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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체공능(整體功能)의 미학
- 박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을 중심으로
이재복
(문학평론가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1. 서구적 기능 및 구조론의 한계
근대 이후 시와 관련한 논의는 대부분 서구의 이론 체계를 따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론의 경우 그 개념과 논리는 서구의 오랜 사유 체계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서구의 사유 체계의 특징은 바탕이나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초월의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적이고 영원한 실체(substance)를 중시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실체의 중시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혹은 살아 꿈틀대는 전체적인 유출의 과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실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가설과 실험을 통한 이론적이고 형식 논리적인 체계 정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험이 아닌 선험 차원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구체적이고 정교한 형식 논리로 정립해 온 서구의 사유 체계는 실체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상생을 중시해 온 우리의 사유 체계와는 여러 면에서 일정한 차이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차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근대 이후 우리의 문화 예술 양식을 이 사유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 해석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근대시를 서구의 자유시 양식으로 규정하고 이 논리에 입각해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우리 시의 양식과의 연속성이라든가 정체성과 관련하여 깊이 있는 논의의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근대시가 서구의 영향 하에 탄생하였고, 많은 부분 그것을 준거로 하여 성장 하고 또 발달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우리의 근대시를 서구의 시 양식이나 사유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의 온전한 이해와 해석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서구와의 관련성 못지않게 우리 시와 사유 체계 내에서의 내발성(內發性)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근대시를 서구의 인식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 해석해 온 데에는 지금, 여기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시론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근대 이후 우리 시의 이해와 해석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시론의 경우 대부분 서구의 시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 시의 내발성을 찾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시론은 주로 언어의 기능과 형식(구조)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서구 사유의 전통인 실체의 이론화와 실천의 연속이면서 확장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의 수사적 기능과 이미지의 감각적 기능, 그리고 기법과 스타일에 기반 한 형식,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구조 등은 서구 시론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시의 기능과 구조에 초점을 둔다는 것은 곧 세계를 하나의 전체적인 흐름의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어 혹은 이미지의 기능과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세계란 지극히 선험적이고 가설에 의한 형식 논리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시의 기능과 형식 혹은 구조를 강조하는 이러한 서구의 시론은 시에 대한 논의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기능과 구조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과 그 영역의 확장은 세계를 분리된 실체의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서 오는 불안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이 불안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이 제시한 것이 ‘총체성’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체 차원의 총체성이고 또 그것은 ‘인간의 수준에 따라 우주의 총체성을 정의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가령 루카치(Georg Lukacs)가 『소설의 이론』 서두에서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을 때, 그가 꿈꾸고 겨냥한 총체성은 인간과 우주와의 합일이 아닌 고대 그리스 시대, 다시 말하면 실체의 세계 내에서 이원론이 극복되고 인간과 우주가 합일된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서의 총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이 깨져버린 총체성의 복원을 위해 소설이 봉사해야 한다고 역설한 루카치의 외침은 이런 점에서 보면 그것은 서구의 사유 체계가 지니는 불안과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카치가 말하는 총체성과 그것이 지니는 한계를 넘어 후기 현대성과 후기 구조주의사상의 길을 연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카니발 이론’이나 ‘다성성 이론’ 역시 실체 내에서 행해진 총체성의 해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후기 구조주의 담론들을 근대 담론이 지니는 모순과 불안을 넘어서는 하나의 대안으로 인식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어떤 위안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실체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 대한 모색이나 탐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구의 실체적인 존재론과는 다른 인식 체계와 실천 방식을 담지하고 있는 서구 너머 혹은 서구 바깥의 역사에 대한 탐색에 대해서는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관심과 포즈 이상의 그 무엇을 드러낸 적이 없다. 서구 너머 혹은 서구 밖에는 세계를 실체 중심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혹은 살아 꿈틀대는 전체적인 유출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서구의 타자가 존재한다.
