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르 드 리옹 역에서 야간 열차를 탐니다.재불 화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칸막이 침대칸에 기어 들었다. 몽빠르나스 역에서 벨사이유를 가려다 정처없이 놀망디로 갈뻔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피식웃었다.열차야 프랑스가 최고다. 이음새 없는 철로 위로 덜컹거리지도 않코 전기 공급을 받아 직선으로 쾌적하게 미끄러진다.
3층 침대에서 한숨자다가 복도로 나와보니 마냥 검은 들판을 달리는데 불란서 아저씨 하나가 차장 밖을 바라보며 서있다. "불레브 퓌메? " 그러자 "농 메르시"하더니만 지꺼로 피우겠다며 봉다리 담배를 능숙하게 종이에 말아피운다.하기야 파이프로 피우는 분 따로 시가로 피우는 분 따로 필터없는 지딴이나 골로아즈 피우는 분 따로이니. 유럽에서는 담배도 하나의 문화이고 식사과정에도 포함된다고 보아도 틀림없다.
새벽이 오고 창밖이 밝아오는데 오밤중에 리옹을 지난듯,전기열차는 마르세이유로 들어선다.역사에서 천천이 언덕을 내려가며 처음 만나는 프랑스 제이의 도시를 만난다.좌우지간 아랍인들이 많다.그래그래 항구까지 걸어 어시장을 만나고 근처 오페라 하우스 옆길을 빠져나오는데, 윈느 빰므가 말을 건다."도르미 아베끄 무아 " "꽁비엥 다르장""마담 멩뜨낭 즈내 리엥 빠르동"꼭두 아침에 자자하니 내참.
아침을 먹으러 일단 카페에 들어가서 크로아쌍과 까페오레를 시키는데 남불의 아저씨들이 이 아침에 꼬냑 한잔씩들 하는게 아닌가. 아! 대단하고 멋져 보인다. 자 마르세아유 구경은 이쯤하고 액스로 가는 열차를 타기위해 다시 역으로 가고자 택시를 탓다.
열차는 프로방스의 액스로 접근하는데 맙소사 여기저기 세잔의 집들이며 성당등이 오리브와 소나무 사이에 실제하는 것이 아닌가.이렇케 반가울 수가....드디어 악상 프로방스에 도착하였다. 시내 중심가의 카페에서 한잔하려는데 두사람의 알피니스트가 먹고있길레 말을 부쳤다.
"우 잘레 부"어디가시오 하니까, 처음보는 동양인에게 쌍 빅뚜아르로 간다한다.이순간 내 가슴이 떨리면서 눈동자가 커 졌다. 좀 같이 갈 수 없을까.
그들은 흔쾌히 좋타한다. 이렇게 좋을 수가. 간단하게 바로 그곳으로 접근할 수 있다니, 하느님 감사함니다."즈 쀠 뚜 빠르 꽁빅시옹 끄 므 뽁드삐에"
프랑스에서 산을 보기는 쉽지가 않타 그래 산악인들은 멀리 길을 떠나고 산을 오르는 것을 대단히 즐긴다.그들의 차를 얻어타고 30분 쯤 갔을 때 어머나! 엄호나! 빅뚜아르 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진짜로 길게 누워 바다로 달리다 벼랑으로 멈춰선 빅뚜아르가 그렇게 내 앞에 실재하는 것이 아닌가.으흐흐흐흐.
이 친구들이 단애 밑에서 밧줄과 함께 산악 장비를 끄집어 내드니만 함께 오르자고 청한다. 대단히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모래의 국제회의 건도 있고 시간도 그렇코 그냥 생 빅또아르산을 멀리서 보고싶어서 고맙지만 정중히 함께 오르지 못함을 미안해하면서 그들과 헤어 졌다.
두대의 카메라가 하나도 셔터가 내려가지 않는다. 고장이다. 꼭 필요할때면 희한하게 작동을 멈춘다. 환장하겠는데 어쩔수 없지 마음 속에 가득히 그리고 세세하게 이산과 주변을 세겨넣을 도리 밖에 없다. 그리해서 천천히 세잔느의 그림속에 실제로 빠져 남불의 소나무와 굴참나무와 벗하면서 보고 또 보고.... 참아 떨어지지 않는 발거름으로 한겨울 녹색의 나무바다위에 떠있는 빅뚜아르를 뒤로두고 액스로 택시잡아타고 돌아왔다.
매우 싼 호텔을 잡고 밤의 액스를 구경하는데 여기는 왠학생들이 그리 많은지,광장의 카페로 가서 굴과 조개와 호밀 빵과 꼬뜨 드 뢘으로 저녁을 떼우고 마지막으로 보드카 한잔하고 프로방스의 감격을 잠져웠다.
아침 일찍 세잔느의 작업실로 향했는데 100년이 지난 언덕위의 이층집은 그데로인데 마침 휴관일인지 문이 잠겨 속을 드려다 볼수 없었다. 관리인도 보이지 않코,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액스의 역사로 발거름을 놓았다.미스트랄을 기대했었는데 불지않는것 갔았다. 다시 세잔느의 풍경 속을 뚫고 마르세이유로 내려왔다.
빠리로 향한 떼제베에 올라 겁나는 속도로 프랑스 평원을 달렸다.자식들 정말 시속 300KM로 달리는데 잘 만들었네 하면서 고속 열차 내의 바아로 가서 또 와인 한병 거나하게 마셨다. 서구의 열차는 이게 마음에 들어 하면서.....
이렇게 내게 프로방스와 엑스와 생 빅뚜아르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갸르 드 리옹으로 돌아왔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다. 첫째가 현재 인간의 모습을 직시하게 한 이브의 사과이고, 둘 째가 과학의 중요한 원리를 알게 한 뉴튼의 사과이며, 셋째가 현대미술의 모태가 된 세잔의 사과이다. 세잔은 사과 하나로 미슬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가라 할수있다. 그를 반 고흐나 폴 고갱에 견주는 일은 격에 맞지 않다
이렇게 내게 프로방스와 엑스와 생 빅뚜아르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갸르 드 리옹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올리브 아래 졸고
시골녁은 이를 껴앉아
소나무향은 이를 내뿜는다.
