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구름에서 번개를 일으키는 ‘필라델피아 실험’
신임 지사 재임 시절에 내가 했던 공공 활동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과학자로 명성을 얻게 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1746년 보스턴에 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막 도착한 스펜스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내게 몇 가지 전기 실험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별로 능숙하지 않아서 실험이 완벽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런 실험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필라델피아로 돌아왔는데 얼마 뒤에 런던왕립학회 회원인 피터 콜린슨 씨가 우리 회원제 도서관 앞으로 유리 시험관과 사용 설명서를 선물로 보내왔다. 마침 좋은 기회였으므로 나는 그 유리 시험관으로 보스턴에서 보았던 실험을 되풀이해보았다. 수없이 연습을 하다 보니 영국에서 보내 온 설명서에 있는 실험뿐만 아니라 다른 새로운 실험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을 하는 동안 우리 집은 이 신기한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부담감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유리 공장에 비슷한 시험관을 여러 개 주문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실험을 하게 했다. 그중에서 이웃에 사는 키너슬리 씨가 가장 잘했다. 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직업이 없기에 나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실험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두 개의 강의록을 주었다. 실험 과정을 순서대로 적은 다음 방법을 설명해놓아서 앞의 내용을 보면 뒤의 내용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강의록이었다. 그는 공개 실험을 위해 멋진 실험 기구를 마련했는데, 내가 대충 만들었던 작은 기구들을 전문가가 근사하게 새로 손을 본 것이었다. 그의 실험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렸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나중에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실험을 보여주였고 돈도 꽤 벌었다. 다만 서인도 제도에서는 습기가 많아 실험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 모든 것이 콜린슨 씨가 시험관을 선물해준 덕이었으므로 우리가 그 기구들을 이용해 실험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험 내용을 적은 몇 통의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콜린슨 씨는 그 편지를 영국왕립학회에 제출했지만 회원들은 회보에 실을 가치가 없다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편지 중에는 내가 키너슬리에게 써준 것으로 번갯불이 전기와 같다는 내용의 원고도 있었는데, 나는 이 원고를 역시 그 학회의 회원이며 나와 친분이 있던 미첼 박사에게도 보냈다. 미첼 박사는 내게 답장을 보내 그 내용을 학회에서 읽었지만 전문가들의 비웃음만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포더길 박사는 원고를 읽어보고는 그냥 썩히기에는 아깝다며넛 출판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그 말에 콜린슨 씨는 <젠틀맨스 매거진>의 발행인인 케이브 씨에게 원고를 주었다. 하지만 케이브 씨는 그 원고를 따로 인쇄해서 소책자를 만들고 포더길 박사의 서문을 실었다. 그편이 돈벌이가 될 거라고 본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책은 나중에 내용이 더 추가되어 4절판짜리 책 한 권이 되었으며 5쇄까지 출간되었다. 그가 들인 돈이라고는 복사 비용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논문이 영국에서 주목을 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전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과학자 비퐁 백작이 우연히 이 논문을 보고 달리바르 씨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한 다음 파리에서 출간했다. 그즈음 왕실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으며 당시 통용되던 전기 이론을 세우고 발표한 유능한 실험가였던 놀레 신부는 이 책을 본 순간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 신부는 그런 실험이 아메리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파리에 있는 적들이 그의 이론을 흠집 내기 위해 꾸며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그가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필라델피아에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진짜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내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아주 긴 글을 써서 책으로 출간했다. 그 글에서 놀레 신부는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내 실험과 그 실험에서 도출된 결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나도 놀레 신부에게 답장을 쓰기로 작정하고 실제 쓰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내 글에 실험 설명이 있으니 누구라도 따라해보고 내 결론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며, 혹시라도 다른 결론이 나온다면 내 변호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이론은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세운 가설이지 독단적으로 제시한 결과가 아니기 ㅣ때문에 일일이 변명할 의무도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논쟁을 벌이다 보면 번역상의 오류 때문에 상대의 진의를 오해해서 그 논쟁이 한없이 이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놀레 교수의 편지 하나는 번역 오류 때문에 쓴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공무로 바쁜 중에 겨우 내는 시간을 이미 끝난 실험을 가지고 논쟁하며 허비하느니 새로운 실험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놀레 신부에게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친구이자 왕립과학협회 회원인 르 로이 씨가 내 편에 서서 놀레 신부의 이론을 반박해주었기 때문이다. 내 책은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내 책에 실린 학설이 서서히 놀레 신부의 학설을 제치고 대부분의 유럽 과학자들 사이에서 채택되었다. 결국 놀레 신부는 직계 제자인 파리의 B 씨를 제외하고 자신의 이론을 신봉한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내 책이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달리바르 씨와 드 로르 씨가 책에 실린 실험 하나를 성공적으로 해낸 덕이었다. 두 사람은 구름에서 번개를 일으키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은 어디에서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물리학 실험 장비를 갖고 있고 물리학 강의를 하던 드 로르 씨는 자신이 ‘필라델피아 실험’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가 왕과 귀족들 앞에서 이 실험을 한 다음붜는 호기심 많은 파리 사람들이 구경을 하려고 모여들기도 했다. 그 대단한 실험에 대한 설명이나 얼마 뒤에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연을 가지고 그와 같은 실험을 해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느꼈던 무한한 기쁨을 여기에서 더 얘기하지는 않겠다. 두 ㅜ가지 얘기 모두 전기에 관한 역사서에 나와 있다.
영국 의사인 라이트 박사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영국왕립학회 회원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실험이 해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어째서 영국에서는 별 관심을 못 받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왕립학회는 예전에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심의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저명한 왓슨 박사가 내 편지에 실린 실험 내용과 나중에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영국에 보냈던 글을 요약한 다음 저자에 대한 찬사를 덧붙여 학회의 회보에 실었다. 그런가 하면 재능이 뛰어난 캔턴씨를 비롯해 런던에 있는 학회 회원 몇 명이 뾰족한 막대를 이용해 구름에서 번개를 끌어내는 실험을 해 성공한 뒤 이를 학회에 보고했다. 학회에서는 예전에 홀대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내게 보상을 해주었다. 내가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회원으로 뽑아주는가 하면 25기니나 되는 회비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보도 무료로 보내주고 있다. 또한 1753년의 고드프리 코플리 상을 내게 수여하기도 했다. 학회의 회장인 맥클스필드 경도 그 자리에 참석해 아주 인상적인 연설을 해준 것은 내게 더없는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