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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1457년 8월 19일(음력 7월 30일) ~ 1495년 1월 19일(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조선의 제9대 국왕(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이다. 본명은 혈(娎), 묘호는 성종(成宗)이며 시호는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기에,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하였다.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 때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인 월산군을 뒤로하고 즉위하였는데, 이는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왕이 된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았다.[1]
정희왕후의 섭정 7년동안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리다가,[2]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중용한후 원상제[3][4]를 폐지하며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억불승유 정책을 추진하며, 경연을 되살리고[5] 1485년에 경국대전을 완성후 반포하여 조선 유교정치의 틀을 닦는 업적을 세웠다.[6] 이후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1479년에 계비 윤씨를 폐출시킨 사건은 훗날 연산군에 의한 갑자사화(1504)의 원인이 되는 불행사가 되고 말았다.[7] 3명의 왕비와 8명의 후궁을 통해 16남 12녀를 두었다
성종대왕께 상황 (上皇)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상황 (上皇)은 누구며, 어떤 역할일까요?
1. 전통적인 한족강역 즉 북경,감숙.섬서.오.월 지역 ㅡ 명(전통 中原)
2. 장강 기준 예맥의 배달족 지역 ㅡ 고려1
3.한반도 지역 ㅡ 고려2
4. 일본 열도 지역 ㅡ 고려3 (진광 상해판)
상황[上皇] 황제의 지위를 물려준 생존하는 전 황제를 높여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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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3년 정묘(1747) 9월 22일(기유)
23-09-22[02] 춘방 등을 불러 《맹자》를 강하게 하고 왕세자에게 왕의 수성에 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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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를 입시하라고 명하고, 춘방(春坊)ㆍ계방(桂坊)을 불러 《맹자(孟子)》를 강하도록 하고, 어려운 부분의 문의(文義)를 질문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밤에 천둥소리를 네가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장(收藏)할 절기인데, 인애(仁愛)로 이와 같이 경고하니, 진실로 치란(治亂)할 기회이다. 이는 내가 덕이 없어서 이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으니, 너는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 저 옛날에 상황(上皇)께서 제천정(濟川亭)에서 일어나 춤추시자 상(上)께서 또한 일어나 춤추셨다고 《보감(寶鑑)》에 그 일이 실려 있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네가 만약 나의 뜻을 이루면 나 역시 일어나 춤추어 고사(故事)를 따르겠다. 내가 마땅히 몸소 읽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반드시 백 번 읽어야 옳을 것이다.”
하고, 몸소 열 번 읽었다.
【원전】 43 집 263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국조보감 제17권 / 성종조 3
20년(기유,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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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정원에 하교하기를,
“당 나라 문종(文宗)이 조서를 내려 백료(百僚)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 농사짓는 것을 보게 하였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행함으로써 백성들이 국가에서 농사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에 돈녕부 영사 이상, 정부, 육조, 한성부의 각 1명, 좌승지 한건(韓健)에게 명하여 동교(東郊)로 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게 하였다. 제천정(濟川亭)에서 술과 음악을 하사하고, 다시 응교 민사건(閔師騫), 교리 강경서(姜景敍), 수찬 박증영(朴增榮)에게 명하여 가서 선온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20년 기유 > 6월 9일 > 최종정보
성종 20년 기유(1489) 6월 9일(병신)
20-06-09[01] 윤필상 등에게 술을 하사하여 위로해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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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 및 육조(六曹)ㆍ한성부(漢城府)의 각 1원(員)과 좌승지(左承旨) 한건(韓健)에게 명하여 동쪽 교회[東郊]에 가서 농사를 보게 하고, 술과 풍악을 제천정(濟川亭)에 내려 주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 등이 하직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특별히 당(唐)나라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경 등을 명해 교외로 나가서 농사를 보게 하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에서 백성의 일을 중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려는 때문이다.”
