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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츨라프>
3번째 영어 사용자의 상륙
브로튼 일행이 부산 용당포에서 체류한 데 이어 맥스웰과 홀 일행이 열흘간 조선을 접촉하고 탐사한 경험은, 영어문화권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맥스웰과 홀 일행이 제기한 '조선 항해시 중국어 통역 대동'의 필요성은, 이후 조선을 찾는 대부분 항해자들이 적극 실천에 옮겼다.
한반도에 영어 사용자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1832년(순조 32년) 6월이었다. 영어 서적, 영어 성경이 처음 조선에 전래된지 16년 뒤다. 이들 한국 역사상 3번째 영어 사용자들의 조선 상륙에선, 이전과는 다른 깊은 수준의 의사 소통이 이뤄졌다. 이들이 '교역'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고, 홀 일행의 충고에 따라 통역을 대동하고 찾았기 때문이다.
3번째 영어 사용자들의 조선 상륙에 대해 이조실록(순조 32년 7월21일자)은 공충감사(충청감사) 홍희근의 장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1)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2)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3)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 1) 구츨라프는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산다고 했다. 구츨라프는 조선에 기독교를 선교하러온 선교사(실제, 통상무역을 요구하러 온것임)이다. 그는 사는 곳을 동시에 두 곳을 말하고 있는데 서자(書字)대답이 참으로 이상하다. 보통 어디에 사냐는 질문에는 한 곳을 말하는것이 상식인데 그는 두곳을 말하고있다. 혹시 시 밑의 구.군과 같은 하위지방 개념일까? 난돈(蘭墩)은 런던을 의미하는데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지역은 어디를 가리킬까?
흔도사단(忻都斯担)의 뜻은 힌두스탄이란 이란계(系)의 언어로 ‘인도의 토지’를 뜻하며 북인도 평야 또는 갠지스 평야라고도 한다. 동쪽의 벵골만(灣)에서 서쪽으로 아라비아해(海)까지 이르며 동서길이 3,200km, 남북너비 최대 320km에 이른다. 일종의 함몰지대로, 인더스 갠지스 ·브라마푸트라의 3대 하천의 본 ·지류가 광대한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다. 지형은 극히 평탄하여 갠지스강江) 하구에서 1,500km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도 해발고도는 150m에 지나지 않는다.충적토 두께는 수백m에 이른다. 이 평야에 거주하는 주민은 전 인도 인구의 40%를 넘으며 역사적으로도 인도 문화를 이룩한 최대 중심지이다.
주민의 거주상태에는 지역차가 있으며, 비가 많은 동부의 갠지스강 중 ·하류부에서는 논농사를 주로 하는 쌀 재배가 성하여 건조한 인더스강(江) 유역에 비하여 5배 이상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비가 적은 서부에서는 잡곡을 주로 생산하는 외에 목화 ·사탕수수 등이 재배된다. 이 지역은 현재 정치적으로는파키스탄과 인도로 나누어지나 양국 모두 경제 ·정치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흔도사단(忻都斯担), 즉 힌두스탄이란 말이 이란계(페르시아어)라는 것이며 이 말이 인도의 갠지스평원을 뜻하는 말이다. 인도는 16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의 무굴제국이 대부분의 인도를 지배했었고, 많은 힌두교와 불교의 유적을 파괴하고 힌두인의 이슬람 개종을 적극 추진했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서에 통상무역을 요구하러 온 독일인었던 구츨라프가 거리상으로 수천Km 떨어져있는 런던과 인도의 흔도사단(忻都斯担),즉 힌두스탄에 산다고 조선의 감사에게 글자(한자)로 답했다는것이다. 그림속의 구츨라프의 외모를 자세히 보면 인도인이 머리에 둘러싸는 터번(turban)에 인도인 복장을 하고 있다. 2) 구츨라프는 영국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 라고 했다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한 하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 영국의 한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니 이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대답인가?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3)' 이 문장으로 판단해보면 지방은 아마도 영국의 식민지를 말하는 것 같다. 과거 유럽중에 영국 식민지가 된 나라로는 지중해의 섬나라 사이프러스나 몰타 같은 나라가 있다. 그럼 운남성에서 발원하여 거쳐가는 것이 지중해라는 것인가? 지중해가 맞다면 대해(大海)는 대서양(大西洋)인가? 구츨라프가 19세기 초때 수천Km를 흘러가는 하류의 흐름을 정확히 알고 대답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영국의 경계가 곤련(昆連)이라는 곳에 가깝다고 대답했는데 구츨라프가 말한 곤련(昆連)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서유럽에 위치한 섬나라 영국을 위치를 설명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하다.
본문계속)
영국과 교역하고 있는 다양한 나라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많은 속지는 물론 인도 등지에 이르는 판도를 파악하고 있다. 이는 브로튼이나 맥스웰과 홀 일행이 조선에 상륙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전에는 조선인은 영어를 전혀 몰랐고, 영국인은 조선어는 물론 중국어조차도 몰랐다. 그래서 의사소통이래봐야 보디랭귀지 수준에서 서로 이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짧은 시간에 이처럼 의사소통이 원할했던 것이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이들이 조선에 교역을 할 목적으로 오면서 앞선 방문객이었던 홀 일행의 충고에 따라 통역을 대동하고 왔기 때문이다.
교역 요구한 최초 서양선 로드 암허스트호
이 배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나타난 최초의 서양선으로, 영국 국적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 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조선, 오키나와, 대만 등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 등을 조사하면서 동시에 지방관민들의 통상에 대한 관심을 직접 파악하기위해, 1832년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를 극동지방에 파견했다. 이미 브로튼과 홀, 맥레드 등의 항해기를 통해 조선에 대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는, 린제이(H.H.Lindsay)를 책임자로, 리(Rees)를 선장으로, 독일인 선교사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郭實獵)를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하도록 조치했다.
