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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설교권위 개발
(디모데후서 4장 1~8절)
Ⅰ. 서 론
우리 한국 교회에 목회자를 위하여 가지는 프로그램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느끼고 아시고 보시는 대로 한신목회개발원의 목회자 세미나가 가장 훌륭하고 성황를 이루고 또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해마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데, 참석할 때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금년에도 1,200여 명 정도 예상했는데 2,000명 정도가 모였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큰 축복이고 또한 한신목회개발원의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도자론에 대하여 말씀드린 다음에 교회 지도자가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한 말씀의 양육을 어떻게 하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Ⅱ. 지도자의 자질
지도자에게는 반드시 지도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1. 지도자에게 필요한 주요 요소
기관이나 단체를 지도하는 데에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능률성이 있어야 합니다.
기관이 잘 되어 나가려면 같은 힘을 투자하고, 같은 일에 종사하더라도 이것을 바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유능한 지도자입니다. 무엇인가 하기는 하는데 도무지 능률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지도자의 역할부족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일하는 사람들이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한신목회개발원은 이중표 목사님이 주동이 되어 심혈을 기울여 일하지만 이 목사님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옆에서 도와주는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 장로님 등 많은 분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기는 열심히 하는데 일이 잘되지 않으면 일하는 사람들은 맥이 탁 풀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잘 되면 수고를 해도 보람과 긍지를 느낍니다. 신명이 납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고 지도할 때 교인들로 하여금 신명나게 하고, 한는 일에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짜증스럽고 한숨이 나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점점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사람들이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목회 지도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인화와 바른 의사소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일하는 사람들의 효율성있는 참여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일할 수 없으므로 인화가 잘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 ‘하모니(harmony)'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 다릅니다. 성품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모두가 다릅니다. 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조화되지 않으면 일의 성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협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은 주동이 되고 옆의 사람들은 구경만 한다면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온 교회다 협력해서 일할 수 있도록 지도할 책임이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협력이 조화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의사전달이 잘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말한 것이 잘 전달되고 전달받은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달이 잘 되어지지 않으면 혼란이 야기됩니다.
여러분이 말한 것이 얼마나 전달이 잘 되었는지를 알아 보려면 광고를 하신 다음에 교인들이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를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광고할 때 교인들이 다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주에 알아들은 사람은 반도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전달이 잘 안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들의 게임 중에 다음과 같은 게임이 있습니다. 즉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옆의 사람 귓속에다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를 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다음 사람에게 이야기하여 받은 말을 전달하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의 말과 마지막 사람의 말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후에 말씀드리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에 있어서 전달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전파한다 할지라도 전달이 잘 안 되어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내가 말하는 내용과 의중을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만 어떤 단체의 지도자로서 책임을 바로 감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적응력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일에 지도자는 적응을 바로 해야 합니다. 지도자(leader)는 피지도자(member)에게 적응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에 부임하면 교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같은 수고를 할지라도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응이 잘 되면 눈길만 주어도 척 알아듣고서 해동에 옮깁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의사가 통합니다.
피지도자가 지도자의 말에 쉽게 적응한다는 것은 지도자가 상당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려면 여기에 대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소질이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려면 목사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정도의 자격이 있어야만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누구든지 할 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목사가 되려면 이정도의 학식 수준과 연령과 경험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객관적인 자격 기준입니다.
지도자는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도 소질이 없으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말씀을 전하는 자인데 뻣뻣하여 입이 돌아가지 않으면 고역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받든지, 아니면 다른 방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 것이 더 은혜스럽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입니다. 달란트는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받은 것을 가지고 개발하는 것은 바로 나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질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힘(power)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영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지도자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받은 사람만이 교인을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 훈련(Leadership Training)도있어야 하지만 교인들의 훈련(Membership Training)도 필요합니다.