태양은 이를 축하하고
붉은 땅에 벼랑에 번쩍이는 소나무에 숨겨진체로
뒤섞인체로 프로방스의 마음은 흐트러져,
아 마치 세잔느의 그림을 보고있는 것 같구나
풍경으로 뒤덮힌체 빛깔의 계시로
정신과 믿음의 교감을 보여주누나
구부러진 정적의 바위와
마른땅위에 열정으로 쏟아부은 붉은 혈액이며
무거운 수평선의 덩어리
타오르는 바다
강기슭
그림속에 거칠지만 부드러움으로 짜여진
고상함이여 순수함이여
태양으로 건조된 수확들이여 그림이여
목욕하는 강물의 아이들
그리고 공기
공기는 기억하고 알고 있구나
그가 각성시키고자하는 종교적인 것 같은
숭고한 모든 형태
성서적 시대의 나무와 바위로 부터
쏟아져 나오는 말들
그러한 감각
다시 사들이고자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든것
하나님을 갈구하는 세상
프로방스의 마음은 우리중에 내려오리
그 유명한 생 빅토아르 산입니다. 하얀 바위 산의 모양이 독특해 많은 사람이 이 산을 그렸습니다.
세잔이 그린 저 유명한 <생 빅토아르산>입니다. 세잔은 이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그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형태가 단순해지고 완전히 재창조됐습니다.
이래서 이른바 '입체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이 그림은 오르세에서 찍은 것입니다.)
바라고 있으려니
’생트 빅투아르산 Mont Sainte-victoire’
프로방스를 우리에게 영원히 낙원으로 기억되게 만든 또 하나의 화가는 세잔입니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고흐와는 달리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세잔은 프로방스의 또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839년 이곳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세잔은 평생을 프로방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1906년 이곳 프로방스에 묻혔습니다.
TGV역에 도착하면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역의 출입구 이름도 ‘세잔의 문’이죠. 시내에서는 세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세잔의 거리’ 가 따로 있습니다. 세잔의 얼굴은 마을 골목에서, 식당에서, 상점에서 우리를 맞이하죠. 세잔이 다닌 학교, 결혼식을 올린 시청, 그의 아틀리에, 세잔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생트 빅트아르산과 마을의 모습.. ‘세잔 루트’를 따라가면 어느새 세잔과 함께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로방스에서는 모든 것이 세잔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드넓은 프로방스의 평지를 굽어보는 바위산, 웅장하고 장엄하면서도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신비로운 생트 빅투아르는 오늘도 관광객들로 북적거립니다. 삼각형 모양의 두 개의 산등성이를 가진 돌산 일뿐이지만 생트 빅투아르는 ‘세잔의 산’으로 세잔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의 성지이죠.
세잔이 이 산을 소재로 한 그림은 수집 점에 이릅니다. 고향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끊임없이 화폭에 담아가던 세잔이 말년에 집중적으로 그린 소개자 바로 이 산이죠. 세잔은 ‘같은 사물이라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참으로 흥미진진한 연구 대상이 된다’고 말하면서 이 모티프에 강한 애착을 보였습니다. 세잔은 몇 달 동안 보리수 그늘의 같은 자리에 앉아서 단지 각도만 달리한 작품을 쏟아내었습니다.
생트 빅투아르산은 세잔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파리에서의 작품활동을 마치고 고향인 프로방스로 돌아온 세잔을 제일 먼저 맞이해준 것이 바로 생트 빅투아르산이었을 것입니다. 기차역에 내려서 저 멀리 보이는, 평온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산은 세잔을 품에 안았습니다. 산은 세잔에게 어린 절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려주었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었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습니다. 세잔은 그런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고, 생트 빅투아르산을 자신의 온몸으로 사랑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빼고 세잔을 생각할 수 없고, 세잔을 빼고 이 산을 떠 올릴 수 없습니다. 한 화가의 열정이 담긴 그림을 보면서 그리고 그림의 소재가 되어준 산과 마주하면서 우리는 세잔을 사로잡은 풍경 속으로 같이 걸어가게 되는 것이죠.
참.. 이 산의 북쪽에는 미술의 왕이 잠들어있습니다. 바로 피카소인데요, 피카소는 세잔을 진정한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숭배했고 1958년 세잔을 따라 생트 빅투아르 산으로 왔습니다. 그는 산의 북쪽 ‘브나그르 성 Chateau Vauvenargues’ 을 매입, 죽어서 이곳에 묻혔습니다. 자신의 위대한 스승의 영혼과 그가 사랑했
번뇌와 격정 내 몰라라
고집과 어리석음 내 본성이로다
누가 우숩게 보드라도
내가 길들인 질서가
기다리노니
그리하여 어느듯 이루었나니
옐리 옐리 사막다
이리하여 하늘이 집과 산과 섞이고
산은 바다로 방향을 잡는다
신종 사과의 조상이여
그냥 테이블 위에 남으려나
사과 이외의 아뭇것도아닌
사과일러라
어디로 달리려는가
상 빅또아르산아!
메디트리안을 굽어 보게나
멱감으로나 가세
삼각의 지주속에서
욕정의 군상들 나신으로 자리잡아
의도되로 누울레라
오르탕스 삐게여
깍지 낀체로 앉아 있게나
에밀 졸라야 이 바보같은 놈아
어찌 멋진 신세계를 알아보리
모멸과 왕따의 시절 가고
약속의 땅에 이르렀네
짜식들 이제야 멀 알 겠느냐
아직도 오줌똥 못 가리누나
나 여기 살리라
청 황색이 넘나드는곳
상위에 흰 도자기 곁에서
오르탕스 삐게
나는 쓸데없는 선입견을 버리기로 하고 세잔느가 오르고 내렸던 아뜰리에로 오르는 층계를 천천히 올랐다. 세잔느가 « 뤼 불르공 »에 있는 집과 아뜰리에를 오가느라 걷던 언덕길을 방금 걸어오면서 마음속에 새기던 세잔느에 대한 경의를 되살려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갔다.
이 화실은 세잔느가 고통스러운 고독과 싸우면서 이룩한 현대미술의 산실이다. 그냥 보통의 작업실이 아니다.
세잔느는 1901년에 이 화실을 짓고 여기서 고작 6년 밖에 일을 못했지만 대작 « 목욕하는 여인들 »을 여기서 « 사인 »했다.
