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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참전 수기(越南 參戰 手記)
◆ 월남 참전 전투기
한국군 파월은 자유 월남을 침공한 공산 월맹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1964년
부터 연5만 여명의 국군이 파월되어 73년 1월 철군시 까지 8년 동안 인류의 정의를 구현하고 대한민국 국위선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는 소총중대장으로써 1년간 열대의 정글을 누비며 월맹군과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하였다.
중대의 첫 작전으로 디엔칸 푸곡 계곡 베트콩 은거지 수색을 실시하고 매복 지역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제3소대에서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내용인즉 선임하사 김중사가 숲속에서 뛰어나오는
사슴의 뿔에 받쳐 이마가 찢어져 급히 후송을 시켜달라는 것이다. 약간 중상이라 안전지대로
하산시켜 연막탄을 피어 헬리콥터로 후송시키고 타 지역으로 이동, 하루 밤 은밀히 매복한 후
새벽에 기도비익으로 역습을 감행, 제3소대가 도망가는 적을 발견 집중 사격하여 베트콩 2명 사살, AK소총 3정, 기타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려 중대의 사기가 한층 고조되고 베트콩의 초라한
시체와 그들의 무기를 직접 만져보며 월남전의 공포심도 사라지고 자신감과 전과의 의욕도 한결 높아졌다.
동보(Dong Bo) 70-10호 연대작전(70. 1. 12.~1. 18)
월남중부 항구도시 나트랑의 동쪽 산악지역의 울창한 정글과 동굴로 형성되어 있고 월남 정부의 행정력도 못 미치니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베트콩들이 은거 하면서 판랑 공군비행장과
1번 도로 지역을 침투하여 습격, 파괴활동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 11중대는 누이한 산표고 1,000m 북단에 헬기로 랜딩하여 정상을 점령하고 정글지대 소로 변에 교묘하게 위장 구축된
인공호 3개를 탐색하여 소총탄과 많은 식량 및 군수품 등을 노획하였고, 다음날 누다마이(Nui DaMai)산의 고봉에서 하향 소탕작전을 실시 제1소대가 4개의 동굴
내부를 수색, CAR 소총 2정과 실탄 259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백마 11호 사단작전 (70. 3. 1.~3. 16.)
장장 15일간 정글 속에서 낮에는 소탕작전, 밤에는 매복 작전을 수행하느라 전투복의 무릎과
팔꿈치가 헤어져 구멍이 났었다. 월남전이야 말로 베트콩(VC)이 있는데도 없고, 없는데도
없다는 말과같이 그들이 활동하는 곳에 전선은 존재하되 전후방의 구별이
없으며 계획된 작전이 끝났어도 포성은 여전히 메아리치는 전선 없는 전쟁터이다.
의심지역은 포병의 포탄을 퍼붓고 티케이 계곡을 수색 정찰하던 2소대가 베트콩 1명을 사살하고 박격포탄을 노획하는 전과는 있었으나 적들도 이미 이 지역을 탈출한 상태라 큰 전과 없이 작전은 끝나고 헬리콥터가 앉고 뜨는 랜딩 지역을 개척 14대의 헬기로 무사히 귀대하였다.
아~악전고투(惡戰苦鬪) Dong-Bo 70-11호(70. 6. 8~6. 22) 연대작전!
적은 나트랑성 베트공(VC) 위원회 250중대를 주축으로 제315포병소대 제803 VC소대, 그리고
지역 VC 들이 송강(SongGia) 상류의 이른바 제7기지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지난 2월부터
5월에 접어들면서 중대규모로 무리를 지어 병참선을 습격하거나 군부대에 침투 파괴하는 등
그 양상이 날로 심하였다. 이에 연대는 작전 계획을 수립, 그물망 포위 작전을 개시하였다.