훈련받은 사람이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훈련받지 않은 교인은 오합지졸이 되고 맙니다. 군대는 수천 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장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훈련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에 강한 리더가 있으면 강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에 리더가 없으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영향력과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놓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지도자에게 필요한 기업가 정신
독일의 경제학자 슘페터(J. A. Schumpeter)는 말하기를 지도자에게는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새로운 자원을 개발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10년 전에 그렇게 했으니 금년에도 똑같이 하고, 지난 달에 그렇게 했으니 이번 달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지도자는 구태의연한 태도에서 벗어나 전에는 그렇게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새로운 개발형태가 되겠는가를 연구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꾸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하나가 창의력(creativity)입니다. 이것은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짐승에게는 창의력이 없습니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 까치가 얼마나 재간스럽습니까? 그러나 그 까치가 집을 짓는 50년 전 까치와 100년 전 까치가 똑같습니다. 발전이 없고 개발이 없습니다. 본능대로 그냥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100년 전의 집과 오늘의 집이 다릅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새것을 개발하는 창의력이 우리 인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창의성을 가지고 새로운 것과 새로운 자원을 자꾸 개발해야 됩니다.
둘째,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합니다.
목회에도 새로운 기술 도입이 필요합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고 말하는데 이것은 믿음의 원리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지 모든 것을 초대교회 때처럼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술을 자꾸 도입하여 현대 감각에 맞는 목회를 해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쓰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입니다.
셋째,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는 것을 계획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운 전도 지역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효과적인 전도처, 풍부한 전도의 어장을 자꾸 개발해 내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입니다.
넷째, 새로운 경영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교회 운영에 있어서도 새로운 운영 방법을 계속해서 개발해 내야 합니다. 지도자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밑의 사람이 하기 전에 앞장서서 나가야지, 뒤에 머물면 안 됩니다. 모든 면에서 지도자는 앞장서서 따라오라고 해야지 뒤에서 밀면 지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는 ‘혁신적인 정신(innovation spirit)'이 필요합니다. 토인비는 이것을 ‘도전적인 정신’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맥클레랜드는 ‘성취 동기’라고 했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전진적인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노만 빈센트 빌 박사는 ‘적극적인 자세’라고 했습니다. 하겐은 ‘창의적인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리치 호마는 ‘생산적인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혁신적인 정신, 적극적인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옛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시키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태양광선이라도 이 광선을 렌즈에 집중시키면 종이가 타버립니다.
무제는 우리의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집중력(power of concent-ration)'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집중하면 큰 힘을 발휘합니다. 힘을 분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지도자로서 성공하려면 모든 힘을 목회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하려고 하면 이것저것 많이 아는 것 같기는 한데 깊이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말을 꺼내 보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각 방면에 대해서 잘 압니다. 만물 박사입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분은 모르는 것이 없더라고 감탄했더니 “그분은 모르는 것도 없지만 아는 것도 없지.”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은 아는 것이 없다는 말과 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식을 넓히려 하지 말고 한 방면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전문화 시대 아닙니까?
저에게는 사위가 두 명 있는데 공교롭게도 다 의사입니다. 둘 다 서울 의대를 졸업하여 한 명은 내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또 한 명은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의사이기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정형외과 박사는 가만히 있습니다. 정형외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내과 박사가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말 잘못했다가는 망신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의사라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어디 가서 들은 풍월로 이야기하다가 만약 전문가가 들으면 무식한 목사라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법률은 좀 몰라도 됩니다. 철학․정치․사업하는 것에 대하여는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했습니다. 전문가가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그 방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영적인 방면,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치에 있어야만 지도자가 됩니다. 권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저 ‘목사님’ 하면권위가 생깁니까? 권위에 반드시 따르는 것은 실력입니다.
실력이 있으면 자연히 권위가 부여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려면 용인지술(用人之術)이 있어야 합니다. 즉 사람을 바로 써야 합니다. 나라도 단체도 기관도 교회도 이 원칙은 동일합니다.
Ⅲ. 지도자의 자격
첫째, 지도자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leader)를 다른 말로 하면 영향력(influence)입니다. 목사님의 말씀 한마디가 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면 영력(power)을 가진 목사가 됩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말해도 교인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교회의 목사님은 지도자로서 아무런 지도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향력이 많을수록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권위와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위(authority)’를 사회적으로 말하면 ‘지위(position)'입니다. 똑같은 사람도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가면 달라집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심심하면 만났는데 대통령되고 나니까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과연 저분이 그러한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자리에 가니까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지위가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력입니다.
