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修道者의 꿈
목우자가 살았던 十二세기 후반과 十三세기는 세계 역사상 주목할 만한 시대였다.
중국 宋나라에서는 朱熹(1130-1200), 陸九淵(號는 象山: 1139-1192) 등의 儒學者들이 나와서 孔子와 孟子의 가르침을 새롭게 하여 소위 宋學을 大成하였고, 일본에서는 曹洞宗의 도겐(道元: 1200-1253), 臨濟宗의 에이사이(榮西: 1141-1215), 淨土眞宗의 신란(親鸞: 1173-1262)등 일본불교 각 종파의 宗祖들이 쏟아져 나와 일본 역사상 다시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聖者의 시대를 이루었고, 서양에서는 중세 최대의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나와서 기독교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목우자는 개성을 떠나기에 앞서 평양 普濟寺라는 절에서 열린 談禪法會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담선법회란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기 위하여 뜻을 같이한 道伴들이 모여 禪理를 토론하고 함께 精進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서 목우자는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목우자가 자기에게 약속된 일체의 명예와 이권을 버리고 결연히 서울을 떠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 모임에서 만난 동지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동지들과 주고받은 이야기의 골자는 出家의 목적과 그 意義에 관해서였다. 釋迦世尊은 태자의 몸으로 태어나 약속된 왕위도 버리고 부모와 처자들도 모르게 홀로 雪山으로 들어가 道를 닦지 않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가. 불제자로서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으며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일이며 통탄할 일이 아닌가. 이렇듯 날카로운 자기비판이 오고 갔다.
이때에 이미 목우자의 태도에는 결심이 서려 있었다. 목우자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왕궁을 박차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釋迦의 심정이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석가가 출가할 때의 나이는 二九세였다. 사나이의 나이 二九세이면 인생의 이모저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때다. 더구나 석가는 남달리 총명하여 어린 소년 시절 부터 당시의 일류 학자들도 그 탁월한 식견을 당해내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가 ‘衆生濟度(중생을 苦海에서 극락으로 인도하여 줌)’라는 말을 몰랐을 리 없다. 수많은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석가의 誓願이 大覺을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생각난 것은 아니리라. 중생제도를 절실히 문제 삼은 석가가 오히려 중생을 버리고 홀로 설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목우자에게 있어서 그냥 듣고 넘겨 버릴 수만 없는 啓示와도 같은 것이었다. 목우자는 이치를 알고 모르고가 문제 아니라 이치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와 같이 되지 못하고서는 구제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목우자는 석가의 출가에 보다 큰 의의를 부여하고 싶었다. 괴로운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인 운명의 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운명을 넘어서서 내 몸에 大自由를 구현하기 위한 첫출발이 바로 출가가 아닐까.
진리탐구도 좋고 精進三昧도 좋고 중생제도도 좋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나와 따로 떨어져 있다면 좋은 것은 저편에 있고 나는 그 좋은 것이 아니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할 때는 일시적이나마 나와 좋은 것이 둘이 아니었을 때다. 양자가 둘로 대립할 때는 이미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떨어져 서로 무의미하게 굳어져 있는 상태다. 이때의 나는 살았으면서도 죽은 물건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우리는 남의 말만 듣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따라 좋다고 하는 식의 허수아비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며, 일시적으로 좋던 것을 영원히 좋다고 해도 안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것과 내가 영원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과 不安에서의 일시적인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현실도피는 자기를 속이는 거짓이다. 더구나 이러한 거짓된 무리들이 남을 제도한다고 덤비는 것은 자기의 그릇됨을 영원히 固定化시킬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자기와 똑같은 병! 에 걸리도록 인도하는 격이다. 이것은 분명히 나에게만 해로울 뿐 아니라 남까지 해치는 것 自害害他이 된다. 나에게 이로울 뿐 아니라 남까지 이롭게 하는 것 自利利他이 불교라면, 불교인은 먼저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겠고 그 둘이 아닌 경지를 체득해야 되겠다.
목우자의 꿈은 자기의 출가가 곧 석가의 출가와 똑같은 의의를 지니는 데 있었다. 사나이가 한번 출가하여 道에 뜻을 둔 이상 부처님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부처님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부처님의 제자 迦葉도, 達磨大師도, 元曉大師도 모두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며 僧服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명예와 이권에 정신이 팔리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데 한몫 끼고 있는 것을 볼 때 목우자는 무한히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목우자의 마음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한탄만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롭지는 못했다. 자기자신이 부처님과 같이 되지 못한 한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목우자의 안중에는 오직 부처님만이 있을 뿐 현실비판도, 아니 불교의 교리까지도 자기와는 거리가 먼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목우자는 괴로웠다. 부처佛陀와 衆生이 둘이 아닌 이론을 분명히 알았건만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세계가 곧 자기의 세계는 되지 못했다.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진정한 자기 영혼의 자유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엇이건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나 자신이 바로 그 무엇이 되어야겠다. 아는 것과 되는 것의 거리를 단축하고, 나아가서 아는 것이 곧 되는 것인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 목우자의 당면한 과제가 되었다.
목우자가 서울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전남 창평 淸源寺라는 절이었다. 이 절에서 목우자는 인간은 본래가 자유임을 투철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六祖壇經이라는 책을 읽다가 생긴 일이다.
육조 慧能(638-713)은 목우자가 평소에 존경하던 중국 禪宗의 高僧이었다. 무식한 나뭇군이었던 혜능이 나무를 팔기 위해 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金剛經 읽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드디어 禪宗의 第六代祖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목우자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고무적인 것이었다. 육조의 유일한 저술인 壇經은 목우자가 일찍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롭다.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에 얽매임이 없이 인간은 항상 자유롭다.”
처음 보는 글도 아니요, 처음 듣는 이치도 아니다. 그러나 목우자는 단경을 읽다가 이 글귀에 이르러 깜짝 놀랐다. 놀라움은 곧 기쁨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목우자는 釋迦牟尼佛을 모신 큰 법당을 무수히 돌면서 단경의 글귀를 외며 골똘한 생각에 잠기었다. 佛陀의 경지와 육조의 가르침과 자기가 홀연히 하나의 세계로 일치된 듯 싶었다.
이로부터 목우자는 修道에 더욱 精進하게 되었다. 정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목우자에게는 세상의 名利를 싫어하는 은둔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목우자는 만년에 가서 이 무렵을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괴로운 시절이었다. 마치 불구대천의 怨讐와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었다. 생각은 자유와 해탈에 있었고, 몸은 감정과 不自由의 노예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목우자에게 있어서 자유와 부자유의 대립, 바꾸어 말하면 理想과 現實의 대립이 마치 원수와 함께 지내는 것처럼 심각하게 대립되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이 철저히 정진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함께 지낼 수 없는 것이 원수이다. 한 쪽이 없어져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목우자는 이상을 버리던가, 현실을 버리던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목우자는 이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목우자의 괴로움은 없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목우자는 끝까지 괴로움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상을 향하여 정진하였다.
끝까지 버티는 강인한 정진력과 이 힘의 원대한 꿈은 목우자를 목우자답게 만든 그의 특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이상과 현실.....나는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