세잔느는 말년에 목욕하는 여인들을 여러 폭 그렸는데, 이때 그린 대작 중의 하나는 미국의 « 반스 »재단이 가지고 있고, 또 하나의 걸작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다.
지금 이 아뜰리에는 세잔느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정물과 소도구들을 보관하고 있는 엉성한 창고처럼 보일 뿐이다.
북쪽 벽을 다 차지한 유리창, 천장 밑까지 유화를 말리고 내리기 위해 오르내렸던 높은 사다리, 화실에 비해서 터무니 없이 작은 무쇠난로와 검은색 길다란 연통, 몇 개의 낮은 장농들, 프로방스의 무늬와 형태의 « 파이앙스 »도자기들, 무거운 대형 캔버스를 톱니바퀴를 이용한 손잡이를 돌려 올렸다 내렸다 했던 거대한 이젤, 그리고 찌그러진 의자들, 등받이 없는 의자들이 주인을 못 찾고 아무렇게나 뒹굴러 있는듯하다.
서쪽벽 허리를 가로질른 띠같이 끝에서 끝까지 달아 맨 좁은 선반엔 정물화에서 본 여러가지 정물화 소도구들이 얹혀 있다 ; 꽃병, 접시, « 럼 »술병, 생강절임 단지, 과일설탕절임단지, 올리브를 넣는 병, 찻주전자, 갖가지 컵, 또 프로방스의 파이앙스도자기, 칼…
한쪽 정물화 탁자위엔 « 사랑의 신 » 석고상, 찌그러진 병, 줄무늬 하얀 내프킨, 설탕그릇, « 파이앙스 » 항아리등이 정물화 구도대로 재현되어 놓여있다.
그 옆엔 바래고 때가 낀 « 오리엔탈 카펫트 »위에 세잔느가 평생 쳐다 보며 지냈던 해골 3개가 고스란히 놓여있다.
유리창 옆 어두운 구석엔 그가 입었던 여러 벌의 외출망또가 넝마같이 나무못에 주르르 걸려있고, 그 옆에는 여러 개의 못생긴 단장이 꽂혀있다.
출구 가까이에 있는 탁자엔 썩어가는 양파와 오그라든 사과가 언제 바꾸어 놓았는지 모르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죽어간 현대 회화의 고독한 순교자
현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느는 죽기 불과 5년전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아틀리에의 보리수 아래서 정원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고독한 예술가의 삶을 마감했다.
남프랑스의 조그마한 마을인 엑상 프로방스는 유명한 화가 폴 세잔느와 소설가 에밀 졸라의 고향이다. 이곳 대학에서는 에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 이 강의되고, 주르당 공원에는 졸라의 두상을 새긴 조각상이 소나무 그늘 밑에 서 있다. 그러나 엑스하면 무엇보다도 셍트 빅트와르산이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산은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 같기도 하고 하늘의 구름더미가 무너져 내려앉은 것 같기도 하다. 세잔느가 만년에 줄기차게 화폭에 담았던 산이어서 이제는 이 화가와 관련짓지 않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세잔느는 엑스의 도처에서 이 바위산을
응시했고 또 화폭에 담았다.
아버지가 사들인 대저택 자스 드 부팡에서도, 여동생의 남편이 사들인 소유지 몽브라앙에서도, 자신이 방 한 칸을 세내어 들었던 샤토 누와르에서도, 비베뮈스 채석장에서도, 톨로네의 꼬불거리는 산길에서도 그는 줄곧 셍트 빅트와르 산을 바라보며 붓을 놀렸다. 셍트 빅트와르 산은 무엇보다도 보호와 구원의 상징이요, 시선의 지평이요, 배경이며 중심이다. 세잔느의 그림들 덕분에 셍트 빅트와르산은 세계 도처에 있는 것이다.
세잔느는 1839년 1월 19일 엑상 프로방스 시내의 오페라가 28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이 작은 도시의 손바닥만한 구시가를 거닐면 이 위대한 화가가 일생을 거쳐간 공간들을 스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엑스 시내를 거니는 무심한 관광객이나 행인들에게 예술가 세잔느를 진정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세잔느 라는 이름만이 도처에서 좀 엉뚱하고 민망스러울 만큼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엑스의 심장부 중에서도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쿠르 미라보 거리를 따라 올라가노라면 그 왼쪽 편에 유명한 카페 되 가르송 이 나타난다. 그 옆으로 난 파브로가를 끼고 도는 모퉁이 집의 아래층은 고급 가방과 가죽제품을 파는 상점인데 그 윗층의 벽면에서는 거의 다 지워져가는 글자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잇다. CHA P... GROS ET DETAIL... (모자... 도매와 소매...) 여기에 세잔느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의 모자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희미하게 남은 몇 글자를 보며 이미 무너지고 바스러져 버린 한 시대가 소생하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화가 세잔느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이 부르주아적인 도시가 아니라 그 인근의 활짝 열린 자연이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단짝인 친구들과 들판과 시냇가를 쏘다녔다. 그가 후일 야외 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은 인상판 화가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된 것은 어쩌면 기질상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잔느는 13살 되던 때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하는 2년아래의 한 소년을 보호해 주었다. 그 소년이 바로 후일 위대한 소설가가 된 에밀 졸라였다. 졸라의 어머니는 세잔느의 집에 사과 한 바구니를 보냈다. 장차 세잔느의 정물화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사과는 이미 두 친구의 우정의 출발점에 잊지 못할 정서를 담고 있었다.
졸라의 아버지는 토목기사였는데 바로 셍트 빅트와르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댐을 설계했으나 그만 장티푸스로 죽고 말았다. 그가 만든 졸라라는 이름이 붙은 이 댐은 오늘날도 엑스 시민들이 먹는 식수의 취수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학교시절 세잔느는 그림보다 문학과 음악에 더 소질이 있었다. 그는 보들레르를 좋아했고 라틴어로 시를 짓기를 즐겼으며 트럼본을 잘 불었다. 이 트럼본은 그의 정물화의 한구석에도 놓였다. 한편 졸라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그리고 장차 에콜 폴리테크닉의 교수가 될 또 한사람의 친구 바티스텡 바이유와 더불어 그들은 이른바 세 사람의 단짝 이었다.
