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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삶의 흔적
추억여행
졸업을 앞두고 분주한 손녀딸을 보며 반세기전의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 할 여유조차 느끼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50년이 지난 지금 불현 듯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여행을 떠나 그 시절의 내가 되어본다.
간호학교 마지막 학기는 나에게 인생과 진로에 대한 고민과 번뇌의 나날들이었다. 인생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언제든 마주하게 된다. 그 결정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두려움과 나머지 선택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고 선택하는 것 또한 청춘만이 누릴 수 있는 젊음의 특권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학업을 연장해서 후학양성에 이바지 하는 쪽으로 가야할지, 졸업과 동시에 국립의료원의 마취과 트레이닝 코스로 떠나야할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 교제하는 사람과 미래를 설계하려니 경제활동을 통해 실질적인 돈을 벌어야 하는지 결정을 못한 채 야속한 시간은 흘러갔다.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청주도립병원에 남는 것이었다.
첫 번째 직장
어느 날 근무 중에 아버지가 피를 토하시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셨는지, 가죽 가방에 돈을 가득 담아 가지고 병원으로 찾아오셨다. 병원 측의 배려로 일 인실에 입원하시고 의료진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시며 평안한 나날을 보내셨다. 병원에 딸린 기숙사에서 딸이 손수 지어드리는 식사를 오랜만에 하시니 흐뭇해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가 불현듯 생각난다. 링거를 직접 꽂아 드리며 아버지를 살뜰히 간호할 수 있어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감사한 날들이었다.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건강이 회복되어 병원구급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호사도 누리셨다. 딸 덕에 애비가 살아났구나 하시며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한없이 그립고 간호사가 되어 아버지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해 가을 대한석탄 공사 문경의 은성 광업소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를 구할 수가 없다며 다급히 우리 병원으로 간호사를 구하러 왔다. 시골이지만 대우도 좋고 은사님이 외과 과장님으로 계시기에 자원하게 되었다. 연풍을 지나서 문경에서 차를 갈아타고 찾아 간곳은 첩첩산중 두메산골의 색다른 모습이 마치 외국에 온 것처럼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천지가 새까만 석탄가루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외부생활과 단절된 채 이년동안 저축한 돈을 모두 아버지께 드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기위해 서울에 있는 국립의료원의 간호사 특채시험이 있어 ‘4급을’ 공무원이 되어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 중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선택은 아마도 결혼이 아니었을까.
내 나이 수물 다섯, 신랑은 수물 일곱이었다. 아버지가 결혼준비 하라고 주신 돈으로 예단과 혼수, 시댁식구들 선물까지 준비하기에 빠듯하였다. 낮에는 환자들 간호하랴 틈틈이 결혼준비로 고단한 하루하루가 계속되니 체중은 45kg 까지 여위어갔다.
결혼식 날이 다가와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저녁이 되자 신랑친구들이 함을 지고 와서 함 사라고 집밖에는 야단법석인데 내일 신랑에게 줄 예물시계가 준비되지 않았다.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 정도는 부모님이 해주시겠지 하였는데, 참았던 눈물이 마음까지 슬프게 하여 두문분출 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다 드리는 게 아닌데 하는 못난 후회도 스쳐갔다. 빚까지 얻어 어려운 농촌에서 교육시켜 주신 것이 고마워 늘 가슴에 담고 살았지만 그때는 왜 그리도 서러웠던지 참으로 철부지였던 것 같다. 신랑친구들이 다 돌아간 후, 어떻게 해서라도 결혼 예물은 준비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던 오빠의 모습이 그립기만 하다.
