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만 묘소(대구 동구 신암선열공원)
1394년 음력 10월 28일자 조선왕조실록에 ‘至新都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새 서울에 닿아 한양부 객사 건물을 왕의 궁전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 날을 기려 양력 10월 28일이 ‘서울 시민의 날’로 지정되었다.
그에 견주면 ‘2월 21일∼28일 대구 시민 주간’은 분명한 역사적 근거를 자랑한다.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이 본격화했고, 1960년 2월 28일 세계사에 이름을 올린 대구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음력과 양력을 마구 바꿔치기한 그런 류가 아니다.
‘대구 시민의 노래’는 1952년 영남일보의 지방자치제도 실시 기념 가사 공모로 탄생했다. 시인 백기만의 노랫말이 뽑혔고, 그 후 영남고등학교 음악교사 유재덕의 곡이 만들어지면서 1955년부터 공식화되었다.
“낙동강 굽이돌아 보담아주는 / 질펀한 백리벌은 이름난 복지 /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 들어라 드높으게 희망의 불꽃
지세도 아름답고 역사도 길어 / 인심이 순후하고 문물도 많다 / 끝없이 뻗어나간 양양한 모습 / 삼남의 제일웅도 나라의 심장 /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 돌려라 우렁차게 건설의 바퀴
세계에 자랑하던 신라의 문화 / 온전히 이어받은 우리의 향토 / 그 문화 새로 한 번 빛이 날 때에 / 정녕코 온 누리가 찬란하리라 /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 솟아라 치솟아라 이상의 날개”
‘질펀한 백리벌은 이름난 복지’는 세종 때 나라 최초로 사창이 설치된 역사를 담고 있다. 정부의 의창과 달리 사창은 관과 민이 함께 세우고 운영했던 백성 구휼 기관이다. 그런 반관반민 기관이 대구에 시범으로 설립된 것은 그만큼 도시가 경제력이 있고 사람들이 상호협조적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사에서도 확인된다. 다른 지역은 관군과 의병 사이에 다툼이 많았다. 대구는 관군은 동화사, 의진은 부인사에 주둔하며 공동작전을 펼쳤다. 덕분에 팔공산으로 피란 갔던 대구부민들은 1592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백기만은 ‘상화와 고월’을 펴냄으로써 국문학사에 업적을 남겼다. 유택은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에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대구 시민의 노래’가 더 많이 애창되고, 노래비가 인파 많은 곳에 또 세워지면 좋을 것이다. 대구의 찬란한 문화가 다시 한번 빛을 드러내어 온 누리를 찬란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