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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지도 한장들고 낙남정맥길을 걷다가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동네 야산에 올라 섰을때
눈앞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유수교와 흐르는듯 정지해있는듯한 강을 만나게 되었다.
지도를 보면 분명 낙남정맥 마루금인데 왜 이런곳에 서있게 되나하며, 다시 뒤로 돌아 낙남마루금을 찾으러 올라 갔다가
결국은 유수교로 다시 돌아와 다리를 건너 다음 마루금을 이어간적이 있다.
산자분수령에 어긋나는 낙남이라 생각해서 어디가서 낙남정맥을 했다는 이야기도 못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낙남정맥길이 진주,의령의 홍수 문제로 인위적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남한 5대강을 마치면 꼭 한번 낙남 정맥길 짤라먹은 그곳을 찾아 보기로 하고 가화천으로 향한다.
날짜 17년 5월 13일
코스:남강댐-가화천 -사천 11km
함께 하신분:추산 대장님
대구 서부 정류장에서 안동의 추대장님을 만나서 첫차로 진주로 향한다.
진주에 도착해서 진주성을 한바퀴 돌아보고 진주시 신안동 국밥집에 들러 아침을 먹어 본다.
그리고 택시를 이용해서 남강댐 노을 공원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남강 물구경을 한다.
남강(186km)은
낙동강 제1지류로써 유역면적 3467㎢.길이 186.3km에 달하며 국립공원 덕유산인 남덕유 정상 함양군 서상면에서
시작해서 진주를 거처 남강 동부 지역 창녕지역까지 내륙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강이다.
남강은 처음과 끝 모두 경남에 두고 있으며 경남의 소중한 식수원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문구는 마음에 들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고
남강댐의 물빛은 맑고 푸른빛이다.
남강이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이곳 남강댐까지 100km를 흘러와 진주시-의령을 거처 의령군 성산리에서 낙동강과 만나 大海
(대해)로 가야 하지만 86km는 생략하고, 홍수 조절 문제로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로 11km만 흐르고 곧바로 남해바다로 흘러들게 하는 수문있는곳
남강댐 홍수 조절 수문에서 도로따라 진행하면 오래전에 다니던 삼계교가 나온다.
좌측으로는 새로 만들어진 삼계교가 보이고 그옆으로 우리나라를 한바퀴 돌아가는 철도교도 보인다.
남강댐 물을 초당 6천톤씩 경남 사천시 사천만으로 방류하는 방수문
이제부터 낙남정맥 짤라먹은 가화천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조선 영조때 만들어진 山經表(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되어 김해시 구산동 분산에서 맥을
다하며 산자 분수령대로 물을 건너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은 물을 건너는 대표적인 정맥길로 되어 버렸다.
왜 남낙정맥 마루금을 짤라 버렸을까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 이후인 근대까지 남강은 홍수 문제로 진주-의령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자
조선 정조때(1796년 정조 20년)에 장재곤이라는 사람이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방류해 홍수를 방지하여 농토를 확보할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쓸대없는 소리라며 한번만 더 쓸대없는 소리하면 엄한벌을 내린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 시대때 영남춘추(1934년 경남 진주에서 발행된 신문)에 남강 홍수를 방지하고 비옥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산줄기 하나를 절하(切下)하고 남강물을 사천으로 보내면 땅 8천정보을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1정보:3천평(15 마지기)
8천정보:2천 4백만평
그렇다면 山脈(산맥)이 먼저인가 衣食住(먹고 사는것)가 먼저인가?이것이 궁금해진다.
조선 정조때나 구한말 시대, 좀더 멀리 본다면 조선 영조때 만들어진 산경표가 있으나
요즘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서 산맥 하나 온전히 남겨 두는것 보다 먹고 사는게 우선인 그시절에 산줄기 하나 절하(切下)하는건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보여진다.
결론은 이미 나와있다.
