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2023. 11월호, 특집 1, 게재 작품>
가야국을 찾아
이향숙
가족을 위하고 가문과 혈통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있을 것이다. 작가는 일찍이 교육계에 몸을 담아 본분을 다하고 퇴임했다. 조용히 노후를 즐겨도 되련만 사회적인 분위기가 운명처럼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누구든 소중한 내 것을 훔쳐 가려고 한다면 분노가 치밀어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작가는 오늘도 그것을 알리고 바로 세우기 위해 자료를 찾고 현장을 누비며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김성문 작가의 『가야국 산책』을 읽었다. 작가는 가야의 후손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가야를 만나고 있었다. 나도 이 책을 통해 가야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는 알고 있었지만 가야는 한두 번 들어서 가물가물하다. 삼국과 같은 시대에 520년간 존속한 나라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육 가야국이 있었고 찬란한 문화유산도 많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 가야를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일본서기』에 들어있는 ‘임나국을 가야국에 비정한다는 것은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울분을 감출 수 없다.’ 라는 대목을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하여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이것은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작가가 이를 바로잡아 가야국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야말로 가야인의 피가 흐르는 한 사람으로서의 책무라고 느껴진다.
작가는 고대 육 가야국의 흔적을 직접 찾아가 보고 생각하면서 느낀 바를 소상하게 적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야유물이 남긴 훌륭한 문화유산이 마치 살아 있는 실체가 되어 내 몸 안으로 젖어 들었다. 작가의 가야 사랑과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나 나도 그 시대의 한가운데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들었다.
책을 펴면서 먼저 가야국의 탄생과 허왕후의 신행길 등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이야기부터 내 마음을 흔들었다. 가야가 남긴 흔적들을 기록한 역사서인데도 나에게 다가온 울림은 컸다. 작가는 여러 설화나 고분 그리고 유물들까지 보고 느낀 것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나도 작가와 함께 가야를 생각하며 신비에 쌓인 설화나 이야기를 현장에서 보고 그 시대를 유추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조금은 낯설 수도 있는 가야역사 이야기인데도 사진 자료와 함께 완전 천연색으로 옮겨 우리에게 쉽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작가와 함께 가야에 대해 깊게 공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이렇게 훌륭한 나라가 우리 민족의 뿌리였구나 하는 자부심까지도 생겼다. 그동안 가야를 별 존재감 없는 조그마한 나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경상도와 전라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고 인명을 소중히 여기며 평화를 사랑했던 나라라 생각하니 내가 역사에 얼마나 소홀했던가를 스스로 느끼게 했다.
그랬다. 나는 가야국 수로왕의 넓은 아량과 생명 존중의 이념에 취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기 42년에 수로왕이 즉위해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인본주의를 실천한 왕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 귀하게만 느껴진다. 그는 멀리 인도에서 신부를 맞이할 만큼 외국과의 교류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로왕은 열 명의 아들 중 첫째는 김해김씨로, 두 아들은 허씨 성을 따르도록 했다. 허왕후가 국제혼인으로 자기 성을 전할 길이 없다는 말에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때 다른 나라로 혼인해서 온다는 것은 아예 집을 버리고 떠나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수로왕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배려심을 가진 남자였으니 허왕후를 품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남성 중심으로 가문을 중요시했던 부계사회인 우리 민족이 일찍이 열린 마음으로 왕후를 배려해서 모계 성을 따르게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21세기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모든 면이 자유분방하게 열려있는 지금에서야 엄마의 성을 따르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조건이 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 옛날에 이를 행했다고 하니 가야국의 수로왕이야말로 정말 열린 사고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에 이미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했고 백성에게 편안과 사랑을 베푼 군주였다.
김성문 작가의 어진 모습이 천상 가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찍이 수로왕의 정신을 배웠다면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혼란스러운 정치 현실이나 살벌한 사건들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수로왕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보장해주고 백성에게 맞추어 나라를 다스렸다. 민본주의 사회를 그 시대에 행했다는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생활은 좀 넉넉해졌지만, 행복 지수는 올라가지 않는다. 나에게 삶은 갑갑한 안갯속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배움의 기회도 막혀 있었다. 배움이 짧았던 나는 늘 오르지 못할 곳을 바라봐야 하는 막막함이었다. 상대적 박탈감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몸을 부렸다. 샛별과 함께 나와 달빛이 이울도록 노력해도 궁핍한 곳간은 채워지지 않았다. 연로한 부모님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도 아직 남아 있는데 몸은 갱년기를 맞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이 버거워 자꾸만 까부라진다.
GDP가 올라가도 나의 삶은 언제나 그 자리다. 『가야국 산책』을 읽으면서 수로왕의 정책을 이어간 가야국은, 정말 그 속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고 신령한 정신을 이어받은 왕은 백성을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만들어 주었다. 가야의 백성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하루의 무사함에 감사할 줄 알았다. 어진 지도자가 어진 백성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문 작가의 『가야국 산책』을 읽으면 품격이 드러난다. 작가는 화려했던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의 개척자였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역사를 보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이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현장을 찾아다니며 새롭게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세를 보면서 사람의 인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그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너와 우리를 생각하는 열린 지식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조금이라도 정화하고 본질을 찾아 바로 세우려는 열정과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다시 한번 조상의 뿌리를 찾고 자기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신을 가슴에 모아본다.
이향숙 lees6052@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2017), 수필집 『색을 찾아서』
첫댓글
고마운 일입니다.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조금이라도 정화하고
본질을 찾아 바로 세우려는 열정과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이런 독자야말로
진정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진실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응원에 감사하다'고 예를 갖추어 인사드리세요.
메일로 인사드리고, 폰 번호 확인 후 좋은 글 고맙다는 인사도 드렸습니다.
지난달 제4회 세미나에서
대전에서 오신 여류작가의 소개를 통해 글을 봤습니다.
김성문 회장님의 뜻과 글은
단순한 가락종친들의 긍지를 넘어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