하였다. 윤필상 등이 이미 떠나자, 또 도승지(都承旨) 김극검(金克儉)과 내관(內官) 김자원(金子猿)에게 명하여 선온(宣醞)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하고, 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민사건(閔師鶱)ㆍ부교리(副校理) 강경서(姜景敍)ㆍ수찬(修撰) 박증영(朴增榮)에게 명하여 선온을 가지고 가게 하는 한편,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으로서 백성의 일을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때로 수재와 한재가 있으면 오직 마땅히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살펴서 공경히 천심(天心)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얼마전 기후를 보건대, 아침저녁으로 서늘하여 가뭄의 징조가 이미 나타났으니, 근심하는 마음이 경경(耿耿)하였던 바, 다행히 하늘의 은혜를 입어 때에 맞추어 비가 들에 흡족하게 내렸다. 이제 특별히 대신을 보내어, 당(唐)나라의 고사(故事)에 의해 교외에 나가 농사를 보게 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중히 여김을 보이게 하고, 거듭 근신(近臣)을 보내어 대신을 위로하게 하니, 그대들은 모두 내 뜻을 체득하여 극진히 즐기다가 돌아오라.”
하였다.
【원전】 11 집 482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권농(勸農)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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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 황화정(黃華亭) 두모포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연산군이 짓고서 나와 노는 곳으로 삼았다. 중종조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유하정(流霞亭) 두모포에 있다. 원래는 제안대군의 정자이며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공청이었는데, 정종(正宗) 5년에 명하여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하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의 승경지를 가려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 혹은 말하기를, 본래 제안대군의 집으로 효종의 잠저(潛邸) 때 정자가 되었다고 한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풍경이 매우 좋으며, 중국 사신들의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성종이 일찍이 행차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한강 도승(漢江渡丞)이 검찰하고 간수(看守)한다.
조선왕조실록 > 중종실록 > 중종 20년 을유 > 4월 16일 > 최종정보
중종 20년 을유(1525) 4월 16일(을사)
20-04-16[03] 일본 국왕 원의청의 서계 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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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왕 원의청(源義晴)의 서계(書契)의 대략에,
“계미년 봄에 대명국(大明國)에 진공(進貢)할 때, 폐방(弊邦)의 간사한 무리가 부고(府庫)의 물품을 노려 방화하고 홍치(弘治)의 감합(勘合)을 도둑질 하였다가 먼 섬으로 귀양갔었는데, 아득한 해양(海洋)을 건너서 도망하여 영파부(寧波府)에 이르러 태감(太監)과 삼사(三司)의 대인(大人)들에게 호소했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신(使臣)이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고 하니 간사한 도적이 도주하므로 사신이 북쪽으로 쫓아가다 여요현(餘姚縣)에 이르렀는데, 무관(武官) 원진(袁璡)이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그때에는 사신이 원진을 사로잡아 이끌고 같이 배를 타고 우리 나라로 와버렸었습니다. 내년에는 배를 마련하여 원진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陛下)께서 미리 대명(大明) 상황(上皇)의 청청(淸聽)에 주달(奏達)하여 지시를 내리게 하여주신다면, 영원히 남을 은덕이 될 뿐만이 아니겠습니다.” 청청[淸聽]말이나 소리를 똑똑하게 잘 들음
하였다.
【원전】 16 집 409 면
【분류】 외교-왜(倭) / 외교-명(明)
[주-D001] 계미년 :
1523 중종 18년.