여름 장마철에 덕유산 남쪽에서 시작한 홍수는
지리산 북쪽(임천강)-동쪽(덕천강)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면서 진주와 의령의 농토를 초토화 시키기에 충분 했으니
산줄기 어디를 절하(切下)하던 물을 분산시키는 방법이 최우선이라 생각했을것이다.
산줄기 어느 부분을 끊어 물을 사천만으로 보내느냐!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에는 낮은 언덕과 같은 낙남정맥이 지나는 마루금이며
현재 유슈교 북쪽으로는 삼계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3km 흘러들어 남강에 합류하는곳이고
남쪽으로는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가화천 8km가 흘렀다.
남강물을 남해 바다로 보내는 가장 빠른길이 이곳 유수교인 셈이다.
물이 역류하는 가화천(삼계천)
물이 흐르지 못하니 물은 고여있고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나마 썩기 직전이라 물속으로는 납자루떼와 작은 송사리를이 많이 돌아다닌다.
겨우 겨우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가는듯한 모습
멀리 철도교가 보이고
새로운 철교가 생기면서 사용하지 않은 유수 철교가 멀리 보인다.
이곳은 백악기 화석 산지 이므로 출입이 제한된곳이다.
곳곳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구와 감시 카메라가 달려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화석을 몰래 채취해서 지금은 마을 주민들 조차도 강가로 못들어 간다고 한다.
유수 철교 넘어로 낙남정맥 마루금이 보인다.
백악기 화석 산지
이곳부터 사천시 곤양면 가화리까지 강바닥은 바위로 구성되어 풀이나 나무가 많이없는
어느강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강이다.
사용하지 않은 유수철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 같지만 이곳에 왔으니 중간까지만이라도 가봐야할듯
정맥5차팀 산행 대장인 추산님께서 먼저 가시고
유수철교에서 본 삼계천(가화천)
강바닥은 온통 바위로 되어있으며 곳곳에 공룡 발자욱이 보인다.
그동안 많은 강을 찾아 돌아 다녔지만 특이한 강이라면 경북 예천의 내성천은 모래뿐인 강이고
이곳은 바위뿐인강이다.
유수리 마을과 낙남정맥 마루금
흐르지 못하는물은 고여서 썩어 가고 있으니
물색갈이 ...답이 없다
빨리 여름 장마철이 되어 모든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야 깨끗해질듯
가화천 위로 보이는 유수교
낙남정맥을 잘라 놓은곳이다.
낙남정맥길을 切下 해 놓은곳
1대간 9정맥을 한사람이나 할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을 지났거나 지나야 한다.
하지만 산자분수령에 위배되는 낙남길
왜 이곳을 切斷(절단)해야만 했는지 알고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유수교와 낙남정맥길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에서 이곳까지 왔다면 물을 건너는 다리를 건너면서 왜 이렇지 하는 생각을 한다.
길이 없어 우회길로 돌아가는가? 대부분 이생각을 하면서 유수교 다리를 건너면 잊어 버리고
이곳은 정맥 마루금이며 오래전 이곳에서 삼계천이 진주로 흘러들었으나 지금은 반대로 역류하는 곳이다.
남강댐에서 방류한 물이 이곳을 지나 사천만으로 흘러야 하지만
더러운 물 아래로 팔뚝많큼 큰 잉어가 돌아 다닌다.
이녀석들도 어디로 가고싶겠지만 빠져 나갈 구멍이 없으니 작은 웅덩이 같은 이곳에서 적응해 살고 있는듯
커다란 잉어 형제가 보인다.
유수교 아래 작은 수중보가 보이지만 지금은 물이 흐르지 못한다.
작은 구멍 하나
그속으로 썩은물은 조금씩 흐르는듯 빠져나간 물은 축구장 같이 넓은 시멘트 길 위에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못잡고
처참하고 암담한 모습이다.
정맥 마루금을 절단(切斷)낸곳이 바로 앞에 보인다.
낙남정맥 마루금을 끊어 놓은곳
높이는 대략 20-30m정도 될것 같다.
