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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2) - 명대의 내각과 환관
임광자 추천 0 조회 85 08.05.15 23: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2) - 명대(明代)의 내각(內閣)과 환관(宦官)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2)- 명대(明代)의 내각(內閣)과 환관(宦官)

나. 명대(明代)의 내각(內閣)과 환관(宦官)                          이길상

(1) 명대(明代)의 관료체계(官僚體系)

2002년 1월 1일의 베이징 근교의 만리장성태조홍무제와 성조 영락제가 이룩한 명나라의 창업(創業)의 기반은 수성(守成)의 길을택한 5대 황제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 / 1425 ~ 35)에 이르러 문물 제도가 정비되면서내각(內閣)과 환관(宦官)들의 정치 참여가 제도화되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태조 주원장은 의심이 많고 사람들을믿지 않았기 때문에 6부를 황제에게 직속 시키고 모든 정무(政務)를 손수 처리하였다.

환관들에게는 정치참여를 금하고 글도 배우지 못하게하였으며 이를 어길 경우 목을 벤다는 3자 철패(鐵牌)라는 것을 만들어 세우고 엄격히시행하여 이들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런 것은 주원장이라는 군주 개인의 성향일뿐 일반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제도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하여 별별 고생을 다한 주원장은이런 것이 가능했지만 강보에서부터 성장까지 아버지를 황제로 둔 덕에 온갖 호사를다한 그 후손들이 황제가 되었을 때 이를 감당하기도 힘들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주원장이 만든 법은 영락제 때 이미 허물어지기시작하였다. 문신관료들로 하여금 각처에서 올라오는 상주문(上奏文)을 해당관서에서사전에 검토케 하고 그 요지를 간추려서 다시 황제에게 올리게 함으로써 황제의 업무를대폭 줄일 수 있었고,

군대를 파병할 때 믿을 수 있는 환관을 감군(監軍)으로참여 시켜 장군들을 감시하고, 외국으로 보내는 사절 대부분을 환관들로 보냈으며,남해원정의 대 선단에는 정화라는 환관에게 모든 것을 맡길 정도로 환관들 역시 다시중용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난의 변(靖難-變) 이래 동창(東廠)이라는비밀 정보망을 두고 반대 세력을 색출하고 숙청하는데 환관들을 기용하였고, 궁중의수비와 수도의 치안 책임도 이들 환관들이 맡도록 하였다. 영락제의 일시적 필요에서만들어진 이런 것들이 선덕제에 이르러 제도화되었는데,

선덕제는 전국 각처에서 황제 앞으로 보내온 모든상주문(上奏文)에 대해서 이를 검토하고 조지(條旨)와 표의(票擬)도 동시에 올리게하였다. 조지(條旨)란 상주문에 대한 의견서를 말하고, 표의(票擬)란 상주문에 대한황제의 답변서, 즉 비답(批答)의 초안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조지와 표의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곳을 내각(內閣)이라고 불렀고, 이 내각의 정원과 계급은 없었으나 문장력이 뛰어난3명 내외가 업무를 담당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6부의 장차관 격인 상서(尙書)나 시랑(侍郞)을겸하고 있었다.

내각에서 올린 조지와 표의에 대해서 황제로서는 수정할것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붉은 글씨(朱書)로 그대로 베껴 써서 보내면 이것이 곧황제의 결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황제가 일일이 골치 아픈 그 많은 문서를 들여다보고 직접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결재(決裁) 원안을 만들어 올리면 그것을보고 결정했다는 것이고, 결재의 원안 작성자, 즉 공문 기안자를 내각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안(事案)에 대한 최종 결정(결재)은황제가 하나 실질적으로는 기안(起案) 권이 있는 내각에서 결정하는 것과 다름 없게되었다.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이 3양이라는 어진 신하들이 내각으로 있었던 선덕제시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제도화되었다.