이 세 사람의 단짝은 특히 엑스의 동남쪽을 흘러가는 라르크 개천에서 멱 감는 것을 좋아했다. 세잔느는 30세때 가장 즐겁다고 여기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설문에 수영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사가 살고 있는 졸라에게 1859년 6월 20일에 편지를 쓰면서 20살의 세잔느는 세 사람의 단짝 이 수영하는 모습을 그 한 모퉁이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라르크 강가에 우뚝 선 채 발 아래 펼쳐진 심연 위로 무성한 머리숱을 펼치고 있던 소나무를 기억하니? 그 싱싱한 나뭇잎으로 우리들의 몸을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그 소나무를. 아! 나뭇꾼의 도끼가 불길하게 닿지 않도록 신들이 지켜주기를!"
세잔느는 그 소나무말고도 다른 많은 소나물들을 보았고 또 많은 소나무들을 화폭에 담았다. 상 파울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큰 소나무(1892-96) 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화폭 한가운데 우뚝 서서 춤추듯이 가지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세잔느가 그린 가장 감동적인 소나무는 1885년부터 1887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지금은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큰 소나무와 붉은 땅 이다. 세잔느가 졸라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팔레트 마을의 냇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잇는 그 소나무를 네가 잊지 않고 있다니 나는 몹시 기쁘다."고 했던 바로 그 소나무일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도 이 그림은 라르크 계곡에서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잔느는 파노라믹한 풍경의 전경에 한 그루의 큰 나무를 분리시켜 세워놓는 것을 즐겼다. 가령 마르세이유로 가는 기찻길이 깔려 있는 고가교가 그려진 셍트 빅트와르산 그림에 깊이를 주는 큰 소나무가 그러하다. 그러나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큰 소나무 의 경우 나무의 엄청난
위용에 압도되어 그 뒤의 풍경은 그저 희미한 하늘과 땅의 배경에 불과하다. 흐릿한 회갈색 밑둥의 당당한 수직선과 그와 직각을 이루며 시원스럽게 수평으로 뻗은 가지가 화면 전체를 거의 다 차지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송두리째 흡수해 버린다.
세잔느는 여기서 나무껍질의 세세한 질감은 아예 생략해 버리고 있으며 소나무 자체의 잎과 주위의 초목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풍경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단순화시키고 있다. 현대회화가
추상화로 가는 길목이다. 또한 화면 전체를 밑둥의 수직선과 가지들의 수평선에 의하여 황금분할함으로써 작품의 모뉴먼트적 성격을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것은 라르크 강변에서 마주칠수 있는 한 그루 나무라기 보다는 세잔느의 삶을 영원 속에 새겨놓은 신의 모습이요, 신화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르크의 시냇물이 세잔느의 작품속에 남긴 위대한 자취는 물론 큰 소나무만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잊을수 없는 것이 바로 그가 만년의 수년동안 줄기차게 그린 목욕하는 여자들 이다. 오늘날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큰 욕녀들 을 비롯한 3점의 작품이 걸작중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좌우로 소나무 밑둥들이 화면의 상부중앙으로 향하여 비스듬히 뻗으면서 큰 삼각형을 이루고 그와 같은 방향으르 옷벗은 여인들이 무리짓고 있는 대작들이다.
1850년대 세잔느의 젊은 시절 엑상 프로방스의 실개천에서는 정말 이처럼 벗고 목욕하는 여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없다. 엑스는 부르주아적이고 염치를 중요시하는 소읍이었다. 그런데도 세잔느의 눈에는 그 벗은 여인들이 보였던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젊음과 툭터진 대자연을 통해 인간과 자연, 오브제와 그것을 에워싼 대기 사이의 조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 근원적인 화해를 화폭속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만년을 오랜 고독에 바쳤던 것이다.
하여튼 그는 130×193센티미터에 달하는 이 대작들을 화실에 들이고, 또 밖으로 꺼낼수 있도록 화실 한 구석에 수직의 구멍을 파도록 설계를 했다. 이른바 그림 통로였다. 사실 오늘날 엑슬를 찾는 사람이 가장 먼저 찾아가게 되는 곳은 바로 세잔느의 아틀리에다. 이곳은 세잔느가 최초인 동시에 최후로 소유했던 자신의 아틀리에였다.
그는 죽기 전 불과 5년 전인 1901년 시의 북쪽 언덕바지에 있는 반 헥타르 가량의 땅을 사들였다. 당시에는 올리브나무, 아몬드나무, 벗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고 오막살이 한 채가 그 가운데 있었는데 그 자리에 2층집을 짓고 윗층을 화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자신은 시내의 시청근처,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은행을 열고 있던 불레공가 23번지에 아파트를 하나 세내어 거처했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은 파리에 가서 살았다. 육십살이 넘은 노화가 세잔느는 가정부인 브레몽 부인의 헌신적인 보살핌에 의탁하면서,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오늘날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세잔느 대로로 명명된 큰 길가에아틀리에 드 세잔느는 소박한 나무문을 활짝 열고 방문객을 맞고 있다. 20여년전 내가 처음으로 찾아갔을때에 비하여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자동차로 15분이면 비베뮈스 채석장의 숲 입구에 이른다. 오래 전부터 채석을 중지한 채 방치된 숲은 고요하기만하다.
그 숲속에는 아직도 세잔느영감이 화구를 넣어두기 위하여 머물던 헛간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숲길을 30분쯤 더듬어가니 남쪽 절벽 저 너머로 졸라의 아버지가 설계한 댐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셍트 빅트와르산이 햇빛 속에 떠오른다. 발 아래는 톨로네의 마을과 성, 그 뒤로 뻗은 길이 바로 세잔느의 길이다. 옛날에 세잔느는 톨로네의 작은 길 이라 불렀다.
그 꼬불꼬불한 산길 2km를 노화가는 매일 마차를 타고 찾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셍트 빅트와르산을, 때로는 검은 성을, 더러는 주르당 헛간집을 그렸다. 1906년 10월 15일에도 67세의 노인화가 세잔느는 셍트 빅트와르 산자락에 있는 길가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는 도중 돌연 소나기를 만났다. 여러시간 동안 비에 젖은 나머지 쓰러졌고 세탁부의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이른 아침 일어나는 즉시 그는 로브 언덕의 아틀리에로 달려가 그리다만 정원사 발리에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는 사색이 되어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만 일주일 뒤인 1906년 10월 23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대로 그림을 그리다가 죽었다. 현대회화의 아버지는 고독한 순교자였다. 아틀리에의 보리수 아래서 그린 정원사 발리에의 초상은 그리하여 세잔느의 유서가 되었다.