[주-D002] 감합(勘合) :
문서를 뜻한다.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로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 창경궁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인종 1) 3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20년 30년 1550년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25권 > 경사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25권 / 경사문(經史門)
효릉(孝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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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정이 명종(明宗)ㆍ선조(宣祖)의 사이에 인재와 영걸이 떼지어 나왔으니 그 소유래가 멀거니와, 실상인즉 성묘(成廟)의 고무(鼓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효릉(孝陵)이 세자(世子)의 위에 있은 지 거의 30년이었는데, 성학(聖學)이 일찍 성취되어 조예(造詣)가 높고 깊으니, 당시에 시강(侍講)하던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쳐들고 요순(堯舜)의 정치를 기다리며 다투어 스스로 학문을 닦아 쓰이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고명한 문장과 심원(深遠)한 경륜이 아울러 흥기하였으니, 대개 성인이 흥작(興作)하면 풍속을 변역시키는 것이 단지 손 한번 뒤집는 사이에 있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효릉은 성현이었는데 우리나라가 복이 없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昇遐)하였다. 이에 당하여 깊숙한 산골에서까지도 부모를 여읜 것같이 여기어 마치 구하는 것이 있는데 얻지 못하는 심정이었으니, 사람의 뇌 속에 깊이 들어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어제(御製) 중에 인체부(人彘賦)가 있는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정(鄭)의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 위세(威勢)에 눌리어 본의 아니게 윤원형(尹元衡)의 데릴사위[贅壻]가 되었었는데, 원형이 무너지게 되자 《괘일록(掛一錄)》을 지어 원형의 악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 말에 믿을 만한 것이 많았으니, 궁액(宮掖)의 일을 목격하여 자세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의하면, “가정(嘉靖 명세종(明世宗)의 연호) 임진(壬辰 1532, 중종 27) 2월 26일에 동궁(東宮)의 해방(亥方 24 방위의 하나. 정서북(正西北)에서 북쪽으로 15도의 방위)에다 불에 그을린 쥐 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또 나뭇조각에다 글자를 써서 걸었으니 대개 효릉은 곧 을해생(乙亥生)이요 2월 26일은 바로 탄생한 날로서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돼지는 쥐와 같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옥사를 박숙의(朴淑儀) 및 그의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에게 돌려 모두 사형에 처하니, 사람들이 원통히 여겼다.” 하였다. 그렇다면 인체(人彘)의 생겨남이 혹시 이 때문인가? 그 후에 미(嵋)의 아들딸들이 혼기(婚期)를 잃고 갇혀 있어 사람꼴이 아니었는데, 효릉이 그들을 위하여 소(疏)를 올려 애절히 하소연하였다. 그 글이 또한 어제(御製) 중에 실려 있는데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느꺼워 눈물이 흐르게 한다.
노 상국 수신(盧相國守愼)의 국만(國挽)에,
사당에는 오롯한 심덕을 표하고 / 廟表全心德
능에는 온갖 행실의 근원을 더했네 / 陵加百行源
라고 하였으니, 이 한 연(聯)으로써 할 말을 다했다 하겠다.
이조민(李肇敏)은 바로 《기묘록(己卯錄)》에 실려 있는 홍간(弘幹)의 손자로서 심의겸(沈義謙)ㆍ김효원(金孝元)과 서로 친한 자였는데 원형이 또한 사위로 삼았었다. 그가 당시의 일들을 갖추 기록한 것이 있어 이름을 《파안록(破顔錄)》이라 했다는데 미처 보지 못했다.
[주-D001] 효릉(孝陵) :
《類選》 卷9上 經史篇7 論史門.
況尹彛、李初連署衆名, 獻書上國, 請迎皇子! 本國之俗, 役奴婢食土田, 家家有公侯之樂, 豈願得中國之人而爲主哉? 況禹玄寶旣幸孫婦之父爲君, 豈欲立他人哉? 其爲詐僞灼然。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1년 신묘 > 7월 2일 > 최종정보
태종 11년 신묘(1411) 7월 2일(신유)
11-07-02[05] 하윤이 네 번이나 상소하여 무죄를 진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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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과 대간에서 또 하윤ㆍ권근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용사자(用事者)라고 말한 것이 만일 대소를 가리켰다면, 경 등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마땅히 법으로 보였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 굳이 청하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윤(河崙)이 네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자기의 무죄함을 스스로 진달하니, 임금이 그 번쇄한 것을 싫어하여 그 글을 모두 돌려보내었다. 그 첫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불초하므로 탄핵을 당하였으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를 가진 이는 창업과 수성(守成)이 같지 않았습니다. 창업한 임금은 반드시 전대(前代)의 쇠하고 어지러운 말년에 나왔고, 반드시 호걸의 선비가 있어 마음으로 복종하고 꾀를 합하여 그 사이에 용사하여, 선비들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진용(進用)하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였습니다. 