서구 중심적인 사고로는 드러나는 않는 이 서구의 타자로서 존재하는 세계는 실체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늘 어두컴컴하고 모호하며, 부분으로 분할되지도 또 분할할 수도 없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온전히 명명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령스러운 그런 세계이다. 이 세계를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인식 체계로는 온전히 해명할 수 없는 무한한 변화와 생성의 과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일컬어 ‘현(玄)’, ‘태허(太虛)’,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분리되어 있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전체적인 유출 과정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소멸하는 공능(功能)의 상태를 드러낸다. 하나의 세계를 이렇게 공능, 다시 말하면 ‘정체공능(整體功能)’의 차원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관념이 아니라 실질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세계란 우리가 숨 쉬고 지각하는 모든 세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지의 잠재적인 세계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정체공능이 ‘기(氣)의 우주(宇宙)’라면 그것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실체론에 입각해 규정할 때 그렇다. 인간의 몸은 소우주가 아니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분리하거나 분할할 수 없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하나의 전체적인 기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이런 점에서 인간의 몸은 우주의 기가 모였다고 흩어지는 그런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에는 기와 혈(血)이 흐르고, 그 기와 혈의 통로가 바로 ‘경락(經絡)’이다. 김봉한에 의하면 인간의 몸에는 ‘365종의 표층 경락과 360류의 심층 경락’이 있다. 이 심층과 표층 경락은 생명의 살아 있는 알 곧 ‘산알’을 통해서 현현된다. 인간의 몸이 산알을 품은 경락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 안은 물론 몸 밖의 것과 몸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 안의 심장, 비장, 폐, 신장, 간 등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각각의 장기는 몸 밖의 기후, 지역, 계절, 방위 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몸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몸과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주는 더 이상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전체적인 유출 과정 내에 있는 공능적인 존재이다. 우주가 그 자체로 하나의 몸이라면 그것을 실체로 대상화하여 하나하나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은 우주의 기의 흐름 혹은 경락의 존재를 부정하고 훼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의 몸이나 우주를 대상화 하여 분석하고 그 기능과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 그것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높이거나 확장시켜준다고 믿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기능과 구조의 방식으로 어떤 대상에 다가가는 행위는 그 명증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인지한 것으로 또 이해하거나 판단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인간의 몸의 장기를 분리하여 하나하나 실험하고 분석하여 전체적인 생명의 유출 과정으로서의 몸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몸의 장기의 분리를 통한 이해는 전체적인 생명의 유출 형태로 존재하는 몸을 통한 이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 몸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한 것을 두고 인간의 몸을 온전히 이해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실체를 통한 세계 이해의 논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실체에 기반 한 서구의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논리는 몸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의 존재마저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체에 기반을 둔 서구의 기능적이고 형식 논리적인 전통이 집적된 최근의 인공지능 같은 과학도 하나의 전체 생명 혹은 생명 전체로서의 공능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정체공능과는 층위 혹은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 이해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 안에 불안을 강하게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천지의 마음과 시의 발견
시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정의하기 위해 던지는 아주 오래된 이해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질문의 형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보다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나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강박과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시를 보다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도구’ 혹은 ‘도구적 의식’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시의 규정과 이해에 요구되는 이러한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도구로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은 언어이다. 시의 언어가 도구적 차원에서 이해된다는 것은 곧 그것이 기능과 형식 혹은 구조의 차원에서 인식되고 또 해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언어가 기능과 형식의 차원에서 작동함으로써 시가 은폐하고 있는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세계는 보다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세계로 수월하게 대체된다. 시에 대한 정의가 언어를 토대로 규정되거나 체계화 되어 있는 데에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구 시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와 신비평, 소쉬르적인 구조주의, 야콥슨의 기능론 등은 시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잘 말해준다. 물론 서구 시론에서도 시의 애매성과 모호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시어가 과학적 진술과는 다른 사이비 진술이며, 언어의 전달(정보) 기능보다는 정서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고, 언어의 평면성보다는 아이러니하고 패러독스한 이중성과 다의성을 중시하는 것 등은 모두 시의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의 시론과 시어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애매모호성을 말할 때조차도 그것을 투명한 형식과 논증 가능한 체계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서구의 단일하고 투명한 의식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무의식의 경우에도 분열된 자아와 왜곡 및 치환과 같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원리 등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 역시 꿈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형식화하여 제시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대한 형식화는 그의 이론을 계승한 라캉(Jacques Lacan)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 드러난다. 