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노동자의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공무짱
◎ 대표적 투쟁 - 1929 년의 원산총파업 투쟁 임금인상, 8시간 노동, 일인 관리자 규탄 등을 내걸고, 84일간이나 완강하게 투쟁한 1929년의 원산총파업투쟁은 지역의 공동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일제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조선의 전 민중을 분노케 하여 노동계급이 반일세력의 주역으로 등장. 지역의 완강한 단결 투쟁과 전국적 연대와 국내외 지원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
- 193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반일 민족해방투쟁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투쟁은 평화적 방법에서 폭력적 방법으로, 경제투쟁에서 항일투쟁으로 발전했고, 군수 공장에서는 파업과 태업, 반일폭동, 공장파괴, 징용과 징병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식으 로 저항하였다.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세력과 결합하여 일제의 전쟁정책을 교란하고, 조
선 독립투쟁을 고무하였다.
조직은 잔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적인 노동조합과 노동단체 결성이 어렵게되자, 비
합법적인 노동조합 조직인 ‘적색노조’를 결성하여 민족해방투쟁을 지향하였다.
2) 해방정국의 노동운동(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
- 해방이 되자, 정세는 민중들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었다. 민중과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
되어 자주관리운동을 벌이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
“ 해방이 되니 일본 놈들 두말 못하고 쫓겨갔제. 압박 받고 살다 우리 세상되니 만세도 부르고 좋아서 죽고 못살았구만. 서러움 그만 당하고 우리도 좀 살아보자고 맘 먹 고 직장관리자치위원회를 바로 만들었제. 긍께로 우리가 탄광 주인이 된 것이었구만. 방대한 운영체계를 이끌었던 일본인이 일순간에 없어지니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곧 정상적으로 가동이 됐어. 실무 일을 거의 모두 한국사람들이 해왔었기 때문에 금방 질서가 잡혀 오히려 일제 때보다 생산량이 더 늘어났어 “(말 1989.4 화순탄광 노동자) |
- 그러나 45년 9월 상륙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일제가 남긴 모든 재산을 압수 관
리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자본가를 양성(친미파)할 뿐만 아니라, 친일 경찰과 인사들을 등용하고 민중들의 조직과 투쟁을 압살하기 시작했다.
- 이에 선배 노동자들은 1945년 11월5일 최대의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
평의회를 결성하였다.(전국 1,194개 노동조합에 조합원 약50만 명이 소속) 그리고 미 군정 철폐와 자주독립국가 건설, 물가상승과 생존권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① 46년 9월 총파업 - 철도노동자의 일급제 전환을 계기로 전국적인 공동투쟁 전개
② 10월 민중항쟁으로 확산(300백여 만 명이 참가)
③ 47년 3월 총파업 - 경찰민주화, 테러방지, 실업방지, 생활보장, 구속자 석방 등 요구
④ 48년 2.7 구국 총파업 - 조국의 분단 위기라는 정세 앞에 유엔 감시단의 방한 반대
⑤ 48년 5.8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
⑥ 이후에 빨치산투쟁에 참여하여 처절하고도 완강한 투쟁 전개.
- 미군정은 ‘대한노총’을 만들었다.
46년 3월10일 혁명적 노동조합인 전평을 파괴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자본가들 을 위해 ‘혈한불석’으로 일하겠다는 강령을 내걸은 부르주아적 노총을 조직하였다.
- 미군정은 전평의 46년 9월 총파업과 47년 3월22일 24시간 총파업을 통한 민주주의적인
요구를 모조리 묵살하고 살상과 투옥과 해고 등으로 철저하게 억압했다.
- 47년 4월 이후부터는 기업내에서 소위 대표노조 선거 방식을 통해서 전평을 파괴하고 ‘대한노총’을 육성하려 노력했다. 4월19일 미군정은 경정회사에서 전평노조인 경전 종 업원조합을 파괴하기 위해서 무장경관과 테러단의 시위 하에 대표노조 선거를 통하여 ‘대한노총’을 확립시켰다.
- 47년 6월8일 전평을 불법화했다.
- 이 시기를 흔히 해방정국이라고 하는데, 이 때는 전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요구가 높아 정치적인 활동이 활발했다. 이때 이미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 의 요구만이 아니라, 전 민족의 요구를 내걸고 전체 민중운동을 주도하고 투쟁의 선봉 에서는 역할을 담당했다.
3) 50-60년대의 노동운동(60년 4.19혁명기 노동운동)
- 이승만 독재정권이 들어선 후 경제는 예속적인 독점자본을 위한 경제가 되어갔고, 6.25
전쟁 이후 민중운동세력의 심각한 타격과 극도로 팽배해진 반공주의와 숭미주의로 인 해 노동운동은 상당한 악조건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53년에 노동법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58년에는 섬유노조연맹과 자본가 사이에 8시간
노동제가 체결되기도 했지만, 대한노총의 철저한 정치도구화와 어용 화라는 어려운 여 건 속에서 노동운동의 역량을 조금씩 쌓아갔다.
-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의 탄생(59년)
58년 8월 총37개 연맹들 중 24개 연맹들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전국노협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결성당시 총 541개의 노조들 중 전국노협에 가입할 의사를 밝힌 노조는 311 개의 노조로 총 조직노동자의 절반이상을 포괄하였다.