15일간에 걸친 작전은 일부 전과를 올리긴 하였으나, 제3대대의 4개 중대는 악전고투,
수명의 전자자와 부상병의 전투손실을 당하고 적의 요새지는 탈환 점령했지만 적들은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그 당시 전투 양상은 월남전사 8권에 ※참전자의 증언「제30연대 제11중대장 구재운 대위의
증언」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전에서 본인은 제11중대장으로서 참가한바, 제 1, 2단계 작전에서는 특기할만한 상황 없이
작전을 끝마치고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6월 16일에 공격개시선이 Nui Tha Tou 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은 능선에 산개하였다. 다음날 조효(早曉)에 공격이 시작되어 동쪽으로 하향 탐색에 들어 간지 3시간 뒤에 암석지대에 부딪쳤는데 바위 사이는 40cm~1m정도 간격의 미로(迷路)가
동굴로 이어진 천험(天險)의 요충이었다. 이에 본인은 각소대장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우발사태에 대비하여 지원대인 화기소대로 하여금 중대본부를 뒤따르게 하였다.
얼마 뒤에 큰 나무위에 관망대가 설치 된 것을 확인하였으나 적은 보이지 않고 자라 한 마리가
2m 길이의 끈에 매여 있었다. 또 그 아래 20m 떨어진 조금 넓은 암석 사이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문서 약간을 노획하였는데 이에는 이른바 호지명(胡志明) 훈장증 4매가 있었다. 본인은 이것을
보고 여기에 침거중(蟄據中)인 무리들은 VC(베트콩)의 정예분자로 판단하고 각 소대장에게 이를 전파하였다. 그런지 잠시 뒤에 갑자기 사방에서 총격이 집중되므로 곧 응전하는데 제3소대 첨병 김낙교(金洛橋) 상병이 그들에게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지려던 순간에 흉탄에 맞아 장렬(壯熱)하게 전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자 각소대장에게 일단 요새 암석지역 외곽으로 퇴각시키는데 인접 제9중대
제1소대의 지헌만(池憲萬) 하사가 이끄는 분대가 저격을 받아 분대장 지하사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바위틈에 끼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의 분대원 2명이 나에게로 달러 와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즉시 화기소대를 거느리고 池하사가 피격된 곳으로 달려가다가 그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측방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화기소대 전령 조성태(趙成泰) 상병이하 2명이 동시에 적의 저격병 흉탄에 부상을 입었으며, 이를 제압하려 암석위로
올라가려는 찰나 뒤따라오던 무전병 김상병이 적의 저격병을 발견 중대장님! 부르며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넘어졌는데, 내가 기어오르던 바위에 총탄(銃彈) 2발이 튕기면서 하얀 탄흔을 남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이윽고 총성은 멎었으나 적정(敵情)은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아군이 움직이기만 하면 소재불명의
V.C들이 조준사격을 가해옴으로 나는 그들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를
이용하여「돌산」끝에 있는 옥수수 밭으로 모두 철수시켰다. 이윽고 대대장의 부름을 받고 대대OP로 올라갔더니 연대장 이민영 대령이 나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며 양주 한잔을 권하면서 다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내일 조조에 여명을 기해 우리 “11중대를 중앙으로 좌, 우에 9, 10, 12중대을 배치 다시 돌산을 공격”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중대원들은 M16소총과 유탄발사기, 수류탄, CN 깨스탄 및 방독면으로 완전무장하고 여명
전에 공격 개시선으로 이동 전개하였고, 밤새도록 교전지(交戰地) 일대에 포탄을 퍼붓고,
날이 밝아지자 O-2공중 정찰기에 의해 목표지점에 적색 탄을 쏘고 팬텀전투기 2대가 공중폭격을 실시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전 중대원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최루수류탄과 M79유탄을 암석
사이에 터트리며 가스작전으로 요새지대를 완전점령하고 동굴을 수색하였으나 베트콩들은
포탄사이를 뚫고 밤사이 도망가고 전쟁 물자와 지하사의 시신만 수습한 악전고투의 실패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실패 원인을 살펴보면, 작전 2일전에 제5중대및 연대수색 중대가 착륙지역 개척을 위하여 침투하다가 제5중대가「돌산」동쪽 1.8Km지점에서 적과 교전 끝에 5명의 전투손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히 하고 사전 정찰도 하지 않은 채 험산지역을 3分하여 3개
중대로서 하향식 탐색작전을 실시한 작전계획과, 돌산 암석지대에 은거한 분대규모 베트콩의 윤곽이 드러났으니 1개 중대로 소탕하게하고 3개 중대는 사전 사주포위(四周包圍)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퇴각하는 적을 포획했어야 했다.
