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심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만인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자신을 성부께 드린 희생인 동시에 당신 자녀들을 먹이는
음식입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
리 각자에게 나누어 먹임으로써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
다. 이것은 당신과 우리 각자가 특이하게 결합하는 묘안입니다. 우리는
먹는 힘으로, 즉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불사불멸(不死不滅)하시는 하느
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태중에서 새
생명을 받고 태어난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 즉 살과 피를 먹고 자라듯
이, 예수성심에서 나온 물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는 성심에서 흘러
나온 피, 즉 성체성사로 양육되기 마련입니다. 성체성사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젖입니다. 다른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베풀지만, 성체성사
는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주시는 지극하신 사랑의 신비입
니다. 이리하여 예수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
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것이 우리
와 하느님과 일치관계를 맺게 하는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가 없다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은 부족한 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
하면 인간인 어머니도 아기에게 젖을 먹여 키우듯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희생제물로 바친 공로로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느님 자녀가
된 이상,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셔야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체성사는 꼭 있어야 되는 것입
니다.
이리하여 예수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이고 성체성사는 예수성심의 가
장 완벽하고 탁월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는 제대상에서 타오르는 사랑
의 불꽃이고 당신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입니다.
예수성심이 베푸신 또 다른 은혜는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아들과 가장 완벽하게 결합하신 분으로 당신의
마음은 아들의 마음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모성심은 인
류의 죄로 고통당하는 예수성심과 완전히 일치하고 당신 아들의 구속사업
에 동참하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성적 자애를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십
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고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어머니로
그리스도를 낳아 기르시고 수난에 동참하셨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을 품고 돌보며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머리이
신 그리스도의 모친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결합된 주체인 교회의 모친
이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수성심께 드릴 공경과 함께 성모성심께 드
릴 공경이 합당하다는 것을 교회는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앙 생활과 예수성심 신심>>
한국 교회의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예수성심 신심을 살펴봅시다.
한국 교회의 신자들에게 예수성심 신심이 왜 꼭 필요할까요?
한국인의 일반적인 종교 심성은 토착화된 무교(巫敎)인 샤마니즘의 현
세기복 및 신비주의에 깊이 젖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巫)”가 어
떤 의미인지 알아봅시다. 그것은 무당이란 뜻으로 한국인은 무당 민족입
니다. 만주, 일본, 시베리아 민족은 민간 신앙인 무교를 바탕으로 살고
있습니다. 단군 시대부터 무당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신들린 인간이
껑충껑충 뛰면서 신령계(神靈界)와 인간계를 연결합니다. 하늘과 땅을 연
결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람, 즉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
다. 샤만이란 말은 퉁구스어로 사제란 뜻입니다. 우리 신부도 서양 무당
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지상의 인간을 중개역할을 하듯 무당은 신령님
으로부터 신탁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 역할을 합니다. 또 무
당은 주문을 외워서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몸에는 무당기, 불교기, 유교기 도교기, 음양오행, 토정
비결, 정감록 사상, 풍수지리 사상 등 여러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한국
인의 종교 심성은 복합적이어서 한국에는 신흥종교가 흥행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성당에서 성모님께 빌어보고 효험이 없으면, 신흥종교로 발길을
돌립니다. 복을 따라 다니는 한국인의 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샤마니즘적인 현세기복, 신비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의 신흥종교는 600가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순진리교, 영생교 등등. 우
리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사이비적인 종교 심신, 즉 현세기복적인
종교 심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분의 수난과 부활로 마련된 구
원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그리
스도 중심적이고 영복을 추구하는 초자연적인 종교여야 합니다. 우리 그
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그분을 통해 성부를 사랑할
때에 성실하고 진실하신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
수성심 공경은 첫째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을 구체
적이고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거듭 말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키면 완전히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런 두 사랑을 누구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따를 수 있고 예수님의 마음을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
을 사랑하시고 성부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이 되
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성심 호칭기도에 있듯이,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
신 예수님,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라고. 예수님의 마음
이 되면 예수님 같이 살게 되고. 제2의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며,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
는 것입니다. 예수성심께서 약속하신 은혜가 영생과 직결되는 은총일 뿐
만 아니라 갖가지 현세적인 축복임을 생각할 때, 현세기복적인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서 볼 때, 예수성심 공경은 실로 구원과 축복의 길임이 확실
합니다. 특히 성시간 기도는 게세마니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지극한 고
통과,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심
을 위로하고 우리와 세상의 죄를 보상하는 보상기도이기 때문에 회개와
생활 개선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효과적인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성심 공경의 의미와 가치를 역설하고 이 신심을 권장하신 역대 교
황님들의 말씀을 들어보자.
