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後記)-166
천하의 시간은 역동적으로 흘렀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라 주장하며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정립 천하의 무리와 그와 동조하는 강호 무림의 인세가 천하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무후와 상국은 그들이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어떤 핍박도 하지 않고 오히려 수인도 사람일 뿐이라는 말로써 그들의 논리를 반박할 뿐이었다.
천하가 안정되고 갑차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목우유마가 본래 용도인 물류를 나르는 일을 하자 천하에 때 아닌 길을 닦는 토목 공사가 이루어졌다.
한여름 소낙비 같은 난세가 끝나고 민심이 안정되자 수확량도 늘었다. 백성들은 태평가를 부르고 천하에 도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살림이 넉넉해진 백성들은 배움의 열의가 생겨 아이들은 현자에게 맡기는 바람에 천하에 글 읽는 소리가 두메산골에서까지 울려 퍼졌다. 이에 천하 제후들은 태학을 세워 인재를 키워 출세길을 열어주니 인재가 풍부해졌다.
백성들은 유례 없는 태평성대에 무후의 덕을 칭송하며 기원하기를….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천상무후(天上武后)를 보(保)하소서.
라고 하며 무후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무후의 치세는 반백 년 간 계속되었다.
***
깊고 깊은 밤. 라혼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고 길고 긴 여행길에 올랐다.
남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꼭 감은 눈에서 참고 또 참은 눈물이 흘러내리며 베개를 적셨다. 세상을 위해, 아니 자신을 위해 남편은 자기 발로 지옥으로의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날이 밝아왔다. 오늘도 어제처럼 이제 쉰을 넘어서는 아들이 문우를 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언제나 듬직하고 현명한 아들이고,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아들이었지만 그러나 어제와 또 달랐다.
“어머니, 아버지는 떠나신 겁니까?”
“알고 있었더냐?”
예법에 맞게 호칭을 하려면 모후(母后)라 해야 하고 상부(上父)라 해야 하지만 천자(天子)인 아들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여느 평범한 집안처럼 어머니라 부르고 아버지라 불렀다.
“예, 소자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너희 부자는 부자만 아는 비밀이 많았지. 공주라도 있었다며 그리 외롭지 않았을 터인데.”
천상무후와 황천상국의 아들인 용호붕(龍虎鵬)은 몇 해 전 천자의 위를 양위받아 황제(皇帝)가 되었는데, 정식 명칭은 황천상제(皇天上帝)였다. 붕은 모후의 타박에 쓴웃음을 지으며 엷은 금안(金眼)의 눈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말했다.
“어머니, 사내들에겐 사내들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랍니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여인인 이상 들려주기가 곤란하지요.”
“여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라….”
“여인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여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원, 녀석두.”
붕은 다시 슬퍼하는 모후의 기색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동안 숨겨온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지금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음? 그걸 네가 어찌 아누?”
붕은 모후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인 대답을 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마계의 문이 열린다는 곳에 수하를 보내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게 정녕 참이냐?”
“예.”
“거기가, 거기가 어디더냐?”
“동영입니다.”
“차비를 해주거라! 내 그곳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그곳은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그리고 이미 마계의 문이 닫힌 지 오래라 그곳은 지금 그냥 보통 바다일 뿐입니다.”
그러나 붕은 모후의 뜻을 꺾지 못했다.
***
무후 51년 5월. 무후와 황제께서 사라진 상국을 찾아 천호에 배를 띄웠다.
무후 51년 6월. 무후께서 대하의 물길을 타고 서경에 도착하셨다. 이에 서경 황미성을 다스리는 양제와 만조백관이 나와 마중하니 무후와 황제께서 서경에 이레를 머무셨다.
