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는 진흥황 14년(553년) 의신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후,
776년 진표율사 및 영심스님 대의 중창을 거쳐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다.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로써의 위용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고,
인조2년(1624)경에 이르러 벽암스님에 의해 또다시 법주사는 중창을 거듭하였고,
1851년에는 국가적 규모의 중수작업이 진행,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진다.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8m에 이르는 기단 위에, 높이33m의 국내에서 최대의 규모이다.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으로 신라36대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하여
100여년간 내려왔으나 대원군에 의하여 [당백전]의 재료로 쓰기 위하여 훼철되고
그 뒤 1939년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만들어진 시멘트 불상이 약50여 년간 있어오다가
1987년 해체되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에 이르렀으며
현재의 금동미륵대불은 총 12억원을 들여 지난 2000년 부터 개금불사 공사를 시작,
17개월만인 2002. 6. 5일 완성되었다.
금동미륵대불은 총 80kg의 순금이 소요되었으며,
겉부분(연면적 900제곱미터에 3미크론(0.0003mm)두께의 금막이 입혀져 있고
섭씨 80도씨~영하30도씨에서 견딜 수 있는 건식 전기도금공법으로 광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 도금되어 있다.
금동미륵대불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용화전 미륵반가사유상>
<지장보살님>
<지장보살님>
<시왕님1>
<시왕님2>
<법주사 대웅보전/보물제915호>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스님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 중 하나라고 한다.
<석등>
<능인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능인전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능인'이라 함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칸, 측면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제곱미터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어 있으며
팔상전(국보제55호), 대웅보전(보물제915호), 원통보전(보물제916호),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팔상전>
<원통보전>
<사리탑>
<석연지/국보 제64호>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면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 뜬 여러 형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석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뉘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뉘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 준다.
<석조>
<쌍사자 석등>
<마애여래좌상>
<희견보살상/보물제1417호>
희견보살은 성불의 큰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면서까지 아미타불앞에 공양하는 보살로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강한 의지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 보살상은 모루돌 위에 다기 모양의 그릇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모루돌과 보살, 그리고 그릇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화재이다.
<철확/보물 제1413호/ 무쇠로 만든 솥>
<당간지주>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을 못 미쳐서 좌측에 쇠로 만들어진 높다란 당간과
그 당간을 지탱하고 있는 당간지주가 있다.
원래의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있는데,
법주사의 당간은 고려초인 1006년(목종7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 높이는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3년)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을 주최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당했다.
이 와중에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은 녹여졌다고 한다.
현재 당간은 1910년 무렵 22m 높이로 다시 만들었으며 1972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괘불대>
첫댓글 법주사 미륵부처님 65년전쯤 불사할때의 모습 사진이 친정집에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가지고있는지 잘 챙겨둘걸,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