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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시인 김삿갓 2부-(51) ●
☆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 ☆
- 남자(男子)가 사노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 -
김삿갓은 감자를 먹어가며,
주인(主人)에게 이런 말도 물어보았다.
"이 깊은 산중(山中)에서 날마다 숯만 구우며
살아가려면, 때로는 외로움도 느끼시겠구려."
지환(志煥)은 당치 않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을 했다.
"산에는 산짐승 친구(親舊)들도 많은 데다,
숯을 굽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워내는 숯이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비록 힘이
드는 일이기는 해도 여간 기쁘지 않은걸요."
김삿갓은 숯을 굽는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자신(自身)이 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즐겁게 해나가는
지환(志煥)의 생활상(生活相)을 듣자,
자기(自己) 일에 아무런 사명감(使命感)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의무적(義務的)으로 살아가는 자신(自身)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 비하면 지환(志煥)은 스스로 만든
천국(天國)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자리 움막은 천정(天井)이 너무 낮아 김삿갓은 무심코 일어서다가 천정(天井)에 이마를 쪼아 붙였다.
"아 얏!"
(하늘은 한없이 높은데, 이 집,
천정(天井)은 왜 이다지도 얕은고!)
김삿갓은 이마를 쓸며
자신(自身)도 모르게 익살을 부렸다.
불편(不便)한 것은 천정(天井)만이 아니었다.
콧구멍 크기의 좁은 방에서 세 사람이 함께
자려니까, 아무리 가로세로 누워도 다리를
펴기에 여간 불편(不便)하지 않았다.
"방이 워낙 비좁아 불편(不便)하시겠지만,
하룻밤 참고 지냅시다. 지내 놓고 나면
이런 일도 좋은 추억(追憶)이 될 것이오."
주인은 워낙 낙천가 인지라,
모든 일을 좋게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 은 김삿갓에게 미안스러운지,
"선생을 편히 모시지 못해 죄송 합니다."
고 말을 했다. "아무리 불편(不便)하기로
토굴(土窟)보다야 낫지 않겠소이까?"
김삿갓은 짐짓 익살을 부려 보였다.
주인(主人)과 양상문(梁想文)은 눕기가
무섭게 코를 요란(搖亂·擾亂)스럽게 골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오금을 못 편 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잠이 살짝 들었다가 깨었는데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아,
잠들기를 단념(斷念)하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뒷산에
올라오니 조그만 정자(亭子)가 하나 있었다.
정자에 올라앉아 산 아래 어둠 속의 수풀과
이를 환히 비추는 달구경을 하는데
배 안의 창자는 주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김삿갓, 빙그레 미소(微笑)를 머금으며
즉흥시(卽興詩) 한 수를 읊었다.
천고만리 불거두 (天高萬里 不擧頭)
◎하늘은 높아서 만리건만 머리를 들 수 없고◎
지택천리 불선족 (地澤千里 不宣足)
◎ 땅은 천 리로 넓건만 다리를 펼 수 없네. ◎
오경등루 비완월 (五更登樓 非翫月)
◎오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구경 때문은 아니오◎
삼조피곡 불구선 (三朝避穀 不求仙)
◎ 사흘을 굶은 것은 신선이 되려 함도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오지환(吳志煥)은 마당에 숯불을 피워 놓고
토끼 불고기를 구워 주는 것이다.
김삿갓이
토끼 고기를 먹어 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토끼 고기는 노린내가 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불에 구워 먹어 그런지 쇠고기와 다름이 없구려."
양상문(梁想文)은 고기를 맛있게 먹어가며,
"저 역시 토끼 고기는
처음 먹어 보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여보게, 지환(志煥)이!
이런 때에는 술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디서 술 좀 구해 올 수 없을까?"
"원, 형님 두!
이런 심심산중 에서 술을 어디서 구해오란 말입니까?“
오지환은 양상문 에게 넌지시 구박을 주다가,
별안간 무엇이 생각난 듯, 무릎을 탁하고 쳤다.
"아 참! 술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납니다.
나는 워낙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러나 한 5년 전쯤인가? 산 머루
한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게 있어요.
지금쯤은 술이 되었을 것 같으니
갖다 먹기로 합시다."
"이 사람아! 그런 게 있으면
진작 가져올 일이지 왜 잠자코 있었는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지요."
김삿갓은 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어 두었다는 머루술이라는 말을 듣자,
대뜸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지환(吳志煥)이 가져온
머루주의 맛은 기가 막히게 향기(香氣)로웠다.
양상문(梁想文)도 술을 마셔 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김삿갓에게 묻는다.
"선생(先生)! 나는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보기는 50 평생(平生) 오늘이 처음입니다.
선생(先生) 입에는 어떻습니까?"
"내 입이라고 노형(老兄)의 입과 다를 것이
있겠소? 이 술을 마시니,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오는 것만 같구려."
오지환(吳志煥)은 그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였다.
"5년 전에 장난삼아 땅속에 묻어 두었던
머루가 오늘날 두 분을 그렇게도 즐겁게
해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본디 좋은 술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오.
그러기에 옛날부터 술은
[寬心應是酒 (관심응시주)
◎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 데는
술이 제일이요. ◎
遺興莫過詩 (유흥막과시)
◎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고 했다오."