이것은 내각이 재상(宰相)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과다를 것이 없게 되었고, 따라서 권력과 힘이 내각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부(吏部)의 차관 격인 시랑(侍郞)과 과거를 담당한예부(禮部)의 장관인 상서(尙書)의 자리에 누가 앉는가에 따라서 관료들의 지연(地緣),학연(學緣), 혈연(血緣)에 얽힌 차별화도 피할 수가 없었고 그 파장 역시 너무나커서 많은 문제들을 불러 일으켰다.

내각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한림원(翰林院) 출사(出仕)하여야하고 한림원에 출사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서 진사(進士)가 되어야 한다.과거를 치루고 진사를 뽑는 것은 예부상서의 소관업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한림원에 들어가면 벌써부귀영달로 치닫는 출세의 지름 길이 눈 앞에다가 서는데 관료가 되는 것은 이부의소관이 된다. 비록 관료가 되지 못해도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입는 혜택은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집안에 수재(秀才)라도 태어나면 모든 관심과 온갖 정성은 그에게 쏠리고, 그러다가과거에 급제라도 하면 그 영광은 본인과 일가 친척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까지미쳤다.

이런 당시 중국 사회의 풍조는 직관(職官/현직관리)이든산관(散官/퇴직관리)이든 관계 없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만으로 평민 위에 군림하는지배계급으로 굳어지게 만들었고, 이들을 향신(鄕紳)이라 해서 명·청대를 거치는동안 중국 사회를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성장케 하였으며, 따라서 이 시기 중국에서는어떤 세력도 이들의 협조 없이는 정권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조선왕조가제도상 고려왕조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면 양반관료제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양반(兩班)이란 국왕이 남북 선 상에서 등을 북쪽으로 두고 정남(正南)을 향해서좌정(坐定)하면, 그 왼쪽이 되는 동편에는 문관들이 오른쪽인 서편에는 무관들이자리를 하게 된다.

이렇게 자리의 위치나 직분에 따라서 동편에 서게된 문관들을 동반(東班) 혹은 문반(文班), 서편의 무관들을 서반(西班) 혹은 무반(武班)이라고불렀고, 이들의 공식 복장인 조복(朝服)의 흉배(胸背)에 문관은 학(鶴)을 무관은호(虎)를 수(繡)로 새겼기 때문에 학반(鶴班)이니 호반(虎班)이니 하는 이름도 붙었다.

이렇게 국왕 앞에 도열할 수 있는 문, 무 관료로 구성된두 개의 반(班)이라 해서 이를 양반이라 불렀고, 따라서 양반은 문무(文武)의 모든관료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국왕으로부터 임명장에 해당하는 교지(敎旨)를 받고관료가 되면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데, 관료들에게는 계급인 품계와 소관 업무인 직사가주어졌다. 예를 들면 최고 관직인 정승의 경우 정1품(品) 보광대국숭록대부(階) 의정부(司)영의정(職) 아무개라고 할 때, 정1품 보광대국숭록대부는 계급인 품계(品階)에 해당하고,의정부 영의정 아무개하는 것은 소관 업무인 직사(職司)해 해당된다.

다시 품계에서 품은 문무 모두 정(正)과 종(從) 각9단계를 둠으로서 18품의 등급이 마련되고, 여기에서 3품까지는 상계와 하계로 다시구분 지움으로서 계(階)는 모두 30개가 된다. 관료가 현직에서 물러나면 의정부 영의정아무개라고 하는 직사는 없어지지만 정1품 보광대국숭록대부라고 하는 품계는 그대로유지되기 때문에 이들 직·산관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대단하였다. 산관(퇴직관리)이라할지라도 국가로부터 모든 특권을 그대로 보장 받을 수 있었고, 봉건적 신분질서위에서 그들이 누린 영화는 죽은 후 까지도 계속되었다. 그 간단한 예는 이들의 나들이풍경만으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들이 나들이 할 때는 벽제(?除)라 하여 "에라모두 물렀거라 아무 대감 행차시다"하고 구종별배(驅從別陪)가 앞서 소리를지르면 이 보다 신분이 낮은 행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거나 행차가 지나갈때까지 길가에 엎드려야 했고, 임금이 행차할 때에는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얼굴조차 들지 못 하였다.