조선 정조때 장재곤이란 분이 이곳을 切下(절하)하자고 한곳이고
이후 일제 감정기때(1936년)에 진양호 공사를 하다가 해방과 동시에 중단 되었으며
1949년도에 다시 공사를 시작했으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
낙남정맥은 이렇게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남았지만 1962년에 다시 착공하여 7년뒤인 1969년도에 남강댐이 완공된다.
조선 영조때 만들어진 山經表 1대간 9정맥
후세의 등산객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준 산경표가 아니기에
결국 남강 홍수 방지를 위해서 9정맥중 지리산에서 계속 이어지는 백두대간 선상이라는 2정간중 낙남정간(정맥) 하나가
희생되었지만 진주.의령의 드넓고 비옥한 농토가 물로부터 안전해진 결과로 이어졌다.
시멘트로 덕지 덕지 처바른 정맥 마루금
온통 상처 투성이지만 낙남정맥 끊어진 산줄기가 한마디 하는것 같다.
"너무 마음 아파 하지마라"며 땅의 기운은 그대로 흐른다고 말하는것 같다.
산꾼으로써 끊어진 마루금을 바라보며 마음은 아프지만
길가에 가화초등학교 교적비가 눈에 들어 온다.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진듯하다.
강가로 가야하지만 잡풀이 많아서 잠시 돌아간다.
돌아가는길에 죽순 하나 들고 맛보는 추산대장님
죽순 맛은...
맛보지 마시라
아무리 배고파도 먹을게 못되니
대나무숲에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담벼락이 보인다.
강가로 가야 빠르고 돌아가면 끝없이 아스팔트길 탐구해야 하는곳
유수교가 보이는 지점에 내려와서 물 건너기로
강 길찾아
가화천은 물이 흐르지 않은듯 정지해있다.
대부분 바위로 되있어 잘만 찾으면 이렇게 물을 건널 수가 있다.
가화천을 건너는 시멘트길도 있고
임도길 끝부분에 음식물 쓰레기 퇴비로 만드는 공장 안길로 들어가서 임도길 찾아서 진행
잠시 돌아나와 다시 길찾아 가는 모습
이런곳에서도 물고기 잡는 마을 촌로(村老)분
물고기는 한마리도 못잡으시고
물은 흐르지만 바위가 징검다리 역활을 할 수 있어 쉽게 건너 다닌다.
공룡 발자욱
어느 문중의 제실이고
갈가의 벚나무 열매가 굵고 맛은 시큼하며 달다.
둘다 물한병 안들고 와서 이곳에서 열매만 부지런히 따먹는다.
진주구간은 언제 끝난건지 모르게 끝나고 경남 사천시 축동면이다.
이곳부터 바닷물의 영양으로 작은 게와 해파리를 발견한다.
징검다리는 아닌듯하고 고기잡는 살인것 같다.
저곳을 건넌다.
해파리 발견했다며 좋아하시는 추대장님
바다에 사는 해파리가 밀물때 이곳까지 올라와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은듯
이런날은 해파리 냉채가 아주 좋은날인데
재료는 있는데...
죽은 게도 보이고
바다인가 강인가
물이 맑아 바다 같아 보인다.
꼭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니 물맛은 짠맛이라 바닷물이다.
여기는 바다가 맞다며 숭어가 여기 저기서 물위로 뛰어 오른다.
숭어가 뛰어오른 사진인데
지나온곳
길은 끊어지고 다시 뜨거운 아스팔트길로
바닷가로 가야하는구
뱀 나올라 조심 조심
작은 갯벌를 지나는데 망둥어가 돌아 다니고
강가에 사는 다슬기기 비슷한 사촌인가 그녀석들은 엄청
많이 보인다.
삶아 먹으면 될듯한데 자연을 아끼자며 그냥 지난다.
바닷가 대나무 숲으로 지나고
가시나무도 타넘고
바닷가로 지나며
지금은 썰물때라 물이 얼마 안되지만 밀물때는 조심해야 할곳이다.
앞은 남해 대교 가화천교가 보인다.