"그거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흘이든 나흘이든 이 술이 바닥이
날 때까지 우리 집에 그냥 머물러 계십시오.
술안주는 노루 고기든 꿩고기든 입맛대로
공급(供給)해 드리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흥이 절로 돋는 소리다.
"선생(先生)! 이 좋은 술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상문(梁想文)조차 보채는 바람에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좋은 대로 합시다. 그려.
나는 워낙 오라는 데가 없는 몸이니
뭐가 급해서 떠나겠소이까?"
김삿갓과 양상문(梁想文)은 오지환(吳志煥)네 움막에서 사흘 밤을 더 묵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술이 아직도 더 남아 있으니까.
아예 바닥을 내고 떠나도록 하시죠.“
오지환(吳志煥)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호소(呼訴)하듯 만류(挽留)하였다.
그러자 양상문(梁想文)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람아! 밑술을 조금 남겨 두어야지
우리가 또 오게 될 게 아닌가."
김삿갓도 웃으며 말했다.
"술이 아무리 좋기로
형공(兄公)의 우정(友情)만이야 하겠소이까,
하룻밤 자고 떠나려던 노릇이 나흘이나
묵은 것은 형공(兄公)의 정성(精誠)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소."
그것은 사실(事實)이었다.
술이 좋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고,
사흘 동안이나 묵은 것은
지환(志煥)이라는 산사람(山人)의 우정(友情)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지환(吳志煥)도 무언가
느껴지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굳이 떠나신다면 억지로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돌아오는 가을부터는 해마다 머루주를 잔뜩 담아 놓고, 두 분이 다시 찾아와 주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야말로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우정(友情)이었다.
이별(離別)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다.
세 사람이 삼거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자,
양상문(梁想文)은 김삿갓의 옷소매를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헤어지면,
선생(先生)을 어느 세월(歲月)에나
또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김삿갓은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感動)이 밀려 왔지만, 말만은 예사롭지 않게 답했다.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설사 못 만나는
한이 있어도, 노형(老兄)이 베풀어 주신
엽전 한 닢만은 죽는 날까지 신주(神主)처럼
품에 지니고 살아가겠소이다."
양상문(梁想文)은 대답(對答)하지 못하고,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리 사라지는
김삿갓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지환(吳志煥)과 함께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52) ●
☆ 보살 같은 무하향(無何鄕) 주모(酒母).
수안(遂安)에서 구월산(九月山)이 있는
은률(殷栗)로 가려면 사리원(沙里院)을
거쳐야 했다.
사리원(沙里院)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김삿갓 산을 하나 넘어가니 술집이 보였다.
집은 게딱지같이 초라해 보이건만,
옥호(屋號)는 요란(搖亂·擾亂)스럽게도
무하향(無何鄕)이라고 붙어 있었다.
술청의 주모(酒母)는 육십을 넘겼음 직한
젊은 할머니였다.
"주모(酒母)! 술 한 잔 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 놓고 술청에 걸터앉으며 다시 말했다.
"게딱지 같은 집에 무하향(無何鄕)이라는
간판(看板)은 너무도 격에 어울리지 않소이다.
주모(酒母)는 무하향(無何鄕)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나 하고 간판(看板)을 내거신 것이오?"
주모(酒母)는 술을 따라 주면서,
"무하향(無何鄕)이라는 말이 어서 나온 것인지, 술장수가 그런 건 알아서 뭐 한다오?
그저,
지나가는 손님이 술 한 잔 사 마시고 나서,
나무토막에 그렇게 써주기에 내버리기가
아까워서 걸어 놓았을 뿐이라오."
김삿갓은 술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
"게딱지 같은 주막(酒幕)에 무하향(無何鄕)이라는 간판(看板)은 ‘개 발에 편자’격이니 떼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하고 무책임(無責任)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모(酒母)는 몹시 아니꼬운 듯,
술을 따르다 말고 김삿갓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김삿갓은 약간 무안(無顔)한 생각이 들어
웃어 보이며 묻는다.
"술을 따르다 말고 왜 내 얼굴만 쳐다보시오."
그러자 주모(酒母)는 다시 술을 따라 주며
혼잣말로 탄식(歎息)하듯 말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다뇨?
무엇이 기가 막히다 는 말이오?"
주모(酒母)는 그제야 정색(正色)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다.
"손님은 말끝마다 게딱지 같다는 말을 하는데, 게딱지가 어쨌단 말이오? 게가 그 말을 들으면 손님을 얼마나 나무랄 것이오?
손님 눈에는 게가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정작 게한테는 자기 딱지야말로
전 우주(宇宙)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런 것쯤은 알만한 분이
왜 이렇게도 입이 점잖지 못하시오."
김삿갓은 주모(酒母)의 질책(叱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주모(酒母)의 말이
구구절절(句句節節)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이 노파(老婆)가 보통 노파(老婆)가 아니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게딱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실언(失言)을
했소이다. 정식(定式)으로 사과(謝過)할 테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시오.“
하고 고개를 수그려 보였다.
그러자 주모(酒母)는 싱긋 웃어 보이며,
"내가 늙은 것만 믿고, 손님에게 말버릇이
지나치게 불손(不遜)했던 것 같구려.