옛 임금에게 친하고 옛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는 모두 힘써 제거하고, 옛 임금의 세력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여 온 조정의 신하가 하나도 꺼릴 만한 사람이 없게 한 뒤라야 큰 계교가 이루어졌으니, 위(魏)나라ㆍ진(晉)나라 이래 송[趙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큰 일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전대(前代) 때에 배척해버린 신하가 모두 쓰이게 되니, 이것은 이세(理勢)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신무(神武)와 불세(不世)의 덕으로 전조의 말년을 당해 장상(將相)을 겸임하였고, 거의(擧義)하여 회군한 뒤에는 중심(衆心)이 추대하기를 원하고 천명이 돌아왔으나, 전대(前代) 군신(君臣)의 분수가 아직 있어서 안위(安危)의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기이한 꾀를 가진 신하가 그 사이에 용사(用事)하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한 뒤에야만 대업이 이루는 것이겠습니까? 이색이 전조에 있어 벼슬이 총재(冢宰)가 되어, 다만 상도(常道)를 지킬 줄만 알았으니, 용사하는 신하에게 꺼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근이 이색의 행장(行狀)을 지어 말하기를,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꺼리어 논핵하여 폄출(貶黜)하였다.’고 함은 오로지 중간의 용사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물며, 윤이(尹彝)ㆍ이초(李初)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연서(連署)하여 중국(中國)에 글을 바쳐서 황자(皇子)를 맞이하기를 청하였으니, 본국의 풍속이 노비(奴婢)를 부리고 토전(土田)의 소출을 먹여서 집집마다 공후(公侯)의 낙(樂)이 있으니, 어찌 중국 사람을 얻어서 임금 삼기를 원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우현보(禹玄寶)는 손부(孫婦)의 아비가 임금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세우고자 하였겠습니까? 그것이 거짓 행위인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태조의 명예(明睿)하심으로 조금도 의심하려 하지 않으셨는데, 다만 한두 용사하는 신하가 예전에 원망이 있는 사람의 여러 이름 가운데에 있으므로 힘써 그 의논을 주장하여 그 죄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하물며 태조가 추대될 때를 당해 겸양하여 굳이 거절하였으니, 즉위하던 날에 이르러 마땅히 관대한 인덕(仁德)을 베풀어 유신(惟新)의 화(化)를 이룰 것인데, 지난번의 용사하던 자가 반드시 묵은 원망을 갚고자 하여 이색 등에게 죄를 돌리었으니, 이것이 어찌 태조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수성(守成)하는 날에 미쳐서 용사하는 신하가 한번도 전일에 하던 일과 같이 하지 못하였으니, 태조의 밝은 판단과 전일의 한 일이 과연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권근이 지은 행장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신이 이로써 서문(序文)을 지은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34년 정유 > 9월 8일 > 최종정보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8일(갑오, 양력 10월 3일) 맑음
34-09-08[10]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따르는 마음에 부응하여 황제의 위에 오를 것을 청하는 전 승지 김선주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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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승지 김선주(金善柱)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지금 펼쳐지고 있는 국가의 성대한 기회는 4000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이며 실로 만억년토록 무궁할 아름다움입니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앞에서 창건하였고 백제(百濟)와 고려(高麗)가 뒤에서 계승하였으나, 풍화(風化)는 돈독한 데에 이르지 않고 문물은 순조롭게 갖추는 데에 미흡하여, 매양 제후국(諸侯國)을 면하지 못하여 거의 백성들에게 부끄러움만 남겼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예성문무(睿聖文武)의 자질로 비로소 나라를 세웠고,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성신(聖神)으로 서로 계승하였으며, 여러 대를 지나 대군주 폐하에 이르렀습니다. 그 어짊은 봄의 화사함과 같고 그 위엄은 가을의 위엄과도 같았으며, 공손하고 검소한 것으로 신뢰를 받았고 지혜롭고 사리에 밝은 것으로 보태어서, 나라는 매우 잘 다스려지고 풍속은 옛날의 순박한 정치를 숭상하였습니다. 삼황(三皇)보다 훨씬 뛰어나서 돈독히 떳떳한 윤리를 펴셨고, 빛나는 문장(文章)의 교화는 오제(五帝)를 능가하였습니다. 이는 지금이 삼황에 폐하 한 분을 더 보태어 사황(四皇)이 되고, 오제에 폐하 한 분을 더 보태어 육제(六帝)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황제는 천자의 칭호이며, 천자는 하늘이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반드시 명하여 억조창생의 군사(君師)로 삼았으니, 무릇 군상(君上)이 된 자는 하늘이 모두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황제의 나라가 아니었던 영국(英國), 미국(美國), 일본(日本), 러시아 같은 나라가 황제의 칭호를 일컫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이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니, 하늘이 실제로 한 것이지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폐하는 덕(德)은 천지에 부합하고 인(仁)은 귀신과 사람에게 신임을 받았으니, 황하(黃河)가 천 년 만에 한번 맑아지는 때가 바로 지금에 해당되고 보위에 오르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징조에 합치됩니다. 