결혼식 당일 교육회관의 예식장으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긴 머리에 국화꽃으로 장식한 신부가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식장 안으로 들어오자 신부가 아름답다고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나의 가냘픈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시고 손을 잡고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셨다. 그 길이 얼마나 길고도 멀게 느껴졌는지 지금도 떨면서 들어가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나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생활
남편은 결혼 전 두 여동생과 일하는 아이와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바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시댁이 잘 사는데 왜 시누이 교육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지. 시댁은 농사를 짓는데 딸을 둘이나 맡겨 놓고 쌀도 양념도 일체 도움을 주시지 않았다. 그래도 불평한번 안하고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웠다. 지금 생각하면 한 참 사춘기 반항할 때 오빠사랑을 새 언니 한 테 빼앗겼으니 내가 얼마나 미웠을 가. 지금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언제나 곁에서 내편으로 든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팔남매의 장남이라 책임감에 큰 시누이를 과학기술 정보센타 라는 정부기관에 취업시켜주고, 둘째 시누이는 공부잘한다고 서울로 데리고 와 식모까지 두고 편하게 살게 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명문여고와 명문여대를 보냈지만 오빠에 대한 감사함이 없었다. 남편은 결혼을 하였는데도 냉장고 와 전축을 처음 장만 할 때면 시댁에 먼저 사드리고 그다음에야 우리 집에 필요한 것을 장만하였다.
얼마 후 바로 아이가 생겨 몸은 점점여위고 아침이면 몇 번씩 토해도 한 시간씩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것은 지상명령처럼 생각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명절인데 나 혼자 임신한 몸으로 낯선 시댁으로 내려갔다. 어느 누구의 배려도 받지 못한 채 남의 집 며느리라는 사명감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난후 휴식시간이 겨우 주워졌다.
기운은 없고 입덧은 심해서 먹을 수 도 없는데 친정을 가게 되었다. 결혼 후 처음 가는 친정 나들이에 아홉 살의 시동생과 다섯 살의 막내 시누이를 딸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신랑은 당직이라 서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친정에 가려면 하루에 아침저녁 두 번 차가 다니는데 차는 이미 끈기고 없었다. 괴산 행 버스를 타고 화곡을 지나 유평을 거처 원터에서 내려 지름길로 가야했다. 눈이 온 빙판 길을 막내시동생과 어린시누를 교대로 업고, 걸어서 가는 십리 길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친정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입덧으로 아무것도 못 먹고 그리운 친정에 왔건만 허약할 대로 약한 몸을 가눌 수 없어 쓰러지고 말았다. 밤새 앓고 난 딸이 가여워 아버지가 화롯불에 구워주신 고구마 두 개로, 기운을 차리고 정들었던 친정집을 떠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대사리까지 배웅을 나오셔서 따끈따끈한 찐빵과 만두를 사주시고 친정에서 밥 한 끼 못 먹여 보내는 딸이 안쓰럽고 걱정스러워 마음아파 하시는 아버지의 촉촉한 눈가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창가에서 눈물진 딸의 모습을 보시며 내가 사다드린 털신을 가리키고 따뜻하다며 돌아서시던 모습은 지금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청주에 도착하도록 하염없이 울었다. 여자의 숙명이 무언지 하소연도 할 수 없고 이방인처럼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여자의 일생.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배려 받지 못한 채 그 시절 시댁에만 오면 일만하였다. 부당하고 서운하다고 한 번도 말하지 못하고 숙명처럼 살아온 그때의 나를 생각하니 너무 아프다.
세월이 흘러 철없던 시누이들도 결혼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지금은 존경받는 스승으로 어머니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예(禮)를 다하는 사람으로 의미 있는 삶 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열 번 된다고 하지 않던가. 즉 사람은 자라면서 또는 평생 동안 자꾸 변해 간다는 의미다.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난 시누이들을 보며 내 삶의 뿌리도 하나님 말씀이었기에 지난날의 아픔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선한 마음으로 받게 되어 매우 기쁘다. 뒤돌아보니 열심히 살아온 삶이 준 인생선물인 것 같다. 이제 과거의 추억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회귀해야겠다.
노을 지는 해변에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어느새 인생의 후반전을 향해 가는 내가 보인다.
늘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삶을 되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은 갖지 못했다. 칠십여년의 삶을 돌아보고 위로받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선물 같은 휴식이 필요했다. 나의 고단했던 삶의 기나긴 이야기를 어머니같이 따뜻하게 품어줄 바다로 행선지를 정했다. 노을 지는 해질녘에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붉은 태양이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서녘하늘을 바라보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서글퍼서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렀다.