그런 의미(意味)에서 내가
술 한 잔 따라 드리리다." 하며
술을 한 잔 따라 주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말이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노파(老婆)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모(酒母)는 혼자 사시는 모양(模樣)인데
자녀(子女)가 한 명도 없으신가요?"하고 물었다.
"자식(子息)이 없기는 왜 없겠어요.
아들딸이 자그마치 일곱 명이나 있다오."
"옛! 아들딸이 일곱 명이나 있다고요?
그런데 자식(子息)들은 어디 가고
혼자만 산다는 말이오?"
"더러는 중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제 아비를 찾아가기도 했고, 계집애는 사내놈과 배가 맞아 도망(逃亡)을 쳐버리기도 했고, 결국(結局) 나는, 혼자 살다 죽으려나 봅니다."
주모(酒母)의 말만 들어서는 처량(凄涼)하기 짝이 없었지만, 주모(酒母)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태연(泰然)하기만 하였다.
김삿갓은
주모(酒母)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러는 아비를 찾아갔다니요?
그렇다면 영감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딴 집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요?"
주모(酒母)는 머리를 좌우(左右)로 흔들며,
"아니지요. 내가 팔자(八字)가 워낙 기박(奇薄)해 열아홉에 아들 형제(兄弟)를 남겨 받고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다오.
부득이(不得已) 개가(改嫁)하여
이번에는 남매(男妹)를 낳았는데
두 번째 서방이 또 죽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기로,
결심(決心)을 하였다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없는 부잣집 영감님이 나를 찾아와서,
돈을 많이 줄 테니 아들을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예요."
"소실(小室)로 데려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만 낳아 달라는 말인가요?"
"물론이죠. 아이가 넷씩이나 달려 있는
과부(寡婦)를 누가 소실(小室)로 데려가겠어요?
나 또한 죽으면 죽었지,
남의 집 소실(小室)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면 돈을 받고 아들을 낳는
기계(機械) 노릇만 해달라는 말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지요. 그렇게 아들을 낳아두 돌 만에 곱게 돌려주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영감님이 찾아와서
아들딸 간에 하나만 낳아 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누구의 부탁(付託)은 들어주고
누구의 부탁(付託)은 거절(拒絶)하기가 안 되어, 결국(結局)은 그런 식으로 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아 주었다오."
전설(傳說)의 고향(故鄕)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를 주모(酒母)는 추호(秋毫)의,
부끄러움도 없이 담담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물론 자식(子息)을 넷이나 키우며
혼자 살아가기가 오죽이나 어려웠으면
남의 아이를 셋씩이나 낳아 주었을 것인가!
이렇듯 남의 아이를 낳아,
두 돌이 될 때까지 정성(精誠)스럽게 키워서
꼬박꼬박 돌려주었다는 것은 부처님 같은
자비심(慈悲心)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주모(酒母)를 대하기에 마치, 생불(生佛)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숙연(肅然)해 오기까지 하였다.
"아니, 그러면 세 사람이 모두 자식(子息)만
낳아 가지고 가고, 같이 살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오?"
"그런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첩살이는
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 거절(拒絶)해 버렸다오."
주모(酒母)는 팔자(八字)를 고칠 기회(機會)가 많았음에도 지금까지 독신(獨身)으로 살아온 것을 보면, 본바탕이 음탕(淫蕩)한 여자(女子)가 아닌 것만은 확실(確實)해 보였다.
"그러면 두 남편(男便) 몸에서 낳은
네 남매(男妹)는 어디로 가고
지금(只今)은 혼자만 살고 계시오?"
"아들 셋 가운데 둘은 스님을 따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버렸고,
한 아이는 호랑이한테 물려 갔는지
집을 나간 채 영영 종적을 모르겠고,
하나밖에 없는 계집아이는 어떤 놈팽이와
배가 맞아 도망(逃亡)갔다오.
지금(只今)은 평양(平壤)서 기생질을 한다는
소문(所聞)이 들려 오는데,
사실(事實)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김삿갓은 "기생"이라는 소리에 흥미가 느껴져서 "평양(平壤)에서 기생(妓生) 노릇을 한다고요?
나도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인데
한 번 찾아보리다. 그런데 따님의 이름은
뭐라고 하지요?"하고 물어보았다.
주모(酒母)는 자식(子息)들에게 아무것도
기대(期待·企待)하는 것이 없는지,
심드렁한 어조(語調)로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집을 나간 지가 하도 오래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어렸을 때는 가실(可實)이라고 불렀지만,
기생(妓生)이 되고 나서는 이름을 뭐라고
바꿨는지는 모르지요."
김삿갓은 쓴웃음을 웃으며,
"모녀간(母女間)의
정리(情理)가 그럴 수가 있겠어요?
지금(只今)도 가끔 보고 싶기는 하겠지요?"
"솔직(率直)히 말해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품 안을 떠나 버리면 자식(子息)도
남과 다를 것이 없는걸요.
내 자식(子息)과
남의 자식(子息) 구별(區別)을 하면 걱정도
생기고 번뇌(煩惱)도 일어난다면서요?"