뽈 세잔느의 거림...
동시성...시각을 위에서 옆에서 이래에서 ..본 ..합한 그림
세상을 뒤바뀐 그림...아......아...
릴케가 세잔의 전시회를 보았던가....
멀쩡한 현상 세계에서는 물체는 물체 자신으로 존재한다...
윗면은 둥굴고 아래면은 직선이고...
테이불 사이에..린넨이 걸치면 분명 ..양측의 테이불 높이는 차이가 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좌우대칭은 현상속에서 ..그렇케 .존재하지않는다..
화폭속에 박스처럼 구겨 넣은 물체들...
색까리로 승부한다....
사과는 ..사과 이외의 어떠한 사과도 아니올시더...
약속의 땅으로 진입한 ..뽈이여....
질량을 갖고 전기와 자장 까지..그대 그림속에 있소이다...
잠자다가 배가 쓸슬하여..묵다남은 걸 찾아도 냉동실의 어름 외에는 암껏도 엄다
꽁초라도 찾아 피울려고 문을 열고 한밤중에 나가니 이런 제길 늘 던져놓는
나만의 담배꼬바리 야적장이 가을 가랑비에 절딴나고 꼬바리는 해체되고 음따..
그리하야 새벽 세시에 우산들고 저 멀리 은하건너 술사고 담배사러 쓰레바끌고
빗속의 나홀로 캬라반을 떠난다..맙소사 동네 구석구석 막창집 ..의정부부대집.. 감자탕집은
오밤중에도 손님과 더불어 운행중이다..어린 여자손님들이 소주잔을 노코
무신 노가리를 까는지...
이러면 안되는데 새벽술 마시면 또 하루의 시간표가 뒤죽이 박죽이 된다마는
에라이..비도 대기에 물칠하듯이..멀리 편의점에서 할증료 웃돈 준소주병 까고
만다..
심심풀이로 오밤중의 케이불 티비를 열고 이리저리 지구 저편을 뒤지는바..
제데로 걸렸다..
소피 마르소가 얼핏 나오고 .존 말코비치도 ..설치고..르네 야콥인가..
마침내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쟌느 모로 까지 넘나드는 구름 저편에라는
질척한 옴니버스 영화가..오밤중을 지나 새벽꺼정 남의 눈까리를 씨뻘것게 물드린다.
눈 꺼풀 마저 어둠 속에서 부라운관의 과도한 발광판 덕에 연신 껌벅거리게 하는
프렌치 영화에 혹해서 ..늙은이는 고문 속에 빠진다.
직감인지 영화 말미에 ..프랑스 남부의 정경이 나오고 발전 설비 넘어 저거는
분명 액상 프로방스의 생 빅또와르 산이라고 확신하는 찰라 아닌게 아니라
늙은 이태리 배우는 프로방스 구릉에서 풍경화를 그리는데..그 화풍은
세잔이렸다..당연히 빅또와르 산이 나오고..오마쥬 세잔일러..쟌느 모르 할매가
한마디하고..세잔의 모티브를 그의 붓터치로 모작하는 짖거리라니
걱정마시라 내 이그림은 절대로 댁에겐 안 팔테니 거장의 기술이
때로는 내 재능이나 창의력 보다는 훨신 나을터이니.....
장면이 바뀌어
세잔의 말기 그림 속에 나오는 남자 시계수리공이 호텔 벽면에 걸려 있다..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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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세잔느의 실수가 아니라 실제로 직선의 가운데를 물체로 가리면 선의 양쪽 끝이 서로 어긋나 보인 것을 정확히 관찰하여 표현한 것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제 우리의 지각 속에서 최초로 사물의 모습을 볼 때, 체험되는 원근법은 투시원근법과 달리 매우 혼란스럽고 정돈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세잔은 굳이 과학이전의 원초적 지각의 세계를 표현함으로서 감각과 사유를 종합 하려 하였다.
세잔느는 밝은 빛의 표면과 입체감 두 가지를 다 표현하기 위해서 자의적으로 명암을 조작했음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색을 그대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 부분에 적용해서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잔느는 자신이 본 대상의 정확한 색채를 작은 색면으로 기록하였고, 이들 색면이 화면에서 연속적으로 겹쳐지고 완성되는 과정에서 즉 색채는 각각의 구조와 촉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신선한 감각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색대비는 뚜렷한 입체감을 주어 돌출부위와 들어간 부위를 대비해주었다. 따라서 세잔느의 색채구조에 대해 조소적이라고 한다. 이때, 조소적이라는 평에는 사물을 덩어리로 파악한다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인상주의는 대상의 바깥 면만 볼뿐, 대상의 내면까지는 투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잔느는 사물을 구체적인 덩어리로서 파악하였다.
"색채가 충실해질수록 대상이 진실되게 포착된다." 는 것이 세잔느의 생각이었다.
그는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관계 사이의 화음을 포착하는 것이다."라도 하였다.
이렇게 세잔은 사실적 묘사 보다는 주관적인 질서감각을 가지고 화면을 구성하였다. 즉 세잔느는 현실의 원리보다는 화면 내부의 원리를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그림 내부에 주목한 것으로서 이제 미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 것을 의미한다
위와 같이, 세잔느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인 명암이나 색채, 심지어는 형태를 왜곡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세잔느의 화폭 위에 나타나는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자랑한다. 이는 현대 회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세잔느를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세잔느는 가능한한 불필요한 잡물을 제거하고 주요한 요소로 압축하여 그림을 그렸다. 즉 구도를 단순화하여 산과 집을 그릴 때도, 화면의 구조로서 가장 중요한 형체의 부분만을 집약하고 필요 없는 형상은 버렸다. <목욕하는 여인들>이나, <생트빅트와르산>에서 그런 경향은 잘 나타난다. |
펌....