내 나이 고희를 넘겼다. 그동안 내 인생의 삶의 터전이었던 외식사업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사업을 시작 할 때가 생각난다. 계약할 때 전 사업자가 “서울에서 직장만 다닌 분들이 이 사업을 할 수 있겠어요. 몇 개월 해보시고 못하겠으면 다시 돌려주세요.”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졸업 후 회사 생활만 해보았지 장사라고는 조상 때부터 누구도 해본 사람이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새벽시장을 보고 예약 상황을 확인한 후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식품에 대한 문제점은 없는지 토의하고 서비스 면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고객 관리는 잘되고 있는지 수시로 직원들과 고객들과 소통하며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 나갔다. 그 세월이 벌써 3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 사업을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힘든 만큼 노력한 만큼 대가가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했다. 너무 지치고 피곤하여 자다가도 헛소리를 하며 꿈속에서도 갈비탕 몇 개 육개장 몇 개 외치던 그때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시간은 돈이다’라는 것을 터득했고 1분 1초를 아끼며 지독하게 살았다. 그 결과 남은 건 흰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이 전부라고 거울은 보여주는데, 그 세월이 얼마 이었던가 뒤돌아보니 내 청춘은 흔적도 없었다. 나를 위한 시간에 인색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해보니 돌봐주지 못하고 과다하게 쓰여 학대당한 내 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몇 년 안에 인공무릎관절수술을 해야 하는 나의 무릎관절, 손가락 마디마디, 허리 등 이제야 육체적 고통을 느끼면서 그동안의 삶의 고단함의 무게감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제 사업을 정리 하려니 구석구석 손때 묻은 사업장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경기도 좋지 않은데 어떤 사람이 하게 될지 생각이 많아진다. 반평생을 함께 숨 쉬며 희로애락을 나누고 치열하게 산 나의 인생이 묻어 있는 이 공간을 폐쇄하려 하니 인생의 뒤안길처럼 초라하고 쓸쓸하다. 한동안 아무도 없는 사업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나와 함께 했던 수많은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간에 사연인들 얼마나 많았던가. 가출한 여고생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하루 이틀 보호자로 돌보며 아이 몰래 부모님께 연락하니 뜻밖에도 아버님이 경찰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며 애타게 자식을 찾았을까. 그 소식이 전해지자 황급히 달려와 딸을 데리고 가던 부친의 뒷모습은 몇 십 년이 흘렀어도 잊을 수가 없다. 어떤 주방장은 선불을 주었더니 하루 이틀 일하다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주던 찬모언니, 손님 많은 날 골탕을 먹이던 요리사, 딸까지 데리고 와 내일처럼 돌봐주던 박아줌마, 그분의 딸은 내가 중매를 해서 지금은 아들이 장가를 들어 며느리까지 보았다. 눈감으면 수많은 사연들이 꼬리를 물고 기억이 새로워지는데 내 어이 잊을 수가 있는가. 1981년 3월4일에 개업해서 올해로 만35년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연과 사람들이 거쳐 갔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사업장 앞에 프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우리가 개업할 때 내 팔목만한 굵기였는데 이제는 그 나무가 한 아름이 모자라 양팔로 안아도 버거운 거목으로 자랐다. 여름이면 우리식당을 시원하게 해주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창가에 햇빛을 드리워준다. 나무는 나의 가족으로 희로애락을 함께 했기에 이별의 슬픔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35년 만에 프라타너스를 안아본다. 가만히 표피에 볼을 대보며 눈을 감았다. 주루룩 눈물이 흐른다. 동동 거리며 뛰어다닌 세월이 얼마인가, ‘나무야, 너는 나의 35년간의 세월을 다 알고 있지. 나의 청춘, 중년, 노인이 된 지금 이 순간까지 항상 그 자리에서 말없이 지켜봐 줘서 고마웠어. 나의 시작과 끝맺음을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해’ 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무는 잘 알아 들었나보다. 내가 건네주는 이별주를 마시고 오월이오면 새 옷을 입고 새 주인을 잘 섬기겠다고 한다.
