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상변(常變)
高子問於孟子曰
夫嫁娶者非己所自親也 衛女何鎰編於詩也 孟子曰 有衛女之志則可 無衛女之志則怠 若伊尹於太甲有伊尹之志則可 無伊尹之志則篡 夫道二 常之謂經 變之謂權 懷其常道而挾其變權 乃得爲賢 夫衛女行中孝 慮中聖 權如之何 詩曰 旣不我嘉 不能旋反 視我不臧 我思不遠
飜譯
고자가 맹자에게 물었다.
“무릇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나라 의공의 딸은 어찌하여 시경에 시가 올라와 있습니까?”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위나라 의공의 딸이 자신의 의견을 편 것은 옳은 일이다. 그 딸이 자신의
의견을 펴지 않았다면 그것은 게으른 것이다. 이는 이윤이 태갑을 모셨을 때, 이윤이 자신의 뜻을 편 것은 옳은 일이고, 자신의 의견을 펴지 않았다면
그 자리를 찬탈하는 것과 같다.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을 경(經)이라
하고,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상도(常道)를 간직하면서 그 변통(變通)도
잘 해야 현명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나라 의공의 딸은 그 행동이 효에 맞고, 그 염려가 사리에 맞으니 변통을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詩經에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나를 기꺼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네 그대의 야윈 모습 보자니 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네’
紬繹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항상 변하지 않는 것(常)을 경(經)이라 하고,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것(變)을 권(權)이라 한다. 항상 변하지 않는 것(常)은
절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것(變)은 상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해와 달과 같이 절대적인 것은
그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성이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데 상황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것(變)은 사람마다 그 기준과 방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라 정의를
내릴 수가 없다.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그 기준이 서로 부딪쳤을 때 모순과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는 고통과 번뇌이다. 그리고
孔子와 孟子 같은 이들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순과 갈등을 줄이고, 그러한
모순과 갈등으로 인한 고통과 번뇌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예(禮)와
의(義)를 정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禮와 義를 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2000년전에 만든 禮와 義가
지금 시대에 맞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변통할 수 있는 것(變) 자체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 바로 예수, 釋迦 및 老子가 말하는 바이다.
사람들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만의 기준을 만든다. 그것을 관념, 관습
또는 가치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 지고 지켜지는 것을
법, 질서, 제도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관념, 관습, 가치관, 법, 질서 및 제도가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과 평화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간에 서로 다른 관념과 가치관에 의하여 갈등과 모순이 일어나고, 이 갈등과 모순으로 인하여 고통과 번뇌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예수, 釋迦 및 老子는 그러한 모든 관념과 가치관, 심지어는 나라는 자의식까지도
모두 버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수, 釋迦 및 老子의 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반문한다. “세상에 내가 없으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요?” 또는 “나를 어떻게 버려요?” 이는
자신의 관념, 가치관 심지어는 자의식까지도 버렸을 때의 자신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치관과 자아의식이 없는 예수가 가치관이 뚜렷하고 자아의식이 강한 기독교 목사와 만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먼저 목사는 자신의 인생철학과 종교철학으로 예수를 설득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가치관과 자아의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하여 옳고 그른 판단 자체가 없다. 그리고 예수는 그 목사가 왜 그렇게 사나운
기세로 설명하고 있는 지도 알고 있고,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 것도 또한 알고 있다. 그 목사가 지칠 때까지 설명하도록 내버려 둔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예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목사는 더 이상의 설명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목사는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예수에게 설득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예수는 목사를 설득하려고 하는 마음도 없다. 그리고 예수는 목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밖에는 없소이다. 당신을 무엇을 어떻게 믿던 당신 자신이 평온하고
행복하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삶의 답이요. 그러나 당신은 지금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는 한번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는 인간 마음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과 자아의식이 없다면
세상 그 누구와도 갈등과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듣고 볼 뿐이다. 자신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왜 그런 말을 하고 행동을 보이는 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관념)과
생각을 자신이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상대방을 그저 지켜 보면서 필요에 따라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한 마디를
건넬 것이다. 그때 한 마디는 곧 지혜의 말이다. 진리 및
지혜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관과 자아의식이 없는 상태를 열반의 경지 즉 깨달음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런 경지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바로 진리이며 지혜일 뿐이다. 예수나
釋迦가 살아서 하는 말은 곧 진리이고 지혜이지만, 죽어서 남겨진 말들은 결코 진리나 지혜가 될 수 없다. 이 이야기에 비쳐 보면, 예수와 석가는 상(常)만이 있고, 변(變)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詩經의 국풍 용풍(國風 鄘風)에 있는 재치(載馳)라는 시는 30절에서 감상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