주모(酒母)의 말을 경청(傾聽)하던 김삿갓은
마음속에 담긴 말을 주모(酒母)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생활(生活) 신념(信念)이 그렇게 뚜렷한 것을 보니, 보통(普通) 분이 아니오.
자!
그런 뜻에서 기분(氣分) 좋게 한 잔 마십시다."
김삿갓은 주모(酒母)에게도 술을 한 잔 따라 주고, 술잔을 주모(酒母)의 눈높이로 치켜들었다.
花飛有底急 (화비유저급)
◎ 무슨 일 급하기에 이리도 꽃은 지리? ◎
老去願春遲 (노거원춘지)
◎ 늙는 몸 원하기는 봄 더디 가는 일을 ◎
可惜歡娛地 (가석환오지)
◎ 애달프니 즐기며 노니는 자리 ◎
都非少壯時 (도비소장시)
◎ 어딜 가나 젊은 때는 이미 아니어라 ◎
▶ 寬心應是酒 (관심응시주)
◎이 마음 달래기야 술이 으뜸이요 ◎
遣興莫過詩 (견흥막과시)
◎흥을 풀 것 시 위에 다시없으니 ◎
此意陶潛解 (차의도잠해)
◎ 내 마음 도잠은 알았으리만 ◎
吾生後汝期 (오생후여기)
◎ 태어나기 늦었으니 어찌나 하랴? ◎
● 방랑시인 김삿갓 2부-(53) ●
☆ 주막 무하향 에서 만난, 낯선 사내 백종원
김삿갓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데,
문득 문이 벌컥 열리며
40세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오더니,
대청마루에 털썩 걸터앉으며
푸념 조 말을 했다.
"아주머니! 나 술 한 잔 주소. 제기랄!
계집년들 등쌀에 사람이
살 수 있어야 말이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주모(酒母)가 얼른 술을 따라 주며 묻는다.
"계집년들이
뭐가 어쨌다고 혼자 화를 내시오?"
김삿갓은 그 기회(機會)에 사나이의
용모(容貌)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이는 사십(四十)이 되었을까 넘었을까,
몸이 우람하고 상투가 큼지막한 데다가
이마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아울러
사내의 눈꼬리가 찢어져 올라간 것으로 보아,
결코 순박(淳朴)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나이는 술 한잔을 쭉 들이키고
술잔을 술상 위에 탁 내려놓으며,
"계집년 얘기는 말도 마시오. 그년들 때문에
이제는 내가 신물이 날 지경(地境)이라오."
그리고 김삿갓의 얼굴을
잠시(暫時)나마 멀거니 바라보더니
별안간(瞥眼間) 깜짝 놀라 보이며,
"아니 이거, 자네는 천마산(天摩山)에 사는
이 서방 아닌가? 여보게, 이거 얼마 만인가?“
하고 외치며, 김삿갓에게
다가와서 대뜸 손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형(老兄)이 사람을 잘못 보셨소이다.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김 서방이오.“
그러나 상대방(相對方)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끼 이 친구(親舊)야!
옛날 친분(親分)을 생각해서도
자네가 나를 모른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백종원(白鐘元)일세,
자네가 성(姓)까지 바꿔 가면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생면(生面) 부지(不知)의 사나이가
얼토당토않은 고집(固執)을 부리자
김삿갓은 매우 난처(難處)한 심정(心情)이었다.
김삿갓은 백종원(白鐘元)이라는 사내에게
빙그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마 이 서방이라는 친구(親舊)가
나하고 어지간히 닮은 모양(模樣)이구려.
그러나 나는
이 서방이 아니고 틀림없는 김 서방입니다.
얼굴이 비슷해서 착각(錯覺)을 일으킨
모양(模樣)이지만, 자세(仔細)히 보면
어딘가 다른 데가 있을 것이오.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은 얼굴을 일부러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백종원(白鐘元)이라는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을 면구(面-)스러울 정도로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문득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을 했다.
"내가
노형에게 큰 실수를 했소이다. 내 친구는
왼쪽 뺨에 커다란 점이 있는데,
노형(老兄)의 뺨에는 검은 점(點)이 없군요.
내가 실수(失手)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그러나저러나 노형(老兄)은 어쩌면
내 친구(親舊)와 얼굴이 그렇게도 닮으셨소.
그래서 그런지, 노형(老兄)은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가 않구려.
그런 뜻에서 한잔합시다."
어쩐지 행실(行實)이 수상(殊常)하다 싶었지만,
김삿갓은 백종원(白鐘元)이 내민
술잔을 물리칠 생각은 없었다.
"좋소이다. 나는 비록 이 서방은 아니지만,
친구(親舊)가 별거 있겠소.
함께 어울리면 친구(親舊)지."
"옳으신 말씀이오. 김 서방이나 이 서방이나
모두가 사람이기는, 매일반일 것이오. 하하하!."
백종원(白鐘元)은 호탕(豪宕)하게 웃고는 문득 주모(酒母)를 쳐다보며 수작(酬酌)을 부렸다.
"주모(酒母)는 성(姓)을 뭐라고 하오?
설마 성(姓)이 주가는 아니겠지?"
주모(酒母)는 백종원(白鐘元)에게
가볍게 나무라는 어조(語調)로,
"여보세요, 성(姓)을 갈면 개자식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누구를 개자식으로 만들려고
그런 농담(弄談)을 하시오."