또한 양반에게 항거하거나 불손한 언사는 이들을 임명한임금에 대한 불경(不敬)으로 확대해석되어 반역(叛逆)에 버금 가는 죄인으로 다루었다.이것이 더 확대되면 상민(常民/상것)은 그 관료의 부모형제나 일가친척에게도 공손해야되는 의무같은 것이 부과된다.

이렇게 되면 양반이란 단순한 문무관료가 아니고 그친족까지 포함하는 상층 지배계급 전부를 지칭하는 계급집단이 된다. 이것이 양반중심의신분사회를 구성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관직에 대한 집념은가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관료가 되는 길은 몇 가지가 있으나 과거에 급제해서교지(敎旨/임명장)를 받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 길이다. 그러나 한정된 관직의 수는과거 급제 자 모두를 관리로 임명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의 인사는 해당 관서의 적임자 세 사람의이력을 병기해서 이조정랑(吏曹正郞)이 추천하면 국왕은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붓을 들어 점을 찍어 결정하는데, 이조정랑이 추천하는 세 사람을 3 망(三望)이라하고, 세 사람 중 국왕이 점을 찍는 것을 낙점(落點)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정기(定期) 혹은 부정기 인사에서 이조정랑이후보자를 3배수로 추천하면 국왕이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다는 것인데, 이렇게되면 이조정랑이 추천하는 3망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선결 문제고 국왕의 낙점은그 다음 문제가 된다.

이조정랑이란 이조(吏曹)에 소속된 정5품의 관원으로품계는 낮지만 그 직사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임기가 보장되고, 직속 상관인 이조판서를거치지 않고 바로 3망이라는 추천권을 가지고 국왕에게 직접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자리다.

따라서 반목과 질시 또한 대단하여 이 자리를 두고사림 정치가 틀을 잡기 시작한 16세기 후반 양반관료 사회가 동인과 서인으로 크게분열되어 이른바 4색 붕당이 등장한 것도 우연한 사실이 아니고 죽기 살기로 관료라는외길만을 고집해야 되는 유교적인 지식인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지 못한데서 야기된예정된 수순이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의 뿌리는 다원화된 후기 산업사회에 들어섰다는지금은 어떤가? 매우 유치하고 후진국가에서도 찾기 힘든 유감스러운 일들이 지금우리 주변에는 수 없이 되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판 이런 양반의 길을 찾아헤매는 군상들이 건재하는 한,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입시제도를 해마다 바꾸어시행해 보고 아무리 유능한 행정기술이 등장해도 인류대학은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그 욕구를 모두에게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2) 중국의 환관제도

환관(宦官)은 고대 오리엔트 제 사회를 비롯해서 비잔틴제국에서도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중국으로서 이미 기원전 1300년 경 은대의갑골문에 그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으로고려 중기에 나타나 조선왕조 멸망 때까지 내시(內侍)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고,일본에서는 과거제도와 환관제도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한다.

환관이란 양근(陽根)과 음낭(陰囊)이 거세(去勢)되어생식기능(生殖機能)을 상실한 성 불구 남성들로서 궁녀를 목욕시키고 알몸의 여체를깃털로 된 옷에 감싸 업고는 황제의 침실로 모셔준 후 이들의 성희(性戱)를 지키다가끝나면 그 증명을 해주는 등, 황제의 성(性) 생활과 여타 오락 및 청소를 비롯한궁중의 대소사를 맡아 보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이들은 성욕(性慾)을 포기한 대가로 물욕(物慾)이강하고 수염이 빠지며 목소리가 가늘어 지고, 몸은 비대할 정도로 살은 찌나 윤기와탄력이 없고, 나이가 들면 앙상한 가지처럼 말라 버리기도 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작은 일에도 감격하거나 흥분을 잘 하며, 특히 신체적인 열등의식은 삐치기를 곧잘 한다고 한다.