아무리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실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지위만을 내세워서 주장합니다. 자기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가두고 압력을 가합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으로 일을 수행해 나가지만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압력으로 합니다. 지도자는 압력 가지고는 안되며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위는 실력으로부터 옵니다. 실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교회 지도자의 권위와 실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라고 했습니다. ‘권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ὑνα )’ 즉 ‘힘’입니다. 다이나 마이트가 바위를 폭파시키는 힘을 가진 것처럼 말씀의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힘이 생깁니다. 이 말씀의 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공신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말하면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인 지도자가 말했으면 말한 대로 해야 합니다. 과거 30년 동안 대통령이 되었던 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말한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말만 해놓고 그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신뢰하지 않으니까 대통령에 대한 신임이나 공신력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한 번 말하면 내게 어떠한 손해가 나도 그대로 해야 합니다. 적당히 하다가 내게 불리할 것 같으면 그만두는 것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지도자의 권위가 없어집니다. 공신력을 상실한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한 내용을 교인들은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만약 교인들이 목사님은 말씀뿐이다,라고 하면 그것은 끝난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의 말씀은 보증수표다, 목사님이 말씀하면 그대로 된다, 라고 인정을 받아야 지도자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힘있는 장군이 지혜있는 장군을 당할 수 없고, 지혜있는 장군이 덕있는 장군을 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힘이있어야 하겠으나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입니다. 지도자는 인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버나드는 「기관과 운영」이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 지도자의 자격론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첫째, 지도자에게는 박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념이 넘치는 의욕과 정열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혀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강한 의지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안심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에 부딪혀도 물러나고 포기해 버리는 지도자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이루어 놓겠다고 하는 결심과 의욕이 몸과 마음에 넘쳐나야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걸음걸이도 늠름합니다. 음성도 낭랑합니다. 표정에도 생기가 돕니다. 태도도 적극적입니다. 피로가 있고 격무에 눌려 있어도 건강하게 해냅니다. 이러한 열성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전파됩니다.
내게 이러한 의욕과 신념과 확신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이 됩니다. 의욕과 신념이 가득 찬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의욕이 생기고 신념이 생깁니다. 그러나 낙심하여 어깨가 축 처지고 한숨만 쉬고 죽는다고 하는 사람과 늘 같이 다니면 나도 그렇게 전염이 됩니다.
교인뿐만 아니라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들께서도 친구를 만날 때 적극적으로 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동기를 만나서 교제해야지, 만나기만 하면 장로나 교인들 흉만 보는 사람과 교제하면 자연히 나도 닮게 되고 그렇게 되고 맙니다.
둘째,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데 문제가 생길 때에 자기의 판단하에 모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최종 결단을 하는 결정권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흔들리면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지않습니다. 그만큼 목사의 위치와 사명과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였던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젊은 종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단력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고 결단력 있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도자에게는 이러한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우왕좌왕하며 갈팡질팡하는 것은 지도자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숙려단행(熟廬斷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결단하면 그대로 밀고 나갈 줄 아는 결단력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설득력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실력이 있는 사람은 설득력 있는 태도를 가지고 대하지,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는 식이 아니라 선후 좌우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설득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능력 있는 지도자는 독재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지도자입니다.
민주사회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독재사회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많은 민주사회의 말 많은 현상들을 조리 있게 설득하는 사람이 바로 능력 있는 지도자입니다. 여러분은 독재사회의 지도자가 되지 말고 민주사회, 민주교회의 지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릅니다. 얼굴이 다르고 목소리가 다릅니다. 사고가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의견이 다르고 주장이 다릅니다. 한 조직 안에는 반드시 리더의 비판자가 있고 반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올바른 지도와 가르침을 위해서 도리와 성의를 가지고 꾸준히 설득해야 합니다. 힘이나 직권으로 누르면 안 됩니다. 설득에는 표현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의와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설득력입니다. 성의가 없는 말은 남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열성은 설득의 비결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정성에 감동하는 동물입니다. 목사가 성의를 다하고 진실 되게 말하면 다 설득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넷째,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판단해서 지시를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도자에게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책임감 없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많은 부목사님들과 같이 일하는데 그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분들은 담임목사가 업무를 지시하면 자기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잘 해나갑니다. 그리고 하다가 잘 안 될 때에는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집니다. 내가 이렇게 하다가 잘못되었다고 하며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업무를 수행하다가 잘 안 되면 담임목사님이 지시해서 했다고 하며 자신은 책임을 회피합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은 다른 데 가서 교회를 책임질 때도 잘합니다. 그러나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데 가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동일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를 훌륭하게 하는 분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무슨 일이 되지 않으면 모두가 내가 덕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모두가 내 책임입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의 책임을 인식하고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 종류의 의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인의식과 손님의식입니다. 손님의 시기을 가진 사람은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책임감이 있습니다. 책임회피, 책임전가는 지도자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무책임한 것처럼 나쁜 것은 없습니다. 소위 심리학 용어로 ‘책임공포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처음부터 지도자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에게는 용기와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희생이 없이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만일 지도자가 대접만 받는다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대접을 받는 것보다 책임져야 할 일과 어려움이 더 많습니다.
