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살기
이제 보름 정도 후면 나는 세는 나이로 일흔 일곱, 희수(喜壽)로서 망팔십(望八十)이다.
원래 비사회적 동물이었던 터라 오십 중반, 남들이 보기엔 아직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게 되자 나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인도인이 숲으로 들어가듯 사회활동의 대부분을 접었다. 아주 가까운 서너 명의 술친구들과의 모임만 빼고는 모든 모임과 만남을 회피했다.
그렇게 숲 속 생활을 한 지 근 이십년이 되자 이제는 활동범위는 집 주변 산책에 그치고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나날이 흘러간다. 실생활이 이렇게 단조로워지자 반작용으로 아니면 보상으로 밤에 꾸는 꿈이 자유롭고 다채로워지는 것 같다. 그 예로 그제 밤과 어제 밤에 꾼 꿈을 돌이켜 보자.
그제 꿈에서 나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국어과목 시험인데 “호랑이”를 주제로 에세이를 쓰라는 작문시험이 나왔다. 한참 고민해도 착상을 못하고 시간을 흐르고 해서 시험관에게 몇 분 남았느냐고 물었더니, 시계가 없어 모르겠지만 몇 분 안 남았으니 빨리 쓰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서 허둥지둥 이렇게 시작했다.
“예전엔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면 호환을 당했다고들 말했다. 내가 이 ”호랑이“라는 작문에 실패해서 시험에 불합격되면 주위에선 나도 호환을 당했다고 말할 것이다. 부디 내가 호환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많은 응시생들은 국어시험에 작문시험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하고 몇 개의 주제를 뽑아 에세이를 써보는 등 대비를 했다고들 한다. 그런 훈련에서 주제로는 로봇 같은 시사성이 있는 아이템을 선정했다고 한다. 나와 대척점에 선 그렇게 꾀바른 수험생들도 작문의 주제로 “호랑이”가 제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그들의 입술이 한 발이나 삐어져 나왔을 모습을 생각하니 잠깐 유쾌하다.
호랑이와 애완견은 둘 다 사족보행의 육식동물로서 본성대로 놔둔다면 사람을 문다. 그런데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는데 호랑이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된다. 호랑이의 희소성 때문이기도 하고 맹수에 물린 사람의 생사 여부에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먼 옛날 우리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모친 웅녀와 라이벌 관계였을 정도로 우리 생활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던 한국 호랑이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에 다 사라지고 많지 않은 개체가 만주와 시베리아의 광대한 숲에서 서식하고 있다.
물론 한국 호랑이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단지 동물원이나 공원의 우리에 갇힌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요즈음에는 야수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해져 재벌기업에서는 수 십 만평에 울타리를 쳐서 호랑이들을 사육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육되는 호랑이는 야생 상태의 삶을 영위하는 맹수 본연의 모습과 습성, 그리고 백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상실한 허울 뿐인 호랑이가 아닐까?
나의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은 “당신도 도시에서 사육되는 인간이 아니오? 당신은 현재의 문명생활보다 십만 년 전 원시인의 야생생활을 선호하는 것이오?” 라고 반문할 것이고 나는 쉽게 내 입장을 정리하지 못할 듯하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써 내려가는데 종이 치면서 나는 패닉에 빠지며 꿈에서 깨어났다.
어제 꿈에서는 내가 미국 뉴욕의 한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아니다! “즐기고 있었다”는 문구는 어폐가 있는데, 양식에 대해 무지하고 서양 테이블 매너에 어두운 나로서는 나를 대접하고 있는 백인 여성에게 얕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식욕이 별로 나지 않았던 느낌이다.
나는 예술인지 과학계인지는 모르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명성이 하나님 꽁무니를 찌를 정도였던 것 같다. 누구나 두 세 번은 뒤돌아 볼 정도로 빼어난 미인인 상대방 백인 여성은 나를 심정적으로 경애하고 사업상 이해관계로 나의 환심을 얻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나 우리 테이블에서 서빙하고 있던 흑인 웨이터는 내 꼴을 아니꼽게 보았던 모양이다. 키는 6피트에 한참 모자라고, 얼굴은 반들반들 수염도 나지 않은 노란 색 피부에 가느다란 눈이 30도에 가깝게 비스듬이 위로 찟어져 전혀 남성적 매력이 없는 중년의 얼간이에게 뉴욕 제일의 미녀가 은근하게 아양을 부리는 광경에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별안간 청소부가 다가와서 내 자리에 물이 쏟아졌으니 닦아야한다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바닥과 자리에 걸레질을 하고 부산을 떨어 분위기를 망쳐놓았다. 나는 중인환시 속에 야단맞는 초등학생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서있는 불편을 겪었다. 웨이터는 그 경우에 알맞은 사과의 말씀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내 등과 팔이 무언가에 부딪혀서 돌아다보니 컵과 접시 등을 잔뜩 실은 트레이가 내 의자에 딱 붙어 있었다.
‘아니 왜 이런 걸 여기에 두었지’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트레이를 떼어놓느라고 살짝 밀었다. 그런데 내 힘에 비해 트레이의 바퀴가 너무 성능이 좋았는지 트레이가 주르륵 굴러가더니 옆 자리의 테이블에 충돌하면서 컵과 접시가 와장창 깨지며 그 파편이 테이블로 쏟아져 내렸다. 그 소동에 꿈에서 깨어났다.
확실히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루어주는 착한 기능을 가진 것 같다. 어떤 철학자는 밤 열시에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던 데, 하루를 보람 있게 지낸 후 휴식을 취한다는 만족감 때문이리라.
그에 반해 나는 하루를 밍밍하고 의미 없이 보낸 다음 자정에 침대에 몸을 누일 때가 가장 즐겁고 기대에 차게 되는데, 이것은 어렸을 때 아침에 일어나며 막연하지만 어떤 기대감을 느꼈던 바와 비슷하다.
어떻든 깨어 있을 동안에는 기대도 실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중에, 잠들어 꿈속에서나마 즐겁거나 의미 있는 일을 겪고 있으니 나는 요즘 꿈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다. (끝)
첫댓글 게시판이 너무 오래 비어 있어 내용도 별로 없는 잡문을 하나 올립니다. 너무 꾸짖지 마시기를.
기대도 실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나의 삶을 꿈 속에서 매일 보는 또 다른 나는 없을려나.
재미있는 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