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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록도지킴이 원문보기 글쓴이: 김정택
책임 있는 존재감 | ||||||||||
아내, 남편, 자녀, 부모, 친척, 이웃,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지쳐 있는 그들에게 유 신부는 그들의 발을 씻겨주고 그 발에 입맞춤하며 이제는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족 같은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 신부는 순환적으로 근무지를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유 신부님은 30여 년을 성심원 한곳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성심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책임 있는 존재감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에게 또 다른 버림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나 이동한다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결국 우리를 버리고 가는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믿고 의지해 준 한센병 환자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끝까지 보여준 유 신부, 그가 이 시대에 보여준 것은 바로 공존의 참 의미인 책임 있는 존재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를 실천하는 분이 계신 반면 요즘 저축은행 사건을 보면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영업정지에 들어가기 전 이틀 동안 책임 있는 자리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그들의 존재감을 지켜준 많은 예금자들에게 너무나 큰 배신과 아픔을 주었다. 모두가 똑같은 고객이며 모두가 동등하게 소중한 고객이다.
은행이란 예금자들의 저축이나 대출자들이 내는 이자로 운영되며 예금자들은 은행이 광고하는 모든 것을 믿고 신뢰하여 예금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저축은행 사태에서 임직원들과 그들의 친인척, VIP 고객들의 예금만 빼돌려 자신들의 안위를 찾기 위해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고객의 소중한 예금을 한 푼이라도 찾아주기 위해 밤을 새워도 아쉬울 시간에 그들의 손은 자신들의 영리만을 찾기 위해 컴퓨터를 바쁘게 움직인 것이다. 누가 분노하지 않을 것인가?
또 한 편의 책임 있는 존재감을 실천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교회 가족 찬송가 경연대회에서 김 집사가 찬송가를 부르다가 가사를 틀렸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로 이어 담임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목사님도 어떤 부분에서 가사를 틀리게 불렀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셨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를 죽 읽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7월 14일 교회 가족 찬송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 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게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월간쪽지 해와달 2011. 4)
우리 사회는 지금 책임 있는 존재감을 실천하는 분들을 갈망한다. 한센병 환자들과 30여 년을 함께 살아오신 유 신부님과 교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대신하는 목사님 같은 책임 있는 존재감을 실천하는 산 실천가들이 필요하다. 자신의 권리와 능력만 과시하고 정작 그들을 지금까지 지켜주고 믿어준,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등 돌려 비수를 꽂는 자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진정 우리 사회의 진정한 리더로는 책임 있는 존재감으로 자신의 편안과 안위보다 더불어 삶을 실천하는 책임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1%의 이자를 더 받으려다 오늘 저녁 식사를 거를 수도 있는 우리 시대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감 있는 책임자가 필요한 것이다.
정한철(한국헤티연구소장·유아교육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