붉은 노을에 취해 추억여행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노도와 같이 몰려온 밀물이 썰물로 빠져나간 후, 질펀한 갯벌이 드러났다. 그 모습이 예약도 없이 단체손님들이 오셔서 일손이 모자라 비지땀을 흘리고 난후, 설거지걸이만 가득했던 내 지나간 인생의 삶처럼 보인다. 진흙 속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저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온 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며 산다는 것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캐는 것처럼 어렵다. 서천 바닷가 갯벌을 보면서 살기위해 바동거렸던 내 젊은 날을 보는 것 같다. 서녘으로 기우는 고운 노을이 아름답다.
35년간 몸담은 사업을 정리한 후 자식들에게 받은 감사패는 그 어떤 상보다도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감사패
35년의 긴 세월동안 언제나 성실한 모습으로 가족을 위해 애쓰신 부모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보여주신 부모님의 삶은 항상 귀감이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반평생을 거구장과 함께 해오셨고 두 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줄로 압니다.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힘들어 우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이제는 새벽시장도 내려놓으시고 건강 챙기시면서 편안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사랑하는 부모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드리며 그 동안의 노고와 주신 사랑을 감사패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우리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건강하게 평생 저희 곁에 계셔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식 일동드림.
사랑은 눈물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삶은 소유가 아닌 존재의 문제’ 라고 했던가. 작은 것이지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나름 위로하며 살아왔다. 오늘은 늦었지만 엄마의 마음을 전하고자 이글을 쓴다. 결혼 한지 십년이 넘도록 속마음을 어미에게도 터놓지 못하고 침묵으로 살아가는 네가 야속하기만 하다.
이년 동안 생사의 기로에서 몸부림치며 아픔을 딛고 기도로 결단하기 까지 누가 감히 너를 탓할 수 있겠니? 세상물정 모르고 금지옥엽으로 온실에서 자란 큰딸이 출가하여 혹독한 세상을 경험하고 우리부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고 어두웠을까. 한마디 원망도 하소연도 없었다. 단지 온 몸을 던 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할뿐이다.
돌아보니 지금의 상황이 운명처럼 우리가 처음 영업을 시작한 그 무렵과 비슷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처음 겪어보는 일들을 적응하기란 무척 어려웠고 일의 두서도 없었다. 자리를 어느 정도 잡을 무렵 다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을 오갔던 일까지 비슷한 처지였다. 인생은 실수와 고난과 아픔의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더 좋은 삶으로 새롭게 항상 고쳐지고 바뀌어져 더 좋은 삶으로 발전하지 않던가. 십년의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문득 식물도 긴 세월 은혜와 사랑으로 보살펴 준 주인에게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 감사의 마음을 무언으로 전하고 열매로 보답하지 않던가. 딸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 사람의 체취는 왜 이토록 오래 도록 부모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딸이 세상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마음 아팠던 사건들을 감수하고 제 자식을 위해 모진 고통을 잘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만 하다.
나도 처음 에는 일 년에 삼일씩 죽도록 앓아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나고 나서야 적응하게 되었다. 딸인들 어찌 그 고통을 겪지 않고 바로 설수 있겠는가. 나보다 가냘픈 몸으로 적응하느라 어디 몸만 아팠을까. 그 여린 마음마저 헤져 있었으니 상심인들 얼마나 크고 힘이 들었을 가. 하지만 어찌 그런 고통 없이 인생의 길을 바로 걸어 갈수 있겠는가.
‘삶이란 고행이며 문제의 연속이라’ 하지 않던가. 여기까지 오는데 십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삶의 경과도 중요하지만 목적을 찾는 것만큼 소중한 일은 없다. 여자 혼자 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난관과 인내와 희생과 봉사와 시련을 극복해야 가능하다. 초등학생이었던 외손녀가 어느새 자라서 대학교 3학년이 되고, 외손자가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참 세월이 빠르다. 제 엄마를 꼭 빼닮은 손녀가 식당 2층 3층으로 뛰어 다니며 엄마를 돕는 모습이 대견하다. 지나온 삶의 시련과 고통이 앞으로의 삶의 주춧돌이 되리라 위로해 본다.