남해대교
마지막 부분 가산교를 건너면서
마중 나와주신 진주의 영스님을 만난다.
멀리 사천만의 이구산이 보이고 좀더 가다보면 사천의 와룡산 민제봉이 보인다.
남강댐을 방류하면 이곳 생태계에 문제가 생겨 여름 홍수철 이외 방류하지 않는다고 한다.
낙남정맥 산줄기 하나 끊어놓았지만 물은 언제나 높은곳에서 낮은곳을로 유유히 흐르며
모든사람을 먹여 살리는데 제역활을 다한다.
이제 그동안 궁금했던 가화천을 끝내고
진주의 영스님과 함께 인근 가산 회집에 들러 물회 하나씩 시켜놓고 점잖게 기다린다.
모처럼 추산대장님과 함께 걸었고 진주의 영스님도 만나고
산행이나 강길 역시나 함께해야 재미나다는걸 느낀 하루였으며
이곳에서 일어나 이제 진주로 가서 아침에 잠시 걸었던 촉서루로 향한다.
차량지원해 주신 영스님께 감사드리며
진주성으로 와서 진주성 박물관으로 향한다.
서애 대감께서 쓰신 징비록
서애 류성룡대감께서 영의정에서 물러나신후 고향 하회마을 여생을 보내시며 쓴글
징비록 원본 (국보 132호 지정)
임진왜란 당시 총사령관격인 영의정 겸 도체찰사 였던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온몸으로 격은 후 지필한 전란의
기록이다.
국정 최고의 요직에 있으면서 전란의 현장에서 백척간두의 나라를 이끌었던 류성룡 이었기에
누구보다 더 전란의 참혹함을 알기에 환란을 경계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후세에 전하고자 피눈물로 쓴 전란서 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옥연정사
서애 대감께서 선조 19년 1586년에 지은것
부용대 옆 조용한 곳에 건물을 하나 지으려고 보니 돈이 없어
스님 탄홍이란분이 10년동안 시주를 모아 물자를 지원하며 짓다보니 10년이란 시간이 흘러 완공
서애 대감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 이야기를 적은 징비록을 구상하고 쓰셨기에 뜻깊은곳이라
할 수 있다.
의병장 고경명 글씨
世篤忠貞 세독충정:세세토록 독실히 충성을 다한다는 뜻
의병장 고경명(60)은 임진왜란 1592년 7월9일 금산전투에서 차남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고
장남 고종후만 살아 남는다.
이곳 진주성 2차 싸움 1593년에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인 고종후가 전사함으로써 고경명의 두 아들이 모두 임진왜란에서
전사하며 고경명의 대가 끊긴다.
이곳 성안의 모든 장수들이 고종후를 살리려고 애들 썼지만 결국 전사한다.
고경명의 딸은 노상룡의 아내가 되어 정유재란때 일본군을 꾸짓고 그 뜻을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함
100년전의 진주성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진주대첩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간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천안 병천 지평리 김충갑의 아들로 태어나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며 훈련원, 군기시,판간을 거쳐 1591년에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진주 모사가 병으로 죽자 그직책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측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사천,고성,진해 지례,금산 등지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어 같은해 10월에 침공한 적 2만 대군을 3,800여 병력으로 6일간 공방전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바로
진주대첩이다.이후에 김시민 장군은 39살에 병사한다
진주2차 싸움
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
진주성 1차 싸움에서 패한 일본은 2차 진주성 많큼은 꼭 공격해서 이겨야 했으며
일본군 측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주성 1차전 패배의 보복전 심리로 조선측에 승산이 전혀 없으니 잠시만 성을 비워
놓으면 일본군이 임시 점령 했다가 남해로 물러갈것이라 하며 진주성 만큼은 꼭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공격하기전에 민간인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라 권고한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성만 공격하고 물러난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명군와 일본군의 권고를 거부
2차 진주성 싸움은 일본군 10만명과 선박 800척으로 진주성 한곳만 집중 공격 진주성내에는 민관군 모두 6만
*진주 인근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明君)은 진주성을 지키는것은 불가능하다 판단 했으며.
