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역주․해제, 디오그네투스에게, 분도출판사, 2010.
디오그네투스에게: 2세기 무명 교부의 신앙 해설 서공석 역 | 분도출판사
과거의 역사와 그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뜻밖의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 책이 그리스도인에게 읽힐 수 있다는 것도 역시 뜻하지 않은 발견에서 이루어진 행운이기 때문이다.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생선 가게 헌 종이 꾸러미에서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이 사본. 사본의 저자는, '귀하'(kratistos)라고 하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서신이나 헌정사에 나타나는 존칭 사용을 미루어 짐작컨대, 행정관리 정도의 인물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주자도 이 책의 제목을 '디오그네투스 귀하' 혹은 '디오그네투스 님'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 헌정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루가복음서 1,3절(존귀하신 데오필로), 사도행전 1,1절(데오필로 님)에서도 등장한다.
이 사본은 약 2-3세기의 문헌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복음서들이나 호교론적인 문헌들과는 달리 성서의 중요성이나 부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 문헌이 그리스도교 교의가 확고하게 형성되기 이전의 것을 담고 있다는 점,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며 예수나 그리스도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 원죄와 그리스도의 구원을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 당시의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 등이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될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원저자의 문헌에 대해서 몇 가지 음미를 해보자.
(1) "귀하는 먼저 귀하의 생각에서 모든 편견을 버려야 하고 거짓된 생활에서 벗어나서 이제 갓 태어난 자와 비슷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귀하가 지금부터 들으려는 것은 귀하도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하가 신들이라고 부르고 인정하는 실재와 형상들을 눈으로만이 아니라 이성으로도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신을 생각하거나 본다고 확신하는 신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편견이나 편협된 정보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상일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그러한 것을 판단중지하고 순수한 이성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2) "유대인이 앞서 말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우주의 주인으로 받들어 경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 대신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 섬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을 우주의 주인으로 받들어 경배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형상이나 삶의 조건, 관계, 물질, 명예 등이 우상숭배로서 자리 잡을 수 없다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자명하지 않은가.
(3) "하느님에게 폭력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로 우리를 부르기 위해 그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심판만 강조하면 하느님을 폭력적인 분으로 단정 지을 수 있다.
허나 사랑이 아니라면 심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기에 사심없는 판단(judgement) 행위이기 때문이다.
(4) "귀하도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선하심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본받게 된다는 말에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꾀하자는 신앙인의 영성 방향을 일러주는 듯한 말이다.
정작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또 하나의 예수, 또 하나의 하느님 아들이 탄생(마이스터 에크하르트)하도록 신앙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우리말이 제대로 통하도록 깔끔하게 번역하신 분은 탁월한 교의신학자요, 역사비평학적 성서해석에도 조예가 깊으신 서공석 신부님이다.
그는 "신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들이신 예수를 배워서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길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덕목의 의미를 넘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사는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라고 역주와 해제를 달고 있다.
그와 같이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실존적으로 신앙을 잘 풀어간 무명 교부야말로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길로 여기며 살아갔을 것이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 신앙의 알짬을, 저자의 육필이 담긴 글자의 여백을 통해서 감지하면 좋을 것이다.
첫댓글 교부라면 기독교인인가? 무명이기에 생기는 질문이라기보다 유대 랍비를 연상해서다. 2~3세기라는 결정적(?) 단서가 있으나 그런 쪽을 모르는 나로선 감감할 뿐. 해제의 내용을 보고 언뜻 <도마복음>이 떠올랐다.
네. 교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도마복음 이후의 사본이기는 하지만, 언뜻 그런 인상을 줄 수도 있는 귀절들이 눈에 띱니다. 2-3세기의 사본이라고는 하나 교의적, 교리적이지 않은 맵짠 글이, 비록 짧은 글이지만 읽을 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