아침은 늘 감사함으로 시작한다. 칠십 여년의 내 인생을 송두리 채 투자한 그 목표가 자식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내 삶의 십년은 나를 위해서 살아 보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에게 크나큰 행복을 준 것도 아픈 상처를 준 것도 자식이었다.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내 새끼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그 인고의 시간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밖에 달리 해줄 수 없는 어미의 안타까운 마음을, 내 딸이 내 나이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러나 지금은 고마울 따름이다.
딸이 삶의 터전을 단단히 잡고 내 옆을 지켜 주고 있어 고맙기만 하다. 이제는 백세 어르신들 건강 강사로, 방과 후 교사로, 요가 선생님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딸이 자랑스럽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많고 그림을 전공하고자 했던 너를 하나님이 오늘날 이렇게 쓰시고자 현대무용을 전공하게 하셨나보다. 그리하여 견문을 넓히고 엘리바스 선교단 으로 국제무대에서도 활동하고 2006년 9월 12일 서울 양재교육문화회관에서 뮤지컬 “그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세 개의 못과 고난의 길”(드라마 워십)
“너는 크게 자유를 외쳐라”,“야! 외쳐라”를 천여 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네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의 밤이었다. 절망에서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자랑스러운 내 딸아 사랑은 눈물처럼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예쁘고 강인한 딸아 너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울 게 없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너를 주님이 영원히 지켜 주실 거야.
푸른솔 문인협회 회장임기를 마치면서
수필을 쓰는 일은 ‘걸음을 늦추어 나를 돌아보는 일’ 이라고 한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하다. 늘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허송세월만 보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어찌 좋은 글을 쓰겠는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글을 쓴다고 시작한지도 어느덧 많은 세월을 보냈다. 글다운 수필 한 편을 발표하지 못함이 작가로서 늘 부끄럽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글보다는 어렵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먼저이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하였으나 그동안 문학을 공부하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게 되었다. 글을 쓰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문학을 알리고 교류하면서 살아온 것은 보람이었다.
푸른솔 문학회의 활동
“문학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글을 쓰고 발표하며 활동하는 언어예술” 이라고 한다.
푸른솔문학회는 그동안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필 창작 반을 수료하였거나 현재 수강하고 있는 원생들과 각문학지에 등단한 작가들의 모임인 푸른솔문인협회이다. 또한 계간지 푸른솔문학으로 등단한 분들이 모임인 푸른솔문학작가회도 있다.
우리 문학회는 1999년 9월 9일 출발하여 올해로 19살 장성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2000년 5월 20일 창간호를 발간하였고 금년에 청솔바람소리 21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또한 제14회 문학 세미나를 비롯하여 문학의 밤, 문학기행, 버드나무 축제, 도민 백일장, 송강 문학제 등 많은 행사를 해 오고 있다. 2009년 9월 5일 창립10주년 행사로 “41인 명 작품 선집”을 출간 하였고, 내년에는 20주년 행사로 더욱 빛나는 작품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우리를 지도하시는 김 교수님은 푸른솔문학회를 창립하시고 충북에서 유일한 종합문학 푸른솔문학 계간지를 연 4회씩 올해로 10년간 발행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등단시켜 작가로 길러내셨다. 푸른솔문학회는 문학수업을 함께 한 작가들로 구성 되어 친밀감이 깊고 등단 후에도 5~10년 이상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도 교수님이 계셔서 타 문화회 보다 단합된 문학 정신으로 내실화를 기할 수가 있다. 현재 몇 개의 상을 제정하여 우수작가에게 상을 수여하면서 위상을 높여 주고 있다.개인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소외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지역에 문학성을 높여 가고 있음이 푸른솔문학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문학회가 활동한 ‘버드나무문화축제’ ‘송강 정철작품 낭송회’ 행사에 2016년부터는 문화재청이 지원하고 충청북도와 청주시에서 후원을 받았다. 우리 문화의 가치를 높이는 “생생 문화재”사업으로 선정되어 문학회의 꿈이 이루어 졌다. 인터넷 카페도 전국 10위권 안에 올라서 있을 정도로 운영 되고 있다. 푸른솔문학회는 동인지 발간, 명수필집 발간, 푸른 솔문학회 등단 작가회동인지 발간, 평생교육원 수강생 문집 발간, 문학세미나. 문학의 밤, 문학기행, 도민백일장 등, 많은 행사를 해오고 있다.