일단 딜레마(dilemma), 즉 역설(paradox)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편의상 그것을 ‘기운생동의 역설’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단 비유를 유추(類推, analogy)와 은유(隱喩, metaphor)로 대별해 본다면,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공통적 속성을 전제로 하는 유추 시공(時空)의 지평에 놓인 대상이 회화와 조각으로 옮겨질 때, 즉 모든 것이 찰나찰나 변하고 마는 대상의 세계가 정지의 세계로 옮겨질 때, 그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의 시간성 역시 공간성과 함께 옮겨져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들의 우정을 광활한 대기 속에서 동일한 상승과 동일한 목마름으로 풀어 주는 것, 그것은 아마도 천재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림’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지향점을 갖는 행위였다. 그것은 그가 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회화라는 지속적인 형식을 통해 옮기는 일이었다. 세잔느는 그것을 바로 ‘실현(realization)’이라고 불렀다.
자연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어쩌면 모든 것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세잔느는 시공 속의 자연의 세계를 그 어떤 변환법칙, 예를 들어 좌표계의 이동이나 삼차원의 공간세계를 평면에 일대일 대응시키는 투사기하학적 방법으로 재조직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대상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에 도달하였다.
나는 동일한 추진력으로, 동일한 믿음을 갖고 서로 떨어져 나아가려는 모든 것을 다시금 연관관계 속으로 돌려 놓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이에 윤곽을 이루고 대상들, 바위들, 나무들이 됩니다. 이들은 부피를 갖게 되고 작용치를 갖습니다. 그림 속의 덩어리와 무게가 눈을 통해 나에게 직접 주어진 지각 속의 평면들과 점들에 대응한다면, 좋습니다, 나의 그림은 두 손을 깍지끼게 되지요. 이 때 그림은 흔들리지 않고 대상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잡아냅니다. 그림은 이제 바로 진실로서 빈틈 없이 꽉 차게 됩니다.
예술가는 단지 수용기관(受容器官), 즉 감각의 기록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중에는 그 어떤 대상도 개체(個體, individual)로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진술하고 있다. 즉 다른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시공 상에 연장(延長)되어 존재하는, 즉 “지금 여기에, 그러나 얼마 후 저기에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개체’란 그에 의하면 특정한 대상에 관심을 두었을 때나, 혹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배경으로부터 대상을 오려 내었을 때”에나 구성되는 ‘생각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서로간에 맞물려 있는, 따라서 어떤 ‘구멍’도 있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데, 세잔느는 이 점을 “두 손이 서로 깍지낀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위의 기술이 단순히 한 철학자의 사변적 결론이 아니라,
대상과의 만남이 사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장시간인 회화나 조각의 경우, 순간의 포착이란 결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순간에 대한 기억의 개입을 불러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관성을 갖고 날아가는 화살을 잡으려는, 즉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노력과도 흡사하다
회화의 지향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내용적으로는 이제 개체의 변화를 통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화가의 시점(視點)과 시각(視角, perspective)들의 실현이 화폭에 공간적·감각적으로 자취를 남기고, 이 ‘자취를 따라감’이 바로 시간 자체가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폭 위의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구석구석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종의 토폴로지군(topology群)을 형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경이(驚異)를 우리는 세잔느에게서 특히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들에서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폭 위의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구석구석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종의 토폴로지군(topology群)을 형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경이(驚異)를 우리는 세잔느에게서 특히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들에서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일점투시도법의 해체는 이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화가는 일점투시도법에 의해 사물을 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개체의 해체는 전제적(專制的) 투시도법의 해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상정하며 공간(대상들)을 평면(화폭)에 투시하는 시각은, 수학적으로 표현해 ‘개체들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원경과 근경, 좌와 우, 전과 후의 독자적인 시각(視角)들 사이를 넘나들 때 체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화가가 대상의 실현에 보낸 작업시간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시간은 그림에 기록된다. 아니 그림 자체가 시간의 덩어리이며 곧 ‘실현’이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세잔느의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에서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경험과 탐색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시간’이란 회화에서 소요(逍遙)의 여정(旅程)과 여정(旅情)으로 구현되며, 사물의 혼(魂나무의 혼은 나뭇가지 주변 공기의 흔들림에서, 또 유동하는 대기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에서 느껴진다. 일종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기호(記號)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과 그 생동감은 시각(視覺)만을 통해 감수(感受)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다른 모든 감각기관과의 연대를 통해, 혹은 감각기관들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
기운(氣韻)은 소요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흔적을 남긴다.
총체적 조화는 색채에서처럼 모든 곳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자, 나를 보십시오. 이제 내가 눈을 감고 비록 세계의 한 구석에 불과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곳인 성(聖)마르크의 언덕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 이 영상은 곧 가장 좋아하는 체꽃의 향을 불러일으킵니다. 붸버의 음악 속에서 나는 들판과 숲 속의 진한 내음을 듣습니다. 라씬느의 시 구절 행간에서 나는 푸생의 경우처럼 향토색을 느끼고, 루벤스의 자줏빛들 사이에서는 한 송가(頌歌)가, 어떤 중얼거림이, 리듬이 나옵니다.
바로 사물의 기운과 혼이 주변 영역의 다양한 감각영역의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에 대한 총체적인 반응과 기록으로서, 예술이란 “꽃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자연 속의 반응들”과 조금도 층위가 구별되지 않는 현상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소요(逍遙)하는 반응자”이다.
조형예술에 있어서 시간의 탐구는, 그것이 단순히 시간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양상과 예술가의 반응형식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형예술의 숨은 실마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실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일단 딜레마(dilemma), 즉 역설(paradox)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편의상 그것을 ‘기운생동의 역설’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단 비유를 유추(類推, analogy)와 은유(隱喩, metaphor)로 대별해 본다면,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공통적 속성을 전제로 하는 유추 시공(時空)의 지평에 놓인 대상이 회화와 조각으로 옮겨질 때, 즉 모든 것이 찰나찰나 변하고 마는 대상의 세계가 정지의 세계로 옮겨질 때, 그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의 시간성 역시 공간성과 함께 옮겨져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들의 우정을 광활한 대기 속에서 동일한 상승과 동일한 목마름으로 풀어 주는 것, 그것은 아마도 천재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림’이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지향점을 갖는 행위였다. 그것은 그가 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회화라는 지속적인 형식을 통해 옮기는 일이었다. 세잔느는 그것을 바로 ‘실현(realization)’이라고 불렀다.