중국어, 즉 한자를 구사하는 구츨라프가 있었기에, 조선 관리들은 과거 접촉에서 보다 훨씬 자세한 문정(問情)을 할 수 있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 수집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영어와 네덜란드어 등에 능통했던 구츨라프는 독일인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이었지만, 중국에서 성경 번역 활동 등을 하던 영국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영향으로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중국어를 배웠고, 나중엔 역시 중국 선교사인 메드허스트(Walter H.Medhurst)의 권유로 아예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이적했다.
그는 '중국 서해안을 따라서 한 3번의 여행(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이란 항해기를 남겼다. 그는 이 항해기의 제5장( p316~356)에서 코레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또 이 항해의 책임을 맡았던 린제이(H.H.Lindsay)도 구츨라프와 함께 '중국북방지역 항해 보고서(Report of proceeding on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를 남겼다. 이들 역시 구글에서 볼 수 있다.
"코레안은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구츨라프의 '중국서해안을 따라서'를 먼저 보자. 구츨라프 일행은 32일동안 조선에 머물거나 해안을 항해했다. 이들은 7월17일 백령도 앞 황해도 장산(Chwang-shan)에 닻을 내렸다. 해안에 접근하면서 어부를 만났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한자로 필담을 나눴고 몇권의 책과 영국문장(紋章)의 버튼을 주자 매우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이듵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유럽산 화승총을 든 사람도 있다고 기록했다.
구츨라프는 "200년전 네덜란드 배가 표류해 오랬동안 억류됐었고, 나중에 암스테르담에서 그 고난의 세월을 출판했다"고 기록, 하멜표류기가 당시 유럽에선 이미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아니라 구츨라프는 조선에서 신유사옥 등으로 서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다수 처형된 사실 등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미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쌓고 조선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조선 관리에게 '왕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 등을 한자로 필담을 나눴으나, 관리들은 "언제 떠날 거냐"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또 한 사람에게 책을 건네주자, 그는 'Pulga(불가)'라고 말했고, 구츨라프 일행은 이를 "fire(쏴)" 혹은 'burn it(태워)"라고 알아 들었다<Journal of Three Voyages~, p325>. 그는 '불가(不可)'라는 한자를 한글로 발음했지만, 이를 구츨라프는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필담은 통했지만,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역을 원했지만, 빨리 떠나기만을 원하는 조선 관리들을 보고, 구츨라프는 '조선사람은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 종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p325)
구츨라프 일행이 황해도 장산에 닻을 내리고, 조선관리와 필담을 나눈 기록은 조선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해당 관리는 문책을 당한다. 다음은 조선의 관련 기록이다. <황해도 지도>
"황해 감사 김난순(金蘭淳)이, ‘지난 6월 21일 이양선(異樣船) 1척이 장연(長淵)의 조이진(助泥鎭)에 와서 정방하자, 관내의 어부(漁夫)들이 생선과 서책을 서로 바꾸고 그 진(鎭)의 이교(吏校) 역시 필찰(筆札)로 문답한 일이 있었는데도 수사(水使)와 지방관은 다만 예사로운 당선(唐船)이 왔다 간 것처럼 보고하였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언어·복색 등이 홍주(洪州)에 정박한 영길리(英吉利) 배와 다름이 없었으나, 상세히 문정(問情)하지도 않은 채 임의로 떠나게 하고, 끝내 사실에 의거하여 낱낱이 보고하지도 않은 것은 변정(邊情)과 관계가 있다.’면서 장계로 수사 윤우현(尹禹鉉)과 장연 현감 김성익(金星翼) 및 본 진장(鎭將)의 죄를 논하니, 모두 나문(拿問)하여 감처(勘處)하였다." <순조 32년 8월11일자>
구츨라프가 장산(Chwang-shan)이라고 기록한 곳은 장산곶으로 행정구역상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다. 이양선이 장연의 조이진에 정박했는데, 제대로 문정도 하지 않고 또 보고도 엉터리로 해서 관리들을 문책했다는 것이다.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
구츨라프 일행은 장연을 떠나 7월24일에는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충 감사 홍희근의 장계에 보이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구츨라프는 조선관리의 문정 과정에서 "한 핵심관리는 아주 유창하게 중국 고전을 설명했고, 우리가 중국 통계 서적을 제시하며 '코레아 왕은 중국에 일년에 4번씩 조공를 보낸다는 이 기록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즉각 '사실"이라고 답했다"고 기록(p330)했다. 또 큰 모자를 쓴 2명의 고위관리가 배에 도착, 왜 영국이 대영국이라 불리는지, 왜 인도가 힌두스탄이라 불리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고 쓰고 있다(p331). 이는 홍희근의 장계 내용 그대로다.
심도있는 의사소통 이뤄져
구츨라프의 기록에는, 조선의 교역요청 거부에 따라 조선을 떠날때까지 머물면서 관찰하고 조선 관리들과 나눈 대화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록 중에는 서울까지의 거리를 이야기 하면서 지도를 꺼내 보이자 놀라는 조선 관리의 모습(p336)이나, 유교를 신봉해 유교사당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하긴 하지만 불교는 혐오하고,도교에는 익숙치 않다는 등의 내용, 영혼의 불명성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내용(p338), 60대 노인의 감기 처방 기록(p347) 등도 보인다. 아울러 외국 식물 유입을 법으로 금지해 감자 심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 물가에 감자를 심고 그 재배법도 써줬다고 했다(p341~342). 이전 브로튼과 홀 등의 접촉과는 깊이가 다른 의사소통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