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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 개벽신화
제주도 ‘개벽(開闢) 신화’는 재미있다.
천지개벽 신화인데 ‘태초는 카오스(혼돈)이었다.’ 대개의 종교서적 첫머리에 나오는 비슷한 이미지이다. 첫 새벽 눈 뜨는 우주는 땅과 하늘 사이가 처음 열리는 것이다. 안개같이 어렴풋한 카오스로 시작된다. 새벽은 빛과 어둠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면서, 마지막 갈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캄캄한 밤에서 처음으로 빛이 스며드는 첫 새벽은 밤과 낮이 처음으로 만나 입맞춤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것은 낮에서 밤으로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만남의 끝은 이별이고, 이별의 끝은 만남이다.
즉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흰색은 바로 모든 색갈의 총합이고, 모든 색갈의 총합은 바로 흰색이다.’ 태어나는 것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바로 다음 세상에 새로 태어남이다. 탄생과 죽음은 반복되는 차 바퀴마냥 영원히 ‘윤회’(輪廻)되는 것이다. 제주도 한라산 북쪽 기슭에 세 명의 신이 땅에서 솟아났다.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삼형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도 제주도에 뿌리를 둔 고씨, 양씨, 부씨가 많다.
여기에 관한 연구는 현행복(방선문, 각 출판사) 등이 “세 신인(神人)의 이야기인 개국신화의 흔적은 지금도 제주 곳곳에 남아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들이 솟아난 구멍은 ‘모홍굴’, 곧 지금의 제주시 중심에 있는 ‘삼성혈’이며, 성산읍 온평리에는 세 공주를 맞은 바닷가 ‘황루알’과 혼례를 올리기 위해 목욕재계한 연못인 ‘혼인지’가 있다. 또한 제주시 화북동에는 세 신인이 거처를 정하기 위해 활을 쏘았다는 장소인 ‘활쏜디왓’이 있고, 그때 쏜 화살촉 자국이 선명한 ‘삼사석’이 모아져 남아 있다.”고 밝혔다. 또한 제주시 홈 페이지에도 오문복, 박찬식 교수 등이 여기에 대한 역사적 문제를 자문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고대 신화는 ‘천손(天孫) 신화와 난생(卵生) 신화’로 크게 대별되는데 천손신화는 단군신화와 같이 창조주(神)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이고, 난생신화는 신라의 박혁거세와 같이 신이 알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 개국신화는 고조선이나 신라의 신화와 달리 땅에서 솟아났다는 점에서 그 탄생 장소가 다른 점이 특이하다.
우리 민족의 시원지始原地는 시베리아 한복판 바이칼 호수 속의 ‘알혼 섬’ 이다. 알혼 섬 안에는 부르칸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아래에 남녀 두 명이 겨우 들어가는 구멍이 있다. 삼성혈은 천지인 세 개의 구멍이지만 여기에는 한 개의 구멍이지만 암수-음양 두 남녀가 들어 갈 수 있는 자리이다.
제주대 현용준 명예교수는 한라산의 개벽신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제주의 신화, 서문문고) “태초는 혼돈이었다. 하늘과 땅이 한 덩어리로 서로 맞붙은 암흑천지였다.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의 머리가 저마다 열리면서 금이 생겨났다. 그 금이 점점 벌어지더니 땅덩어리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하늘에서는 푸른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검은 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쳐지더니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별이 생겨났다. 동쪽 하늘엔 견우성, 서쪽에는 직녀성, 남쪽에는 노인성, 북쪽에는 북두칠성이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 삼태성이 뜨더니, 이어서 많은 별들이 자리를 잡았다.”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였다.
“그 다음 구름이 생겨났다. 동쪽에서는 푸른 구름이, 서쪽에서는 흰 구름이, 남쪽에서는 붉은 구름이, 북쪽에서는 검은 구름이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는 누런 구름이 떠 오락가락 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다.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울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의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 둘과 달 둘을 내보냈다. 드디어 천지가 활짝 개벽되었다. 천지는 개벽했지만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초목도 말을 하고 짐승도 말을 했다. 귀신과 인간의 구별도 없었다. 사람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부르면 사람이 대답했다. 더구나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 때문에 만민백성이 낮에는 더워 죽고, 밤에는 추워 죽어갔다.”