자연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어쩌면 모든 것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세잔느는 시공 속의 자연의 세계를 그 어떤 변환법칙, 예를 들어 좌표계의 이동이나 삼차원의 공간세계를 평면에 일대일 대응시키는 투사기하학적 방법으로 재조직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대상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에 도달하였다.
나는 동일한 추진력으로, 동일한 믿음을 갖고 서로 떨어져 나아가려는 모든 것을 다시금 연관관계 속으로 돌려 놓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이에 윤곽을 이루고 대상들, 바위들, 나무들이 됩니다. 이들은 부피를 갖게 되고 작용치를 갖습니다. 그림 속의 덩어리와 무게가 눈을 통해 나에게 직접 주어진 지각 속의 평면들과 점들에 대응한다면, 좋습니다, 나의 그림은 두 손을 깍지끼게 되지요. 이 때 그림은 흔들리지 않고 대상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잡아냅니다. 그림은 이제 바로 진실로서 빈틈 없이 꽉 차게 됩니다.
예술가는 단지 수용기관(受容器官), 즉 감각의 기록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중에는 그 어떤 대상도 개체(個體, individual)로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진술하고 있다. 즉 다른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시공 상에 연장(延長)되어 존재하는, 즉 “지금 여기에, 그러나 얼마 후 저기에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개체’란 그에 의하면 특정한 대상에 관심을 두었을 때나, 혹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배경으로부터 대상을 오려 내었을 때”에나 구성되는 ‘생각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서로간에 맞물려 있는, 따라서 어떤 ‘구멍’도 있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데, 세잔느는 이 점을 “두 손이 서로 깍지낀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위의 기술이 단순히 한 철학자의 사변적 결론이 아니라,
대상과의 만남이 사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장시간인 회화나 조각의 경우, 순간의 포착이란 결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순간에 대한 기억의 개입을 불러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관성을 갖고 날아가는 화살을 잡으려는, 즉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노력과도 흡사하다
회화의 지향점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나, 내용적으로는 이제 개체의 변화를 통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화가의 시점(視點)과 시각(視角, perspective)들의 실현이 화폭에 공간적·감각적으로 자취를 남기고, 이 ‘자취를 따라감’이 바로 시간 자체가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폭 위의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구석구석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종의 토폴로지군(topology群)을 형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경이(驚異)를 우리는 세잔느에게서 특히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들에서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폭 위의 대상들은 모두 동일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구석구석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종의 토폴로지군(topology群)을 형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경이(驚異)를 우리는 세잔느에게서 특히 그의 풍경화와 정물화들에서 극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일점투시도법의 해체는 이제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화가는 일점투시도법에 의해 사물을 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개체의 해체는 전제적(專制的) 투시도법의 해체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상정하며 공간(대상들)을 평면(화폭)에 투시하는 시각은, 수학적으로 표현해 ‘개체들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원경과 근경, 좌와 우, 전과 후의 독자적인 시각(視角)들 사이를 넘나들 때 체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화가가 대상의 실현에 보낸 작업시간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시간은 그림에 기록된다. 아니 그림 자체가 시간의 덩어리이며 곧 ‘실현’이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세잔느의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에서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경험과 탐색을 추체험(追體驗)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시간’이란 회화에서 소요(逍遙)의 여정(旅程)과 여정(旅情)으로 구현되며, 사물의 혼(魂나무의 혼은 나뭇가지 주변 공기의 흔들림에서, 또 유동하는 대기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에서 느껴진다. 일종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기호(記號)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기운과 그 생동감은 시각(視覺)만을 통해 감수(感受)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다른 모든 감각기관과의 연대를 통해, 혹은 감각기관들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난다.
기운(氣韻)은 소요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흔적을 남긴다.
총체적 조화는 색채에서처럼 모든 곳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자, 나를 보십시오. 이제 내가 눈을 감고 비록 세계의 한 구석에 불과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곳인 성(聖)마르크의 언덕을 마음 속에 떠올리면, 이 영상은 곧 가장 좋아하는 체꽃의 향을 불러일으킵니다. 붸버의 음악 속에서 나는 들판과 숲 속의 진한 내음을 듣습니다. 라씬느의 시 구절 행간에서 나는 푸생의 경우처럼 향토색을 느끼고, 루벤스의 자줏빛들 사이에서는 한 송가(頌歌)가, 어떤 중얼거림이, 리듬이 나옵니다.
바로 사물의 기운과 혼이 주변 영역의 다양한 감각영역의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에 대한 총체적인 반응과 기록으로서, 예술이란 “꽃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자연 속의 반응들”과 조금도 층위가 구별되지 않는 현상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소요(逍遙)하는 반응자”이다.
조형예술에 있어서 시간의 탐구는, 그것이 단순히 시간의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양상과 예술가의 반응형식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형예술의 숨은 실마리라고 불려도 무방하다. 실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릴케가 살롱 두똔느에서 세잔느 추도전시회를 본 것은 1906년(31세) 10월 6일의 일이다. 이후 그는 거의 매일같이 세잔느 전시회에 다닌다. 이 전시회를 구경하고 나서 릴케의 시법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의 아네 클라라에게 쓴 편지들(『세잔느에 관한 편지』, 1952, 인젠·프랑크푸르트; 조엘 아지(영역), 1985, 인터내셔널·뉴욕)은 그의 감동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대변해준다. 이 서간집을 읽고 릴케가 자기의 시에 끼친 영향으로 늘 세잔느를 들었던(1906)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릴케가 본 세잔느보다도 나는 메를로-퐁띠(M.Merleau-Pouty)가 읽은 세잔느에 더 끌린다. 그의 「세잔느의 회의」(『의미와 무의미』)는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메를로-퐁띠의 현상학이 경도했던 <시원적 세계>를 그는 세잔느의 <시원적 지각> <태어나는 질서> <태어나는 윤곽>에서 살피고 있다. 메를로-퐁띠는 세잔느를 “존재의 화가”라 부르고 “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존재의 뿌리 그 자체에 엉켜붙어 있다”는 세잔느의 말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눈과 정신』). 이 철학자는 인식을 눈길로 제시하고 존재의 분열을 안쪽에서 만나고 칼날같이 사물의 불투명성에 스며드는 세잔느를 발견하고 있다. 요즘 메를로-퐁띠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영역판 (알폰소 린기스 역, 1968, 노드웨스턴 대학교 출판부)을 입수했다.(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이 없는 듯하다) 메를로-퐁띠는 이 책의 초고를 집필하던 1961년 5월 3일 밤 그의 책상 위에 쓰러졌던 것이다. 사후에 갈리마르에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964년의 일. 영역본이 미국에서 나온 것은 또 4년 후의 일. 역자의 서문에 의하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진리의 기원”과 자연-“야생의”, 비문화화된, 전(前) 대상적인 자연에 대한 철학을 탐색하는 메를로-퐁띠의 현상학적 인식론이다. 가시성(可視性)의 생성과 살(肉)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키아즘(교차배열)의 도입이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메를로-퐁띠의 세잔느 이해의 깊이를 깨닫게 해주는 저서다. 마치 부록처럼 뒤에 붙어 있는 미완의 그의 연구노트는 온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피나는 사색의 흔적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다시 메를로-퐁띠의 『지각의 현상학』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의 대표적인 이 저서에서 나는 “진정한 철학이란 세계를 보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라는 신나는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
◈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세계최고가 미술품 기록…2800억원
▲ [마이데일리 = 함상범 기자]프랑스 화가 폴 세잔의 명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Joueurs de cartes, The Card Players)'이 세계 미술품 판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뉴욕에서 기를 쓰고 달려간곳은 메트로포리탄 뮤지움이었읍니다.