진신(縉紳)과 백료(百僚)들이 일제히 절하며 정성을 바쳐 황제의 위호를 더 올리기를 청했다는 말을 삼가 들으니, 이것은 실로 위로는 천명에 응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화합하는 훌륭한 거조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윤허하는 비답을 받지 못한 것은 비록 폐하의 겸손한 큰 덕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늘이 돌보아 주시는 아름다운 명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라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 보위에 오르는 것이 혐의쩍다고 말씀하신다면, 국호(國號)의 위에다가 이미 대(大) 자를 더하였는데 어찌 다른 대륙의 여러 나라보다 못한 것이 있겠습니까. 왕위(王位)에다 존호(尊號)를 더 가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천도(天道)는 순환하여 반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전대의 사책(史策)에서 징험할 수 없겠습니까. 신들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채로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는 자들로서는 먼지만큼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오직 충의(忠義)만은 마음에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삼가 충심을 아뢰는 것입니다.
장인(匠人)의 동산에서 재목을 실어올 때는 아무리 작은 것도 빠뜨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경부(罄府)에서 비속한 음악을 연주하는데 감히 오음(五音)의 곡조가 맞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대세는 옛날과 완전히 다릅니다. 전선(電線)과 윤선(輪船)의 기계가 나와서 만 리나 되는 바다가 지척의 땅과 다름없게 되었고, 무장한 사졸(士卒)은 정예화되었으며, 온 세상의 백성들은 모두 인수(仁壽)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명석한 판단과 통달한 이치를 가지고서도 예를 다하여 사양하고 몸을 공손히 하셨으니 요 임금이나 순 임금과 같고, 교화가 바다 건너까지 미치니 위대한 우(禹) 임금과 같으며, 예(禮)를 징험하고 음악을 제정하였으니 은(殷) 나라나 주(周) 나라의 임금과 같고, 관리들이 경술(經術)을 익혀서 법을 정요(精要)하게 드리운 것은 한 나라나 당 나라의 융성함과 같으며, 문(文)을 높이고 도(道)를 중시하여 정사를 펼치는 데 기강이 있는 것은 송 나라나 명 나라와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일찌감치 큰 계책을 정하고 속히 보위에 오름으로써 한편으로는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따르는 마음에 부응하시고, 한편으로는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이는 덕으로 삼으셔서 기필코 국운(國運)이 영원히 창성하는 것을 누리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미 지난번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주-D001] 경부(罄府)에서 …… 있겠습니까 :
경부에서 저급한 유행가를 부르니 이것을 따라 부르는 자가 많았으나, 고상한 노래를 부르자 따라 부르는 자가 매우 적었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古文觀止 卷4 對楚王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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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8년 임술(1502) 1월 29일(임인) 08-01-29[03] 병조가 북방을 방비하여 변고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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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兵曹)가 아뢰기를,
“평안도 관찰사가 아뢴 바에 의하면, 참지휘(站指揮)의 자비(咨批)에 ‘해서 삼위(海西三衛)에 달자(達子)가 애양보(靉陽堡)의 서북지방에 군사를 둔쳤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와 고려(高麗)를 침범하려고 할 것이다.’고 했으니,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것이 염려되오니, 적군을 방어(防禦)할 여러 가지 일을 조치하여 변고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광해군 12년 경신(1620) 11월 21일(갑오)12-11-21[02] 황제의 조선 국왕에 대한 칙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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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라는 문치(文治)는 넉넉하나 무공(武功)은 굳세지 못하기에 짐이 누차에 걸쳐 진심으로 신유(申諭)해 왔던 바이니, 그대는 그대대로 군대 양성에 노력하고 외적을 막는 방법도 강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전사들을 고무하여 열이 천을 당하게 만들고 군사 기밀도 잘 짜서 백에 하나 실수가 없도록 하라. 강가의 요해처에는 군대를 매복하여 방어하고 국경지대의 관진(關津)에는 염탐을 철저히 하라. 오랑캐가 움직이면 혹은 그 선봉을 무찌르기도 하고 혹은 그들 후미를 괴란하기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뒤돌아보느라 전진을 못하게 할 것이며, 오랑캐가 후퇴를 하면 혹 그들의 태만한 틈을 노리기도 하고 혹은 돌아가는 부대를 요격도 하여 노루처럼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라. 공격과 수비를 때에 따라 하고 기병[奇]도 쓰고 정(正)도 쓰고 하여 사나운 오랑캐들을 섬멸함으로써 국치(國恥)를 깨끗이 씻으라. 그리하여 삼한(三韓)을 편안케 만들고 백제(百濟)를 다시 편안하게 하라.
