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죽다’란 표현을 부쳐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든지 배고파 죽겠다든지 좋아죽는다 라든지 죽다 살아났다든지 하며 어느 상황을 강조를 할 때 끼워서 쉽게 자주들 쓴다. ‘너 죽고 싶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하는 격한 표현도 정작 죽음을 목전에 두거나 인식한 표현은 아니다.
사전에서 ‘죽다’ 란 말의 유사 표현을 찾아보면 유명을 달리하다 서거하다 고인이 되다 눈을 감다 세상을 하직하다 황천길로 떠나다 돌아가시다 숟가락 놓다 서거하다 타계하다 하늘나라로 가다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죽음은 두려운 것이겠지만 표현의 다양성에서 친숙함을 읽는다. 마치 연습을 해 익숙해지려는 의도가 있는 것만 같다.
‘죽고 싶다.’란 표현도 예사로 들릴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 말 보다는 ‘외롭다’ 라는 표현이 더 진진하고 소슬한 느낌이 든다. 실제 사람들은 외로우면서도 그 말을 잘 꺼내 쓰지 않는다. 이는 이를 당연시하는 것이거나 내습한 칙칙한 기세에 위축이 되는 자신이 싫어 발설을 안 하는 것이다. 삶의 의지와 삶의 외로움은 같이 산다. 의지가 강할 수록 외로움이 짙다. 정작 두렵고 곤혹한 것이 외로움은 아닐까.
얼마 전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뭐 하냐.”란 물음에 답은 아주 간결했다. “그냥 있어. ” 친구 역시 간단명료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도 쉽게 늘 듣는 말이 그냥 이란 말이다.‘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줄곧’인 그냥 이란 아무 일이 없다는 것으로 안심을 시키는 말도 된다. 나이 들어서는 오히려 그 말을 들을 때 더 편하기도 하다.
문득 생각이 나고, 어느 순간 보고 싶어질 때, 그러한 존재의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그 말은 꽤 고맙고 잔잔한 맛이 있다. 하지만 그런 통화를 하고 나면 매번 느껴지는 것이 적적함이다. 친구는 특별한 용건도 없이 왜 전화를 했을까. 불현듯 옛 생각이 나더란 말인가. 필시 어머니는 TV 재방송을 그 시각 맛없게 보고 있었을 것인데 먼 산 넘어 가는 기러기 떼를 망연히 쳐다보듯 그냥 있다한다.
그럼에도 반감은커녕 순순한 무기력함이 엄습하는 것은. 어릴 적 무슨 기회를 얻을 때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 ‘아싸’. 요즘 그 말을 써먹어 본적이 있던가. ‘아싸’와 ‘그냥’은 단지 말의 어감이 아닌 세월의 차를 말한다. 당연지사로 ‘그냥’이 되어버린 요즘 그 자체는 외로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 하는 것은 외로움을 서로 묵인하고 그 외로움에 어느 만큼은 동조를 또 하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외로움은 한 학기 맞는 전공 선택이 아닌 필수교양과목으로 바뀐 셈이다. 요즘 아내도 그냥이란 표현이 꽤 잦다. “그냥 집에 있지 뭐해.” 아내는 그 그냥의 때 뜨개질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왜 그냥이라 했을까. 아내의 그 모습에서 평온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찾아온 어느 외로움과 대적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도 별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쓴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