이런 얘기를 에니메이션으로 창작하여 보여주기도 했는데, 제주시청 홈피에 들어가면 다양한 멀티미디어로 재미있게 재편해 놓았다.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지왕은 지상의 총맹부인과 혼인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다. 천지왕이 찾아왔지만 총맹부인은 가난하여 동네제일 부자인 수명장자에게 급히 쌀을 한 되 꾸어 밥을 지어 대접해 올렸다. 수명장자는 그 쌀에다 흰 모래를 섞어주었기 때문에 천지왕이 으드득 모래를 씹게 되었다. 총맹부인이 그 쌀을 열 번이나 씻었는데도 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어쩔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천지왕이 수명장자에게 벌을 내렸다.
“벼락장군, 우뢰장군, 화덕진군을 땅으로 내려보내 수명장자에게 벼락과 우뢰로 호통을 치고, 화덕으로 그의 집을 불 질러 버렸다. 그래서, 화덕진군 불찍사자는 ‘불찍굿’에서 얻어먹게 되었다. 수명장자의 못된 아들과 딸들에게도 엄벌을 내렸다.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한 딸들에게는 꺾어진 숟가락 하나를 엉덩이에 꽂아 팥벌레 병신 몸으로 환생시키고, 소와 말에게 물을 굶겨 목마르게 한 아들들은 솔개 몸으로 환생시켜 비 온 뒤에 꼬부라진 주둥이로 날개의 물을 평생 핥아먹게 만들었다.” 불교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보여준 것이다.
한편, 총맹부인의 몸에서 나온 두 아들을 하늘에서 맞은 천지왕은 매우 기뻐했다. 이 신화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얘기와 흡사하다. 유리왕은 아버지를 찾아갈 때 부러진 칼을 가지고 가서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있는 부왕의 칼과 맞추어 부자임을 확인한 것이다. 총맹부인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주고 간 박씨를 심어서 그 박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재회를 한 것이다.
천지왕은 이제 세상의 혼잡한 질서를 바로 잡을 때가 왔다며, 첫째 아들 대별왕에게는 이승을, 둘째 소별왕에게는 저승을 맡아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별왕은 이승을 차지하고 싶어 형을 속였다. 동생이 형에게 수수께끼 내기를 했지만 계속 지기만 했다. 나중에는 ‘잠 잘 자기 내기’ 를 하며, 소별왕은 대별왕이 잠 든 사이에 왕성한 혀의 꽃과 시들어진 자기 꽃을 바꿔치기 하여 결국 형을 속였다. 눈을 뜬 우직한 형은 자기 꽃이 시든 것을 알고 동생에게 이승을 넘겨주었다.
“소별왕아. 이승을 차지하긴 하라마는 인간 세상에는 살인, 역적 많으리라. 도둑도 많으리라. 남자는 자기 아내를 두고 남의 아내를 우러르기만 하고, 여자도 자기 남편 두고 남의 남편을 우러르기만 할 것이다.”
소별왕이 정말 이승에 내려와 보니 과연 질서가 엉망이었다. 소별왕은 형에게 잘못을 빌면서 도움을 청했다. 대별왕은 우선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을 천근 화살로 쏘아 각각 해와 달 하나씩을 동해바다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짐승이나,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든 생물들이 다 말하던 능력을 사람만이 하도록 했다. 송피가루 닷 말 닷 되를 세상에 뿌려 풀과 나무, 짐승의 혀 등을 굳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 동생을 도와주지 않아 지금도 이승에는 도둑, 살인, 간음 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과 유사한 서사구조는 아리비아의 ‘판도라 상자’나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얘기와 같다. 판도라 상자에선 마지막을 열어보지 말라고 했는데 인간은 호기심에 못 이겨 마지막을 열어보는 순간에 악마가 튀어나와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악마가 횡행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마지막 유혹을 못 이겨 선악과 열매를 따는 순간 악의 고통을 수반하는 고생을 하게 되었다.
2. 바이칼 호수와 부랴야트 민족
제주도 신화와 전설, 그리고 시베리아 샤먼은 그 서사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바이칼 호수, 알혼 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연락선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한국청년들을 만났다. 고려대 전자공학과와 용인대 태권도학과 학생들이었다. 반가웠다. ‘우리민족의 시원’을 찾아 혼자 배낭 여행을 나왔단다. 이런 의식 있는 청년들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앞날은 희망이 있다. 부랴야트 족은 특이하게 라마교를 믿는다. 러시아에서는 이질적인 동양의 불교 수도원을 볼 수 있다.