그대 나라의 군신과 우리 문무 장리(將吏)는 마음을 함께하고 같이 노력하여 이역에서 한 배를 타고서 불후의 명예를 수립하고 이전에 없었던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이 일에 그대는 노력하라. 그리하여 이렇게 선유하는 것이다.”
【원전】 33 집 355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행행(行幸)
사료 고종시대사 10 > 1880년(고종 17년) 7월 12일 > 미국 해군제독 슈펠트, 화친서 관련 일본 외무 당국의 실책을 비난하고 이홍장의 초청 소식을 주일 미국공사에게 전함(R. W. Shufeldt→John A. Bingham)
기사제목 | 미국 해군제독 슈펠트, 화친서 관련 일본 외무 당국의 실책을 비난하고 이홍장의 초청 소식을 주일 미국공사에게 전함(R. W. Shufeldt→John A. Bingham) |
연월일 | 고종 17년(1880년, 淸 德宗 光緖 6年, 日本 明治 13年) 7월 12일 |
발신 | R. W. Shufeldt |
수신 | John A. Bingham |
공사 귀하,
제가 조선의 국왕에게 보낸 화친서와 관련하여 일본 외무경 직무대행인 우에노(上野) 씨가 보낸 서한 사본과 조선의 예조판서가 이노우에(井上) 외무경에게 보낸 서한의 공식 번역본 사본을 동봉한 이달 6일 자 귀하의 서한 잘 받았습니다.
위의 서한에 관해서 귀하께 다음과 같은 사항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조선의 예조판서가 일본의 외무경에게 보낸 회신 내용은 불확실합니다. 제가 보낸 화친서에는 이전에 조선의 국왕 앞으로 보낸 서한에 대한 회신을 조선의 예조판서가 보냈다는 증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특히 조선처럼 정부 조직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경우 한 국가의 최고 권위자 앞으로 서한을 보내는 것이 적절합니다. 정식으로 구성된 대신들로부터 그 서한에 대한 회신을 받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적절합니다.
셋째, “위대한 고려”에서 “위대한 조선”으로의 국명 변경은 중요하지만 도쿄에서 문제의 화친서를 전달해달라고 외무경에게 건네주었을 때 외무경이 국명 변경에 대해서 저에게 알려주셨어야 했습니다.
만약 귀하께서 이런 사항을 잘 검토하신다면, 정중하게 귀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첫째, 조선의 일본인 관리들은 조선의 국왕에게 보내는 화친서의 반송을 받지 않아야 했습니다. 둘째, 정당한 회신을 받기 위해 말씀드린 화친서를 조선 정부로 되돌려 주는 것은 일본 정부의 위엄과 자존심이 달린 문제입니다. 화친서를 조선 정부로 되돌려 주는 일은 조선의 예조판서가 “상황을 검토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이노우에 경에게 요청한 것과 부합될 것입니다.
