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에서는 일반적으로 17세기 유럽의 미술을 바로크(Baroque) 미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 각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양상은 저마다 달라서 하나의 통일된 양식으로 설명하는데 다소 무리가 따른다. 애초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에서 가져온 용어 ‘바로크’는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후원하는 미술의 특성을 일컫는 말이었기에, 신교가 득세한 나라들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미술이 등장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파장은 실로 컸다. 신교와 구교로 분열된 교회는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쳤고, 이에 예외일 수 없었던 미술은 종교적 주도세력의 이념과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시각적 기록을 남겼다. 이를테면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국가로 남은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Flanders: 오늘날의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의 미술가들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인 교회와 왕실로부터 주문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반면 신교세력의 주도하에 1648년 독립공화국이 된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유로운 무역과 상업으로 부유해진 시민들을 새로운 주문자로 맞이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가 보여주는 바로크 미술의 두 얼굴
남부 벨기에에서 태어난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미술은 가톨릭을 고수한 플랑드르 바로크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당시 곤차가(Gonzaga) 가문이 다스리던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공국의 궁정화가이기도 했던 루벤스는 1600년경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을 여행하며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섭렵한 대가였다. 뿐만 아니라, 카라바지오, 카라치와 같은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켰고, 이를 인정받아 1606년 로마 발리첼라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 곳은 반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오라토리오 교단의 관할 성당이었다. 루벤스는 중앙 벽면에 기적을 행하는 성모와 아기예수를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 벽면에는 놀라움으로 이를 지켜보는 성자들을 그림으로써 작품 안의 모든 요소들이 상호 작용을 이루도록 했다. 그는 또한 절묘한 빛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작품이 설치된 바로 그 장소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이러한 공간과 작품의 종합적 관계는 가톨릭 교회가 추구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루벤스가 17세기 가톨릭 지역의 플랑드르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라면,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자주 비교되는 렘브란트 판 레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신교 지역인 네덜란드 레이덴 출신의 화가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 주문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다수의 종교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1634년에 그린 [십자가를 내림] 루벤스의 안트베르펜 성당 제단화 [십자가를 내림]의 중앙 패널을 참조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작품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 지역의 미술이 어떻게 다른지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루벤스의 작품은 교회 예식에 쓰이는 제단화로서 거대한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반해, 렘브란트의 작품은 그보다 훨씬 작은 감상용 크기로 제작되었다.
루벤스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성모] 중앙벽면, 1608년 석판에 유채, 425x250cm,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 로마. <출처 : Kolf at Wikipedia.org>
또한 루벤스의 제단화가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 그리고 역동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채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눈 앞의 역사적인 사건에 동참하게 한다면, 렘브란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느 정도 관객과 거리를 둔 채 고요한 어둠 속에서 그들의 감정과 슬픔을 전달하고 있다. 루벤스의 것이 보다 많은 신도들의 종교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가톨릭 교회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이와 달리 렘브란트의 것은 보다 개인적인 사색과 감정에 몰두하게 만든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이미 공화국 이전부터 도시국가들의 자유로운 상업적 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진보적인 사상과 학문의 분위기를 갖춰온 터였다.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공화국을 이룬 네덜란드는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나 전제군주가 통치하는 스페인, 프랑스와는 달리 시민들의 조직을 통해 운영되었다. 이들 부유한 시민 계층은 미술 작품의 주된 수요자가 되었고, 특정 미술가를 후원하기 보다는 미술 시장을 통해 자신들의 취향과 요구에 맞는 작품을 구입했다.
사회 건립의 주도 계층으로서 자부심을 지닌 시민 자치단체들은 실력 있는 초상화가에게 자신들의 그룹 초상화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Frans Hals)는 인물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기존의 일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변화 있는 구도와 인물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생동감 있고 수준 높은 그룹 초상화를 남겼다. 자본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 문화는 기존의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주제 이외에 현세의 삶에서 택한 주제들, 즉 풍경화, 장르화(풍속화), 정물화 등의 독립적인 회화 장르의 발달을 가져왔다.
할스 [성 아드리안 시민 민병대원들의 모임], 1633년경 캔버스에 유채, 프란츠 할스 미술관, 하를렘.