"주가가 아니란 말이구려.
그러면 진짜 성(姓)은 뭐라고 하오?“
"내 성은 천씨(千氏)라오.
본관(本貫)은 영양(潁陽)이구요."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을 했다.
"천씨(千氏)라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전공(戰功)을 올린 사암(思庵) 천만리(千萬里)의 후손(後孫)인가 보구려?"
주모(酒母)는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어머나! 손님은 우리 가문(家門)의
내력(來歷)을 잘도 아시네요."
그러나 백종원(白鐘元)은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씰룩거리면서
대뜸 시비조(是非調)로 나왔다.
"주모(酒母)는 왜 그렇게도 건방지지?"
"성(姓)이 뭐냐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對答)했을 뿐인데
뭐가 건방지다는 거예요?"
"왜 건방지다는 것인지 몰라서 묻나?
내 성(姓)이 백가인데,
주모(酒母)의 성(姓)은 내 성(姓)보다
더 열 갑 절이나 높은 천가라고 하니,
그런 건방진 성이 어디 있어?
오늘부터는 "千"자의 대가리를
툭 쳐버리고 ‘十哥’ 라고 해요.
그래야만 격에 어울릴 거야.
내 말 알아듣겠지!"
이렇게 백종원(白鐘元)이라는 사내가
주모(酒母)의 성(姓)을 가지고
생트집을 잡는 바람에,
김삿갓은 배를 움켜잡고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화제(話題)를 돌리기 위해서
백종원(白鐘元)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姓)이라는 것은
본인(本人)의 의사(意思)와는 아무
관계(關係)도 없이 피동적(被動的)으로
타고나는 것인데,
남의 성(姓)을 가지고 나무라면 어떡하오?
천가면 어떻고 백가면 어떻소?
사람은 다 마찬가지인걸, 나는 그보다도
노형(老兄)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백종원(白鐘元)은
술을 한잔 들이키고 나서 반문(反問)했다.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오?"
"노형(老兄)은 아까 이 집에 들어설 때
계집년들 등쌀에 신물이 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소?
어떤 연유(緣由)로 그런 말로 화를 냈는지,
그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그러자
백종원(白鐘元)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 얘기 말인가요? 그 얘기라면
창피(猖披)스러워서 말도 하고 싶지 않소이다."
"말을 할 수 없다니까 더욱 듣고 싶구려.
오가다 만난,
우리 사이에 창피(猖披)스러울 것이 뭐 있겠소.
이왕(已往)이면 기탄(忌憚)없이 들려주시구려."
그러자 백종원(白鐘元)은
문득 생각이 달라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기는 사내들이란 너 나 없이 모두가 똑같은 동물(動物)이니까,
노형(老兄)도 내 이야기를 들어 두면
많은 참고(參考)가 될 것이니 잘 들어 보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백종원(白鐘元)은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를
한집에 데리고 살기 때문에, 두 여인(女人)
사이에는 사소(些少)한 일을 가지고도,
하루가 멀다고 싸우기 일쑤였다.
오늘도 큰마누라와 작은마누라가
서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년 저년 하며 대판 싸우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두 마누라가
서로 싸우는 꼴을 본 백종원(白鐘元)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편을 나무라고 다른 편을
두둔할 수도 없는 형편(形便)이었다.
백종원(白鐘元)은 생각다 못해
작은 마누라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건넌 방으로 끌고 가며 이렇게 호통쳤다.
"이년아!
너 같은 계집년은 숫제 죽여버려야겠다.“
작은마누라를 야단치며 끌고 가야만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설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정작 작은마누라를 건넌방으로 끌고
건너왔을 때, 젊은 계집이 탐스러운 젖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을 보자,
백종원(白鐘元)은 별안간(瞥眼間)
욕정(欲情)이 솟구쳐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작은마누라를 모두 벗겨 놓고
낮 거리를 정신(精神)없이 하고 있는데,
별안간(瞥眼間) 방문(房門)이 홱 열리더니
큰마누라가 비호(飛虎)같이 덤벼들어
백종원(白鐘元)의 등덜미를 움켜잡고
끌어당기며 다음과 같이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다.
"이 잡놈아!
저년을 이런 식으로 죽여 주려거든,
왜, 나를 먼저 죽여 주지 않고,
저년 먼저 죽여주냐!"
(이, 오라를 칠 놈아!)
● 방랑시인 김삿갓 2부(54) ●
☆ 부처님 같은 김삿갓, 보살 같은 주모. ☆
김삿갓과 주모(酒母)는
그 말을 듣자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하하하, 두 마누라를 한 집에서 거느린다는
것은, 보통(普通) 예삿일이 아닌가 보구려."
주모(酒母)도 웃어가며 덩달아 말을 했다.
"호호호, 이왕(已往)이면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큰마누라도 죽여 주지 그랬어요?"
"에이 여보시오, 내가 물개인 줄 아시오?"
그 소리에 술자리는 또다시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이 백종원(白鐘元)에게 물었다.
"그래, 작은 마누라 배 위에 엎어져 있던
노형(老兄)의 뒷덜미를 낚아채, 자기(自己)
먼저 죽여 달라는 큰마누라는 어찌하셨소?"