이들은 ‘대한 노총 지도부들의 부패, 집권당과 자본가들에의 예속, 어용노조 결성 등을
1956년 3월5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지명하자 이승만은 대통령 지명을 수락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발언을 했다. ... 그 다음날 대한 노총은 바로 전업노련 산하의 조합원들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재출마 염원 데모’를 벌이며, ‘부통령에는 자유당에서 지명한 이기붕을 절대 지지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대한 노총을 우마차까지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하며 데모를 벌여 민의가 아닌 “우의, 마의 데모”라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
하지만 이들은 정부의 탄압으로 4.19까지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어용 「대한노총」을 재편성하여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을 결성하였다.
- 4.19혁명
민중들은 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계기를 맞아 반 독재 투쟁에 떨쳐나서
4.19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정세는 유리했고 선배들은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민주화, 신규노조 결성투쟁을 대대적 으로 벌였다. “전국 실업자 구호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사무직노조인 교원, 언론(대구일보, 연합신문, 평화일보 등) 신문사 노조, 금융 노동자 (조흥은행 등 시중은행, 증권사 노조들이 은행노조연합회를 결성) 들이 노동조합을 결 성하였다.
⇒ 즉, 이 시기는 자주적인 민주노조운동이 힘차게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노동운동은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된다. 박
정권은 임금을 동결하고 노동조합과 각종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선 건설 후 분배, 산
업 역군’이라는 이념공세와 저임금 정책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된 다. 또 정부는 정치투쟁을 전면 봉쇄하고, 「한국노총」을 어용으로 재편하고 노동관계 법은 개악하고 외국인 투자기업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을 금지(외국인 투자기업에서의 노 동조합 및 노동쟁의에 관한 임시특례법)하기도 했다.
- 5.16쿠데타는 8월 위로부터의 노조재편을 지시하고 ‘9인위원회’를 구성, 이들에 의해 12 개 산별노조 조직을 만들고 이어 “한국노총“을 결성하였다.
“한국노총”은 ‘군사정권 승인과 지지’, 형식적 ’노사협조주의‘를 내걸었다.
- 노동법 개정 : 노조 설립주의, 정치활동 금지, 복수노조금지, 쟁의 절차 복잡화
3)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전태일에서 김경숙까지)
(1) 시대적 상황
- 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대기업 노동자가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사회의 주요 세
력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가는‘한강의 기적, 국가안보, 70년대 우리 집 시
대, 80년대 내 차 시대’를 외치면서 저임금정책을 고수하고 고된 노동과 빈곤을 강요 했다.
- 정치적 위기를 오직 폭압적인 통치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박 정권은 71년에
「국가비상사태」를, 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긴급조치(74년 -79년)」를 발표했 다. 그러나 민중들은 구속과 탄압을 각오하고 유신철폐를 위한 투쟁을 끈질기게 벌였다.
- ‘국가와 국가기구에 의한 직접적 개입’에 의한 노동통제 정책을 썼다. 즉 노동운동을 ‘국가안보에 의한 사회질서와 치안유지 차원 - 노사간의 대립갈등은 경제정장의 저해 요인이면서 국가안보를 위협한다.’
- 한국노총을 통해 노동자 통제를 하였다.
한국노총도 이에 발맞춰 1972년 10월 유신지지성명 발표, 1974년 한국반공연맹가입, 1976년 새마을 교육강화,
단위노조 민주화 탄압 ,
- 공장 새마을 운동“종업원을 가족처럼, 공장일을 내일 처럼”
(2) 노동운동의 특징
① 당시 노조가 없었던 미 조직 노동자들의 자연 발생적이며 폭발적 투쟁이 많았다.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선배의 분신 항거한 투쟁은 고된 노동과 빈곤에 대한 인간선언이 자, 인간으로서의 권리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로 인해 노동문제가 사회에 널리 파급되었고, 노동자들은 스스로 각성하면서 자주적으로 살기 위해 거센 투쟁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 남성노동자들의 폭동, 노동조합 결성시도
파월 한진 노동자KAL 빌딩 사건(71년), 현대조선소 2만 노동자의 투쟁(74년), 사우 디 현대건설 노동자의 투쟁과 중동노동자들의 동정 파업(78년)
② 노총의 어용행각과 정부 탄압을 뚫는 민주노조 건설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 활발했다.
70년대에 약 2,500개의 새로운 노조가 결성되었다.
70년 11월27일 청계피복노조(77년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노조 결성이 있었고, 삼성 그룹 산하의 제일제당 김포공장의 노조결성투쟁(77년)도 있었다.
또 63년 결성된 한국모방 노조 민주화와 임금, 단협체결 투쟁(72년), 두 차례에 걸쳐 민주노조사수 투쟁을 벌인 동일방직 노조(78년) 등이 있다.
③ 7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일방적인 노동자 희생정책에 반대하여 임금인상, 체불 임금 지급 등 노동조건 개선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④ 70년대 후반에 연대 지원 기구가 활성화되었다.
카톨릭노동청년회, 산업선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의 단체들이 노동자들의 의식, 조직,투쟁사업을지원하거나노동문제의사회여론화에기여했다.
◎70년대 대표적인 투쟁 -YH무역노조의 투쟁 79년 3월 YH무역 회장이 미국으로 자산을 빼돌려놓고 회사를 폐업조치하자, 노조측에서는 “공장폐쇄는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 극”이라면서 농성투쟁을 벌임. 정상화와 폐업을 반복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79년 8월부터 신임당사에서 농성. 이에 정권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경찰을 난입시켜 강제연행. 이 과정에서 김경숙씨가 시체로 발견. 정부는 연이어 노조지부장 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 그러자 부산, 마산 지역의 민중들은 대대적인 항쟁에 돌입. YH노동자 투쟁은 박정희가 죽게된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
4) 70년대까지의 투쟁을 돌아보며
- 70년대는 5-60년대의 단위사업장 중심의 고립적 투쟁에서 벗어나, 민주노조의 연대투 쟁과 노동자의 사회 정치적인 인식이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민주노조의 수와 역량, 경험은 부족하여 노동운동의 주체적인 역량을 확고히 강화시켜야 했고, 이 과제는 80년대에 획기적으로 해결되어 갔다.