울란우데 시내에서 약40분 정도 거리에 라마교의 총본산인 ‘다찬’ 수도원이 있다. 독특한 라마교 양식의 중앙 건물과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돌림 팽이 등이 있다. ‘돌림’ 행위는 큰 바위나 큰 나무 등 큰 대자연의 물건을 경배하는 것이다. 부랴야트 족이나 몽골족 등 샤머니즘 족들은 차를 타고 지나가다 가도 큰 탑 등이 있으면 반드시 내려서 자기 나이 수만큼 돌고 간다.
시내 민속박물관에는 옛 부랴야트족의 농가와 소수민족 빠오(텐트) 주거지를 재현해 놓았으며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무속신앙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그곳의 민속박물관에 놓여 있는 의식주 생활양식 가운데는 우리의 제주도 민속박물관 일부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부랴티야(Buryatiya) 공화국과 이르쿠츠크주(州)에 속해 있는 바이칼 호수의 면적은 한반도의 1.5배(31만 5,500㎢)가 된다. ‘바이칼 호수’는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의미이다. 시베리아 사람들 은 ‘시베리아의 진주’ 라고 부를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겨울이면 꽝꽝 어는 호수 위를 순록의 썰매로 산타클로스마냥 달릴 수도 있으며 자동차로 한복판에 들어가면 밑바닥이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 이르쿠츠크는 어디를 가도 앙가라 강과 만나게 되어 있다. 강을 끼고 도는 시베리아 열차는 환상적이다. 잠자고 일어나도 강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어린애 기저귀같이 긴 남북의 길이는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길이(636㎞) 정도이며 동서 최대 넓이는 86.6㎞나 된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깊은 바이칼 호수는 세계 최대의 희귀 동식물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칼의 역사는 무려 2,500만년이나 된다. 호수의 내부에는 ‘알혼 섬’을 비롯하여 27종의 섬이 있다. 여기에는 336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흘러 들어오고 있지만 나가는 것은 ‘앙가라 강’ 오직 하나 뿐이다.
1956년에 건설된 앙가라 강의 대형 수력발전소는 이 호수의 관광 개발에 큰 몫을 한다. 리스트 비앙카의 ‘과학 아카데미’에는 바이칼 호소학(湖沼學) 연구소가 있다. 북쪽 연안에는 바이칼-아무르 철도가 지나고, 남쪽 연안에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며, 중심도시는 이르쿠츠크이다.
이 길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한 발해(渤海)가 이곳 특산물인 담비를 교역하기도 했다. 발해는 고구려 후예들이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일으킨 강국이다. 검은담비를 위해서 시베리아를 점령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검은담비 털은 곧 부자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르쿠츠크 국립대학에는 한국학과도 있다. 러시아 푸틴의 적극적인 해외합작과 개발정책에 한국과의 경제, 문화, 교육 협력관계도 급팽창하고 있다.
바이칼 호수에는 많은 전설이 있다. 호수 속 용궁의 신이 폭풍우를 일으켜 어부와 항해자를 끌어들이고는 재판을 한다고 했다. 그 전설 가운데는 ‘바이칼과 앙가라’를 의인화한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바이칼 왕에게는 아름다운 외동딸 앙가라와 33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왕은 앙가라를 이르쿠트라고 하는 용감한 청년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갈매기들이 앙가라에게 예니세이라는 청년이 더 멋있다며 유혹했다. 그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몰래 만나며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을 눈치챈 왕은 앙가라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앙가라는 어느 날 왕이 잠든 사이에 예니세이와 몰래 도망친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된 왕은 도망가는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잽싸게 던졌다.
외동딸 앙가라는 아버지 바이칼 왕이 던진 바위에 모가지가 정통으로 맞아 즉사하고 만다. 그 원한의 죽음이 지금도 리스트 비앙카로 가는 길가에 ‘샤먼 바위’로 남아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3. 시베리아 샤먼과 한민족 전통습속
부랴야트인들은 한 집에 3대가 같이 살았다. 몽골의 파오마냥 오른쪽은 여자, 왼쪽은 남자의 생활무대이다. 여자는 주로 실크 복장에 중국산 옥돌로 옷과 모자를 장식했다. 가족이 죽으면 집안에 묻고,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문턱 아래에 매장했다. 죽은 시체도 사람의 일부이기 때문에 경모했다. 사람이 죽을 때는 세 가지 영혼이 있다고 한다. 멀리 떠나는 영혼, 약하고 우유부단한 영혼, 사람의 뼈 속에 남아 있는 영혼 등 세 가지이다. 그 중에 세 번째 영혼은 항상 무덤과 같이 남는데 이 영혼은 욕심이 많다.
