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신문용지공장 70년사-(3)
美 軍政廳, 李晩秀, 金元全의 삼각관계
8.15해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사라지고 미 군정청이 정치, 경제, 사회 등 남한의 모든 분야에 대한 전권(全權)을 장악했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각종 산업시설 가운데 규모면에서나 사회 및 시설의 성격에 따라 미 군정청이 직접 장악을 하고 적산귀속기업체(敵産歸屬企業體)를 남한의 기업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업체들은 종업원이나 직원들에게 관리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이같은 처리방침에 따라 북선제지화학공업 군산공장도 당시 만월표로 유명한 고무신업계의 대표주자인 경성고무회사 사장 이만수에게 관리인수보증금 95만원을 받고 제1대 한국인 관리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제지사업에 손을 댄 이만수는 1946년 4월 인수당시 관리인수자가 아닌 공장 관리인에 김원전씨가 취임하고 있었고 초대 관리인인 이만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고 ‘제지계’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 대한 이만수와 김원전의 관계는 이만수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관리인수보증금 95만원을 납부하고 1대 관리권을 받았음은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김원전이 당시 공장 관리인이라는 데는 명쾌하게 나타난 기록이 없어 궁금증으로 남아있다.
이는 별 문제로 하고 이만수는 미 군정청에서 파견된 관리인 구레보 중위와의 언어소통이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등장한다. 구레보 중위는 실권을 장악한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만수 통역을 맡은 사람까지 언어소통이 부족해 구레보와 이만수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이나 기능면에서 권한행사를 못하는 실정이다.
관리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 좌익들의 소요에 어려움을 겪는 등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움을 인정하고 관리인 직을 내 놓았다. 이로써 이만수는 2-3개월 만에 북선제지와 인연을 끊었다.
이로 인해 북선제지는 새로운 운명에 처하게 된다. 1946년 2월 제2대 관리인으로 영어에 능통한 김원전 시대가 열림과 동시 북선제지는 우리나라 신문용지생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제2대 관리인으로 전기를 마련한 김원전은 북선제지화학 군산공장의 첫 관리인은 이만수이며 그는 95만원을 미 군정청에 납부하고 제지공장을 인수했다고 밝힌다. 당시 김원전은 미 군정청 제지부문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보증금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한 자료나 입증할만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다. 다만 김원전의 구술에 의한 내용만 전해올 뿐이다. 그러나 관리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한 내용으로는 매일경제신문에 김원전이 군상공장을 맡기까지는 능숙한 영어실력과 혈연이 주효했음을 밝히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귀속재산으로 넘어갈 때 미군정으로부터 인수받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영어실력과 김원전의 뒤에 당시 혈연인 김가전 전북지사와 우자형(禹滋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김원전의 친형인 김홍전 박사가 당시 전라북도 민정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에 김원전이 보상금 한 푼 없이 북선제지를 인수 받은 것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건대 김원전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 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내 놓을 수 있는 일이다.
1946년 2월 당시 김원전은 29세의 청년이다. 장래가 총망되는 청년 실업인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당시 제지업계는 김원전의 프로필에서 김원전은 8.15 해방 후 미 군정청 전주사무소에서 잠시 일을 보다가 전주북중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한다.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자 북선제지 군산공장 견학을 하기에 이른다. 김원전은 견학과정에서 공장 기술고문으로 있는 ‘그레이지’와의 교류를 통해 관리인 수락을 수차례 권유 받기도 했다.
그래도 김원전은 기업인이 되기를 원치 않고 학교에 근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에 ‘그레이지’는 삼고초려를 할 만큼 김원전에게 관리인 수락을 거듭 요청한 끝에 결국 제2대 관리인 직을 수락 받는다.
이것이 북선 제지와 김원전의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한쪽에선 정무장관 등 혈연을 강조한다.
김원전은 이만수와의 관계에서 명확한 정리가 이루어졌으며 또 미 군정청과도 이만수와의 관계정리에 이어 완전한 관리권인수가 정상적으로 정리됨에 따라 김원전은 삼각관계에서 잔무가 전혀 없을 만큼 인수 인계에 명확성을 이룩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된 청년 김원전의 소년시절과 일본유학의길 등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946년 2월 북선제지 군산공장 제2대 관리인으로 경영의 최고 책임자 가된 김원전은 충남 한산의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형편의 사정으로 부모를 따라 전주로 집을 옮겼다. 전주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는 김원전은 전주신흥학교를 거쳐 동 중학부를 졸업한 1936년 3월 청운의 꿈을 품고 단신 일본유학길을 떠난다. 그의 나이 19세.
그는 동경에서 신문배달을 하는 등 모진고생을 무릎 쓰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상공성 동경공업시험소 화학기술자 양성소에서 ‘분석화학 및 합성화학’을 전공, 1942년 3월 3년간의 수업을 마쳤다.
김원전은 그곳 시험소 연구소에 조수로 취직이 되었다. 승진을 거듭한 그는 기수(技手)로 승진, 주로 경금속 제련에 종사하던 중 8.15해방직전인 1944년 10월 고국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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