조선군 곽재우.선거이 홍계남은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이 많았으나 곽재우는 진주성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한다.
"내가 죽는 것은 상관 없지만 경험이 풍부한 나의 휘하 병력이 이런데서 개죽음 당하게 할 수 없소!"하고
선거이,홍계남은 곽재우와 함께 가버리면서 충청 부사 황진을 만나서 몇마디 대화를 나눈다.
곽재우:진주는 고립된 성이기 때문에 지킬 수 없고 더구나 공(황진)은 충청도의 절도사이니 진주성을 지키다 죽는 곳은
공의 올바른 직분이 아닌듯하오
황진:비록 그렇다 하나 김천일에게 이미 약속을 했으니 죽는다 해도 약속을 깨트릴 수는 없오"하며 진주성에 남는다.
고립무원의 진주성에서 싸워서 이기던지 죽던지 둘중에 하나
*창의사 김천일 군사 3백명
*충청병사 황진 7백명(황희 정승의 5대손이며 활을 잘 쐇다고 한다.)
*경상 우병사 최경회 5백명 (논개 남편)
*의병 복수장 고종후 4백명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
*부장 장윤 3백명
*의병장 이계련 1백명
*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3백명
*의병장 민여운 2백명
...
의병 2천 8백과 진주 목사 서예원과 김민준.이종인 등 진주 주둔중인 조선 정예군 3천은 진주성을 지킨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6천명의 조선군이 왜군 10만명을 상대로 8일을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조선군,명나라.의병 어느 부대도 진주성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기록에는 진주성안에 있던 피난민과 6만명이 전멸 했으며 성안에 개한마리 남겨 두지않고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일본군은 고니시가 말했던대로 전라도를 공격하지 않고 남해로 내려가 버렸다.
곽재우의 현실성과 황진의 용감성 두분중 누가 더 뛰어난 분인가 개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죽음을 알면서도 진주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간 황진장군을 택할것 같다.
2차 진주성 싸움 결정적 요인
충청 병사 황진이 적이 쏜 탄환을 맞고 전사
성안의 유일한 베테랑 관군이었던 황진의 죽음은 이미 절망적이던 전투의 승패를 완전히 결정이었고
전사한 황진을 대신해서 목사 서예원이 경비대장을 맡았으나 겁을 먹자 경상 우병사 논개의 남편 최경회가 경비대장직을
파하고 장윤에게 그직을 맡겼으나 장윤도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오후에 내린 비로 인해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 성안으로 들어와 창과 칼로 육박전이 일어나
이때 여러 장수들 남강으로 투신 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서예원.최경회 머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침으로써 진주성 전투 승전을 선언한다.
진주성을 구경하던중
가야금 소리를 들어 볼까하여 자리에 앉아서 잠시
같은듯 다른 사진
바람 시원한 촉서루에서
진주하면 남강
남강하면 논개
그 대표적인물이라면 주 논개님을 곱을 수 있다.
주 논개 영정
논개 영정
논개는 주씨 성으로 전북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이 고향이고
지금의 대곡 저수지 그곳에서 태어나 삼촌이 김풍헌의 집 민며누리로 팔아 버리자 어머니와 함께 도망을 가게되고
얼마후 장수현감에 붙잡혀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벗게된다.
누명을 벗었으나 갈곳이 없게된걸 안 장수 현감(최경회)은 자기 부인의 병수발드는(침방관비) 일을 맏게 되고
이후 현감 부인이 지병으로 죽게되자 주논개는 현감의 2번째 첩이 된다.
현감의 첩이 되었으니 기생이라는 전설은 아니다.
그의 남편 병마절도사로 제수된 최병회는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10만 왜구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되자 몇몇 장수 3명
과 함께 남강물이 흐르는 진주성 아래 의암에서 투신한다
주논개는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의 잔치날 음력6월29일 ( 7월 7일) 기녀로 꾸며 참석하여
왜장 가토 부장인 "게아무라 로구스케"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면서 10일간의 치열했던 진주성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논개는 신분상의 이유로 의로운 죽음을 인정받지 못한다.