그러자 백종원(白鐘元)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對答)했다.
"다 늙어빠진 마누라를 무슨 재미로 죽여 주오?
큰마누라한테 도대체 흥미(興味)가 없어,
부득이(不得已) 작은마누라를 얻게 됐는걸요."
그러자 주모(酒母)가 정색(正色)하며
백종원(白鐘元)을 나무랐다.
"그건 너무 하시오. 작은마누라만 죽여 주고
큰마누라는 돌아보지도 않게 되면
큰마누라가 얼마나 원통(冤痛)하겠어요?"
"워낙 많이 써먹어서 온통 닳고 닳아 더는
못 쓰게 되어 버린 걸 어떡하냐는 말이오."
주모(酒母)가 화를 내며 말을 했다.
"모르는 소리 그만하시오. 여자(女子)는
화로(火爐)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화로(火爐)는
평소(平素)에는 냉랭(冷冷)하지만
숯불을 활짝 피워 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법이에요."
김삿갓은
주모(酒母)의 말을 듣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하! 하! 하!, 주모. 남자(男子)가
화로(火爐)와 같다는 소리는 들어보았으나,
여자(女子)가 화로(火爐) 같다는 말은
생전(生前) 처음 듣는 말이오."
그러자 주모(酒母)와 백종원(白鐘元)이
거의 동시(同時)에 김삿갓에게 물었다.
"남자를 어떻게 화로(火爐)에 비교(比較)한다는 말이오?"
김삿갓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對答)했다.
"지금(只今)부터 내가 남자(男子)의 성정(性情)을 연령별(年齡別)로 불에 비유(比喩)해 볼 테니 잘 들어 보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대 남자(男子)는, "장작불" 경험(經驗)이 많지 않아, 빨리 타고 쉽게 꺼진다.
30대 남자(男子)는, "연탄불"
경험(經驗)도 적당(適當)히 쌓여서
제법 오래 탄다.
40대 남자(男子)는, "담뱃불" 불은 불인데,
"쪽쪽" 빨아 줘야 겨우 불같이 보인다.
50대 남자(男子)는, "화롯불" 속을 헤쳐서 찾아보아야 겨우, 불을 발견(發見)할 수 있다.
60대 남자(男子)는, "번갯불"
불은 불인데, 쓸 수 없는 불이다.
70대 남자(男子)는, "반딧불"
불도 아닌 것이 불인척한다.
"하! 하! 하! 하!“
김삿갓의 말이 끝나자 백종원(白鐘元)은
대굴대굴 구르며 배를 움켜잡았다.
”호! 호! 호! 호!"
주모(酒母) 또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혀 배꼽을 잡았다.
"노형(老兄)도 대단하시오!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백종원(白鐘元)은 기분(氣分) 좋게 웃으며
김삿갓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잡담(雜談)을 한없이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잠자리가 걱정된 김삿갓이
주모(酒母)에게 부탁(付託)했다.
"주모(酒母)! 나 오늘 밤
이 집에서 좀 자고 갈 수 없겠소?"
그러자 주모(酒母)가 대답(對答)했다.
"방은 하나밖에 없어서 안 되겠고,
술청이라도 괜찮다면 자고 가시구려."
김삿갓은
좋은 방 나쁜 방을 가릴 형편(形便)이 못됐다.
"술청이라도 좋으니 재워 주기만 하시오.
그런데 술값은 얼마죠? 우선 술값을 계산(計算)합시다.“
김삿갓은 주모(酒母)의 말대로
전대(纏帶) 속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
백종원(白鐘元)은 김삿갓의 전대(纏帶) 속에 돈이 두둑이 들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瞬間), 눈빛이 이상(異常)하게 희번덕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백종원(白鐘元)에게 말을 건넸다.
"노형(老兄)도 집에 돌아가 보았자 어느 마누라도 환영(歡迎)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오늘 밤은 차라리 여기서 나하고 같이 자는 것이 어떻겠소?"
백종원(白鐘元)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뒤로 훌렁 자빠져 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마누라 등쌀에 나도 갈 데가 없는 몸이오."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으면서 갈 데가 없다니, 그야말로 졸지(猝地)에
처량(凄涼)한 신세(身世)가 되었구려."
"그러니까 나도 여기서 자고 가야지 되겠소.“
"잘 생각하셨소. 서방 귀한 줄을 알게 하려면
가끔 외박(外泊)도 필요(必要)한 것이라오."
김삿갓은 그런 농담(弄談)까지 해가며
등잔(燈盞)을 끄고 누워 버렸다.
새벽 어스름한 시각(時刻)에
김삿갓은 왠지 몸이 서늘해 오는
기분(氣分)이 들어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백종원(白鐘元)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이상한 예감(豫感)이 들어 허리를 만져 보니,
간밤에 분명(分明)히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纏帶)가 없어졌다.
(앗! 이 사람이 돈을 훔쳐서 달아났단 말인가?)