황제라는 자리가 인간적으로는 매우 고독했기 때문에이들 환관과 황제 사이는 매우 친근(親近)해서 그들만의 궁중대화로 서로를 부르는등 허물없이 지냈으며, 한(漢)·당(唐) 시대에는 황제를 폐립(廢立)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권력까지 휘둘렀다.

그러나 전제군주권이 발달한 명나라에서는 이들도다만 관료의 일원으로 황제 밑에 예속되어 이런 폐단은 사라졌으나, 그러면서도 황제와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힘없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권력의매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스스로 거세한 환관을 자궁환관(自宮宦官)이라고 부른다.명의 성조 영락제가 환관을 신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주원장과건문제로부터 홀대 받았던 환관들이 영락제를 도와 쿠데타를 성공시키게 한 것도그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고, 반영락제 세력의 거점인 사대부 관료들을 억압하는수단으로 이들을 중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락제 시절의 중국에서는 환관을 화자(火者)라고하였다는데, 이를 중국 발음으로 하면 휘저(hou zhe)가 되고, 휘저란 힌두어 호자(Khojah/ 거세당한 남자)의 중국식 음역(音譯)이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의 환관은 인도 방면에서 대량수입(?)되었고, 이 외 조선인, 몽고인, 안남인, 아라비아인의 환관들로 궁중을 채웠다고한다. 카리스마적인 황제의 권위와 궁중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국 풍속과 언어에어두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재격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몸을 불구자로 만들고, 많은 어려움과 수 많은경쟁자를 물리치고 등용된 그들이 권력과 물욕에 집착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일반적인 군신관계를 넘어 이상한 신뢰와 애정으로 황실과 결합되고, 권력의 전면에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적인 전제군주제와 황제라는 절대권력과의 상호 보완작용에서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환관의 폐단을 지적한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제도 자체를폐지하자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

제도적으로 환관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선덕제때부터이다.앞서 이야기 한데로 황제에게 올라오는 상주문은 일단 해당내각에서 조지와 포의를첨부해서 올리면 그것을 보고 황제가 주서(朱書)로 정서해서 내리면 이것이 곧 결제가되는 이른바 비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각에서 올리는 원안에서 한자도 수정 없이그대로 결제되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그대로 복사하든 그 효력을 같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관 중에 글을 아는 자가 황제를 대신하여이를 정서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내각에서 올리는 원안에의의가 있을 때는 수정안이나 의견서를 덧붙여서 황제에게 별도로 결제를 요청할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각에서 아무리 좋은 의견이 올라 온다 하여도 항상 측근에서황제를 모시고 있는 환관들이 의의를 제기하면 원안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명나라에서는 환관 내각이라는 것이 등장하였고이들의 권력은 내각을 앞 질렀다. 이 환관 내각의 중추는 사례감(司禮監)이란 것이었고그 장관을 장인태감(掌人太監)이라 불렀다. 장인태감은 환관들의 우두머리로서 내외의정보까지 독점하는 막강한 자리가 되었다. 황제의 비서 역할까지 이들이 담당하여그 세는 내각의 관료들은 능가하였다.

이래서 가문의 번영과 안전을 빙자하여 아비가 아들을,형이 아우를 거세 시켜 환관을 만든 사례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고, 중년의 남성중에는 스스로 거세한 후 환관이 되기도 했는데, 천계제(天啓帝 / 明의 15대 황제熹宗 / 1620 ~ 24))가 1621년 환관 3천명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자 지원자가무려 2만명이 넘어 4천 5백명으로 늘려 뽑았다고 한다.