이와 같이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선배들이 5-60년대 밭을 일구고, 70년대 씨앗을 뿌리 고, 80년대 중반까지 거름을 주고 가꾸어 냄으로써 90년대에는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사의 발전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수확을 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3. 광주 민중항쟁과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발 (79년 말 - 82년까지)
1) 시대적 배경
-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 당한 후 80년 봄에 학생․시민들의 유신잔재 세력의 퇴
진과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화되었다. 그러나 5.17 쿠데타를 통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 군부세력은 5월 광주민중항쟁을 압살한 뒤 노동운동은 물론 민족민주운동을 폭압적으로 탄압하였다.
- 또 노동법을 개악하여 『산별노조 체계에서 기업별 노조체계로, 노조설립요건의 강화,
방위산업체․국 공영 기업에서의 쟁의금지, 3자 개입금지』등 법률을 개악했다. 게다가
「비상계엄하 노조활동지침」 등 7가지의 정화지침을 내고 노조임원 사퇴강요, 전임자 삭감, 정화대상자의 선정과 사직강요로 노조간부 191명을 ‘강제 정화조치’하고, 50여명 의 노조간부를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2) 뜨겁게 달아오르는 노조운동
- 80년 초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 투쟁이 가열되자, 노동자들도 자주적인 노동조 합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노동조합 결성이 확대되어 약 7-8만 명의 조 합원이 증가하고, 쟁의건수는 80년 상반기에 1천 건에 달해 유신체제 7년 동안의 쟁 의와 비슷할 정도였다.
- 민주노조의 ‘한국노총 민주화투쟁’
: 80년 5월 13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전국 궐기대회’를 한국노총강당에서 개최
동일방직 해고자 등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김영태 노총위원장과 김병룡 금속노조위 원장 등 어용노조 간부들의 즉각 사퇴를 주장,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서명운동을 제의했다.
이들은 노동기본권의 완전한 확보를 위해 농성에 돌입
5.14일 학생시위대의 연대 투쟁 제안에 ‘노조운동의 분리를 주장하며 자체 해산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 청계피복노조 : 대표적 투쟁으로 청계노조의 임금인상투쟁이 있는데, 전태일 선배의
분신 이후 여러 차례의 탄압을 견디며 생명을 유지해 온 청계노조는 80년에 최저생계 비 쟁취를 위한 단체교섭력 확보와 그를 통한 조직확대를 꾀했다. 그러나 기업주들의 냉담한 반응에, 간부 단식투쟁, 조합원 연좌 농성, 가두시위로 임금 29%인상, 10인 이
상 사업장의 퇴직금 제도를 쟁취했다. 이러한 성과는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 사북의 동원탄좌 : 또 4월에는 강원도 사북의 동원탄좌 광산 노동자 투쟁이 있었다. 사북의 광산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낮은 임금, 노조의 어용 성을 개선하기 위 해 대규모의 파업 투쟁으로 사북 시가지를 장악하였으나, 지도부의 취약, 대오의 동 요, 내부 분열 확대로 몇 가지 요구 안을 관철하고 파업을 끝내지만, 이 투쟁의 사회 적 파급은 엄청났다.
- 이처럼 유리한 정세를 맞아 조직을 활성화하고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여 민주노조의 줄기를 세워 갔지만, 군부독재의 청산 없이 노동자의 요구가 근본적으로 달성될 수 없
었다. 하지만 당시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확고한 주체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70년대부터 활성화된 민주노조를 물리적으로 해체시켜, 5.17 이 전에 112만 명이던 조합원이 80년 말에는 95만 명으로 격감하였고 이에 맞서 청계피
복, 콘트롤테이타, 원풍모방 노조는 격렬히 투쟁하였다. 이러한 민주노조 사수투쟁은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남겼고, 이것이 87년 7-9월 투쟁으로 살 아 났다.
3) 당시 투쟁의 의의
- 민주노조의 와해와 노동운동의 원천봉쇄 아래서도, 선배들은 현장역량을 축적하기 위 해 소모임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했다. 의식면에 있어서도 70년대의 막연한 반 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벗어나 노동운동권과 정치권력간의 대립적 성격을 자각하고 사회변혁 적 운동으로 가야한다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90년대 들 어서 소수 노동자를 넘어서서 조합원 대중 속으로 물결쳐나갔다.
4. 역량축적과 방향의 모색 기(83년에서 87년까지)
1) 5공 치하의 사회적 상황
- 5공 정권은 박 정권의 뒤를 이어 수출과 자본 위주의 성장이라는 두 토끼를 쫓기에 만 급급하여 노동자의 생존은 외면한 채, 외국자본의 급격한 도입 등 독점 자본을 위 한 소위‘민간 주도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경제가 더욱 예속화, 독점되었다.
- 81년부터 미문화원 방화점거투쟁, 광주학살 원흉처단 요구 투쟁을 비롯해 대학생들의 시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농민들은 외국농축산물의 도입 반대, 농가부채 해소, 농 협 민주화투쟁, 빈민들은 철거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2) 도약을 위한 준비
① 83년 말 노조 결성과 소모임 활동으로 역량을 축적한 이리․인천 해고자들이 중심이 되어 <블랙리스트 작성, 배포에 대한 규탄 및 취업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유인물 배 포, 단식투쟁, 대중집회를 전개해나갔다.