당시 네덜란드는 가정집은 물론 상점과 푸줏간에도 미술품을 걸어놓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작품 가격 역시 무명 화가의 싼 그림부터 유명 대가의 비싼 그림(아담한 농가 한 채를 살 수 있는)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미술 수요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는 화가들로 하여금 각자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 매진하도록 만들면서 전문화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시민들의 미술 수집은 작품의 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피테르 얀센스 엘링가(Pieter Janssens Elinga)의 그림에서처럼, 수집된 작품들은 대부분 그들의 집 거실과 식당, 침실 등의 실내 공간을 장식할 용도였기에 대작보다는 사적으로 감상하기에 적합한 크기가 선호되었다.
이를테면,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은 가로 세로 불과 20cm가 조금 넘는 크기로 그려졌는데, 이렇듯 작은 크기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룹 초상화와 같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당시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대부분 1m 이하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엘링가 [앉아 있는 인물들이 보이는 실내], 17세기 후반 캔버스에 유채, 76x89cm, 개인 컬렉션.
북유럽의 사실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네덜란드 미술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발달하게 된 장르는 역시 정물화였다. 화려한 꽃과 곤충들, 과일, 갖은 음식과 반짝이는 식기들, 투명하고 섬세한 유리잔, 그리고 책과 악기 등이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전형적인 소재였다. 식물학과 원예산업의 발달은 꽃 정물화의 확산에 기여했고, 해양산업과 동방무역의 성장은 진귀하고 이국적인 소재들을 제공했다.
암브로시우스 보스스하르트 [꽃병에 담긴 꽃다발], 1618년 동판에 유채, 55,5 x 39,5 cm, 국립미술관, 코펜하겐.
화가들은 이 중에서 자신이 가장 잘 그리는 소재를 골라 주로 다룸으로써 그 방면의 전문화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물화가 단순히 눈 앞의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중한 선택과 세심한 연출을 거쳐 작품 안에 표현된 대상물들은 각각의 상징 의미를 지닌 채, 성서에 명시된 ‘바니타스(vanitas: 존재의 덧없음)’와 같은 보다 심오한 삶의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 절대적인 신 앞에서 인간 삶의 유한함을 깨닫게 함으로써 경건하고 바르게 살 것을 권고하는 일종의 종교화와 같은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진귀하고 값비싼 것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들 정물화는 사람들의 심미적 감성과 함께 물질적 욕망을 대신 채워주는 역할도 겸하면서 수집가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다.
피테르 클레즈 [바니타스 정물화], 1630년, 캔버스에 유채, 39,5 x 56 cm, 마우리츠호이스미술관, 헤이그. 인간의 지식을 뜻하는 낡은 책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아래 놓여져 있다. 곧 굴러 떨어져 깨질듯한 섬세한 유리잔과 방금 꺼진 촛불, 그리고 회중 시계는 모두 유한한 인간 존재를 상기시키는 모티프들이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자국의 지형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기존 종교화와 역사화에서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풍경을 독립적인 장르로 다루기 시작했다. 야콥 반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이 그린 [하를렘 근처의 표백 농가]는 낮게 펼쳐진 대지와 광활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그리고 당시 하를렘 도시민들의 주요 산업이었던 면직물 표백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끝에는 그들의 현세의 삶과 신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교회가 보인다. 반 로이스달의 또 다른 작품 [유대인 묘지]는 화면 중앙의 묘지 뒤로 오래된 폐허와 함께 무성한 나무들과 힘찬 물줄기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풍경화 역시 인위적으로 구성된 이미지이며, 이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무한함을 찬미하는 한편, 그러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 로이스달 [하를렘 근처의 표백 농가], 1670~1675년 캔버스에 유채, 62.2x55.2cm, 쿤스트 미술관, 취리히.
반 로이스달 [유대인 묘지], 1657년 캔버스에 유채, 141 x 183 cm,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디트로이트.
17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의 회화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 한 세기에 걸쳐 지속된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이후 서구 유럽의 근대 미술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러 회화 장르의 발달과 시민 계층이 주도한 미술 시장의 융성은 기존의 미술 체제뿐만 아니라 동시대 가톨릭 교회가 후원하는 나라들의 미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양상을 보였다. 17세기 서구 유럽의 미술은 이렇듯 다채롭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