의암 사적비
선조 26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민,관,군 6만이 순절하자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논개(義妓論介)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에 홀로 서있고 그여인은 우뚝 서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그여인 아닌들 그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오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워 그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암(義巖)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며
강물은 예전의 그강물이 아니다.
세월이 흐른많큼 강물도 흘렀으며
지금은 부유물로 가득한 남강을 보며 논개와 이곳에서 치열했던 진주성 싸움을 생각해본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위배되는 강으로는
인위적인 두곳: 낙남정맥.한남정맥
자연적인 한곳: 낙동강 구문소
첫댓글 저는 정맥길도 걸어보지 않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끊어진 낙남정맥과 그 의구심을 풀어가는 가화천
가만히 앉아서 공부 잘하고 갑니다.
두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부에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기분 좋습니다.
훗날 이길을 지나신다면 꼭 한번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기분 좋은 대뽀님 감사드려요
가화천을 찾아서 강행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글을 안읽으시고 댓글만 달는 것 같습니다.
공부에 도움되는 글이 많은데...
방장님께서 기획하신 한국의 5대강 그리고 그 지류로 100km이상의 강탐사에 속한 가화천은 아닙니다만...
정맥, 그 산줄기를 곁하여 흐르는 강줄기의 연관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가화천을 다녀오셨군요.
강탐사에 나서시면 처음 찾는 곳이 발원지인데... 가화천은 그 곡절(?)로 인하여 발원지가 댐의 수문이 되는 강이군요.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치수는 인류의 숙제이며 또한 식량 확보는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1대간9정맥을 진행하면서도 자칫 놓쳐버릴수 있는 부분, 직접 걸음하셔서 짚어주시니...낙남 진행할때 눈에 잘 들어오지 싶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 했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글을 모두 읽으신 수행중님이시구요
훗날 정맥길을 지나신다면 꼭 알고 가시기 바랍니다.
배우는 마음 자세가 훌륭한 학생
전진
전진
쉼없다
대한민국은 나의 손바닥안에 있다
세상은 좁고 좁아라
세계를 향하여
진군!
수고하셨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멋찌시네요
홧팅
공부에 도움되는 글인데 읽지 않으신듯 합니다
다시한번 더 읽어 보시고 도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맥이 끊겨 아쉽기는하지만 홍수를막아준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가화천 구경 잘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글을 모두 읽으시는 해피맨님
먹고 사는게 우선인 우리네 인생이죠
홍수예방 차원에서 산줄기 하나 절하 시켰지만
그덕에 많은 사람들이 홍수에서 벗어나 농사를 지으시는것 같더군요
글 감사드립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산행기 잘 봅니다.수고하셨습니다.
산줄기 하나 아작낸 산행기라 슬픈 내용인데 ^^
글 감사드리구요 어디 좋은데 알고 계시면 연락 주십시요
지난 날 어설프게 낙남정맥길과 가화천의 잘못된 동거를 알고
어둠속에 걸었던 가화천,유수교
오늘 다시 접하는 가화천은
짤려진 脈을 보면서 조선 영조때 만들어진 산경표의 "山自分水領"을 무시하는 가화천의 진실
잘 알고 갑니더
추산대장님과 함께 수고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산경표지만
농민들에게는 농토가 제일이겠죠
처음에는 정맥길을 切下시킨 그분들을 욕했지만 진행하면서
아하 이래서 이걸 切下시켰구나 하며 이해를 했습니다.
공부에 도움되셧다년 저도 만족하며 좋으네요
아우님 정맥길 잘 이어 가시고 다치지 마십시요
글을 다 읽어보니 임진왜란 진주성 이야기는 방장님의 다른 글에서 봤던 재탕 (아니, 3탕인가? ㅎㅎ)이네요. 그렇긴 해도 2차 진주성 전투는 픽션보다 더 극적인 역사라 다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저는 유수교의 기억이 더 각별한 것이, 낙남 할 때 한밤중에 대형알바를 해 마루금을 놓치고 강가로 떨어져서 한참을 헤매다 다시 마루금을 이어간 곳이 유수교라 그렇습니다.