수필문학과의 인연
수필은 개인적인 사고와 경험을 바탕으로 쓸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것이요. 그 것에서 여과 되거나 발효된 정서를 녹여내는 것 이였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자신과 타인의 삶을 간접 체험으로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존재감을 확인하는 자성의 통로이다.
오늘이 있기 까지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학창시절 미팅에서 성함을 알게 된 후, 20년 후에 우리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인연이 되었다. 나는 김 교수님으로 부터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변하게 마련이다. 어렵기만 했던 문학의 길을 걸어오게 됨은 마침내 교수님의 지도로 회장 임기까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부족한 자신이 ‘푸른솔문인협회’ 회장을 억지로 맡게 되었을 때, 많은 고심을 하였다. 초창기의 회원으로 난감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회장직을 미루어오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오고야 말았다. 그때 자신에게 회장직을 넘기면 문학회를 탈퇴하겠다고 까지 하였지만 문학회회장 명만 맡아달라는 바람에 기어코 책임을 지고 말았다.
꿈도 꾸지 않았던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어 양어깨가 무겁기만 하였다. 부족하지만 임기동안 무엇을 할 것 인가 각오도해 보았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참으로 빠른 것이 세월인가 보다. 어느새 2년이란 시간이 지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짧은 기간이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보람된 삶이었다.
문의향교 뒷산에 몇 년 동안 푸른솔문학회 회원들이 심어놓은 나무와 유실수들을 문학공원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오솔 길도 어떻게 구상 할 것인가 연구 중에 있으며, 아름다운 문학 동산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제1회 제2회로 매화와 산수유나무를 많이 심어 봄이면 매화축제를 하였다. 대청호가 바라다 보이는 향교뒷산에 올라 금년에 3회째 매화축제를 한 후 가지치기도하고, 비료도 주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심었던 매실로 담근 화합 주를 마시고, 손수 빚은 화전을 먹으며 문향에 취해 ‘매화 축제’ 사행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 전회원이 심사위원이 되어 장원과 우수상 차상에게 상품을 수여하였다. 그 동안 역대 회장님들, 그리고 임원님들의 협조와 회원님들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셨기에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지면을 통해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푸른솔문학회 각종 문학상
푸른솔문학회 최고의 권위 있는 상으로써 김홍은 발행인이 수여하고 상금은 사비로 후원하고 있다. 개인 저서를 발간한 작가로써 문학적 자질이 우려하며 우수한 작품집을 발간하고, 푸른솔 문학회를 발전시키면서 널리 알리는 사회적 활동 등을 참작한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고 있으며 상금은 50만원 이다. 올해로 제 16회 홍은 문학상이 주어진다.
푸른솔문학상 역시 우수한 수필을 발표하고, 수필집을 발간한 회원에게 수여하며 부상은 30만원이다. 정은문학상도 이와 같으며 부상은 50만원이다. 이외 충북대학교 수강생들에게 춘추로 작품공모를 하여 시상을 하는 효동문학상(부상 50만원), 충북대수필문학상, 신춘수필문학상이 있다. 이런 각종 상을 수여하면서 회원들의 위상을 높여 주고, 문학발전의 노고를 격려하여 오고 있다.
나는 문학회 창립 멤버로 수필집「새벽을 여는 행복」을 출간하였고 우리문학회 산증인으로 ‘홍은문학상’도 받았다. 인생이 살아가는 데는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바꿔지게 됨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내 인생을 꽃과 열매가 되게 하는 자서전도 쓰게 되었다.