라캉은 프로이드의 무의식에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결합하여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새장을 연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논리는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캉의 논리는 그의 독창적인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기능이나 형식과 같은 투명하고 논증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는 서구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논리에서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언어’이다. 무의식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지고 그 구조에 의해 작동된다는 그의 논리는 무의식의 존재를 언어와 같은 증명 가능하고 투명한 실체를 통해 제시하려고 하는 서구의 잠재된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론이 널리 소개되면서 그것을 각각의 학문 분야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이론이 소개되면서 현대의 복잡하고 난해한 시를 해석하는데 프로이드의 이론으로는 투명성의 확보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들에게 라캉의 이론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라캉의 이론이 시 해석에 활발하게 적용되면서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현대의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가 언어에 의한 도식과 기호로 명료하게 표상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시의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한 세계가 이렇게 언어를 통해 투명하고 해석 가능한 세계로 인식되는 경우는 우리의 경험 내에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 뿐만 아니라 꽃이나 나무, 심지어는 인간의 몸이나 우주 같은 존재에 대해서도 분석, 실험, 가설의 과정을 거쳐 명료한 해석을 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 왔다. 꽃의 암술과 수술의 개수와 위치, 물관과 체관의 배열, 미토콘드리아의 구조라든가 인간의 몸 유전자의 염기 서열, 우주의 시간과 공간적 실체에 대한 탐색 등은 모두 시에서 언어와 같은 어떤 실체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꽃의 구조를 투명하게 밝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꽃잎을 따거나 줄기를 잘라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몸의 유전자 구조를 밝히기 위해 전자 현미경과 컴퓨터를 이용한다. 우리에게 이 도구들이 없다면 그 각각의 구조를 투명하게 밝혀내기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의 존재를 투명하게 밝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구 없이 어떤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을 진정한 세계 인식의 주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도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 인간은 ‘도구적 이성’에 다름 아니다. 꽃과 몸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현미경과 컴퓨터라는 도구를 이용하듯이 시 혹은 시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도구의 있고 없음에 따라 구조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러한 도구를 통해 어떤 대상이나 세계의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 그것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일까?’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꽃의 구조 혹은 몸의 구조를 어떤 도구를 통해 투명하게 밝혀냈다고 해서 그 꽃과 몸의 존재를 온전히 밝혀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경험한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인체의 신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회의 컨셉은 인간의 몸을 해부하여 표본화 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몸 내에 플라스틱을 특수 처리해 주입하는 방식으로 생전의 인체 특징을 유지하는 ‘인체의 프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건조하고 앙상한 형해가 직접적으로 노출된 인체 구조물에서는 어떤 신비함도 또 숭고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의 신비함과 숭고함은 이렇게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서 발생하기보다는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 불쑥 의식의 지평으로 솟구쳐오를 때 발생한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의 흐름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우주적인 기가 몸 안에 모였다가 밖으로 흩어지는, 끊임없는 흐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생명체이다.
이러한 인간의 몸이야말로 정체공능(整體功能), 다시 말하면 결코 분리되지도 또 분리할 수도 없는 생명 본연의 힘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몸이 정체공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해부하여 분리한 다음 그것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그 형식과 구조를 드러내는 일은 살아 있는 전체로서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으로부터 분리된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숨 혹은 기를 통해 느끼는 몸은 정체공능의 전체로서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인체의 신비전에서 본 프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화 된 몸은 정신의 이데아가 만들어낸 가상의 관념적인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체공능의 몸은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프라스티네이션화 된 몸은 도구를 필요로 한다. 정체공능으로서의 몸이 말해주듯이 시 역시 정체공능으로서의 몸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 편의 시가 공체공능으로서의 몸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구 혹은 도구화된 언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 말은 언어에 대한 배제라기보다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정체공능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언어 자체의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공능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전체 세계 혹은 세계의 전체적 유출의 공능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정체공능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체적 유출로서의 세계에 대한 주체의 의식이다. 이 의식은 언어 자체의 이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정체공능의 흐름 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체의 의식이 이런 흐름에 대한 자각 내에 있고 언어가 그것을 매개로 세계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좋은 시가 될 것이다. 시에 대한 규정이나 평가 준거는 다양하지만 만일 정체공능이라는 것이 시 평가의 준거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이런 문맥 하에서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시에 대한 가치 평가나 의미 부여와 관련하여 공체공능으로서의 시의 문제를 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몸으로 감지된 것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다른 개념(실체)화된 틀로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체공능의 좋은 본보기가 몸이라면 몸의 지각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인지되고 이해되는 차원과는 다른 기(氣)로 지각되는 우주 전체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 영역을 포괄하게 될 것이다. 