작전 중 정글에서 중대장이 지도를 펼쳐 적진을 살펴보고 있다.
◆ 병영일지(兵營日誌)
69년 12월 혹한의 추위 속에 강원도 오옴리 월남파병 교육단에서 지휘관 요원으로 2주의 단축
교육을 받고 김포 비행장에 들어가니 먼 남쪽 고성에서 어머님과 큰형님이 상경하여 월남으로
떠나는 아들을 배웅해 주시었다. 공군 C-56 수송기를 타고 8시간을 비행 필리핀 크라크(cluck)
공군 비행장에 내리니 상하(常夏)의 나라 이국정취는 별천지 같았다. 이곳 호텔에서 1박하고
다음날 4시간을 비행, 사이공 탄손루트 공항에 내렸는데, 입출국을 기다리는 흑인 병사들이
활주로 주위에서 샌드백을 베고 30도의 더위도 모른 채 누워 있고, 계속해서 치누크 헬리콥터는
하늘을 진동시키고 있어 아~ 여기가 전쟁터 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사이공 주월사
보충대 호텔에 들어서니 여긴 딴 판이었다.
가지각색의 아오자이를 입은 월남 공까이(아가씨)들이 유혹하고 휘황찬란한 야경의 거리는
전쟁과는 너무 멀어 보였다.
다음날 헬리콥터로 월남 동,중부 투이호아 9사단 보충중대에서 2일간 지내는 시간은 공포의
연속이었다. 먼저 밤이나 낮이나 도마뱀들이 천장을 기어 다니고 밤새 쏘아 대는 포성과 쉴새없이
뜨고 내리는 헬리콥터의 소음 그리고 세파베트콩들이 맨 몸으로 중대기지 철책을 침투 습격을
했다는 정보 등 전쟁터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었다.
◉ 사단 전투력 점검준비
내가 부임한 30연대 3대대 11중대의 임무는 베트남 동남쪽 디엔칸 지역에 위치, 깜란만의
미군 군수보급시설 외곽 경계와 다랏 산악지역의 월맹군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대는
사단에서 1년에 한번 씩 실시하는 전투력점검으로 교육수준, 각종 장비 관리 상태, 화기사격과
중대기지(Bace) 자체 방위 능력, 진지 보수, 장애물 설치 등의 검열준비를 하느라고 3일전
즈음에는 일등병으로부터 중대장까지 모두 시아스타 타임(낮잠)도 없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전투력 점검은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 대로 우수하게 평가받아 부대 사기는 진작되었으나 그동안 병사들의 사역노고가 많아 저녁에 소대별로 맥주 파티를 열러 위로하였다.
중대 기지를 방문한 백마부대 부사단장이 중대장 및 소대장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 분대장들의 건의 사항 (70. 4. 26)
70. 4. 15일 전격적으로 판랑 지역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작전지역 임무교대를 하였다.
새로운 기지의 임무는 판랑항의 미,공군기지 외곽경계 및 주변 지역 평정 작전으로써 중대 기지는
미 공군비행장으로 부터 약 8km 떨어진 148고지로서 전지역 관측이 양호하며 8~20km의 황막한
개활지에는 선인장을 포함한 소정글 지역으로 서부극에 나오는 한 장면 같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 진지는 최초 해병청룡부대가 진주 했다가 백마부대에서 인수한 지역인데 진지가 낡고 돌산지역으로 새로운 진지 구축이 필요했다. 이에 우리의 안전을 위해 모두 팬티 바람으로
호를 파고 샌드백을 쌓아 진지와 내무반을 구축하고 환경정리 작업에 병사들이 지친 듯하다.