긴 세월 문학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문학회가 처음에는 문의향교가 멀기만 하였는데 지금은 우리의 손때가 묻고 그동안 정이 들어 협회 사무실도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 초하루 보름으로 교수님이 손수 관리인이 되셔서 몸으로 지역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버드나무 축제’를 통하여 유치원생 동화구연대회, 청소년백일장과 호드기불기대회 ‘송강정철 문학제’를 통하여 지역민들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주고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하고 고귀한 문화유산 작품들을 대할 때 후손으로서 자랑스런 마음과 긍지를 갖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함께 동참하여 우리문화를 교류하고 발전해 가는 문학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버드나무 문화축제
푸른솔문인협회는 버드나무와 인연이 깊다.
지난 1996년도는 충청북도로부터 처음으로 전개한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2000년도에는 중요한 도정 시책의 하나로 '손자 숲 가꾸기' 운동을 계획하여 한층 더 푸르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가덕면 병암리 앞, 도로 구획문제는 이 운동의 취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그런 계획이다. 우리의 자손들을 위하여 자연을 더욱 잘 보존하고 또 가꾸어 나가자는 운동과는 달리,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던 버드나무 숲을, 청원군에서는 지난해 어찌하여 이를 폐지시켰다. 도로확장 개설에 지장이 되어 사전에 폐지시킨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새천년을 맞아 ‘손자숲가꾸기’ 운동의 취지에 과연 500년을 이어온 마을의 수호신인 버드나무 숲을 베어내고, 불과 5-6년생의 나무들로 다시 가로수로 심는 계획을 반대하였다. 다행이 가덕면 병암리 도로변 500년된 버드나무숲을 살려낸 연유의 계기와 장자골 버드나무수술을 하여 제1회 버드나무 문화축제가 시작되었다.
* 축제의 목적
생생의 문학, 소통의 문학으로
1. 농촌을 대상으로 문학의 소재를 이끌어 내고, 문학을 통하여 소외된 지 역의 문화를 발전시킨다.
2. 가난한 농촌을 이해하고, 아름다운 정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3. 어렵게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도시사람들에게는 잊혀져가는 고향의 향수에 젖게 한다.
4. 우리 농산물을 사랑하고, 생산자에게 도움을 주고, 상생의 정을 나누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푸른솔문학인의 인간애(人間愛)를 꽃피운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버드나무축제가 출발하게 되었다.
역사의 얼이 서린 양성산 기슭에 자리한 문의 향교에서 올해로 제9회 버드나무 문화행사(제7회 청소년 백일장, 제6회 아동 동화구연대회. 제7회 호드기 불기대회) 를 푸른솔 문인협회에서 개최하였다. 문화행사를 열어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느껴 보도록 호드기불기대회를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기위해 백일장에서 장원한 학생에게는 어사화의 모자와 관복을 입혀 꽃가마를 만들어 태우고 축하를 받게 하고 있다. 또한 각 분야별로 우승자에게는 상장과 상금을 주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문학 세미나를 비롯하고, 향교의 밤, 도민백일장을 매 해 하고 있다.
송강 정철 문학제
송강 정철 문학제는 금년 제11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하고 고귀한 문화유산 작품들을 대할 때 후손으로써 자랑스러운 마음과 무궁한 긍지를 갖게 된다. 그 중 송강의 시조와 가사문학은 천년의 독보라 할 수 있으리 만큼 뛰어 나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요, 특히 문학의 길을 걷는 우리들에게는 말 할 수 없는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선현들의 깊고 넓은 문학 토양을 배우고 본받아 그 토양을 바탕으로 다시 창조라는 찬란한 열매와 꽃을 피우도록 우리 후손들은 더욱 힘써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랑한 목소리로 정철선생을 기리며 작품을 낭송하고 작품전시회도 함께 시행하여 오고 있다. 우리는 가사문학을 계승하는 문학의 후손들로 더욱 힘써 나아가려 노력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난해는 열 번의 행사의 모습들을 화보집으로 엮어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함도 회장의 임기를 마치는 보람이었다.
푸른솔문학공원 조성
어느 날 푸른솔문학 카페의 문의 향교에서 김홍은 교수님, 이재부, 유기학 회장님과 함께 대화를 나눈 기록을 읽게 되었다.
16년간의 세월을 회상하며, 쌓은 흔적들을 되돌아 보았다.