지금도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성전환(性轉換)한남자 아닌 남자, 혹은 여자 아닌 여자의 군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신(神)이 준혜택(?)을 거부하고 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둔갑하는 게이(?)라는 그들문화를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들은 현대의학의 시술에 힘입어죽음에 이르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하지만 거세 며칠 전부터 물을 적게 먹어 몸 속의수분을 줄인 후, 무지막지하게 잘라 버렸던 당시의 형편 없었던 시술 덕분에 많게는절반정도가 그 후유증으로 중성의 인간이 되기 전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3) 환관 왕진

선덕제 시절에 환관 왕진(王振)은 선비 출신으로서사대부들이 멸시한 자궁(自宮)환관이 된 사람이다. 그는 해박한 학문 덕택에 동궁에서태자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런 연줄로 선배들을 물리치고 환관의 우두머리가되었다.

야심 만만한 이 왕진이 엄격하게 교육 시킨 태자가1435년 선덕제가 죽고 9살의 나이로 명의 6대 황제가 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 1435 ~ 49)다. 그런데 이 정통제를 낳은 것은 손귀비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다른 궁인의 소생을 감쪽같이 바꿔 치기 했다고 한다.

중국 황실에서 태자의 바꿔 치기란 제도적으로는 도저히불가능하다. 이런 불가능을 황태후라는 권력의 다른 정점과 환관들의 합작품으로쥐도 새도 모르게 만들어 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던 삼십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못했든 선덕제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다.

명군(明君)으로 소문 난 선덕제로서는 아들을 낳아후사를 잇도록 해준 손귀비의 그 고마운 보상을 황후 자리로 보답하고자 했다. 그러나엄연히 정전인 호(胡) 황후가 살아 있고, 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이를 갈아치울만한 명분이 없었다.

이를 두고 고민하든 선덕제는 결국 이 문제를 신하들에게떠 맡겼다. 신하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결론은 병석의 호황후가 스스로물러나는 것으로 결론 지웠다. 춘추의 대의가 어떻고 하는 구차한 변명을 달았지만현실에 안주를 원하는 중신들과 젊은 관료들 누구에게도 추상 같은 선비들의 기상은찾아볼 수 없었다.

건문제를 따르다가 정난의 변으로 영락제가 즉위할때, 즉위 교서 작성을 거절한 이유로 부모 처자식을 포함한 수백명의 친지와 수 천명의동료 지인들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선비의 절개를 지켰든 방효유의 선비 기상은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다.

정통제가 비록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나 태황태후가섭정으로 있었고, 3양이라고 불렀든 훌륭한 중신들이 정사를 보살폈기 때문에 나라의근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통 7년(1442) 태황태후가 죽고 황제의친정이 시작되면서 왕진은 날개라도 단 듯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반대파를 가차없이추방하고 모든 요직은 자기 사람으로 갈아 치웠다. 주원장이 만들었던 3자 철패도그의 손으로 제거하고, 태자 시절부터 교육을 맡아 철저하게 자기를 따르도록 세뇌시킨 황제를 마치 친 자식처럼 꾸짖었다. 황제인 정통제는 왕진을 왕 선생이라고부르고 사부로서 깎듯이 대접했다.

심부름 보낸 환관을 황제의 사위인 부마(駙馬)가 꾸짖었다고해서, 이는 환관 전체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트집 잡아 귀양을 보내는가 하면, 선비관료가 그에게 인사를 잘못했다 하여 땅바닥에 꿀여 앉혀 벌을 세우고 창피를 주기도했다. 그의 신체적인 열등의식이 이런 일을 만들게 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사실상황제를 능가하는 환관 재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문전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를 한 번 뵙는 값이 6부의 장관인 상서(尙書)들의 1년 녹봉보다 많은 은백 냥, 술 대접을 받는데는 은 천냥,......뇌물과 엽관 운동이 판을 치게 되었다.토목보의 변으로 그가 전사한 후 그 재산은 정리해 본 결과 금은을 쌓은 창고가 60여 동, 사람 키보다 큰 산호가 20 여 개, 옥반 1백개, 보물과 피륙은 수를 헤아리기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진은 무종 정덕 시절의 환관 유근이나 희종천계 시절의 환관 위충현에 비교하면 그래도 양반이라 할 수 있다. 불학무식한 이들이황제의 권력을 등에 엎고 저진 횡포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이야기는 잠시 뒤로미루고 명나라의 다른 이야기에 눈을 돌려보자.