길이와 폭에 놀랐읍니다만 역시 발목을 잡은 곳은 세잔느 었음니다.
맞은편 구겐하임에서는 전시준비 관계로 입장불가를 당했지만.
마드리드 푸라도에서는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압도적입디다.
텐마크 루지에나에서는 마침 지하철 차량에 그려진 실물크기의 현대판 낙서가 묘한 정감을 주었읍니다.
런던의 내셔날 갤러리 또한 초상이 유명하여 헨리8세와 에드워드 불라디메리 엘리자베스를 가까이할수 있었으며 여기에도 세잔느의 일품들을 반겨 응대 했음니다.
에딘버러에는 휴관이라 들어서지 못한을 아쉬워 했었으며
카디프에서는 앙증맞은 세잔느가 있었음니다.
파리의 뮤제 돌새에서는 입장권을 받는 것으로 기역되었는데
생 라자르 역이 변한 것이지요 19세기 미술관으로 특징지워 집니다.
뽕삐두는 축소되었지만 예전에 가보았을 때 누구인지 모리지만 피아노 한대 부셔 벽면에 근사하게 부쳐 놓은 작품과 공중전화 부스 속에 잡동산이 가득한 미술품은 걸작이었음니다.
쾰른의 미술관에서 세잔느의 악상 프로방스는 있엇음니다.
본 옆의 작은 오래된 기차역이 예술인의 작업실과 전시실로 치완된 곳이 있었는데 화장실이 한사람의 페인트 작품으로 벽이고 천정이고가 칠해졌는데 완전히 그림 속에서 유쾌하게 볼일 볼 수 있었읍니다.
상해에서는 몇층을 뒤져 츠타오를 대면하여 숙연히 자리했음니다.
아무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어간다는 것은 다리 부러지는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뜻일 겁니다.
교토 뮤지움에서 신라 골호와 야외에 직립하고 있던 문신석상을 보았을 때 반가움에 몸서리 쳤음니다.
페테르부르그 의 알마타쥬에도 기어 들어가야 할텐데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아무튼 경복궁도 과천 미술관도 없는 이곳이지만 서라벌로 가서 돌과 친해 보려함니다. 간다라에서 서안을 거쳐 경주까지의 여정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첫댓글 휴일 閑日에 첨지께서 올린 글이 브런치 맛보다 더하오. 날이 촌촌하게 차가워서 외출도 여행도 삼가하고 있다보니
글 읽기가 더욱 생광스럽구려~~~. 저 리옹 역에서는 헤밍웨이의 첫 부인이 그의 원고를 잃어버려서 이혼의 빌미가
되었고, 니스 해변 관련해서는 나이스하게 다 벗은 해수욕객들의 사진 한장도 못찍고 말았던 옛날 일이 생각나외다.
요즘 같았으면 쉽게 양해 얻어 만고의 작품을 얻었으련만 당시만 해도~~~^^.
첨지영감이 드디어 發動이 걸렸나 보오
봄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는데 매화꽃 제가 안 피고 버틸 재간이 있을라고요
청담헌님, 젊은시절의 나를 지금 스스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정도로 무모한 짓을 했구나 싶네요 리용에는 70년대 프랑스 TV에서 요리강좌로 인기절정 이었던 요리사 뽈의 레스또랑이 있어서 찿아가 보기도 했고 니스 해변에선 우리나라에서는 비키니도 못보던 시절에 절반정도의 여자들은 아예 milk-room을 다 내놓고 있었으니... 나야말로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싶었답니다 우리집 사람이 당장 돌아가자더니 며칠도 안되어 어라~ 내가 약을올린 효과를 보았지요 한강에 배지나 가긴데 했던가? 첨지영감 만세삼창~~
우리가..엉터리로 알게 모르게..접한..미술비평이란..얼매나 한심한...지
테이불 중간에 천이 늘어지면 분명히..테이불 끝선은 서로 연결되지 안심다
병이나 항아리나..그릇의 양안은 그렇케 대칭적으로 현상의 공간에
자리잡지 안심다..우리그림에도 ..민화에서 ..원근법은 ..파괴됨니다..
피카소 이전에..더 피카소적인..장닭을 표현한 그림도..민화에서 보임다..
세잔이 엄섯다면...?......PLAYER DF THE FINE ART도..엄심다...
함부르크의 상파울리 유흥가..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전북의 센뽈 고등학교
인류에게 유명한 뽈이 두분계시옴니다..바울사도, 폴 세잔느
두 사람이 유명한거야 맞지만 유명한 뽈(폴, 바오로,파울, 파울루스)이
많이 더 있지요 폴 게티 미술관에 가 보시면 그 사람도 유명했구나(화가가 아니라 재산가로)
인정을 않을수가 없을것이고 화가로 말 하드라도 폴 고갱도 있고.........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미술평론 뿐이겠소이까
나는 이제 자러 갈랍니다 Gute Nacht (구테 낙흐트)
현재 한국과 독일의 시차는 8시간이니 계산해 보십시오
지금 독일 시간이 몇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