② 83년 12월 5공 정권이 소위 ‘유화조치’를 실시하자 대중투쟁은 고조되었다.
84년 4월 400 조합원이 명동성당에서 청계피복노조 복구 및 합법성 쟁취투쟁을 벌였 다. 경찰은 현판식 불허, 간부 연행, 폭행에도, 청계피복 노조는 계속 합법성 쟁취대회 를 열어 신고필증은 없어도 당당히 노조를 복구하였다.
③ 84년 5월 대구, 부산 등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이, 84년 여름부터 85년 4월까지 대우 자동차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때부터 70년대와는 달리 남성, 대공장 기간산업 노동자가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서울. 인천 등 지에서 민주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84년 초에서 9월까지 157개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이것은 지난 4년 간의 결성 숫자 보다 많다.
④ 이러한 성과 속에서 85년 6월 서울 구로 지역 9개 노조가 동맹파업을 벌였다.
정부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명을 구속에 맞서 효성물산, 가리봉 전자 노조 등이 동
맹 파업에 들어갔고, 9개 노조는 학생들과 연대하여 7일간 폭발적 투쟁을 전개했다.
⇒ 투쟁의 요구와 구호 : 노동자들은 “구속자 석방, 노동악법 철폐, 해고자 복직, 최저 생계비 보장, 민주노조 파괴에 앞장서온 노동부장관 물러날 것. 폭력경찰 물러가
라!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고 외쳤다. 파업농성과 가두시위, 연대투쟁 과정에서 43명이 구속, 2천명이 해고되었다.
⇒ 이 투쟁은 내용이나 규모 면에서 실로 충격적이었다.
노동자계급과 반 독재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이 만천하에 확인되었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과제가 부각되었다. 또 ‘우리 노조만 잘 지키면 된다’는 조합주의, 기업별 의식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즉 노동운 동의 방향과 내용이 새로운 전환점에 이른 것이다.
⑤ 이렇게 노동자의 진출이 거세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유화조치’를 포기하고, 전면 탄 압에 나선다. 이 때부터 신규노조, 복구되었던 노동운동의 투쟁력은 주춤하게 되며, 노 조를 통한 공개적인 활동이 봉쇄되어 87년 여름까지 이어진다.
3) 이 시기의 중요성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정부의 탄압을 뚫고 민주노조 건설의 노력을 활발하게 전개한 시 기다. 정치의식을 고양하고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기업별 활동이 아니라, 연대 활동과 투쟁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87년 이후 노 동 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5. 87년 노동자 대 투쟁과 노동운동의 발전
1) 6월 항쟁
- 이 시기 이후는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겪은 시기다.
87년 1월 박 종철 학생이 고문 학살되자, 추모투쟁을 전개해 나가고, 이어 4월 13일 정 부가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체육관 선거’를 천명하자(노총도 지지성명), 학생, 지 식인, 종교인의 단식, 삭발 투쟁이 연이어 전개되었다.
- 드디어 6월 10일, 전국의 22개 도시에서 해방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직선제 개헌, 군부 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대중적인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범 국민적인 지지와 참여가 높 았고 초기 학생 대오 중심에서 점차 근로민중의 광범한 참여로 투쟁 기세는 드높아 갔 다.
- 그러자 정부는 직선제 인정 등의 ‘6.29 노태우 선언’을 하여 기만적인 민주화 제스쳐 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고, 당시 뚜렷한 투쟁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투쟁을 지속시키지 못하면서, 6월 항쟁은 주춤하게 된다.
2) 7-9월 노동자 대 투쟁
(1) 불붙는 노동자 대 투쟁
- 6.29선언으로 투쟁이 주춤하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6월 항쟁에 보여진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과 군부독재 세력의 후퇴라는 조건을 타고, 80년대에 다져진 역량을 발판으 로 투쟁의 광장으로 진출하였다.
- 7-9월 투쟁의 최초의 진원지는 울산의 현대엔진 노조로, 회사측의 서류 탈취와 어용노 조 결성에 맞서 투쟁했으며,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으로 투쟁은 확산되 었고, 8월에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하고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6개 사업장 4만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시위와 행진으로 최루탄 난사로 대응하던 경 찰을 무력화시켰다.
- 7월 중순 부산, 마산, 창원 등 남부지방에서 시작하여 전국과 전 산업으로 투쟁이 파급 되었다.
- 정부는 놀라기만 하고 있다가 8월 말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의 장례를 무 력으로 해산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탄압에 들어갔다. 9월 들어 언론의 이념공세와 파업 농성장 경찰력 투입으로 농성 장을 해산하고 구속시키는 등 대대적인 진압공세를 펼 쳤다.
(2) 7-9월 노동자 대 투쟁의 특징
- 하루의 쟁의건수가 몇 해 동안의 수보다 많은 자연 발생적인 투쟁의 폭발력이다.
6월 29일부터 9월 13일 까지 쟁의건수가 총 3,241건(하루 44)으로 80년 봄에 비하면 6 배에 달하고, 이 중 제조업이 1,796건에 달한다. 그리고 전 산업, 전 지역에 걸쳐서 파 업과 농성, 가두시위가 동시다발로 전개되었다. 6월 29일 이후 노조가 1,162개 결성 되 어 그 전보다 노조 수가 40%로 증가하였다.