정통 14년(1449) 7월, 원나라 멸망 후 초원지대에흩어져 살던 몽고 부족 중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오이라트부족의 에센(Esen /也先 / 야선 / ? ~ 1454)이 산서(山西/산시)의 대동(大同/따퉁)을 치는 한편 그가옹립한 칸 토크타부하(脫脫不花)는 만주에서 산동(山東/싼뚱) 방면으로, 다른 별동대는서북쪽의 섬서(陝西/싼시), 감숙(甘肅/깐쑤) 방면으로 물밀 듯이 명나라 영토로 쳐들어왔다.

이들의 침략을 당한 명나라 군대는 세 곳 모두에서패전에 패전만 거듭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진은 젊은 황제를 부추겨 주위의 만류에도불구하고 그 해 8월 5일, 별다른 작전도 계획도 없이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황제와함께 베이징을 떠나 거융관으로 향했다.

전쟁(戰爭)의 전(戰)자도 모르는 일개 환관서생인그가 이런 기회에 군공을 세워 그 위상을 더욱 높이겠다는 공명심이 앞섰든 것이다.결과는 대 참패, 왕진이하 수행했던 황제측의 고관 대장들은 몰살을 당했고, 황제인영종 정통제는 땅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중국사에서는토목(土木)의 변(變)이라고 한다. 원나라 멸망 후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어떻게 지내고있었을까? 그리고 어떤 힘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까지 사로 잡았을까?- 다음호에 계속 -



Main Theme (영화 '베어' 삽입곡)

 

세계는 지금,...2002년 1월 6일. 일요일

아라비아사막의 Nad Al Sheba (in Dubai)를 지나는 낙타 머리 위에서도
2002년의 새 아침을 밝히는 태양은 장엄하게 떠오르고
on January1, 2002.

터키의이스탄불에서는 Hagia Sophia 역사 박물관을 배경으로
흰 눈이 소복이쌓여 있다.
Turkey, Friday Jan. 4, 2002.(AP Photo/ Kaan Soyturk)
 

아프가니스탄의수도 카불에서는 어린 소년이 힘겹게 땔감을 실은 수레를 밀어 본다.
Kabul, Afghanistan, Tuesday, Jan. 1, 2002. (Ap Photo/CP, Kevin Frayer)

브라질의Rio de Janeiro에서는 한 밤의 불꽃 축제로 새해를 마지하고,
atmidnight, January 1, 2002. REUTERS/Sergio Moraes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다시시작하는가?
인도의 군대들이 바쁘게 국경지대로 이동하고 있다.
southwest of Jammu, India, Sunday, Jan. 6, 2002.
(AP Photo/AijazRahi)

인도-파키스탄 국경지대, 이 초라한 사막오두막 집에 사는 듯한 소년은
무심한 듯 카메라의 초점만 응시하고있지만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의 조짐은 곳곳에 보이고
세계는원자탄을 가지고 있는 이 두 나라가
핵무기(nuclear arms)를 사용하지않을까 두려워하고
국경지대의 주민들은
이 곳에서 그 전보다큰 전투(conventional fight)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떨고 있다.

Jaisindher village, on the India-Pakistanborder, 68.2 miles (110 kilometers) west of Barmer, India, Friday,Jan. 4, 2002.
(AP Photo/Siddharth Darshan Ku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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