가령 ‘시를 천지의 마음’이라고 정의하는 경우 그것을 단순히 시적 주체의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을 ‘우주 속에서 사물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때문에 개체 사물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우주적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3. 목월의 「나그네」, 「윤사월」과 정체공능의 미학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보다 근원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근대 이후 자연은 급속도로 인간의 투명하고 실체적인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도구화된 산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이 도구화된 산물 내에서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또 판단해 왔다. 그 결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한 것을 ‘자연’이라고 규정해버렸다. 어떤 도구를 통해 투명하고 명확하게 규정해버린 자연은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인지하는 자연과는 다른, 이것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된 자연을 말한다. 인간이 몸으로 느끼고 인지하는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자연의 흐름에 순순히 따르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과 분리되어 실체화된 자연 내에 있으면 여기에서 오는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보다 정교하고 완벽한 가설이나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자연이 수치화된 공식으로 제시되거나 기하학적인 형식이나 구조로 제시되는 경우 과연 그것을 자연의 은폐된 세계를 온전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것은 애매모호함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자연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순의 간극만큼 불안도 생겨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불안의 증가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어떤 획기적인 대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획기적인 대안이란 자연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을 말한다. 근대 이후 가속화된 불안의 원인이 자연과의 분리에 기반을 둔 인간의 인식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의 분리가 아니라 전체적인 유출 혹은 흐름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자연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이 중요한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는 실체 이면에 눈으로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지만 끊임없이 힘의 형태로 작용하는 그런 자연을 망각한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망각의 역사는 자연을 도구화된 언어의 틀 내에 기능하게 하면서 그것을 단순한 형식 논리의 산물로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근대 이후 우리 시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이 들어와 급속하게 근대화 내지 서구화된 시기는 물론 경제 개발과 산업화가 진행된 1960·70년대와 그것이 가져온 부작용과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던 1980년대 이후에도 자연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 이후에도 우리가 망각한 자연 곧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 시사에서 ‘청록파’ 혹은 ‘자연파’ 시인으로 명명되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경우 이들의 시와 관련하여 말해지는 자연은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일까? 만일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자각 없이 그것을 말한다면 이들의 시가 은폐하고 있는 혹은 본래 지니고 있는 정체공능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시에는 정체공능적인 것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들의 시를 둘러싸고 행해진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 한국적 자연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목월의 경우에도 그 자연을 정체공능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해석한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에서의 자연이란 ‘향토적’, ‘공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는 상징적인 實在’,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自足的 세계’, ‘감각적 단순성 혹은 그것을 벗어난 일상생활의 체험영역’ 등으로 인식되고 또 해석된 것이다. 목월의 자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정체공능을 토대로 한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은 향토적인 지엽성으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공간을 초월하거나 자족적으로 혹은 일상의 차원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결코 분리, 부분, 대상, 가설, 실험, 소외, 배제, 실체 등과 같은 명료한 존재 인식의 차원으로 해명할 수 없는 ‘도의 숭고함과 무궁함, 도구의 경시(말이나 언어보다는 사물 그 자체), 정신의 중시(마음과 정신의 깨달음)’ 등과 같은 차원을 내포하고 있는 모호함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목월의 시 중에 이러한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그네」와 「윤사월」일 것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의 「나그네」 전문
이 시에 대한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직관이다. 그것은 직관이 어떤 세계를 분석적·기능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체적·공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시의 초점은 ‘간다’에 있다. 이때 여기에서의 ‘간다’는 언어 구조상의 기능을 넘어선다. 언어 구조상 ‘간다’는 분절의 중심 단위이다. 이 ‘간다’를 중심으로 분절하면 이 시는 크게 천상을 시공성으로 하는 경우와 지상을 시공성으로 하는 경우로 구조화된다. ‘간다’의 시간성이 ‘구름, 달, 노을’ 등 천상의 공간성과 결합하는 하나의 구조와 ‘간다’의 시간성이 ‘강나루’, ‘밀밭 길’, ‘남도 삼백리’, ‘마을’ 등 지상의 공간성과 결합하는 또 다른 하나의 구조가 서로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천상과 지상이 대립이 아니라 천상이 지상을 감싸는 그런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의미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가 천상이 지상을 감싸는 의미구조로 되어 있다면 ‘나그네의 걷기’는 그 구조 내에서 분석되고 해석되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어떤 구조 내에서 혹은 구조적으로 해석된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많은 논의를 진행해 온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제시된 현상학적이고 해체주의적인 것 역시 인간의 의식의 틀과 선험의 방식이 드러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도구성으로부터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조든 아니면 탈구조든 ‘물질’이나 ‘실체’를 통해 그것을 드러내려 한 서구의 오랜 존재론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이나 실체를 기반으로 한 서구의 존재론에서 그 존재의 온전성은 이 안에서 규정되고 이해되고 또 평가되어온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 시를 천상이 지상을 감싸는 의미구조로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그네의 행위가 구조적인 인식 내에서 행해진 분석이나 해석으로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관점이나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야 하는 것일까?
