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8. 신앙자유의 여명을 향하여
조선 교회, 1886년 한불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 여명기로 나아가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사진 왼쪽>과 김보록(로베르) 신부.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1876년 선교사 들어오며 무너진 교회 재건
1876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들어와 무너진 교우촌을 방문하여 교회 재건을 시작하였다. 블랑 신부는 한강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를 위해 집을 한 채 마련하였다. 사대문 안 공소 회장에 참봉 조 베드로를, 문밖 공소 회장에는 김 프란치스코를 임명하여 공소와 교우촌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고를 통해 도성 안에 열심한 신자 42명·냉담자 62명, 도성 밖에 92명의 신자·82명의 냉담자가 있었고 25명의 예비신자가 준비 중이며 이들의 삶이 매우 비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7년 리델 주교와 두세·로베르 신부가 함께 들어왔는데, 그때의 상황을 로베르 신부가 묘사하였다.
“이제는 정작 우리 전교 지방으로 들어가야 하겠는데 양반 상제(喪制)들의 모양을 꾸며야 한답니다. ⋯어떻든 우리는 변장과 변모에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옷이 이렇습니까? 나는 주교님과 정(두세) 신부가 옷을 입고 나선 모양을 보고 너무나 웃음이 터져 나와서 한참 동안 킬킬거리고 웃었습니다. 보십시오. 바지는 분명히 바진데 그 가랑이가 어찌나 넓은지 그 속에 들어가서 살아도 좋을 만큼 넓고 저고리도 역시 같은 모양이며, 이와 반대로 버선은 왜 그리 작고 좁은지 발끝을 겨우 들여보낸 후는 발이 도무지 들어가지 않아 한참이나 비비대느라고 쩔쩔맸습니다.”(1878.3.9. 로베르 신부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
선교사들은 상복을 입고 짚신을 신고 산골 교우촌을 향해 갔다. 때로는 조랑말을 타고, 때로는 가마를 타고 움직였다. 그들이 상복을 벗게 되는 것은 1886년 한불조약이 맺어진 뒤 호조(護照)를 가지고 자유롭게 조선땅을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로베르 신부의 조선 적응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약간의 요기를 한 후 곧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바퀴라는 벌레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손과 발이 다 퉁퉁 부었습니다. ⋯이 지방에는 집집이 없는 집이 없으며, 또 바퀴뿐 아니라 빈대·벼룩 등이 온 담벼락에 도배한 것처럼 쭉 깔렸으니 마치 개미 소굴과 흡사합니다. ⋯조선말을 배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책도 없고 사전도 없고 교수하는 방법도 모르니 어찌합니까? 우리 선생은 한문에는 정통하나 본국 말을 교수하는 데는 어디서부터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 주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마디씩 배웠습니다. ⋯낙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 모든 어려움을 통고의 어머니이신 성모께 바쳤습니다.”(로베르, 위의 편지)
한국-교황청 관계사 발굴 사업을 통해 바티칸 도서관 필사본실에서 발굴된 블랑 주교 문서. 블랑 주교의 한국명 ‘백요왕’을 시작으로 사제·신자들의 이름과 세례명·서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바티칸 도서관 홈페이지 캡처.
주거와 언어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 보내
이처럼 선교사들은 새로운 선교지에서 주거와 언어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를 보냈다. 당시에는 「한불자전」이나 「한어문전」 같은 사전과 문법서가 없었기 때문에 생존 언어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김보록(로베르) 신부는 황해도 배천(白川) 지방에서 강원도 이천(伊川)으로 옮겨 교우촌과 신학생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리델 주교의 체포와 추방으로 신학생들을 해산시키고 산악지대로 피신하였다. 그 후 로베르 신부는 블랑 신부(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의 명령에 따라 경기도·강원도 일대에서 신학생을 가르치며 교우들을 돌보았다. 블랑 신부는 1882년 초 경상도 지역의 사목 중심지를 대구로 설정하고, 그 지역 담당으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블랑 신부는 1878년 리델 주교가 체포당하고 추방된 이후 조선대목구장 직무대행(Pro-vicarius)으로 임명되었다. 블랑은 전라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1879년 5월 충청도 공주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드게트 신부 역시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블랑은 전라도 지역의 사목을 리우빌(A. Liouville, 柳達榮)신부에게 맡기고, 신학생 교육은 두세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는 서울로 들어와 남산 아래의 낙동(駱洞)에 거처하면서 여러 공소를 설립하고, 다른 지방에도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공소와 본당을 준비시켰다. 또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을 추진하면서 1882년 뮈텔 신부를 시복 판사로, 로베르 신부를 서기로 임명하여 시복재판을 개정하였다.
1882년 설립된 인현학교에서 출발한 서울 계성초등학교 모습. 서울 중구 인현동에 개교한 인현학교는 이듬해 종현동(명동대성당 인근)으로 이전했다. 현재 교사는 2006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신축 이전한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블랑 주교, 조선 성직자 양성에 관심 기울여
대목구장 직무대행이었던 블랑 신부는 갈매못에서 순교하여 서들골에 안장되어 있던 다블뤼 주교 등 4위의 순교자 유해를 3월 10일 발굴하여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하였다. 또한 종현(鍾峴) 공소를 본당으로 설정하였고, 인현학교(仁峴學校)를 설립하였다. 1882년에 승계권을 가진 보좌 주교(Coadjutor)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883년 7월 8일 나가사키에서 프티장 주교의 집전 아래 앙티곤(Antigone)의 명의 주교로 서품을 받고 귀국하였다.
블랑 주교는 그해부터 종현 언덕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6월 20일 리델 주교가 사망함에 따라 제7대 조선대목구장을 승계하였고, 무엇보다 조선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페낭 신학교 파견을 중지하고, 원주 부엉골에 소신학교를 설립하여 국내에서 사제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1885년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는 너무 외져 물품 조달도 어렵고 전염병 등 어려움이 있어서 2년도 못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1885년 3월에는 서울 곤당골(美洞)에 보육원을 설립하였고, 7월에는 동골(東谷)에 양로원을 설립하였으며, 1887년 「한국 교회 지도서」를 제정하였다. 1887년 말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 14명·신학생 14명·신자 1만 4200여 명이었다. 당시 「지도서(Coutumier, 조선 교회 관례집)」 중 세례와 관련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대부 대모가 될 수 없다. : 이전에 배교한 적이 있는 신자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배교 사실을 아는 자; 장애가 있는 자; 성사를 규칙적으로 받지 않는 자; 상습적인 술꾼. ⋯신자는 본인 스스로 세례명을 정할 수 있다. 만약 신자가 세례명으로 정한 것이 없다면, 선교사가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지어준다. 좀 특이한 세례명을 줄 경우, 세례받는 자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름을 종이에 써서 주도록 한다.”
이처럼 체계적인 사목 지침서가 만들어지면서 조선 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 여명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