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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천 암각화길을 여고 동창생들과 걷다.
김매자
지난 2014. 9. 27 토요일 화창한 날씨다.
여고 동창들과 졸업 44주년 기념으로 제 1회 울산문화아카데미(이사장 이상도) 문화탐방 프로그램 ‘나를 찾아 울산속으로’에 참여하며 대곡천 암각화 군을 체험하는 날이다.
울산의 역사적인 장소인 국보 제 285호 반구대 암각화와 국보 제 147호 천전리 각석이 있는 대곡천을 축복받은 날씨속에 설레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반구대 박물관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돌아 걷자 1713년쯤 경주 최씨가 만들었다는 정자인 집청정이 나타났다.
300년동안 200여명의 시인 묵객들이 묵으며 400여편의 시를 남겼다는 유서깊은 집청정 뒤에는 놀랍게도 펜션들이 지어져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 신성한 곳에서 쉬고 있는 저 손님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 흔한 힐링일까? 아니면 자기성찰일까?
반구(盤龜)라는 한자 두자가 잘 새겨진 바위를 지나며 걷자니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렸다는 멋진 직사각형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는 아름다운 계곡이 나타난다. 물소리도 듣고 태극무늬로 휘어지는 물줄기도 감상하며 하늘을 보니 맑은 하늘에 같은 높이의 산봉우리들이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며칠전 비가 온 탓에 물량이 많았고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처음 걸어보는 아름다운 계곡을 이리저리 감상하고 있다가 갑자기 난 너무 놀랐다. 왠 놈들의 자동차들이 쉴사이 없이 빠르게 달리며 먼지를 뿜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고요한 마음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계곡을 감상하는 자리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얄미운 차들이 우리들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캐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성당에 가선 경건한 마음이 되고, 불신자가 아니어도 대웅전에 들어갈 때는 몸이 추스려진다는것은 누구나 경험한다. 그런데 이런 성스러운 곳에 차량이 매연을 뿜어대며 붕붕 다니는 것이 허용되다니 이곳이 단순한 유원지가 아님을 빨리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을 가니 아주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이 벼랑길이 벼루길로 말이 변하자 벼루硯자가 붙은 硯路로 명명되어져 있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벼루길이라는 말조차 벼루를 한자인 硯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마음이 아프다. 마치 출세를 하려면 예나 지금이나 과거시험이나 사법고시에 합격하려고 목매는 사회구조의 한 단면이 이 산골짜기의 길 이름에서조차 묻어나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은사시나무가 보인다. 자작나무처럼 아름다운 흰색의 몸통을 갖고 있는데 다이아몬드모양의 무늬가 흰색 몸통에 예쁘게 수놓아져있는 멋진 나무다. 처음 보았다. 자작나무와는 이 다이아몬드 모양의 무늬로 구분이 된다고 한다.
30분정도 걸어가며 물소리와 기암괴석 얕으막하고 포근한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계곡 저쪽에 정몽주가 머물러 있었다는 장소에 세워진 정자가 보였다. 곧이어 그 유명한 국보 제 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눈앞에 나타났다.
암각화는 안타깝게도 아래 1/3가량이 물에 잠긴 상태였다. 암각화가 있는줄 모르고 사연댐을 만들었기에 저 암각화는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기를 무려 50년째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망가져가는 암각화 보존을 위해 카이네틱댐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신문지상에 많이 보도 되고 있다.
잘 해결되어야 될텐데 늘 걱정이다.
오후 2시경이라 아직 북향의 암각화에 서쪽으로 지는 햇살이 비추어지기전이어서 해가 질녁이면 저녁햇살에 의해 드라마틱하게 커튼이 위로 올라가듯 하나하나 암각화 동물들이 펼쳐진다는 그 매직쇼는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우측에 있는 안내판에 그려진 그림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다음엔 꼭 망원경을 갖고 오후4시경에 와서 저녁햇살이 비치기를 기다렸다가 그 장면을 봐야겠다. 동창중 한명은 서울에서 올 때 누군가가 꼭 망원경을 준비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는데 울산시민인 나보다 암각화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서울에도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안내판 그림 중 호랑이처럼 보이는데 동그란 점무늬가 점점히 박힌 호랑이 크기만 한 동물 이름이 무엇이냐고 친구가 계속 묻는데 표범이라고 하니 표범이 이곳에 있었느냐고 의아해한다.
나도 잘 모르는데 호랑이 친척쯤의 동물인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표범일까? 호랑이일까? 나의 무식이 부끄러웠다.