- 투쟁 내용이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임금인상, 노조건설, 근로조건 개선으로
집약되었다.
- 투쟁형태는 군부독재하의 노동악법을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돌파해나갔다. 거의 모 든 사업장에서 쟁의발생 신고나 냉각기간을 무시하고 현장을 점거한 후 파업농성에 돌 입 했으며 가두시위와 행진이 일반화되었다.
- 지역․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중화학 대기업 남성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경공업, 중소기 업, 여성노동자 사업장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 투쟁의 주체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투쟁으로 전개되었다.
3) 7-9월 대 투쟁의 교훈
- 7-9월 투쟁은, 6월의 민중의 폭발적 진출을 노동자의 대 투쟁으로 상승 발전시키면서 6월 항쟁의 소강상태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계승해 나갔으며, 십 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대중운동의 비약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규모의 대중투쟁이었고, 노동자 투쟁의 분수령이었다. 이 투쟁을 통해 남한 노동조합운동은 비 약적인 조직적 진출을 하였으며, 이후 지역, 전국, 업종별 노동자의 단결을 기초가 되 었다.
“87년 대 투쟁으로 노동자 자신이 노동운동의 주체가 되었고,
합법적인 노동조합 틀을 통하여 노동운동의 지평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6. 7-9월 대 투쟁부터 현재까지의 노동운동
1) 87년 이후부터 89년 말까지 조직․투쟁의 흐름과 특징
(1) 의식의 변화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굴종의 삶이 아니라, “노동자도 인간이 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며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여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과학적인 사상과 계급의식을 정립하여 변혁의 주체로 서게 되었다.
(2) 조직의 확대 강화
조합 수는 3배, 조합원수는 2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금의 많은 민주노조가 이때 결성되었다.
|
87년 6월 이전 |
89년 10월 |
노동조합수(조합원수) |
2,725개(90만명) |
7,400개(200만명) |
- 노동조합의 연대조직인 지역. 업종별 노조협의회(연합)를 건설.
87년 12월 마창노련을 필두로 88년까지 11개 지역에서 지역노동조합협의회 (지노협) 를 결성하였다.
지노협은 상반기에 공동교육, 공동임투, 연대투쟁을 전개하고, 하반기에는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면서 기업별 한계를 극복하여 정부와 총자본에 대항 해 가는 유력한 무 기가 되었다.
- 이를 기초로 88년 하반기부터는 민주노조의 전국적 구심을 만들자는 제기와 결의 속
에 88월 12월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조직되었다.
- 아울러 사무금융노련, 언론노련, 병원노련, 전국교직원노조 등 업종 노동조합이 대대적 으로 결성되었다. (업종별 노조협의회 또는 연맹) 한편 대기업 노조는 그룹 차원으로 단결했다.
(3) 대중적인 투쟁력 강화
- 쟁의건수로 볼 때 투쟁이 활성화되었다.
(87년 전 연 200건 미만, 88년 이후 연 1천7백 건)
기업별체계에서도 89년부터 공동 임투를 조직하는 등 연대투쟁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활발하게 벌였다.
- 이에 정부는 88년 10월 무 노동 무임금지침, 12월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사업장내 공권력 투입), 89년 10월 산업평화 조기정착화를 위한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직접적인 물리적 탄압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탄압이 88년 말 안강의 풍산금속, 89년 1월초 울산 현대중공업의 경찰력 투입을 통한 폭압적 진압이다. 소위 ‘공안통치’가 시작된 것이 다.
(4) 이 시기 특징을 요약
87년의 성과를 기반으로 민주노조는 지역, 업종, 전국의 규모로 단결하고, 임투와 노동법 개정투쟁을 통해 연대 투쟁을 조직함으로써 이제 노동운동은 사회변혁 세력의 확고한 구 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 90년 전노협부터 95년 민주노총 건설까지 (조직의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1) 90년 전노협, 업종회의, 대기업연대회의 결성
-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을 선언했던 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했다.
전노협은 14개 지역의 지역노조협의회와 민주출판노조협의회, 시설관리노조협의회 등
2개의 업종별 노조협의회로 20여만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조직을 결성했다.
-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40 %를 차지하는 전문기술, 사무직 노동조합연맹도 전국 업종 노동조합회의를 92년 현재 530개 노조 16만여 조합원으로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정 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였다.
- 또 90년 들어서는 포항제철, 대우조선, 만도기계, 아세아자동차 등 여러 대기업에 민주 노조들이 속속 들어섰고, 이러한 성과들이,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로 조직적으
로 결속하였다.
- 90년은 그동안 세운 조직력을 토대로 정부와 자본의 총체적 탄압에도 줄기차고 끈기 있게 임금인상, 노동법개정, 노동운동 탄압분쇄 투쟁을 전개했다. 공동임투와 업무조사 거부 투쟁, 노동운동탄압저지 및 전노협 사수투쟁 등을 전개하였고, KBS,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에 이어 5월 1일 노동절 총파업투쟁으로 전면적인 공동대응을 시도했
다.
◆ KBS, 현중골리앗 투쟁, 전노협총파업
90년 4월12일 관제사장(서기원 사장) 반대 농성중인 KBS노조에 공권력이 투입 117명이 강 제 연행되었고 노조는 조합원비상총회를 열어 제작거부를 결의한다. 4.30 KBS 파업 농성장 에 공권력이 재투입되어 333 명 강제 연행 당한다.