어떤 사물이나 세계를 구조화한다는 것은 분리와 증명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나 세계로부터 분리되면 그것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실체가 만들어지게 된다. 본래의 사물이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실체의 탄생은 그 온전한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실체 내에서 개념, 가설, 실험, 형식, 구조 등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존재론적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실체 내에서의 형식이나 구조의 확장과 심화는 결국 실체의 존재성을 보다 더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여기에서의 목적성은 합리적인 절차와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합목적성’을 말한다. 이 합목적성이 서구의 존재론적 사유에 일정한 토대로 작용하면서 인간과 세계 더 나아가 우주 일반의 원리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이것 바깥에서의 존재론적 사유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억압하고 추방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실체 중심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자연 역시 합목적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이 합목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산물일 뿐 자연 그 자체가 그러한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총체 기능으로써의 합목적성보다는 정체공능적인 무목적의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막연하다거나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인간의 ‘몸’을 예로 들어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이야말로 정체공능적이다. 그것은 이미 ‘整體功能’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의 몸을 정체공능적이라고 본 것일까? 인간의 몸은 어떤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리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기(氣)와 혈(血), 그리고 그것의 통로인 경락(經絡) 등은 몸의 존재성이 무한히 연속적인 흐름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이 연속적인 흐름은 그것이 몸 안에서의 흐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의 몸은 기의 흐름으로 충만해 있지만 그 기는 몸을 넘어 우주 혹은 자연과의 끊임없는 흐름의 과정 내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주의 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기철학자인 장횡거와 왕부지가 인간의 몸을 그렇게 규정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몸과 우주는 하나의 기의 흐름 속에 있고 그 흐름은 일종의 변화이다. 그 변화는 동적인 양(陽)과 정적인 음(陰) 그리고 동과 정 이전의 천지인 삼태극(三太極)을 모두 포괄하는 상태를 말한다. 태극(太極)에서 음양(陰陽)이, 음양에서 사상(四象)이, 사상에서 팔괘(八卦)가, 팔괘에서 육십사괘(六十四卦)로 이어지는 발생론적인 흐름은 이 우주 혹은 자연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흔히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잘못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소우주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우주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의 흐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규정하는 것은 실체를 중시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몸을 대하는 서구 의학과 한의학이나 중의학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서구 의학의 토대는 해부학에 있지만 한의학이나 중의학은 경락(經絡)과 음양에 있다. 해부학이란 기본적으로 몸의 해부를 통해 그것의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런 점에서 해부학은 분리의 방식과 구조화를 필요로 한다. 어떤 증상이 있으면 몸의 해부를 통해 그것을 가시화하고 체계화하여 좀 더 명료하게 그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매스, 현미경 등과 같은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명료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의학과 중의학은 몸을 분리하거나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것을 전체 유출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몸의 전체적인 유출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기혈의 통로인 경락의 흐름을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기혈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침이나 뜸을 써서 맺혀 있던 부분을 풀어준다. 이 흐름의 원활함이란 곧 기의 두터움, 우주의 기가 몸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의 생생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물을 때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기의 흐름으로 몸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을 분리하거나 구조화하지 않고 우주의 전체성 내에서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의학이나 중의학에서 몸을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음양에 의한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에 대한 한국과 중국에서의 인식은 자연이나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 적어도 우리 문화와 예술에서 자연이나 우주를 말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의 준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목월의 시에서의 자연 혹은 자연에 기반 한 시를 해석할 때 이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은 남다른 존재성과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목월의 시 「나그네」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직관으로서의 세계는 이 정체공능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이 시에서 직관적으로 초월적 평온함을 느끼는 것일까? 또 왜 우리는 이 시에서 직관적으로 세계와의 평정 상태에서 체험하는 조화와 균형의 감정을 강하게 느끼는 것일까? 