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으로 거느리다
이 애 경
바스락바스락 재잘대는 낙엽들 사이로 사뿐히 나뭇잎 하나 내려앉는다. 시원한 바람결에 은은한 가을 향기 가득하다. 시선 두는 곳마다 자연의 향연이 한창인 요즘 좋아하는 사람과 걷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평소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우리 부부에게 산책은 같이 즐기는 취미이자 소통의 통로이기도 하다. 나란히 걸으며 하루 동안 각자 경험한 일들에 대해 담소도 나누고, 고민거리도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이다. 가끔은 기분 좋게 손을 잡고 나갔다가도 사소한 것들로 다투고 멀리 떨어져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해내야 할 여러 가지 일 때문에 평소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서 저녁밥을 먹고 나면 지친 채 소파에 몸을 내던지듯이 눕기 일쑤다. 유일하게 방안을 채우는 텔레비전 소리가 현실과 꿈속을 오가며 소파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가는 내 몸뚱이를 가끔씩 깨운다.
자연스레 우리들의 대화도 줄어들었다. 두세 시간을 산책하면서도 끊이지 않던 그 많은 말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이 자연스럽다.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우리의 말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이가, 우리의 일상이 좀먹은 헌책 같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의미 없이 던진 몇 마디에 돌아오는 메아리는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무미건조하다. 이런 것들에 점점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 더 슬픈 일이다. 우리 사이에 갈라진 틈새를 메꾸어 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 한줄기 단비처럼 우리에게 찾아왔다. 몇 해 전부터 내가 몸담고 있던 구미낭송가협회에 남편도 회원으로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회원으로 입회한 일이 처음인지라 모든 회원이 축하와 응원으로 맞아 주었다.
남편이 입회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해마다 여는 시낭송콘서트에 영광스럽게도 우리 부부가 듀엣 낭송을 하게 되었다. 부부 듀엣 낭송에 잘 어울릴 낭송할 시도 찾아보고, 시에 담긴 의미와 해석도 나누어 보고, 시인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주고받으며 낭송하는 등 우리는 많은 시간을 의미 있는 말들로 채워나간다.
발길 닿는 곳마다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 낭송 연습 무대가 된다. 아파트 키 큰 소나무 앞, 노란 융단을 깐 은행 길, 공원의 늘어진 수양버들 아래, 약간 소란스러운 카페 안, 이동하는 차 안, 산책길도 그 자체로 그러하다.
언제부턴가 늦은 저녁 잠깐이라도 산책을 나선다. 그럴 때면 우리는 나란히 걸으면서 서로의 호흡과 눈빛을 맞추며 시 낭송을 한다. 자연스레 빨라지려는 발걸음의 속도도 맞추게 된다.
가뭄에 메마른 논바닥 사이로 단비가 내리듯이 우리 사이에도 탄탄하게 새로운 물길이 튼다. 침묵에 잠식당한 채 사라질 것만 같던 말들이 무수한 별빛이 되어 쏟아진다. 향기로운 말들로 물길이 출렁인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문정희 시인의 시 ‘부부’를 낭송하며 우리들의 결혼을, 사랑을, 그리고 부부로서의 모습을 떠올린다. 둘이서 함께 해 온 수많은 배경을 풍경으로 거느리며 오늘도 함께 하는 우리. 이런 것들이 행복이 아닐까. 하여 우리는 행복한 부부가 아닐까.
가을을 가득 담은 저녁에 서로를 유정하게 바라보면서 마음을 읽어가는 이 밤, 행복이 살포시 여울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