지난 6월 1일 받은 전보를 통해 제가 해군부 장관 각하로부터 조선인들에게 적대 행위를 사용하지 말고 설득력 있는 수단만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저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해서 적대행위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타이콘데로가 호를 타고 조선을 다시 방문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나가사키에 더 이상 체류할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총독으로부터 천진으로 방문해달라는 은밀한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리홍장 총독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국익에 최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달 19일 목요일에 즈푸(Cheefu, 芝罘)로 출발할 예정이고, 몇 주 뒤 고베 항이나 나가사키 항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귀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없는 동안 귀하께서 공적으로 유익하다고 간주하는 이 서한의 일부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실 것이라 믿으면서 고베 항이나 나가사키 항에서 전보로 제가 도착했음을 귀하께 알릴 예정입니다.
저의 중국 방문이 조선의 개항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중국 정부를 설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더 이상 진전 사항이 없다면 제가 받은 명령 하에서 제 임무가 종료되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명령에 복종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출발한 뒤 일본 측에서 이 사안에 대해 취하는 추가 조치는 워싱턴의 정부에 직접 보고될 것입니다.
이 일의 초기부터 귀하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귀하의 친절하고 진심어린 협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근배(謹拜)
미국 해군제독 슈펠트
출전 · AADM, pp.902-903
첫댓글 고맙습니다
위 글은 좀 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특히나 원문과의 비교도 필요해 보입니다.
세종 6년 갑진(1424) 7월 8일(신사)
06-07-08[01] 황제에게 처녀를 진헌하게 하고 진헌색을 설치, 판돈녕 김구덕 등을 제조로 삼다
주문사(奏聞使) 원민생(元閔生)과 통사(通事) 박숙양(朴淑陽)이 먼저 와서 계하기를,
“황제가 원민생에게 이르기를, ‘노왕(老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어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소왕(小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지 아니하여, 전날에 노왕이 부리던 화자(火者)를 달라고 하였는데도 다른 내시를 구해서 보냈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 권비(權妃)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로는 무릇 음식을 올린다든가 술을 양조한다든가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이 모두 마음에 맞지 않는다.
세종 6년 갑진(1424) 7월 13일(병술)
06-07-13[01] 주문사 총제 원민생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주문사(奏聞使) 총제(摠制) 원민생(元閔生)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생물을 총알 배송하고 있더라구요. 이거 북경이 있기나 한 건지.
성종 15년 갑진(1484) 1월 5일(계사)
15-01-05[01]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종수리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삼가 받들어 보건대, 황태자(皇太子)께서는 이미 하늘이 낸 상성(上聖)의 자질을 받아서 조선 동궁(東宮)의 자리를 갖추었으니, 협찬하는 데에 어찌 사호(四皓)를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왕위에 올라 마땅히 만기(萬機)를 맡을 것인데, 사이 백만(四夷百蠻)이 누가 마음이 쏠리지 아니하겠습니까? 신(臣)은 이미 동번(東藩)이라고 일컬었으니, 장차 황도(黃道)에 나오는 해를 우러러볼 것이므로, 뛰고 춤추는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삼가 받들건대, 선태 황태후(先太皇太后)께서 요즈음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파하고, 곤의(坤儀)를 교산(橋山)에 짝하였습니다.
조선은 별도 독립된 상왕(황)부 태상왕(황)부를 운영하는 나라입니다. 각자 궁궐도 존재하고, 관리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환자.화목찬모가 필요했겠죠.
연산군 생년 1476년(성종 7년)
조선 세자 1483년 3월 14일 ~ 1495년 1월 25일 (11년)
재위 1495년 1월25일 ㅡ 1506년 9월 18일 (11년)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성조成祖 때에 와서는 중국과 오랑캐의 중간지점에 자리잡아 북쪽 왕국을 없애고 남으로 향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높은 지붕 위에서 병의 물을 내려쏟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으므로 모든 적을 숙청한 나머지의 위력을 가지고 먼저 장청새(長淸塞)의 남쪽을 뚫고 나가서 북두(北斗)를 보고야 말았으니 웅대하고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다.至成祖則以為跨居華夷之交殄滅北庭 이 글은 대도 북경에서 주천(숙주)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해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