국보 285호가 그려진 바위가 있는 산은 정이등변삼각형으로 주위의 산들과 구분이 되었다. 선사인은 바위에 그림을 새기려고 장소를 물색할 때 이 정확한 이등변삼각형을 분명히 계산에 넣었으리라. 그리고 바위는 정한가운데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이는 무언가 도약적인 느낌을 주려는 선사인의 의도가 있는 듯 하다는 김한태(문화도시울산포럼이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암각화 지역주변은 1억3천만년~9천만년 전에는 경상호라는 이름의 거대한 호수였다. 호수바닥에 쌓인 흙과 모레들이 어느 시기에 일제히 융기된 후 시간이 지나 풍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연약한 부분이 골짜기가 되어 깊은 계곡이 형성되고 물 흐름은 태극무늬로 흐르게 되었다 한다.
자연이 만드는 물굽이 지형은 음과 양, 태극의 개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대곡천 물굽이를 항공촬영 후 직선거리와 곡선거리를 재보니 곡선길이가 직선의 3.1배로 길었다. 원주율 파이는 3.1이다. 자연의 변화는 원주율을 따른다는 것이 김한태 이사장의 설명이었다. 처음 이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아 발표하려고 문헌을 살펴보니 이미 스웨덴의 지질지형학자인 요한스가 브라질의 한 계곡을 계측하여 이 자연의 물흐름 현상이 파이의 수치와 같다는 것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니 한발 늦고 말았다.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중간쯤에 생긴 소뿔모양의 습지가 있는곳엔 나무로 다리를 잘 만들어 놓았다. 태극무늬로 흐르던 물이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직선으로 가기 때문에 소뿔모양의 습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창녕의 우포늪 울산 정곡산의 무재치늪과 그 크기가 비교가 되지는 않지만 향후 세월이 가면 귀중한 늪이 되려는 싹 늪이었다.
그리고 억년전에는 우포늪이 있는 창녕도 이곳 울산과 같이 호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있는 표지판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빨리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면 좋겠다.
반구대 암각화를 뒤로하고 천전리 각석으로 향하자 울퉁불퉁한 좁을 길로 접어든다. 산의 높이는 거의 비슷비슷한데 물소리가 제법 졸졸 들리니 갑자기 어린시절로 돌아가 물속에서 뛰어놀며 소꿉놀이가 하고 싶어진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때 걸어서 다니던 경기도 용인의 시골 학교 가는 길에도 이런 시냇물이 있었고 그 곳에서 우리들은 책가방 내던지고 물장구치고 소꿉놀이 했었는데.....
한참을 가니 산길이 높아지고 저 멀리 천전리 각석이 새겨진 그 위대한 바위형상이 눈아래 보이기 시작한다.
왕복 산행중에 우리 일행들 외에는 딱 한명만 맞닥뜨렸다. 그런데 그는 산악 자전거를 타고 여기 높은 계단길까지 올라와 쉬고 있었다.
산악자건거는 사람이 사뿐히 걷는 발자국보다 훨씬 땅에 깊은 바퀴자국을 남긴다. 아니 이런 고요하고 적막한 곳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암각화의 의미와 암각화를 새긴 선사인을 생각해야 하는 곳에 산악자전거를 타고 스포츠를 즐기다니 이건 주위 자연환경과 너무 안어울린다. 물론 아까 붕붕거리며 달리던 승용차들 보다는 났지만.
8년 전인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갔을 때 산 정상 부근부터는 오직 자전거만으로 왕래를 하게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조금 더 산행을 하니 각석바위 오른편으로 꽤 쎈 물살이 흘러 마치 폭포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물살 우측에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공룡 발자국들이 여러개가 보였다. 발자국마다 가장 깊은곳에 물을 조금씩 머금고 장엄히 놓여 있었는데 1억 3천만년전에 이곳에 살던 공룡들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듯하다.
어제도 작년도 아닌 1억년전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세월을 건너 뛴 공룡들과의 해후. 어느 발자국은 엄지발가락과 가운데와 새끼발가락까지 구분되어 돌 위에 자취를 남겼다. 아주 힘껜 놈이었나 보다. 저렇게 발가락까지 구분지을 정도의 힘센 발을 가진 놈은 아마 암컷이었으리라. 새끼들을 키우느라 몸집이 크고 건강해야 했기에.
1억년 전에는 이곳 대곡천이 거대한 호수였고 이 곳에 물먹으로 온 공룡들이 발자국을 남겼다는데 이 발자국의 주인공들은 특히 좋은 위치에서 물을 먹으려고 동료들과 싸우느라고 깊은 발자국을 남긴건 아닐까?
공룡 발자국이 새겨진 넓은 돌판을 지나 각석으로 가려하니 시냇물을 건너야 했다. 그제 내린 비로 물이 많아져 놓여진 다리위에 물이 많이흘러 맨발로 건너야 했다.
