대풍련 제 11차 안동 합동간산과 관련하여...
2016년 4월 17일(일요일)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제 11차 안동합동과 관련하여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010년 부터 현재까지 실시한 연홥회 합동간산을 보면 지방에서는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으나, 정작 서울에 거주하는 회원들의 참여가 저조하여 당부드리오니, 여러 사정 등으로 바쁘시더라도 많은 성황을 부탁드립니다.
<합동간산 책자에 등재된 본인의 답사 내용 일부와 책자에 미 등재된 사진 일부를 공개합니다>
대풍련 제 11차 안동 합동간산 小考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주관 2016년도 4월 17일에 시행하는 합동간산은 경상북도 안동 땅이다.
안동이 오래전부터 역사의 중심 터로 주목받기 시작한 내력은 이렇다.
신라 말엽 당시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행하였고, 특히 옛 백제 땅은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으며, 옛 고구려 땅은 고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927년(경애왕 4년)에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진군하여 왕을 자살케 하고, 재물을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역부족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세워 이곳에 집결하였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면서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돌아간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 신라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안동을 공격한다. 10년 전 공산싸움에서 패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는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대는 생사를 건 대 전투를 시작한다. 이듬해 1월 예안에 주둔하던 고려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후백제군은 맞은편의 석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대치한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은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의 군대는 상황이 좋지 못했으며, 대상(大相)이던 홍유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당시 고창(안동의 옛 이름)의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으나 돌아가신 경애왕의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라 여기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을 한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곳 지리에 밝은 세 태사(太師)는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을 하면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고을사람들을 이끌고 고려 군사와 함께, 저수봉(猪首峰: 현 안동시 뒷산)에서 밤중에 견훤의 군대를 후면에서 습격한다. 때를 맞추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진격하니 견훤은 견디지 못하고 8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한다.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30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해 100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한다. 고려 태조는 이 병산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세 태사(三太師)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선평은 대광(大匡), 행과 길은 대상(大相)으로 삼고, 모두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린다.
또 태조는 원래 경주김씨(慶州金氏)이던 삼태사에게 선평은 김(金), 행은 권(權), 길은 장(張)씨란 성(姓)을 하사하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삼태사의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다. 즉, 동쪽을 편안하게 한 고을이란 뜻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이란 지명을 내려 준 것으로 전한다.
<이번 답사지는 백두대간의 문수지맥중, 천등산이 일군 연맥으로, 학봉종택, 봉정사, 삼태사들의 묘와 단입니다>
1 학봉종택 考察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112호(1995년 지정)인 학봉 종택은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 선생을 시조로 하는 의성김씨 문충공파의 종택이다.
김성일의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峰)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의성이며, 증조는 김만근(金萬謹), 조부는 김예범(金禮範),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민세경(閔世卿)의 딸 여흥민씨이고, 배위는 권덕황(權德凰)의 딸 안동권씨이다.
선생은 서애(西厓, 유성룡)와 더불어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1577년(선조 10)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90년(선조23) 3월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정사(正使)인 첨지(僉知) 황윤길(黃允吉, 황희의 고조손)과 부사(副使)인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전적(典籍) 허성(許筬, 허균의 형)은 수행원 200여명과 함께 왜의 사신인 평의지(平義智)를 대동하고 대마도를 거쳐 대판(大阪[오사카])으로 가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를 만나고 이듬해 3월 환국(還國)하여, 왜국에 대한 정세를 보고한다.
이 때 서인(西人)에 속한 정사 황윤길은 “필히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니 내침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라 보고하였고, 동인(東人)에 속한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으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될 수 있으므로 사의(私意)에 매우 어긋납니다.”란 상반된 보고를 한다.
이어서 선조가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고 물으니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듯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김성일은“그의 눈은 쥐와 같았으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답을 한다.
『서애선생문집』에 의하면 이때,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말한 내용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라고 물으니, 김성일이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기필(期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처럼 인심이 흉흉해질 수 있어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 라고 한다.
이에 류성룡은 공석인 전라 수사로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고, 경상 우병사로 나이가 많은 조대곤(曺大坤) 대신 이일(李鎰)로 교체하였으며,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발탁하여 전쟁에 대비토록 한다.