진주성에 관한 글을 써놓고 나니 자주 써먹게 됩니다.
특히 진주성 2차 싸움은 황희 정승의 5대손인 황진 장군의 죽음
그리고 고경명 장군의 가족(2남1녀) 모두 전란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죠
치열했던 싸움 속에서도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 장군을 살리기 의해 동분서주 하던 모습이 그려질때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진주성 꼭 한번 찾아 주시고 글을 자주 읽으면 대구담님의 가슴속에 살아 남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홍수를 막고자 하는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합니다.
남쪽에는 벚이 익어 먹을만 한가 보군요.
이제 뱀들이 활동을 할 때라 조심하셔야 합니다.
두분 수고하셨습니다.
장재곤이란분이 남강을 切下 하자고 했을때
그분은 분명 이곳을 가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것 같더군요
홍수로 늘 농사를 망쳤지만 이후로는 홍수에서 벗어난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방장님의 글 과 사진으로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배우고 갑니다.
험한길 건너 다니시며 수고로 얻어지는 많은것을 앉아서 컴으로 접하니....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 입니다.
글을 읽어보시고 도움 되시면 꼭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대간 끝나고 조용 하시니 한번 뵙고 싶네요
방장님, 국공때 어려운 여건하에 초점산아래 고냉지농막지원, 백학마을 회관지원.. 열정지원 감사했습니다.
130여키로 밤샘진행하시고 곧바로 국공지원하신 리더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봅니다.
거친 갈대숲에도 민소매 반바지ㅡ전투복차림,이제 야성의전사 본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역동적 활동도 더 빨라질듯합니다.
유익한 역사,인문기행 유익하게 잘보고있습니다.
무탈하게 목적탐사 진행하시기바랍니다.
길고 길엇던 남한의 江도 이제 6개 남았고
강이 끝나고 나면 긴강 옆으로 흐르는 산길도 한번 더 가봐야 할듯합니다.
역사가 묻어나는 강줄기
강물이 오염되는건 우리 모두의 탓이니 물 아껴 씁시다.
"너무 마음 아파 하지마라"며 땅의 기운은 그대로 흐른다고 말하는것 같다 라는 글이 제일 맘에 와 닿네요 ㅎㅎ
가화천 추산대장님과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으셨군요~~ 즐감하고 갑니다.
인위적인 낙남을 다녀왔으니 자연적인곳도 한곳 빠른시일내 다녀오려고 합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이쁜 얼굴 다치지 않게 언제나 안전산행 하시기 바랍니다.
짬짬히 방장님 강행기 세번만에 다읽었습니다~역사에 박식하셔서 뭐하나그냥 지나치심이없으세요~가화천(남강)발원지는 남덕유군요~
온통바위라는것도 알게됐구요~
낙남정맥 마루금짤린것 유수교로 땜빵하셨군요ㅎ 시작과 끝이같은 경남강줄기 험한곳도 많군요~추산님 영스님 얼굴도뵙고 물회맛있게 드셨을것 같습니다~추산님과 쌩고생 하셨습니다~~^^
가화천 발원지는 남강댐이라고 봐야 할듯합니다.
낙동강으로 가야할 물이 경남 사천만으로 흘러드니...
물누님글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조심조심 산행 하십시요
가화천 다녀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글을 남길수있는 지류천인가 의아했습니다.
유수교를 지날때는 하나의 지름길 개념으로
지나갔구요.
잘려나간 마루금 어귀에 유수교 다리를
만들어 다행이라 여기고 유일한 마루금다리
도하보다는 낫습니다.
지나가면서 잘린 위치를 눈으로 보면서
걸어간걸로 만족해야겠네요.
더운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