역대회장 (정태익, 김정자, 김예식, 장석노, 이재부, 유기학 회장님)
사무국장 (장재섭, 김민자, 정상옥, 정명숙, 홍성란, 장용대 님 )
또한 모든 회원님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각 행사의 지원금을 받게 됨이었음의 내용이다.
또한 다음카페 <문학예술>의 <수필>검색 순위에 <푸른솔문학회> 카페가 자랑스럽게도 2위에 우뚝 올라있다. 회원님들의 열성적인 활동의 성과의 내용이다.
이제 우리의 할일이 또 남아 있습니다. <내나무 심기> 마음이었다. 입버릇처럼 말했던, 푸른솔문학회의<문학공원>이다. 문의 향교에는 우리 문학회 사무실이 있고, 향교 뒤편으로는 2ha가 되는 향교산을 아름답게 꾸며 놓으면, 선조들의 문화인 문의 향교가 아름답고 행복한 우리고장이 되고 푸른솔문학회의 꽃동산이 알려지게 된다.
<내 나무>는 지역사회와 함께 꽃마음으로 밝혀가는 우리의 문학정신이다. 글을 쓴다는 정신은 자신을 아름답게 살아가게 만드는 수련으로, 지역사회의 문화를 높이는 문학이어야 한다. 금년 봄에는 <내나무 한그루> 심기를 추진하자.
‘꽃이 피어, 열매가 맺으면 이를 따서 이웃과 함께 정을 나누고
새들의 먹이도 되고, 약용식물을 심고 길러 자라면, 아픈 사람 병을 고치게 하고 나무마다 사랑이 되게 하여 詩가 되고, 隨筆이 되고, 小說이 되기를 바람이었다. 푸른솔문학회의 문인들은 전설속의 문학으로 꽃피게 하는 문인다운 문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는 뜻으로 문학공원이 조성되었다. 회장으로 임기기간동안 봄에는 매화꽃 향기에 취하고, 초여름이면 매실을 따던 손끝에는 봄여름 가을겨울의 계절마다 의미가 다르고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였다.
푸른솔 문인협회가 지역 사회에 끼친 영향
첫재, 청소년 백일장 행사를 개최하여 문의면. 현도면, 가덕면 청소년들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둘째, 버드나무 문화축제를 개최하여 문의 지역민들에게 잊혀져가는 고향에 대한 애향심을 이끌어 주고 있다.
셋째, 타 문학회가 하지 못하는 송강 문학제를 개최하여 조선시대에 가사문학을 기리는 문인의 긍지로 푸른솔 문학회가 가사문학의 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넷째, 문의 향교를 통하여 우리 문화를 계승하며 ,선조들의 애국심을 본받고 선비정신으로 나라 사랑을 익혀 나가고 있다.
다섯째, 도민백일장을 개최하면서 도민들에게 문학의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여섯째, 문학회 회원들이 각 문학단체에 가입하여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고, 지역 신문에도 수필 작품을 기고하여 지역 문화 창달에도 기여 하고 있다.
막중한 책임을 맡은 지 어느새 임기 막바지에 이르렀다. 20여년의 푸른솔문학생활을 돌아보니 감개무량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교수님을 다시 만나 문학회 창립멤버로 마지막 회장까지 마치고 보니 문학회 산증인으로 감회가 남다르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문학회 행사를 이끌어올 때 남편의 도움과 무용을 전공한 딸이 있었기에, 문의향교 명륜당에서 부채춤으로 행사를 빛내주고 끝날 때까지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 큰 힘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현의 말씀대로 책임의식이 없는 사람은 사명감을 가질 수 없으며,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사명감이란 바로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무엇이든 이룩할 수가 없음을 다시금 깨우치게 되었다. 앞으로 푸른솔문학회 10년 후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갈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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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사합니다. 늦은시간까지 다시 점검했습니다.
사랑은 눈물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밑에서 20번째줄 ... 어느새 자라서 부터 ... 외손녀는 경희대 경영학과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외손자는 대학재학중 씩씩한 군인으로 의무를 다하는 중이다.
로 고처주세요.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