그러다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은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좌의정 류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는 공을 세웠으나, 진주성에서 병사(病死)하자 사후에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황윤길은 이와 대조적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음에도 별다른 관직을 받지 못했으며, 이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호도 없고, 언제 사망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 학봉종택은 원래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었지만 저지대에 위치하다 보니, 침수(侵水)가 잦자, 학봉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38)에 이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자리를 옮겨 살았으며, 지금의 자리는 소계서당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64년 종택을 다시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에 있던 소계서당은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한 것이다. 나지막한 내룡(來龍)이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진행하다 북서쪽으로 회전(回轉)하는 산자락의 등에 해당하는 배후지(背後地)에 터를 정하다 보니, 이곳 터에 들어서면 조선의 통신사로서 왜군의 상황을 잘못 전달한 김성일의 행태가 눈에 보이듯 아른거리며, 우여곡절이 많았던 건물임을 판단할 수 있다.
『양택십서(陽宅十書)』의《논택외형(論宅外形)》에
「人之居處, 宜以大地山河爲主, 其來脈氣勢最大, 關係人禍福最爲切要. 若大形不善, 總內形得法, 終不全吉, 故論宅外形第一. 陽宅來龍原無異, 居處須用寬平勢. 明堂須當容萬馬, 廳堂門廡先立位. …… 생략」라 하여
【사람의 거처(居處)는 마땅히 대지산하(大地山河)를 으뜸으로 삼아야하고, 그 오는 맥(脈)의 기세가 가장 중요하여 사람의 화복(禍福)과 관계가 깊으므로 가장 절실하고 중요하다.
만약 큰 형체(形體, 형세)가 좋지 않으면 모든 내형(內形, 가옥)의 배치가 법도에 맞더라도 끝내 온전히 길(吉)하다 할 수 없으므로 택(宅)의 외형(外形)을 논하는 것이 첫 번째인 것이다.
양택의 내룡(來龍)이란 원래 차이가 없지만 거처하는 곳은 모름지기 넓고 평평한 세를 써야한다. 명당(앞마당)은 모름지기 만마(넓어야)를 수용할 정도는 되어야 하며, 대청마루와 문과 회랑이 먼저 자리를 정해야한다.】하여 사람의 거처는 외형(外形), 즉 산세의 기세(氣勢)와 형체(形體)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거처하는 택지의 내룡은 넓고, 평평한 세를 써야 한다 하여 볼록한 능선의 음맥(陰脈)이나, 볼록하게 배를 내미는 음처(陰處)가 아니고, 평평하거나, 오목한 양맥(陽脈)이나, 양손을 드리운 가슴팍과 같은 양처(陽處)에 터를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담자록(啖蔗錄)』의 고문(古文)에 의하면
《古》云:「凡龍到頭手腳開,此是陽地休疑猜, 陰地求一線,陽地求一片」이라 하여
【무릇 용(龍)이 도두(到頭, 부모봉)아래로 개각(開脚)이나 개수(開手)하여 넓게 벌려 감싼 터라면 이런 택지(宅地)는 의심(疑猜, 의시)할 필요가 없다. 음택(陰宅)이라면 하나의 맥선(脈線)에서 구하고, 양택(陽宅)은 하나의 납작한 조각인 편(片)에서 구하라” 하였다.
즉, 생자(生者)가 거처하는 택지(宅地)는 음택(陰宅)에서는 중요한 요소인 맥선(脈線)의 유무(有無)를 살피거나, 따질 필요가 없으며, 부모봉(父母峰)이나, 도두(到頭)아래로 팔을 벌리거나, 다리를 벌린 그 사이(조각)가 양택의 적지(適地)임을 피력한 내용이다.
※ 편(片) : 환포하는 사이의 한 조각
그런데, 이곳 터의 후산(後山)을 보면 볼록하게 배를 내민 능선이 충(衝)을 하는 배후지에 터를 정하다보니, 반배(反背)의 성정(性情)이 강하게 작용하는 터다. 전방의 도로 아래의 저지대를 점하면서 서남향(艮坐坤向)을 향해 좌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