찾아오는 사람을 잡아간다고 하여 무덤을 경계하고 그 근처를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사상은 샤먼적 무속(巫俗) 신앙이다. 부랴야트 사람들은 매우 가족적이다.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경로사상이 철저하다. 그러나 고려장처럼 늙은 노인은 내다버리기도 했다. 나이를 너무 많이 먹으면 자식과 손자들의 생명을 가져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인들은 스스로 양기름을 먹고 자살하기도 했다. 양기름에 물을 마시면 기도가 막혀 죽는다. 족보와 혈통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여 예전에는 구술로 30대까지의 조상을 외워야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교육시킨다고 한다.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으로 여자는 천대를 받았는데 그것은 여자가 월경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는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하고, 힘든 일도 많이 해야 한다. 남자는 돈만 있으면 여러 명의 여자를 둘 수 있다. 샤먼(무당)은 남녀 구분이 없으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하며 반드시 ‘신들림’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뜨거운 돌멩이를 집거나 쇠막대를 휘게 하는 힘을 보이기도 하는데 때로 미쳐버리거나 죽기까지 한다. ‘샤먼’은 에벤끼족 말로서 부랴야트 말로는 ‘뷔’라고 한다. 에벤끼족은 동-서 부랴야트에 산재해 있으며 외형상 부랴야트족과 구분이 된다. 부랴야트 말이 몽골어 계통으로서 에벤끼족 말과 다른 어족(語族)이다.
부랴티야의 주도(州都)는 울란우데(Ulan-Ude)이다. 울란우데는 1666년에 우딘스코예라는 카자크의 겨울 야영지가 세워져 요새도시로 변하며 번창되었다. 1686년 이루쿠츠크가 도시로 승격되었고, 1693년에 즈나미엔스카야 러시아 정교회가 세워졌다. 약 3백년의 긴 역사는 다찬 라마교 사원과 함께 종교적인 두 개의 물줄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치형의 창을 가진 두 개의 첨탑, 하나는 꼭대기가 뾰족한 반면 다른 하나는 모스크를 연상시키는 둥근 모양이다. 지붕은 녹색이고 벽체는 흰색이다. 교회 안에는 데카브리스트의 쿠데타 때 유배된 데카브리스트들과 그 가족의 묘가 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콜롬부스’라는 제리포프의 묘도 있는데 항해사였던 그는 북 아메리카 일루션 열도에 최초의 러시아 거주지역을 조성하였다.
1923년에 옛 소련 연방의 부랴야트-몽골 자치구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의 ‘부랴티야 공화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울란우데는 바이칼 호수 남동쪽 연안에 있으며, 동쪽 사얀산맥과 하마르다반 산맥 사이에 있다. 주민들은 바이칼 호수로 흘러드는 셀렝가 강 골짜기에 주로 많이 모여 산다. 많은 수수민족 가운데 전체의 약50%가 넘는 부랴야트인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타타르사람 등 다양하다. 주로 사냥을 중심으로 한 양 가축사업과 모피 가죽 생산이 주업이다.
유목민족인 부랴야트인들은 한민족과 인종, 혈통, 전통습속이 매우 흡사하다. 우리민족의 시원(始原)은 이곳 시베리안 부랴야트일지도 모른다. 부랴야트 족은 다시 크게 4개의 큰 종족으로 나눈다. 이히리트, 블라가트, 호리, 한고드리인데 각각 부랴야트 공화국, 치찐 자치주, 이르쿠츠크, 부랴야트 자치주 등에 나뉘어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중국의 북쪽과 몽골의 북부 지역에도 부랴야트인들이 흩어져 있다. 원래 이 지역은 ‘부랴야트-몽골리아’ 로 불리웠는데 이를 바이칼을 기준으로 동서 둘로 나눈 것은 몽골의 강력한 힘이 부활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란다.
부랴야트 족은 16세기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 정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렵생활을 주로 하며 시베리아 곳곳을 이동하며 살아왔다. 제정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코샤크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면서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서 부랴야트(자치구)와 동 부랴야트(치찐)는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서 부랴야트가 지금도 수 천 년의 전통을 가진 샤마니즘을 그대로 이어 오고 있는 반면, 동 부랴야트에서는 몽골의 영향으로 라마교의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화적 특징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