4월25일 현대중공업노조는 노조간부구속에 항의해 전면파업에 돌입하고 KBS투쟁지원 및 민 주노조 사수대회를 1만 8000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한다. 4월28일 경찰은 현대중공업 1만8000 명의 조합원을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 진압한다. 이에 노조는 파업지도부를 포함해 200명이 골리앗 점거농성에 돌입한다. 이에 마창노련, 현대그룹계열사노조, 서노협 등이 중공업 탄압 에 맞서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4월 29일 전노협은 비상중앙위원회를 서울대에서 개최 5.1 전 국 총파업을 선포하고 5.1 전국70개 노조 약 12만 명이 총파업에 돌입한다.
▶ 이 투쟁을 통해 하반기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공동으로 11.12 “전태일 열사 20주 기 추모 1990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 하게된다.
(2) 91년 전국임금인상 공동투쟁본부, ILO공대위 구성
- 민주노조 총 단결의 기치 아래 전노협과 대 공장 노조 연대회의와 함께 91년 전국 임금
인상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했고, 91년 하반기에는 전노협과 업종노조회의, 노동단체와 함
께 구성한 ILO 공대위 로 민주노조 총 단결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 왔다.
- 91년에는 계속되는 소위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제 2공안 통치 속에서 ‘수서 비리 은 폐정권 규탄 국민대회’, ‘세계노동절 102주년 기념대회’,‘강경대군 폭행치사 규탄투쟁’ 을 비롯 5-6월 각종투쟁 참가,‘박창수 위원장 옥중 살인 규탄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규탄 대회’등 대규모 투쟁에 참가했다.
◆ 전노협사수를 위해 투쟁하다 숨져간 박창수 열사 (노동과 세계 196호)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는 1990년 위원장선서에서 93%의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에 당선된 다. 90년 전노협와해 공작에 실패한 노태우 정권은 91년 현장과 지역조직을 무력화시키는 공작에 착수한다. 그 첫 대상은 전노협가입사업장중 대기업인 한진중공업노조였다.
한진중공업노조는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연결하는 연대의 핵심고리였다.
1991년 2월13일 박창수 위원장은 대우조선 파업지원방안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대기업 연대회의 간부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구속된 이후에도 회유와 협박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인신 매매 범을 한방에 수용해 부인을 납치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4월25일에는 부산의 한 카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이라는 사람이 노조간부들을 두 차례 만나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 위원장을 석방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5월4일 박창수는 이마가 6cm쯤 찢어져 안양병원 중환자 실에 입원했다.
6일 새벽 병원마당 시멘트바닥에서 박창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검찰은 영안실 벽을 해머로 강제로 부수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 강제부검을 실시한 후 일 방적으로 수사를 종결지었다.
민주노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노동자 박창수, 그는 정권의 서슬 퍼런 ‘전노협 와해 공작’ 에도 조직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 바쳤던 진정한 노동운동가였다.
(3) 92년 「총액임금제 저지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대표자회의」결성
전노협, 업종회의는 물론 대기업 노조 대표자들이 모여 전노대를 구성하였다.
(4) 93년 6월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은 「전국노동조합 대표자 회 의」에서 민주노총준비위 발족
- 전노대는 노동법 개정 투쟁 등의 공동사업과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 전망 및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93년>
- 전노대는 노동법 개정 투쟁 등의 공동사업과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 전망 및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한 민주노조 진영은 1993년 92년 전국노 동자대회조직위원회 성과를 바탕으로 임금인상, 노동법개정투쟁, 고용보장, 사회개혁 투쟁 등 전국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공동사안을 놓고 통일적인 대응과 함께 강력 한 결집을 위해 단일한 대오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은다. 그 결과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노협이 모여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 다.
** 전노대를 구성하면서 노동운동단체들은 배제되었다.
- 전노대는 노․경총의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을 어용노총 해체 투쟁과 탈퇴운동으로 결 합시켜 내면서 임금인상투쟁을 집중시켜 나간다. 이 시기는 민주노조의 조직 발전 모 색을 준비하는 시기로서 민주노총, 산별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발전 경로와 발전을 위 한 논의가 집중된다.
- 93년의 투쟁은 현대정공 김동섭 위원장의 직권조인에 대한 분노로부터 촉발되어 현총 련 공동 임투에 불을 부치게 된다. 6월30일 울산 일산해수욕장에서 대규모집회와 7월7 일 63,000여 조합원의 연대 총파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투쟁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문 민 개혁의 허구와 문민정부라는 대중의 기대, “ 김영삼 정부내의 개혁파를 돕기 위해 파업이 자제되어야한다” 는 논리가 잘못된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투쟁이었다.
<94년- 대기업, 공공노동자의 투쟁과 민주노총 준비위 발족 >
- 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소속 철도노동자들과 지하철노조의 연대투쟁은 ‘공기업 3% 임금억제정책 철폐, 근로기준법 준수, “해고자 원직 복직’ 등 공동요구에 기초한 공동파업을 전개함으로써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전지협 연대파업투쟁은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LNG 선상파업투쟁, 광주의 금 호타이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대구의 대우기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각 지역별 대 공장 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져, 김영삼 정권의 임금억제정책과 노사협조정책을 실력으로 무력화시켜 나갔다.
- 94년 1월 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단일 산별노조의 건설 및 연 맹의 합법화’라는 형태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켜 나갔다. 병원노련과 전문노련은 기업별 노조체계 하에서 집단교섭을 성사시킴으로 업종별 공동투쟁의 가능 성을 보여주었다.
- 전국과학기술노조, 전국의료보험노조 등은 단일 산별노조(소산별)를 건설하고, 합법성 을 쟁취함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의 전망과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운동의 경우, 의료제도의 개선, 완전한 사회보장의 실시, 언론 민 주화 등 사회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나갔다.