이 물음은 시의 초점이 나그네의 가는 행위에 맞추어져 있고, 그 가는 행위 자체가 천상과 지상의 어우러짐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나그네의 가는 것, 구름에 달이 가는 것, 저녁 놀이 타는 것, 강나루를 건너고 밀밭 길과 남도 삼백리 길을 가는 것 등이 하나의 흐름 내에 있다는 사실은 곧 천지인 삼태극의 공능에 의해 우주가 변화하고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구름에 달이 가는 것’과 ‘나그네가 가는 것’을 단순히 수사적으로만 연결한 것이 아니다. 언어에 의한 수사 이전에 이 둘은 이미 삼태극 혹은 정체공능의 차원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차원의 수사에 집착하다 보면 그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세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수사의 차원에서 이 시를 천상이 지상을 감싸는 구조로 분석하는 경우 삼태극 혹은 정체공능으로서의 우주는 드러나지 않는다. 천지인의 삼태극이나 정체공능으로서의 우주에서는 무엇이 무엇을 구조화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우주는 정체공능적이고 삼태극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또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의 바탕 위에서 그 변화의 상(相)과 용(用)이 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변하지 않는 체(體) 위에서 음양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세계를 직관을 통해서 느끼기 때문에 이 시에서 우리는 조화와 균형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음양의 차원에서 보면 천상은 건(乾), 진(震), 손(巽)이 되고 지상은 곤(坤), 태(兌), 간(艮)이 되며, 강은 감(坎)이 되고 저녁 놀은 이(離)가 된다. 음양이 서로 갈마들면서 변화하는 세계 내에서의 조화와 균형은 소외라든가 배제 그리고 극단적 허무 등과 같은 차원과는 궤를 달리 한다. 시 속의 나그네를 이런 차원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나그네와 이 시의 의미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 된다. 나그네의 의미를 언어나 수사 구조의 차원에 가둔다거나 아니면 시대나 현실의 구조 차원에 가둔다면 그것의 정체공능으로서의 우주적인 의미 지평을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목월의 ‘나그네’에서, 봄이면 저 멀리 강남에서 높디높은 허공을 날아 이 땅에 왔다가 가을에 다시 또 그 하늘을 날아 돌아가는 제비의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모두 정체공능적이기 때문이니라. 장구한 시간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단순한 연대기 차원이 아닌 하늘 혹은 허공의 차원에서 제시한 데에는 존재를 이루는 시간과 공간의 한국적(동아시아적)인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월의 나그네의 의미 지평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곧 이 시(「나그네」)에 은폐된 신비하고 신령스러운 정체공능적인 기운을 불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과 우주는 무형(無形)의 도(道)인 ‘태허(太虛)’가 잘 말해주듯이 그것은 너무 크고 깊으며 늘 변화와 움직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명료하게 그 실체를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세계이다. 이로 인해 그것을 어떤 도구를 이용해 규정하고 개념화하는 것은 그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세계를 제거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도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경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 우주와 자연을 드러내는 것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연과 우주의 미묘함과 신령스러움이 도의 차원에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 역시 도의 차원에 있어야 한다. 도의 모호함이 아닌 그것과 다른 차원의 명료함을 목적으로 하는 로고스(이성)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투명함은 도의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드러낼 수 없다. 이성의 강화는 도의 미묘함과 신령스러움을 박제화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가령 인체 해부도라든가 인체 표본 전시 같은 몸의 내부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경우, 몸의 미묘함이나 신비함보다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기로 충만한 몸의 생생함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의 해부를 통한 총체적이고 기능적인 투명함이 아니라 기와 혈 같은 전체로써의 흐름으로 그것을 대할 때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생생한 관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한의학에서 몸을 해부하지 않고 진맥의 과정을 통해 그것의 상태를 파악하는 경우 이것은 곧 그 몸 전체로써의 기의 흐름과 그 이면에 은폐된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세계를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또 투명하게 드러나지도 않은 채 어둡고 모호한 허공의 차원으로 존재하는 몸은 그 자체 자연과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몸과 자연, 몸과 우주는 하나의 기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몸을 느끼고 인지하기 위해 기와 혈의 흐름을 살피듯이 자연과 우주를 느끼고 인지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과 우주를 느끼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기’에 있다. 인간의 몸이 우주의 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라면 우주와 자연을 느끼고 인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통할 수밖에 없다. 몸이 아닌 이성적 관념의 차원에서 인지되는 자연과 우주는 허공의 부피감이 부재한 박제된 실체에 지나지 않는다. 몸으로 지각하는 자연과 우주의 경우 여기에는 허공의 부피감에서 오는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재해 있다. 목월의 시 「윤사월」은 그런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세계의 한 정수를 보여준다.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의 「윤사월」 전문