제1소대 정하사가 분대장들의 애로 건의 사항이 있다고 보고 하기에, 중대장 실에서 분대장들의 건의 사항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작업이 너무 많아 정신을 못 차리겠으니 시간을 달라. 그리고
아침 점호는 작업 기간 중 생략하고, 작업 및 식당군기 등을 분대장 자체감독제로 실시 해 줄 것과 야간 순찰시 후레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건설적이고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즉시 받아 들여 좋다고 허락하고 시행하도록 했다.
과거 월남군인 생활은 베트콩만 잡으면 된다는 인식하에 대체로 군기와 지휘 계통이 문란 했었다.
그렇다고 일시에 군기를 잡는 것은 병영분위기만 나빠질 수 있다. 나는 이제 군기를 늦추어도
명령계통은 확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분대장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고, 나의 지휘 통솔
에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었다.
◉ 제2사관학교 생도대장 송택구 대령의 편지
생도대장 송택구 대령은 투철한 군인정신과 관료적인 지성인으로 내가 존경하는 분인데
그의 달필로 먼 월남의 격전지에 격려의 서신을 보내 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편지 내용에는 같이 근무한 나의 능력을 좋게 평가해 주고 나의 근무 실적에 추종이 불가하다며
그리운 정을 아쉬워했다. 한편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사관후보생을 양성 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토로하며, 2사관하교 생도 제1기생이 졸업하는 날 “나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라고
편지에 썼다.
청렴결백하고 의지가 강하며 항상 책을 읽으며 많은 후배 장교들로 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지만 청렴결백성 탓인지 육사 8기생인 그가 아직 장군진급을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고, 자연 쓸쓸한 모습만 떠오른다.
◉ 신임 소대장 윤중위 (70. 4. 5.)
신임 소대장이 전입해 왔다. 부대대장이 데리고 와서 전에 같이 근무를 했다며 우수한 장교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얼굴에 많은 흉터가 보였다. 그리 흉해 보이지는 않아 물어 보았더니,
전방부대 중대 교육장에서 크레모아가 폭발하여 안전사고로 중대장은 사망하고 자기는 얼굴에만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갑종 203기 윤 중위를 제3소대장으로 임명하고, 다음날 원칙주의 장교
제2소대장의 수색정찰대에 배속, 판랑 공군기지 외곽에 있는 114고지 험산을 수색정찰과 매복 등
1박2일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왔는데 피곤한 내색 없이 오후엔 군가 경연대회를 위해 합창요원을
소집 열심히 지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동정심과 든든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 최근 적 활동 동향 (70. 5. 7)
최근 월남전 양상은 납치, 살인, 탈취와 기지 습격 등으로 베트콩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여졌다
중대의 전입 고참병들도 이구동성으로 포성, 총성, 야간 조명탄이 전에 없이 많다며 경각심을
일으키고. 박쥐 부대에서는 도로 정찰조가 기습을 당해 3명 전사 11명이 부상하였고, 수색중대
탐색조가 베트콩의 저격으로 4명 전사, 어제 밤에도 디엔칸 성청 근처에 박격포탄 8발이 떨어져
공포에 떨게 하였다. 오후에는 대대장님이 와서 중대 전 병사들을 모아 놓고 정신교육을 하였는데
어제 밤에 2대대 제6중대 기지에 세파부대가 기습하여 3명의 전사와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시설이 파괴되었다며 첩보에 의하면 베트콩 4개 대대가 우리 사단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며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하였다.
소위 적의 세파부대는 2년 이상 특수훈련을 받고 분대 단위로 주로 한밤중에 기지나 주요 병참
시설에 기습 침투 살상, 요란작전으로 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장애물 제거용 공구와 소총 및 B-40 총포 등을 휴대하고 팬티내지는 알몸으로 철책
장애물에 걸리지 않고 침투하는 전술이다. 이에 중대기지 4km내외의 주요 지형지물과 접근로에 주야간 수색 정찰과 매복을 실시 적의 침투에 대비 경계를 강화하였다.