- 94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 동안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의 선도사업장으로 정부의 임금통제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이 라는 이유로 노동3권마저 심각하게 제약 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상반기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출발로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 업 투쟁 등을 계기로 공공부문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11월 4일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노조 대표자회의]를 결성하였다.
-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수천의 대중 지도력과 대중적인 공동투쟁의 경험, 계급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단결을 요구하였다. 더구나 민주노조 사수 투 쟁이라는 방어적인 투쟁과 시기집중에만 머무는 소극적인 전술을 뛰어넘어 총자본과 총 노동의 대립을 실질적인 투쟁 전선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기업별 노조의 틀로는 더 이상의 계급적인 단결과 공동투쟁을 조직하는데 한계가 있었 다. 한편 대중적인 어용노총 탈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 명실상부하게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구심으로 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 준비위]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범하였다.
<95년>
- 95년 5월16일 한국통신은 유덕상 위원장을 비롯하여 노조간부 60명을 파면시켰다.
더 나아가 김영삼 정권은 한국통신노조의 준법투쟁을 ‘국가 전복의 저의를 가진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 임금가이드라인 철폐, 통 신 개방반대, 재벌특혜 민영화 반대”의 요구를 걸고 서울명동성당과 조계사에서 농성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은 최초로 명동성당 등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 중 인 노동자를 강제 연행하였다. 이에 한국통신노조는 7.24 파업을 결의하였으나 7.30 국가 기간산업의 파업 불가를 깨지 못하고 파업투쟁 중단을 선언하면서 이 투쟁 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 신경영전략에 노동자들은 노동강도가 강화되고 산업재해 증가, 고용불안에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대우조선의 박삼훈 동지, 대전 철도 공작 창 서전근 동지가 분신으로 투쟁을 하였다.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는 신경영 전략이 가져온 노동강도강화와 노조의 실리주의 노 선에 반대하며 분신으로 저항했다. 현자노조 민주세력은 대책위를 꾸리고 5.15 전 공장 파업투쟁에 들어갔으며 이를 받아 현총련이 연대 투쟁에 들어갔다.
(5) 95년 11월 11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출범
- 민주노총의 힘찬 깃발이 올라간 그 순간에도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는 고통받고 있었 다. 95년 12월15일 새벽 민주당 서울지부당사의 5~6층 비상계단에서 대우정밀 병역특 례 해고노동자 조수원 동지는 스스로 목을 매어 오랜 수배 생활의 막을 내린다. 조수 원 동지의 투쟁은 민주노총이 받아 안아 병역특례법 개정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 96년 1월12일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한국전력노조 최태일 어용집행부의 부당징계에 항의하고 노조민주화를 요구하며 한일병원지부 위원장 김시자 동지는 자신의 몸에 불 을 당긴다.
- MBC 노동자들의 “강성구 사장연임 반대와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 분쇄” 투쟁, 구미 한 국합섬, 울산 태광산업․대한화섬 노동자들의 6~7월 파업 투쟁, 공공 5사(한국통신, 전 국 지역의보,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 조폐공사)의 연대투쟁 등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 속되었다.
- 김영삼정권은 ‘신노사관계구상’을 발표, 5월9일 대통령 자문기구로 [노사관계개혁위원 회]가 구성된다. 여기에 민주노총은 “참여와 투쟁”이라는 전술로 노개위에 참석하게 된 다.
(6) 96-97 노동법 개정 전국총파업투쟁(노동자의 정치선언)
김영삼 정권의 ‘노사관계위원회’와 ‘신노사 관계’, 노동법 개악 정책은 97년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정국주도권 장악 음모 속에 1996년 12월 26일 정리해고 법을 핵심 으로 한 노동법과 안기부 법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12월 26일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고 전국적 총파업 투 쟁으로 맞섰다, 3단계에 이르는 끈질긴 투쟁 끝에 1997. 3.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 되어 통과된다. 이러한 파업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정리해고’에 대한 법적 제도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높은 위기 의식과 이러한 위기의식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모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또한 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대중투쟁동력으로 확산 된 이 투쟁은 노동자 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민족주의 세력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96-97년 노동자총파업투쟁의 역사적 의의
- 파업참가 누적규모가 3,206개 노조,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 치 총파업이었다.
- ‘노동악법 전면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체 노동자의 이해와 단사별, 지 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전국총파업 투쟁이었다.
- 96~97년 총파업투쟁은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 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투쟁으로서 기존의 민 주주의 투쟁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 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소위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는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경우 하나의 ‘시민’으로 민주주의투쟁에 참여했지만, 96-97총파업투쟁에서는 투쟁의 주체로 서 조직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 투쟁의 형태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준비를 통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 두 집회와 시위를 결합하고, 이를 노동자들이 중심에서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 운 투쟁모습을 보여 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정치총파업 이었다.
(7) IMF 구제금융과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98년>
- 97년 11월 IMF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적극 추진하였다. 민주노총은 98년 2원6일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 법을 받아들이는 노사정합의안에 동의하였다. 2월9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조합원의 거센 항의 속에 직권조인 한 합의 부결, 지도부 사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월10일 비상대책위원회는 1월13~14일 총파업을 결정, 산하 67개 사업장 12-14만 명의 조합원은 총파업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2월12일 비대위는 총파업을 철회하게 된다.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 리 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 조합원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한다.
