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 나라의 잔디는 추운 겨울 땅에서도 죽지 않고 견디며 사계절 왕성하게 생육하고 번식한다. 가끔 이 잔디를 보고 있노라면 내 과거의 삶과 퍽도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아마도 직업상 늘 잔디를 밟고 다니는 나에겐 잔디가 여러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예전 새마을 운동 전후에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지게가 산간 벽지 농사의 이동 도구였다. 꼴을 베러 산기슭 오솔길 사이와 밭두렁이나 논두렁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일은 주로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이었다. 떼로 몰려 다니며 꼴을 베는 바람에 잔디는 꼴 베는 사람들 발길에 많이도 짓밟혔고 게다가 줄기를 뻗고 기어 나오는 바람에 꼴 베는 아이들을 많이도 넘어지게 했다. 그 덕에 발길질과 낫질을 당하기도 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잔디는 다시 가 보면 여전히 무성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시골 학생들은 대다수 학교 공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안 농사일들을 했어야 했다. 종류도 다양해서 꼴 베기, 고추 따기, 알곡들 마당에 말리고 거두어 들이기, 콩 깍지 까기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시 그런 시골 아이들은 진학도 제대로 못해 일거리를 찾아서 상경을 했다. 나 역시 그런 아이들 중에 하나였다. 처음 상경 후 도시 아이들이 부모의 보살핌 속에 학교 생활에만 충실히 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
상경한 이들이 타향 객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힘들게 돈 모아서 명절이면 손떼 묻은 돈으로 부모형제께 드릴 선물 꾸러미를 한 아름씩 가져와 효자 효녀들 소리를 들었다. 동네부모들은 모이면 누구네 집 누구는 무슨 선물을 가져왔다며 다들 자랑으로 뿌듯해 하시는 그 표정도 기억이 난다. 도회지 야박한 생활에 눈물 젖던 시름을 불원 천리 하고 달려와 부모 형제 정든 고향에서 위안을 받고 이들은 다시 떠난다. 돈 없고 배우지 못한 그들의 혹독한 고생을 위안해 줄 곳은 그 고생 항상 알고 있는 그 곳 가족밖에 없었으니…… ! SPAN>
잔디는 자기 자리 지키기에 최선을 다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경사지 밭둑도 논두렁도 잔디가 많이 심어진 둔덕들은 여름 장마를 견디며 자신이 맡은 황토 흙을 잘도 지키며 뭉개지지 않았다. 그 만큼 자생력이 강하고 수분 흡수력이 강하여 자신의 자리를 잘도 지켰다……. 잔디는 또 시골 마을 어른께서 돌아가시면 무덤에 덮을 떼를 떠서 듬성듬성 심어놓으며 자생력이 강한 잔디는 푸른 양탄자를 만들어 조상을 섬기는 성지가 되게 했고 양지 바른 언덕배기 금잔디 위에서는 연 놀이와 장난꾸러기들의 총 싸움 놀이터의 공원이 되기도 했다.
잔디는 백의민족 백성과도 닮았다.
일제강점기, 독재시대, 짓밟힌 인권 유린과 수난의 역사를 슬기롭게 끈덕지게 인내하며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백의민족을 민초라고 비유한다. 강대국 틈에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70,80년 산업화 주역인 산업전사라는 익숙한 슬로건은 홍수 난 제방에 떼를 입히듯 배고픈 나라를 구하기 위해 빈곤한 시골 청소년 인력으로 신발공장 합섬공장 인형가발공장 등 수출납기에 맞추느라 밤낮없이 분주하게 공장은 돌아갔고, 밤에는 야간 중, 고등학교 개설 운영하는 업체도 많았다. 주경야독하며 근면 성실하게 배우고 익힌 잔디 같은 악착같은 헝그리 정신의 토대 위에 산업화는 튼튼히 다져졌고,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90년대부터는 정보 통신 산업을 바탕으로 지금은 세계 속에 IT강국이 되었다. 인터넷 클릭 시대 속에 잔디의 새로운 순들이 끊임없이 발아하고 있다. 잔디는 정원, 잔디구장, 골프장 등 사람과 사람의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어준다.
잔디도 산업이다.
깨어있는 민초(국민)들 덕분에 정치도 발전하여 독재화에서 자유 민주 제도로 이제는 세계화되어 선진 국민의 대열에 접어들었다.
논두렁 밭두렁 산기슭 오솔길에만 있었던 잔디들은 도시의 고급 정원에, 월드컵의 열광하는 관중들이 있는 운동장을 덮었다. 잔디 연구하는 학과와 연구소들도 많이 생겼고 잔디밭을 토대로 사업을 하는 레저 골프장이 2005년 현재 대략 180개정도 정규18홀, 평균 30만평의 잔디밭이 필요하니까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그 잔디밭에서 일하는 그린키퍼, 캐디, 코스 관리 등 수 많은 직종이 생겼고 잔디밭이 배출한 세계적인 골프선수들(박세리, 최경주, 박은희, 김미현 등.)국위를 선양하고 있지 않은가?
잔디 같은 이력
어린 시절 양지바른 개간 밭이랑이 나의 놀이터였다. 그러나 초록이 완연한 푸른 잔디 놀이터를 오래 가질 순 없었다. 난 초등학교 졸업 후 객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위에서도 잔디는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그 암담하고 어둠의 청소년기 공장을 전전하며 쉬는 시간 옥상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생각했었다. 시골 빈농의 생활이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고향집이 화재로 인해 여섯째, 다섯째 동생은 아버지 따라 탄광으로 넷째, 셋째 동생들은 할머니와 고향에서, 고등 학생인 형은 소도시 자취생으로, 16세인 나는 홀홀 단신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뿌리 내리기도 어려운 부초와 같았다. 그러나 뿌리가 뽑혀있어도 죽은 것이 아닌 잔디처럼. 비 한 방울 이슬 한 방울만 적셔줘도 연명하며 기력을 축적할 수 있는 잔디처럼 강인한 생명력이 있었다.
책도 자유롭게 볼 수 없는 공동 공장 기숙사의 불편함을 참고 주경야독하며 지낸 모진 객지 생활 동안 난 작게나마 자유공간인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곳은 내 인생의 꿈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꿈의 그린(green) 구장이었고, 시골 동생들에게는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동생들은 지식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뻗어나가는 잔디 줄기처럼 뿌리를 내리며 자생했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는 다기능 재능을 나는 일찍 터득한 덕분에 삶에 대한 열정과 절망하지 않는 내성을 가진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그런 개인적 경험으로 골방 같은 나의 연구소에서 금잔디 밭을 가꾸며 경험과 지식을 나누며 감사와 복된 인생을 탐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