우리들은 오랜만에 양말 벗고 신이 나서 물속에 잠긴 다리를 건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 내친김에 맨발로 각석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바닥에 크고 작은 돌들과 뾰족한 모래 때문에 발바닥이 너무 아파 도저히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길 가장자리로 가니 부드러운 흙으로 다져진 부분이 있어 겨우 계단으로 내려와 각석까지 도달했다.
친구들은 중도에 양말과 운동화를 도로 신은 애들이 많았다.
이곳에 진작에 부드러운 흙을 깔아 이 대곡천 물을 맨발로 건넌 후 맨발 그대로 각석까지 걸어 흙의 촉감을 느끼도록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건데..
이 귀중한 선사시대의 유물을 가까이 보면서 목욕자계까지는 안해도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마름모꼴 동심원 등 뜻 모를 기하학적 무늬로 무언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저 3000년 전 아니 4000년 전 선사인과 마주하는데 어찌 그냥 댕그러니 몸과 마음의 준비 없이 이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맨발로 버릇없이 마주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때까지 벗고 신 앞에 선다는 상징적 의미를 두어 누구든 이 암각화군 장소에 오려면 반드시 물을 건널 때 발을 씻음으로 그 천전리 각석의 오묘한 의미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코스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도시락 싸들고 와서 각석 앞에서 떠들며 놀다 가는 평범한 명승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곡천 상류에 있는 4000년전의 천전리 각석에서부터 7천년전 선사인의 예술혼이 서려있는 반구대 암각화 주위의 모든 자연환경은 나무하나 풀 한포기까지 다치지 않도록 세계문화유산에 빨리 등재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커진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두 개만을 등재시켜서는 안되고 이 대곡천 전체 일대를 하루빨리 암각화 군으로 정비하여 세계인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저녁에 동북아 역사 재단의 장석호박사의 암각화 강의가 유니스트 대학 강당에서 있었다.
국보 285호 좌측 맨 상단에 있는 샤만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상을 세계에 널려있는 다른 암각화의 인물들과 비교하여 설명해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샤만은 우리가 두 손모아 기도하는 모든 기도상의 가장 원초적인 그림일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울산에서 반구대로 가다보면 일명 반구대로인 국도35호선을 따라 언양으로 이동해야 한다. 언양 중간쯤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려면 우측으로 꺾어져 올라가야 하는데 2~3분만 차로 가다보면 갑자기 경치가 좋아지면서 무릉도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그리고는 곧이어 박물관이 나타나는데 이 박물관 주차장은 모든 차량과 오토바이, 산악자전거 등이 집결하는 마지막 마지노선이 되어야겠다. 그 이상은 도보로 걷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힘든 사람을 위하여 가마를 준비해 두면 어떨까? 혹은 일반 자전거 몇 대 까지는 허락을 해도 좋겠다.
지금 양산 통도사에서 영천까지 길 확장공사를 하면서 새로 생기는 나들목을 반구대 나들목으로 하자는 많은 분들의 의견이 있다. 참으로 좋은 의견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세계인이나 한국인들이 반구대로인 35번 국도로 차를 타고 오다가 점점 반구대 나들목을 지나게 된다. 그들은 도대체 반구대가 어떤곳일까? 라는 궁금증이 서서히 더해갈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려 볼 것이다.
세계인들은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을 지나 대곡천 좁은 길로 점점 들어서면서 바람소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새소리 이외에는 다른 일상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약간은 신비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해야한다.
걸으면 걸을수록 더 성스러운 순례를 하게하여 국보 285호와 맞닥뜨리고 또 한참을 걸어가 국보 147호와 마주할 때 선사인들이 우리에게 그림을 통해 먼저 걸어오는 그 말의 의미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듣고 해석하고 가도록 문화적 환경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한번 굳게 해본다.
지금으로부터 7천년전에 선사인들이 생활하던 그 숭엄하고도 경건한 장소가 그때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이곳 한국인의 탯줄 같은 대곡천 반구대 천전리 각석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끝없이 신에게 지금까지도 기도하고 있는 우리의 조상 선사인들과 영적인 교류를 누구나 한번쯤은 꼭 하고 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공룡발자국과 함께 다양한 고래나 동물, 변화무쌍한 기하학적 무늬가 살짝 숨겨져 있는 이 아름다운 계곡을 우리는 지금껏 너무나 방치했다.
암각화속의 인물상 특히 가면 쓴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상은 가면이 아닌 6천년전의 우리 조상님의 실제의 초상화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최근 반구대라는 소설을 펴낸 울산대 구광렬교수도 이 그림에서 남자주인공을 착안하셨다고 한다.
최근에 가장 오래된 한국인 얼굴이라며 미국 미네스타대 김민구교수가 중국 지린성에서 출토된 고대 부여의 2~3세기 금동 얼굴상을 발표하며 가장 오래된 한국인 얼굴이라고 말한바 있다.