- 5.1 3만여 조합원이 모인 108주년 세계노동절 기념집회에서 민주노총 5대 요구(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법 철폐 및 부당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보장, 고용․ 실업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 정경유착근절과 재벌해체, 노동3권 보장․ 노동자 경영참여. IMF 재협상)를 내걸고5월말 6월초에 총력투쟁을 선포한다.
- 자본과 정권의 총공세는 시작되었다.
6.18 55개 퇴출기업발표, 6.29 5개 퇴출은행 발표, 6.30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신고, 7.30 11개 공기업민영화계획 발표
- 7월14일 금속산업연맹의 투쟁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어 7월22일에는 금속산별 연맹 15개 노조 6만8천명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 7월23일 민주노총 연맹대표자회의에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게 된다.
- 지도부의 오류로 합법화된 정리해고의 칼날은 여지없이 노동자의 목을 향해 날아들어 온다. 이후 전국의 노동자는 정리해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공세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전략에 맞서 총파업과 총력투쟁으로 강력히 맞서 왔 다.
- 1998년 5월27~28일 총파업투쟁에 돌입. 49개 노조 7만 7천명 참여
- 7.14 강제퇴출에 맞서 싸운 3개 은행(동화, 동남, 대동)
- 동아 엔지니어링퇴출에 신길수 위원장의 목숨을 바친 투쟁
- 현대 중기산업노동조합 퇴출 반대투쟁. 이 과정에서 육경원 조합원은 목숨을 바쳐야 했다.
- 1998년 7월20일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를 위한 무기한 천막농성과 파업투쟁
- 8월17월 만도기계노조 파업
- 10월 전국실업자 대회
- 조폐공사 창 통폐합 반대 파업투쟁
<99년>
- 1999년 민주노총 총력투쟁
- 4월19일 서울지하철 파업투쟁
- 조폐공사 파업유도 진형구 검사 취중발언
- 1999년 10월 한라중공업노조 파업
- 11월 33일간 파업투쟁으로 재능교사 노조 창립 - 비정규직 위탁계약직노동자로서 처음 노조설립
<00년>
- 2000년 3-4월 자동차4사 노조 연대파업, 축협노조투쟁, 신선대․우암 노조 투쟁,
- 고속철도 건설공단노조 파업투쟁
- 6.29 롯데호텔노조 파업에 공권력 침탈
- 7.1 사회보험노조 공권력 투입
- 민주노총 공안탄압저기투쟁 및 서울역 농성투쟁
- 아셈 반대 투쟁
- 2000년 12월 금융노동자파업(국민, 주택은행) ,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파업
<01년>
-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
- 01년 6월 대한항공조종사노조 파업, 아시아나항공 노조 파업
- 철도노조민주화 투쟁 - 54년 만에 철도노조에 민주집행부 직선제 당선
<02년>
- 01년 2월 발전노조, 철도노조, 가스공사노조 민영화 반대 파업투쟁
<03~04년>
비정규노동자의 생존권문제, 손배 가압류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투쟁이 줄지어 이어지고 있다.
- 03년 손배 가압류라는 노동자 생계를 송두리째 뿌리뽑는 탄압으로 배달호동지의 분신 으로 시작해서 9월 멕시코 칸쿤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의 할복, 10월17일 한진중공업 김주익동지 자결, 10월23일 세원테크 지회장 이해남 동지의 분신, 10월 26일 근로복지공 단 비정규직노조 광주전남본부장 이용석 동지의 분신, 10월30일 한진중공업 곽재규동지 의 투신에 이어
- 04년도 2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 동지 분신, 5월7일 정오교통 노동자 조경식 동지가 택시노동자의 암울한 현실과 노동탄압에 항거하여 분신하였다.
7.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1) 패배를 딛고 노동해방으로
지난 투쟁과정에서 지도부의 구속 수배와 해고, 노조 파괴 등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좌 절하거나 패배의식에 빠지기도 했고 노동해방이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의 투쟁을 돌이켜 보면서 얻은 것이 있다. 지난 100년 간 우리 노동 자들은 탄압 속에서 더욱 철저히 노동조합의 소중함과 새로운 사회의 열망을 확인 하였 고, 투쟁 속에서 조직을 세우려는 끈질긴 노력을 해 왔고, 이런 노력이 오늘날 노조운동 의 거름이 된 것이다.
“노동자는 시련은 있어도 투쟁과 조직으로 극복 발전해 간다.” 는 것이 노동운동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 당장은 힘겹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고 생각할 수 있 지만, 우리에게는 바위를 뚫는 힘이 살아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지난 수 십 년 간은 지금보다 지독한 어려움 속에서 오늘의 이
기초를 닦아왔다는 사실이다. 60 - 70년대 선배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우리는 상당한 조직적 투쟁적 성과에 기초해서 전망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 또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1)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인 자주성, 민주성이 사라지고 있다. 비리로 얼룩져가고 있는 노조운동을 다시 원칙이 살아 숨쉬는 민주노조운동으로 곧추세 워야 한다.
2) 유연화 현장 통제방식을 극복하고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의문제를 적극 해결해 나가야한다.
3) 산별노조와 정치세력화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의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는 노동자 계급적 산별 조직, 정치세력화가 이루어 져야한다.
4) 비정규직 법안, 노사관계로드맵 등 노동법이 06년 말 개악되었다. 개악된 법 무효화 투쟁 및 사회변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권리 향상을 이루기 위한 투쟁사업을 적극적으로 전 개하자.
5) 대 공황, 경제위기속에 노동자에게 희생을 또 강요할 것이다. 자본가 정권에 대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대안사회를 모색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