그러나 김삿갓은 백종원(白鐘元)이라는
친구(親舊)가 전대(纏帶)를 훔쳐 갔으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술까지 나눠 먹은 그 친구(親舊)가
설마 돈을 훔쳐 가기야 했을까!)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들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전대(纏帶)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전대(纏帶)는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의심(疑心)스러운 것은 백종원(白鐘元)이 새벽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 알고 보니,그 친구(親舊)는 아주 몹쓸 사람이구나.)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노라니,
주모(酒母)가 방문을 열고 내다 보며 묻는다.
"손님은 아까부터 무엇을 찾고 있어요?
무언가 없어진 게 있어요?"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纏帶)가
간밤에 감쪽같이 없어졌군요.“
그 소리에 주모(酒母)는 깜짝 놀라며,
"에구머니! 전대(纏帶)가 없어지다뇨?"
그리고 사방(四方)을 두루 둘러 보았다.
"같이 자던 백씨(白氏)라는
사람은 어디로 갔고요?“ 하며 묻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군요.“
"옛? 그렇다면 전대(纏帶)는
그 사람이 훔쳐 간 것이 분명(分明)해요.
어쩐지 인상(人相)이 좋지 않은 데다,
큰마누라가 어쩌니, 작은마누라가 어쩌니,
하면서 씨가 먹히지 않는 허풍을 떠는 것이
수상하다 싶더니 역시 그놈이 도둑놈이었군요.
그런 놈을 내 집에서 재웠으니 아이 무서워!.“
하면서 주모(酒母)는 몸서리조차 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러나저러나 돈을 몽땅 도둑맞았으니
어떡하죠?"하고 걱정의 말을 했다.
"돈 좀 없다고 죽기야 하겠어요.
본디 사람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人生)이건만,
그 친구(親舊)가 그런 것을 모르고
인정(人情)머리 없이, 도둑질했으니
나는 잃어버린 돈이 아쉽다기보다도
인정(人情)을 배반(背反)한 그 친구(親舊)의 소행(所行)이 슬프기만 할 뿐이오."
"손님은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나서도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계시네요.
빨리 관가(官家)에 가서 고발(告發)하세요.
그런 놈은 당장(當場)에 잡아다가
물고(物故)를 내야 해요."
"고발(告發)한다고
그 친구(親舊)가 쉽게 잡히리오? 또,
잡아서 물고(物故)를 내게 한들 뭐 하겠소?"
그러자 주모(酒母)가 한마디 하는데,
"관가(官家)에 고발(告發)도 안 하겠다.
돈은 한 푼도 없겠다.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이에요?"
"어떡하긴 무얼 어떡하오. 그 돈의 주인(主人)은 내가 아니라 그 친구(親舊)였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親舊)가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니겠어요?"
"이 양반(兩班) 듣자 하니, 계속 부처님 같은 소리만 하고 있네!"
주모(酒母)가
은근(慇懃)히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하였다.
김삿갓은 빙그레 미소(微笑)를 지으며 말했다.
"부처님이고 보살님이고 간에,
주모(酒母)에게 부탁(付託)이 하나 있소이다."
"무슨 부탁(付託)인데요?“
"내가 돈은 없어도 길을 떠나기 전에
아침을 먹어야 하겠소. 도와주는 셈 치고
아침이나 한 그릇 공짜로 먹여 주시오."
"손님은 참말로 딱한 양반(兩班)이시네.
내 집에서 자고 난 손님을 설마 굶겨서
보낼까 봐 걱정이세요?
곧 아침을 지어 올 테니 편히 앉아 기다리세요."
이렇게 아침을 얻어먹은
김삿갓이 다시 길을 떠나게 되자,
주모(酒母)가 얼마간의 돈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몇 푼 되지 않지만 가지고 떠나세요.
길을 떠나려면 돈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김삿갓은 주모(酒母)의 인정(人情)에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남의 돈을 훔쳐 간 친구(親舊)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인정(人情)인가.
김삿갓은 감격(感激) 어린 어조(語調)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돈은 못 받겠고,
보살(菩薩) 같은 아주머니의 인정(人情)만은
고맙게 받아서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55) ●
☆율곡 이이, 동기유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
술집 무하향(無何鄕)을 나온 김삿갓은
구월산(九月山)을 향해 가면서 웬일인지
마음이 지극(至極)히 허전하였다.
그런 탓 인지 주위(周圍)의 산천(山川)과 경계(境界)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감흥(感興)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럴까. 호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마음이 이토록 심란해진 것일까?)
돌아 보 건데 어제 보던 산천초목(山川草木)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을 리가 만무(萬無)하다.
산(山)도 어제 보던 그 산(山)이요,
물(水)도 어제 흐르던 그 물(水)이다.
어제만 해도 그처럼 아름다워 보이던
산천초목(山川草木)이었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감흥(感興)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직 호주머니가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김삿갓은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심리적(心理的)으로 위축(萎縮)을 느낀
자신(自身)의 인격(人格)이 치사(恥事)스럽게 여겨져 견딜 수 없었다.
(아, 김삿갓이라는 자가 이렇게
치사(恥事)스러운 인간(人間)이던가? 그런
주제에 어떻게 방랑(放浪) 걸인(乞人)으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겠다고
장담(壯談)하고 나섰더란 말인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앉아
한참을 궁리(窮理)하던 김삿갓은
마침내 자리에서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래! 무하향(無何鄕)을 떠나올 때
주모(酒母)에게 말을 한 것처럼,
전대(纏帶)에 들었던 돈은 내 돈이 아니었어!