◉ 인접 월남군 중대와 친선 운동경기
예정대로 배구선수 12명, 탁구 선수 5명과 군가 응원선수 20명을 포함 장교 4명, 사병 40명이
인접부대 월남 959중대를 방문 친선경기를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월남군은 우리를 우방국으로
반갑게 환영해주었다. 날씨는 쾌청하지만 바람 한 점 없어 몹시 무더웠다. 월남인들은 이런
더위에도 땀을 흘리지 않고 컨디션이 좋아 잘 뛰었다. 운동결과는 배구는 지고, 탁구는 5전 3승
으로 가까스로 이겼다. 점심은 그들이 차린 월남요리였는데 한국식으로 생채소와 긴 털게 등
신경을 써서 만들었지만 간이 맞지 않고, 그들의 토속 조미로 썩힌 막장(늑막) 냄새가 나의 비위에 맞지 않아 욕구가 나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정다운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진 월남 중대장은 아리랑을 부르며 우방군의 결맹을 과시하였다.
◉ 월남의 열대성 기후
월남의 열대성 기후는 두 계절로 구분된다.
먼저 乾期(건기)는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로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열은 몹시 강하게 내려 쪼여
한낮에 사람들은 거의 행동하지 않고 집안이나 나무 그늘에 그물침대를 걸어 놓고 시아스타 타임
이라고 낮잠을 즐긴다. 심지어 교량 등 주요시설 경계병까지 그물침대에서 누워 잠자는 장면도
보았다. 간혹 소나기가 내리기는 하지만 가뭄이 계속되어 식물도 생장을 멈추는 듯 시들고,
정오엔 30~40도까지 오른다.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농작물도 재배하지 않고 들에는 황무지 같이 내버려 두는 땅도 많았다. 개울 및 연못 주위, 정글 늪지대에서는 바나나, 야자수, 선인장 열매 등 푸짐한 과일이 생산되고 그래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건조한 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또 한
계절은 雨期(우기)인데 11월~2월까지 약 4~5개월로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가 자주 나며 아침, 저녁에는 쌀쌀하고 정글지대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농사는 일부 건기를 포함 2모작 내지 3모작까지 벼농사를 재배 의식주에는 걱정 없이 살기 편한 나라였지만 100여 년간 강대국의 외침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으며 후진국으로 살고 있었다.
◉ 월남 복지 모범중대 선정과 소령진급(70. 9. 15)
주월사령부에서는 매년 중대단위 교육, 사격, 행정, 보급, 내무생활 등을 점검하여 복지 우수중대를 선발하는데 우리 중대는 여러 가지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다.
우선 기지가 판랑항를 바라보는 황량한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150고지 정상에 경계시야가
매우 좋고. 배구, 족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과 식당2층은 공연관람과 장기 및 바둑 등 중대원들이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강당도 있어. 작전이 없는 날이면 소대 대항 배구, 족구 등의 운동경기와
장기, 바둑대회를 열고, C-레이션 등의 상품을 시상한 실적을 업무일지에 잘 기록되어 있어 검열관의 칭찬이 대단했고, 기지 바로 아래 개활지의 양호한 사격장이 있어 사격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단에서 우승을 했으며, 기타 보급행정 등을 우수하게 평가받아 백마 복지모범중대로
선정되어 타 중대에서 연일 견학을 하러 왔었다. 나는 대위 4년차로서 첫 진급 대상자이었지만
꿈도 꾸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우선 대대본부 참모 및 인접중대장 등 5명이 모두 나의 선배로 우선권이 있고 말단 중대에서 어디에 전화 한통 못한 처지라 바라지도 않고 있는데 진급 발표가 난지 3일후에 같이 진급된 연대 전투지원 중대장 선배가 나에게 소령진급 축하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다. 아마 보병학교의 교관 및 중대장 제2사관학교 군수과장의 경력과, 월남 복지 모범중대
선정의 덕분이라 생각되었다.
