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想錄, 18 德壽宮, 石造殿
덕수궁의 석조전은 서울 중구 세종로 99, (정릉동)에 있다.
덕수궁 석조전은 대한제국 마지막황제의 생활 공간이면서 황제라는 상징성이 있고,
자주국가 표상이라는 대외적으로 표방하고져 건립되였다.
그림의 석조전은 1층은 영빈관이면서 연회장과 식당이 있다.
2층은 고종의 침실이다.
지금은 역사 박물관으로 활용하고있다.
설계는 영국인 존, 멕립; 브라운(J, M, Brown) 했다.
필자는 2024, 9월에 서울에 군(軍) 동기생과 만난의 장, 차원에서 고희에 찾았다.
예전에, 덕수궁 돌담길을 찾았던 일을 회상하며서 , 그때 그 시절 만큼이야 하겠 건만, 어떻든 길은 남여의 데이트(date)를 즐기는 길이다.
아이러니(irony) 하게도 궁(宮)의 이별이 깃든 길 위에서,
사람들은 걸으면서 인생의 뒷안 길에 추억과 낭만의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한다.
덕수궁 돌담길(노래)
- 비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도없이 혼자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에 혼자 거닐까.~~~ 필자는 그날이 비는 안 왔지만 혼자 거닐었다.
단풍이 있을 락 말락 했지만 기분은 썩 좋아, 떡뽑기도 사 먹었다.
필자의 요즘하고는 정서가 젊은 날에 요즘 하고요,
그래도 알게모르게 젊은이하고 어울어진다는 게 행운이면 행운이라까.
덕수궁은 조선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모두 소실되었다.
1593년 궁궐로 정릉동 행군(貞陵洞行宮)이 었다.
1611년 경운궁(慶運宮)이 되였다.
창덕궁이 중건되여 별궁이 되였다.
1897년 고종,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물러나면서 덕수궁이 되였다.
조선 왕궁은 5개 궁중 덕수궁은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5대 궁을 전부 섭려했다.
경복궁은 직업상 다소 다소 들락거렸다.
그리고 창덕궁, 창경궁도 그렇다.
허나, 경희궁과 덕수궁은 나의 관할지에서 멀어저 어쩌다 가곤 했다.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며, 들어서면 중화전(왕의 국가 행사장: 4 칸의 단층에 팔삭지붕) - 준명당(고종의 휴식공간)- 석어당( 왕의 정치장소)- 덕승전( 명성황후의 혼전, 魂殿)-
함녕전(고종이 거처 하던 곳)- 정관헌( 서구식 정자: 커피를 즐기던 곳)이다.
그리고 석조전 전면에는 작은 연못에는 분수대가 있다.
석조전 우쭉 소나무로 가려진 곳이 준명당 위치다.
석조전과 어울러져 고색 찬연한 풍경이 서양식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주위에는 소나무 그리고 낙엽송이 조화를 이룬다.
어쩌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축소된 궁 같기도하다.
필자의 모습의 그림은 본관(석조전) 옆 건물인 석조로된 덕수궁 국립 현대 미술관 1층 입구에 석조로 된 계단에 서 있는 모습이다.
5대 궁(宮)은 정궁인 경복궁이 있으나 실제는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했다.
그 옆에 창경궁이 있고 서울 시청 옆이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 서울 종로구 사직동)이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때 작공, 인조때(1626년) 완공했다.
지금은 전각이 대부분 철거되여, 숭전전, 회상전 홍정당 외 다소 몇 건물만 남아있다.
창덕궁의 부속건물을 허물어 창경원 을 만들어 식물과 동물원을 만들었다.
조선의 뿌리를 희석 시키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벚나무가 많았다.
벚꽃은 일본의 국뽕이다.
봄의 벚꽃을 서울 시민이 즐겨 찾기도 헸다.
필자도 다소 자주는 아니지만 찾기도 했다.
지금은 일제의 잔재를 없엔다고 벚나무를 전부 없애 버리고, 일제가 없에버린 건물을 복원하고 소나무가 많다.
특히, 창덕궁 후문에는 비원(秘苑) 이있다.
일제시대의 명칭 이다.
지금은 일제의 잔재를 없에려고 후원(後園)으로 개칭되였다.
후원은 왕의 비밀정원이면서 왕자들의 휴식공간겸 글방이있다, 그리고 규장각(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난리시 왕가분들이 피난 처이면서 궁중에 잔치는 때로는 여기서 행사를 하기도했으며,
과거 시험장도 여기에 있다.
특히 봄과 가을에 가면 자연과 어울어진 정자며 연못이 대 여섯군대 되여 아기자기 한 모습이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는 곳 이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덕수궁에서 나와서 소공동 여느 식당에서 ,
여느 셀러리맨(salary man) 처럼 복은밥에 막걸리 한 병을 먹고 마시니, 포만감으로 즐거웠다.
내 인생에 남한 전 도(道)을 명에 의거 살았지만 남과같이 돈도 못 벌고 명예도 없지만 남은 것은
그지방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풍습과 역사를 읽을 수 있어 그보다 큰 자산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 虎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