무후 51년 6월. 대해의 날씨가 나빠 배를 띄우지 못하자 무후와 황제께서는 대하를 건너 육로로 통해 남하하셨다. 이에 계주의 백성들이 나와 스스로 길을 쓸고 치워 길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게 하였다. 또한 돈제가 백관을 이끌고 마중하였다. 게다가 생신을 맞이하신 무후를 맞아 돈제가 소 1000두. 돼지 1500두를 진상하였고, 무후께서는 그것을 백성과 나누시었다.
무후 51년 10월. 계주 흑해성에서 다시 배를 띄워 봉수성으로 향하였다.
무후 51년 11월. 남상대도독과 남례안찰사가 나란히 먼 바다까지 나와 백관을 이끌고 마중해 무후와 황제의 앞길에 안녕을 기원했다.
무후 52년 12월. 무후와 황제께서 봉수성에 잠시 머물러 새해를 맞으시고, 천하에서 모인 백관들의 조하를 받았다. 또한 생신을 맞이하신 황제에게 백관들이 진하드리며 남례성에서 만든 술 1000단지와 과일 등을 산같이 쌓아 바치고 소 1000두와 돼지 2000두를 잡아 백성들과 나누었다.
무후 52년 3월. 무후와 황제께서 바다에 배를 띄우시고 남해로 향하셨다.
무후 52년 4월.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려올 조짐이 있어 극남성으로 피하였다. 극남성의 백성들이 무후를 위해 스스로 별궁을 지어 바치니 무후와 황제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별궁의 이름을 곤붕(鯤鵬)이라 하셨다.
무후 52년 7월. 무후와 황제를 태운 배가 동영에 도착했다. 동영의 백성들 또한 무후와 황제를 위해 길을 내고 별궁을 지었다. 이에 무후가 별궁의 이름을 남명(南溟)이라 하였다.
무후 52년 8월. 무후는 동쪽 바다로 배를 띄우고 100일 간 머물다 돌아오셨다.
***
설화는 1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그곳으로 왔다. 아들은 이곳이 그곳이라 하지만 보이는 것은 짙푸르기만 한 바다와 일렁이는 파도뿐이었다. 뭔가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설화는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산 위라면 비석이라도 세워 표시하련만, 동쪽 멀고 먼 바다 위 망망대해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설화를 태운 배들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자,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서 신기루인 양 환상이 펼쳐졌다. 그것은 온통 설화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쪼그만 계집아이가 난데없이 ‘서방님’하고 부르는 모습, 빨간 홍의를 입고 좋아라 뛰어다니던 모습, 설화에게 처음 여인을 느끼던 때의 모습, 행복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 그리고 진정한 부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던 모습, 아들에게 직접 젖을 물리며 행복해하는 모습. 그것은 바로 라혼의 설화에 대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환영은 모두 설화가 밝게 웃고 있는 모습만 펼쳐졌다. 무후를 수행하기 위해 온 무사들과 상궁들은 환상처럼 펼쳐진 무후의 어릴 적 모습과 한창 꽃피던 때의 모습을 보면서 상국이 얼마나 무후를 사랑했는지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렇게 환상은 사흘 밤낮 동안 펼쳐졌고,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설화의 손에는 아무도 모르는 보석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 신기루처럼 펼쳐졌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거기엔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둘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행복한 기억뿐이었다. 그래서 설화는 슬펐다. 자신은 못해주고 미안한 일만 자꾸 생각나는데, 남편의 추억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뱃길을 돌려 동영 남명궁에 돌아왔다. 거기서 기다리는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는 새로 여행을 떠나셨을 뿐이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본래 하시려는 일은 천하를 다스리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온 천지의 생물들을 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아비는 신선이었지. 그저 때가 되어 하늘이 내린 소임을 완수하러 가신 것일 뿐. 나 또한 숱한 여인들의 남편과 아비들을 사지로 보냈는데….”
***
무후 55년 8월. 무후께서 천지로 돌아가셨다. 이에 천하 백성이 슬퍼하고, 21방의 제후들이 무후의 붕어를 애도하였다.
완(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