자연 혹은 우주가 기의 흐름으로 충만하고, 그 흐름이 음양의 조화를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흐름과 변화의 모습이 바로 계절이고 절기(節氣)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입춘, 우수를 시작으로 입하, 하지, 입추, 상강을 거쳐 동지, 대한에 이르는 24절기의 구분은 우리가 얼마나 여기에 기반 하여 살아왔는지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 흐름 내에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 자연에 대한 의식 자체가 둔감해지게 된다. 이런 둔감한 의식으로는 자연의 미묘함을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기가 어렵다. 자연의 미묘함은 그것을 이루는 허공의 미묘함을 잘 감지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허공은 절대적으로 크고 형태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적막감’을 자아낸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 느끼는 적막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공 혹은 자연은 기의 흐름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내는 적막감은 정지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떨림’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고 적막하지만 그것이 떨림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먼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나 그것을 타고 날리는 ‘송화 가루’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산 속 외딴 봉우리’에 날리는 ‘송화 가루’란 적막한 우주의 떨림에 대한 현시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의 떨림에 대한 현시는 시에서 ‘꾀꼬리의 울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산 속 외딴 봉우리를 감싸고도는 꾀꼬리의 울음은 단순한 산 속 메아리를 넘어 우주의 허공을 가로지르는 기의 흐름 혹은 떨림에 대한 현시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윤사월 해 길다’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울음은 장구한 시간성이 깃든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적막한 우주의 떨림이 ‘산’과 ‘새’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떨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산과 새는 우주와의 소통을 상징한다.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우주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그쪽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매개물이 필요한데 산과 새는 그것의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산에 단(壇)을 쌓고 그곳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한다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새가 한다고 본 것은 모두 이 존재들의 우주 혹은 천상과의 소통을 전제한 것이다.
시 속의 외딴 봉우리와 꾀꼬리의 존재는 이런 점에서 숭고하고 신성하다. 우주적인 기로 충만한 자연의 적막감을 외딴 봉우리와 꾀꼬리의 존재로 드러내면서 그 세계가 지니고 있는 숭고함과 신성함에 다가가려는 시인의 의지는 ‘눈 먼 처녀’를 통해 완성된다. 시인이 설정한 ‘산지기 외딴 집’의 눈 먼 처녀는 적막한 우주의 떨림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지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눈이 먼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는 적막한 우주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지각하는데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 적막한 우주의 떨림을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는다. 문설주가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해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 역시 우주와의 소통을 표상하는 ‘우주목(宇宙木)’이면서 천상의 신성함을 지닌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문설주에 귀를 대고 엿듣는 그녀의 행위는 온몸으로 문설주를 통해 전해지는 우주의 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몸으로 적막한 우주의 떨림을 느끼고 지각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박제된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무궁한 변화와 생생한 움직임의 차원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적막한 우주의 기를 느끼는 눈 먼 처녀의 시간과 공간 자체가 ‘자연’이다. 자연이란 본래 몸으로 느끼는 전체 유출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自然’이라고 할 때 그 ‘自’는 ‘鼻’와 같은 것이고, ‘然’은 생명을 불사른다(火)는 의미이다. 자연은 대상화하거나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전체 유출 과정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몸과 그 몸이 미묘하고 신비한 기의 흐름을 느끼고 지각하는 과정에서 자연은 그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목월의 「윤사월」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짧고 정제된 형식 속에 우주의 적막함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흐름을 외딴 봉우리, 꾀꼬리 울음, 문설주, 눈 먼 처녀, 윤사월, 몸 등의 질료를 통해 절묘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자연(우주)이 은폐하고 있는 정체공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시의 눈 먼 처녀는 어두컴컴하고 모호한 태허(太虛)의 무와 허공의 차원을 몸으로 느끼고 지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자연에 동화되어 있다. 눈 먼 처녀의 이러한 태도는 이 시를 휩싸고 도는 적막감에 깊이를 더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지 가능한 차원을 넘어 미묘하고 아득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의 영토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초월적 상상력과 시의 지평
박목월의 시에 대한 해석에서 자연의 의미는 각별한 데가 있다. 목월에게 자연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의 시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은 우리 시사에서 목월을 ‘청록파’ 혹은 ‘자연파’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 규정은 하나의 권위로 작용하면서 자연의 의미를 이 범주 안에 묶어두게 된다. 이 범주 내에서 자연은 ‘시인의 개인적인 이상과 상상이 만들어낸,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전통적인 자연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목월의 자연이 개인적인 이상의 산물이라는 해석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자연 넘어 허공으로서의 자연, 다시 말하면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을 인식하지 못한 차원에서 내려진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 혹은 우주의 기본 구조는 전혀 변한 적이 없다.’