중국 지린성의 금동얼굴상을 연구한 37세의 미술사학자 김민구교수는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이 인물상을 알고도 지린성의 금동상을 한국 最古의 인물상이라고 발표를 했을까 아마 몰랐을 가능성이 많아보인다.
암각화에 새겨진 인물상은 적어도 2C 부여시대보다 1000년에서 수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곳이 만들어진 년도가 7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을 따른다면 대곡리 암각화군은 우리 한국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조상의 얼굴이 새겨진 신화와 꿈의 세계라 하겠다.
난 그날 암각화 박물관에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져 있는 암각화 그림을 보며 특히 가칭 가면 쓴 인물을 유심히 보았다. 김민구 교수가 발표한 중국 지린성 부여인과 거의 흡사한 얼굴모습이었다. 다시말해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실제의 맨 얼굴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왠지 큰 어른 조상을 대하는 마음이 들어 마음이 경건해졌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사건때나 르완다 대학설이 있었을 때 나치의 만행이 있었을 때라도 그 만행의 중심인물들이 이곳에 초대되어 인류조상의 얼굴이 새겨진 바위 앞에서 자기 성찰을 했었다면 이들도 나처럼 마음이 경건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남북한 고위급회의는 DMZ나 제 3 국에서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뿌리가 새겨져 있는 이 대곡리 암각화군에 와서 조상님께 묵념이라도 드린 후 회의를 한다면 회의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꿈을 꿔 본다.
이 대곡리 암각화군의 모든 자연환경을 잘 정비하여 세계평화를 이루는 광장으로 거듭난다면 세계의 곳곳에서 서로 의견이 첨예히 맞서는 어느 집단들이라도 이곳에 초대하여 의사소통하는 장소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
나를 찾아 울산속으로의 이번 문화탐방에서 나는 위와 같은 일을 하는데 나의 정열을 받쳐야한다는 사명을 찾았다.
2013년 반구대포럼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금상을 수상한 3학년 어린이의 시를 소개하며 나의 꿈을 대신한다.
선사인들의 선물
삼산초등학교 3학년 3반 김재민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시대의 너를 만나러 간다.
푸르른 숲 터널을 지나
기대와 상상의 바람을 타고
나는 너를 만나러 간다.
여기는 7천년전 선사시대.
나는 아주 거대한 암벽에
동물을 그리고 있는 너를 보았다.
너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다.
세계적 가치가 뛰어난 보물을
반구대암각화를...
나도 너에게 선물을 주어야겠다.
너의 영원한 그림에 대한
세계인들의 감탄사를...
첫댓글 20대 소녀의 열정적인 모습을 품은 호림 선생님 늘 반짝이는 눈 으로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뵈면서 감탄 했습니다.조그마한 체구 에서 품어나오는 에너지 와 지성이 울산 문화의 윈동럭이라는것을요 그대에게 아낌없는 갈채 를 보냅니다
선덕여왕에 비할바입니까?
나를찾아문화기행 여러분 모두덕분입니다
류회장님 열정 안보이는데서 빛납니다
언제나 묻기를 좋아하시고 의문이 있는 문제의 해답을 갖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역시 답사와 여행은 자료를 충분히 남겨주는게 맞나봅니다.
잘읽어 보았습니다.
글이많이부족합니다
류회장님 도와주세요
"나를 찾아 울산 속으로"
울산의 정체성을 찾는 울산문화아카데미의 첫 실험무대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없는 멋진 공연
끝까지 2부행사까지 자리 지키며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보여주신 시민들의 선진의식과 사회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시는 이상도이사장님, 김매자원장님 감사드리며,
당시 북태평양 연안한반도는 아열대였을걸로 추정되며 표범이 있었을 걸로 봅니다.지금 호랑이 표범은 남획되어 사라졌지만, 당시 동물들의 최상위층으로, 활이나 작살로 잡지아니하고 그물로 또는 함정을 파서
생포 하지않았을까요? 가죽은 중요한 의복으로 양탄자로 지도자만 사용하는
물건이었을테니까요?
김원장님 반구대 암각화 대단한 사랑하심이 묻어 있습니다.
동창생들과 함께 "나를 찾아 울산속으로" 멋진 추억을 담아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잘 들여다 보지 않은 탓에 이제야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되었네요
늘 배움으로 무장하고 계신 원장님은 다른곳도 열정으로 대하시지만
반구대 만큼은 더욱더 열정적으로 임하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깨알같은 맘을 쏟아놓으셨는지 배움에 대한 열정은 만큼은 따르고 싶습니다.
"나를 찾아서 울산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잘 읽고 반성도 했습니다. 저에 대한,,,,,,,,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