중대 기지로 위문공연을 온 가수 남진과 중대장 필자
◉ 중대장 민사군정의 결실 (70. 11 .20.)
우리 중대는 판랑 미공군 비행장 외곽경계 임무도 맡고 있어 사방 8Km의 넓은 메마른 야지에
초원과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65년도 파월시 해병 청룡부대가 진지를 개척하면서 교전이
심하여 주위목장의 가축 방목을 금지시켰는데 내가 부임하니 촌장들이 찾아와 생계가 어렵다며
민간출입통제 해제를 건의를 해왔다. 이에 대한 분, 소대장들의 의견을 종합 검토한 결과
중대기지 150m고지 관망대에서 전 지역 관측이 양호하고, 81m박격포, 106m 무반동총의
중화기 조준사격과 관제통제가 가능함을 확인하고 대대장에게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승인을
받아 방목 출입증을 내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양 5 마리를 몰고 와서 중대에 기증을 하는 것이었다. 인사계 말인즉 팔아
쓰던지 잡아먹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중대원들은 양고기를 먹을 수도 없고 팔수도 없는
형편으로 관상용으로 키우는데 도망쳐 목장으로 가면 또 끌고 오곤 했는데 결국은 돌려주었다.
중대기지 진입로 2Km 큰길가의 목장은 소 200여 마리, 양 500여 마리를 키우는데 출입 해제로
많은 도움을 받은 탓인지 주일마다 과일 생선 등을 가져왔다 이에 중대원들이 C-레이선의
비스켓등을 모아 주기도하고, 취사장 잔반을 가져가도록 배려했더니, 귀국 장병들을 판랑으로
실고가 쇼핑을 도와주는 등 56세의 월남할아버지는 우리 중대원들의 참다운 도우미였었다.
내가 중대장 임무를 마치고 귀국을 한다니까 판랑 시내의 자기 집으로 식사 초청을 하기에
화기소대장과 들렸더니, 식사 후에 사진을 펼쳐 보여 주었는데 목장의 소와 양들이 총포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처참한 사진들이었다. 그러면서 다이한 해병대가 쏘아 죽인
사진이라며 언젠가는 국제제소를 하려고 간직하고 있었는데 다이쯩 구(중대장)가 너무
잘해주어서 마음을 풀었다며 사진뭉치를 나에게 넘겨주고, 뜻밖에도 한길이 넘는 최고급
호피(虎皮) 한 마리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 결언
월남전에서 정글을 누비며 베트콩과 실전을 벌이는 부대는 보병 전투중대뿐이다.
보병중대는 적의 접근로 요새의 독립기지에서 작전지휘관인 중대장의 임무는 막중하다.
장교7명(FO포함)과 중대원 180여 명, 매 20일마다 18명의 중대원이 전입 및 귀국하고,
1년 동안 수많은 분,소대, 중대의 자체작전과 대대, 연대, 사단작전에 참가 수색정찰 및 매복, 소
탕작전을 펼치고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어도 그 보다 더 중요한 우방국을 돕는 지원전쟁에서
최소의 전투손실로 중대장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소령진급의 명예를 안고 귀국하게 된 것은
소대장 및 분대장이하 전 병사들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회생정신의 발휘로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 주요경력
1962년 8월 갑종장교로 임관, 1969년 12월 제9사단 30연대 11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으며, 육군대학 73정규반 졸업 후 대대장 및 사단참모, 육본 작전참모부
부대계획장교로 복무 후 1983년 8월 31일 중령으로 예편, 1983년 9월 군무 부이사관으로
특채되어 합참본부에서 이사관으로 정년퇴직했으며, 대통령 표창장 및
삼일보국훈장을 수여받음,
저서로 道松 具在雲 文集
「구주령(九珠嶺)을 넘으며(희망사.311페이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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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송님 송죽이 밑에 답글을넣었고 삼초님도 넣었다라구요
그런데 어데로 도망갔어요 이상하게 없어졌어요
혹시 도송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