돈 이란 본디, 돌고 도는 것 아니던가?
영원(永遠)한 내 것도 없고,
영원(永遠)한 남의 것도 아니지.)
김삿갓의 생각이 이에 이르자
마침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김삿갓이 황주(黃州). 봉산(鳳山). 신천(信川). 안악(安岳) 등(等)을 거쳐,
구월산(九月山)이 있는 은률(殷栗)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계절(季節)은
어느새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었다.
황해도(黃海道)는 워낙 가는 곳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이를 두루 살펴보다 보니 걸음이 더뎠다.
구월산(九月山)은 황해도(黃海道)의
주봉(主峯)을 이루는 명산(名山)이다.
그 주변에는 신천(信川), 안악(安岳),
은률(殷栗), 문화(文化), 풍천(豊川),
송화(松禾), 장연(長淵), 장련(長連) 등등(等等).
많은 고을이 산재(散在)하여 있는 것만
보더라도 구월산(九月山)이 황해도(黃海道)의 중심(中心)을 이루고 있는 산(山)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斟酌)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사서(史書)에는
우리 배달의 민족(民族)의 시조(始祖)인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은
구월산(九月山)에서 태어나셨다는 설(說)도
전해 온다.
김삿갓은
구월(九月) 산성(山城)에 올라가 보았다.
성(城)의 형태(形態)와 구조(構造)가
여간 절묘(絶妙)하지 않다.
거석(巨石)으로 쌓아 올린 성(城)의
모양(模樣)은 커다란 배와 같은데,
둘레가 1만 5천 척에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산성(山城)이었다.
성안에는 수목(樹木)이 울창(鬱蒼)하고,
여러 갈래의 물이 성 밖으로 흘러나갈 때는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서 거창(巨創)한
폭포(瀑布)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다.
단풍(丹楓)이 무성(茂盛)한 산길을 걸어
성안으로 들어와 보니,
구월산(九月山) 상상봉(上上峯)이
아득한 하늘가에 높이 솟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산꼭대기에는 단군(檀君) 시대(時代)의 천제단(天祭檀)도 있었다.
김삿갓은 다행(多幸)히
구월산(九月山)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季節), 가을철에 찾아왔기 때문에 실감(實感)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절경(絶景)을 감상(鑑賞)할수 있었다.
황해도(黃海道)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해주(海州)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어,
이번에는 발길을 해주(海州) 쪽으로 돌렸다.
해주(海州) 고을에 발을 들여놓자,
무엇보다도 김삿갓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거유(巨儒) 이율곡(李栗谷)과 동기(童妓)
유지(柳枝)와의 연정(戀情) 설화(說話)였다.
이율곡(李栗谷)이 말년(末年)에
황해(黃海) 감사(監司)로 와 있을 때,
유지(柳枝)라는 동기(童妓)를 사랑한
일이 있었다.
유지(柳枝)는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동기(童妓)였지만, 그녀 역시 율곡(栗谷)을 진심(眞心)으로 존경(尊敬)하고 사모(思慕)하였다.
그러나
율곡(栗谷)은 몸이 몹시 쇠약(衰弱)했고,
유지(柳枝)의 나이가 너무 어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몸은 범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범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율곡(栗谷)의 심정(心情)은 어떠했을 것인가?
율곡(栗谷)이
유지(柳枝)를 두고 읊은 시(詩)를 보면
그간의 심정(心情)을 족히 가름할 수 있다.
弱質羞低首 (약질수저수)
◎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수그려 ◎
秋波不肯回 (추파불긍회)
◎ 추파를 보내도 받아들이지 못하네 ◎
空聞波濤曲 (공문파도곡)
◎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건만 ◎
未夢雲雨臺 (미몽운우대)
◎ 운우의 정은 풀지 못했네. ◎
爾長名應檀 (이장명응단)
◎ 너는 자라서 이름을 떨칠 것이나 ◎
吾衰闔己閉 (오쇠합기폐)
◎ 나는 너무도 늙어 사내가 아니로다 ◎
國香無定主 (국향무정주)
◎ 미인에게는 정한 임자가 없는 법 ◎
零落可憐哉 (영락가련재)
◎ 장래에 영락할 것이 가련하구나 ◎
노쇠(老衰)한 선비와 앳된 동기(童妓)와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애간장이 타는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栗谷)은 동기(童妓) 유지(柳枝)를 두고 이렇게도 한탄(恨歎)하기도 하였다.
天姿綽約 一仙兒 (천자작약 일선아)
◎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
十載相知 意能多 (십재상지 의능다)
◎ 사귄 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는데 ◎
不是吾兒 腸木石 (불시오아 장목석)
◎ 너도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
只緣衰弱 謝芬華 (지연쇠약 사분화)
◎ 다만 몸이 쇠해 사양했을 뿐이로다. ◎
이렇게 율곡(栗谷)이 유지(柳枝)를 지극(至極)히 사랑하면서도, 자신(自身)의 몸이 약해
가까이하지 못한 것은 사내로서는 너무나도
지독(至毒)한 비극(悲劇)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