1. 비오 9세 교황 :
교회와 세상이 희망을 둘 곳은 예수성심 뿐이다. 우리의 모든 불행을
낫게 하실 분도 오직 예수성심 뿐이다.
2. 레오 13세 교황 :
예수성심 공경은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탁월한 신심이다. 모든 희망을
두어야 할 곳은 예수성심이고 구원을 위해 기도할 곳도 예수성심이다.
3. 비오 10세 교황 :
위험 중에 있는 인류의 유일한 피난처는 예수성심이시다.
4. 비오 12세 교황 :
예수성심 신심은 모든 신심의 종합이요, 더 완전한 생활규범이다. 하느
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할 때 완전
한 덕행을 닦을 수 있고 완덕에 나아갈 수 있다.
이 교황님은 예수성심신심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간추려서 『너희는 물
을 길으리라』(1956년)라는 회칙을 반포하셨는데, “예수성심 신심은 그
리스도교 신심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요, 모든 신자가 져야 할 의무,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잘 모르는 성직자들은 예수성심 신심을 이지적이
지 못하고 아주 감정적인 신심이라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감정과 지성, 의지를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
문에 이러한 것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
한 하느님의 사랑 역시 지성적이고 의지적인 동시에 감정적이기 때문입니
다. 또한 정감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감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은 온
전한 인간적인 생활이라 할 수 없다. ‘아름답다’, ‘귀엽다’, ‘예쁘
다’ 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목석이지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
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
끝으로, 예수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발현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
다. 예수님의 발현 또는 성모님의 발현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하
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 즉 아니 계신 곳이 없
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는 곳은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성모
님은 어떤 성모님인가요? 매일 하늘 궁전을 비우시고 세상에만 돌아 다
니는 성모님이신가요? 성모님도 하늘 나라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성모
님도 피눈물을 흘립니까? 그렇다면 하늘 나라가 초상집입니까? 하늘에 계
신 성모님은 울지 않는다. 복이 넘치는 하늘 나라에서는 울고 슬프고 고
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는 성모님은 누구입니까?
지상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발현은 하늘에 계신 성모님의 그림자입니
다. 그러면 그림자는 성모님의 가짜인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
이나, 예수님, 성모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이나 성모
님을 지복직관할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봅시다. 하늘에 있는 보름달은 하나이지만 지상에 나타나
는 보름달의 그림자는 무수히 많습니다. 강, 호수, 우물에도 달의 그림자
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하늘에 떠있는 달과 다른 것인가요?
그것은 같고도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은 본체(本 )이
고, 지상에 비치는 달은 하늘에 있는 달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같고도
다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있는 성모님과 세상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성모
님은 같은 성모님인데, 그때 상황에 따라서 수백만 가지로 변화하는 것입
니다. 마음의 본체는 불변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불변합니
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성모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신데, 지상
에 발현하는 성모님은 하늘에 계신 성모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분으로 장
소와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수백 가지 모양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지
상에 발현하시는 성모님은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경주에는 보문단지라는 곳이 있는데 ‘보문’이란 ‘보문시현’, 즉 관
세음보살이 자기 몸을 32가지의 다른 모양으로 드러내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주교의 성모님에 해당하는데, 임금
을 구제할 때는 임금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창녀에게는 창녀의 모습으
로, 거지에게는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각각 그들을 구제한다고 합니
다.
본체는 불변하는 것이고, 본체에서 나오는 물질적인 것은 수백만 가지
로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세상의 피조물은 변화무쌍하여 모든 것이 변합니다. 죽고 살고 움직이
고…, 다시말하면 본체는 항상 그대로 있지만, 본체의 작용은 변화무쌍
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 물질이 아닌 것으로써 본체라
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서 나오는 작용, 즉 생각, 말, 행동은 수
십, 수백 가지로 바뀌어 표현됩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아프다고 합시
다. 그러나 아픈 마음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아프기 때문
에 나오는 행동이나 말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양 사상에는 ‘체용(体用)이 있는데, ‘체(体)’는 본질을 말하고 용
(用)은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작용을 말한다. 하느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
지만,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변화무쌍한 것이고, 현상계의 우주
만물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며, 연구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용(用)은
체(体)와 일체를 이룹니다. 용(用)이 없으면 체(体)를 알 수 없고 체(体)
가 없으면 용(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발현도 이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는,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성모님이나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성모님이나 예수님의 발현을 통해서 메시
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사적계시를 통해서도 메시지를 듣게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