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이 드러내는 자연은 이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자연은 개인의 이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순한 표층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도 아닌 우주 전체와 그것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모호하고 심오한 존재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에 잘 드러난 정체공능으로 인해 그의 시의 자연은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이상과 초월은 우주 전체 혹은 전체로서의 우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실체 차원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우주나 자연을 망각한 채 여기에서 분리된 실체 차원의 세계만을 진실 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다.
정체공능의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실체 차원의 세계는 일종의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체공능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그것이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도구가 목적이 되고 표층이 전체로 인지되는 세계에서는 ‘우주의 본심’에 도달할 수 없다. 이 도구적이고 표층적인 세계를 초월할 때 비로소 우주의 본심 다시 말하면 정체공능으로서의 우주(자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차원에서 목월의 자연을 이상적이고 초월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논의에서 말하는 이상이나 초월과는 다른 것이다. 기존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의 존재 자체를 망각한 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목월의 시와 자연에 대해 ‘허구적인 상상속의 자연’이나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꿈이나 체험’의 차원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있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목월의 자연과 시의 이상주의적인 성격을 이런 차원에서 해석해버리면 이때의 이상과 초월은 도구나 표층을 넘어 정체공능의 자연이나 우주로의 초월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망각은 그것을 허구적인 상상속의 자연이나 영원히 실현되지 않는 꿈이나 체념으로서의 자연으로 규정해버리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구의 실체론에 입각해 자연이나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해온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식의 규정을 손쉽게 내릴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이사의 사상, 철학, 문화, 예술 등에 일정한 토대로 작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단절과 망각 위에서 자연이나 우주를 해석해 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역사가 왜곡과 오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이나 우주에 대한 망각은 우리의 몸에 대한 망각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 몸을 느끼고 지각하듯이 자연이나 우주 역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나 우주가 너무 크고 깊어 인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그것을 망각하게 된다.
이 망각은 자연을 중요한 존재 기반으로 하는 시의 경우와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자연이 신으로 인식되어 온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 전체의 공능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후 우리 시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겪게 되는 인간의 실존적인 불안을 형상화해 왔지만 그 불안이란 기실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망각에 다름 아니다. 이 사실은 자연 자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서 그것이 망각된 상태로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것을 망각한 것일 뿐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존재해 왔다면 그것과 관련하여 시가 은폐하고 있는 자연을 발견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망각한 정체공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발견은 곧 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될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서의 시는 자연에 은폐된 도의 현현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이 도구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삶 그리고 제도에 기본적인 공능으로 작용하면서 그것이 은폐하고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세계를 하나의 양식을 통해 구현한 것이 바로 시인 것이다. 시가 단순한 개인의 감정 표현을 넘어 그것이 자연과 우주의 반영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감정 역시 이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정성의 지극함이 우주를 바꾼다거나 시가 곧 천지의 마음이라는 진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천지인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것이 정체공능의 세계 내에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인간의 성품, 감정 그리고 사상까지도 모두 천지 혹은 우주(자연)의 법을 본받고 또 승순(承順)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만들어진다는 것은 정체공능을 통한 새로운 시적 지평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四端)이든 아니면 그것이 사물에 접하여 표출되는 감정(七情)이든 이 모두의 근간을 천지 혹은 우주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동북아시아 시의 이해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월의 시에 드러난 정서와 자연의 세계는 이러한 범주 내에서 해석할 충분한 여지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망각한 것이든 아니면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든 다시 그것을 우리 시의 장으로 불러내 깊이 있게 드려다 볼 필요가 있다. 시의 지평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 자연, 우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그것을 상상과 표현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시에 열린 지평을 제공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지용이 목월을 『문장』에 추천하면서 그의 시를 ‘조선의 시’라고 평 했을 때, 그 조선의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근본부터 다시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재복
1966 충북 제천 출생, 1996년 『소설과 사상』으로 평론 등단,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몸과 그늘의 미학』 등, 고석규비평상,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애지문학상 수상. 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