다섯째, 지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그 방면에 무식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중국에서는 인물을 평가할 때 네 가지를 보는데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본다고 합니다. ‘신(身)‘은 신체적인 조건으로 튼튼한 몸, 훌륭한 풍채, 좋은 인상, 맑은 음성, 화기가 풍기는 얼굴, 사람을 끄는 본성, 좋은 몸가짐 등입니다. ‘언(言)’은 표현력, 설득력, 언변 등입니다. ‘서(書)’는 책을 읽어 지식을 갖추고 학문을 고양하는 것, 즉 식견이 넓어 양식이 있는 인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판(判)’은 사리분별을 가리킵니다. 공평 무사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사리사욕이나 사감, 사심,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Ⅳ. 지도자의 역할
지도자가 일을 하다 보면 언제나 평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단체나 개인을 지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에게는 다음과 몇 가지의 역할이 요구됩니다.
첫째,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지도’라는 말에서 ‘지’자는 손가락 지(指)입니다. 그러므로 지도한다는 것은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도’자는 인도할 도(導)입니다. 길을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지적하다(point to)'는 말로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경륜과 청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계획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에게 경륜이 없고, 계획이 없고, 철학이 없으면 바른 지도가 되지 않습니다. 한 나라를 인도하는 데도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통치하는 것과 철학이 없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하여 너무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정치에 대한 철학이 없었습니다. 철학이 없으니 되는 것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에 대한 꿈을 가지고 지금에 이르니까 백 날밖에 안 되었지만 그 경륜이 쌓아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대통령이 범사에 잘만 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통령도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가치관이나 철학이 예수님처럼 완전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완전을 향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지도자는 배로 말하면 선장입니다. 모든 방향은 선장이 알아서 지시하고 판단해서 설정해야 합니다. 선원이 몇 백 명, 몇 천 명이 되어도 선장의 판단에 의해서 배가 움직여야지,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가지고는 배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장을 서셨습니다. “내가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 내가 제자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참 지도자의 자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가진 것과 하는 것과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 가운데 백 날을 지냈는데 천 날을 지낸 것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과 경륜을 가지고 많은 일을 질서 있게 수행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교회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솔선수범 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순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나서면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수상이었던 간디는 말하기를 “지도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면 적어도 몇 사람은 따라 들어온다.“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말입니다. 지도자가 생명을 걸고 나서면, 솔선수범하면 따르는 사람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뒤에서 미는 지도자의 배는 파선하고 맙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을 다 듣다가는 배가 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목회자는 선장입니다. 작은 배든 큰 배든 여러분이 맡은 교회라는 배의 선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조직 관리와 경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되든지 있는 사람들을 다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경꾼이 아니라 연주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을 파악하여서 저 사람은 어떠한 방면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고 어떤 분야에 적합한지를 생각하여 각자가 받은 재능대로 일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을 할 때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다섯 가지의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존심, 성장의 욕구, 기회와 보람의 욕구, 그리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공헌의 욕구 등입니다. 사람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하는 일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성취감을 가지게 될 때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지도자가 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인 버트란드 러셀은 “인간의 진정한 만족은 소유 충동의 만족이 아니라 창조 충동의 만족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얼마나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신목회개발원의 이사장이신 이중표 목사님에 대하여 말한다면 목회자 성장을 위한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쏟다시피 하며 심혈을 기울이시는 일 가운데서 보람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제가 그분에 대하여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하여 대단히 큰 도움을 줍니다.
특히 이중표 목사님은 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장을 생각할 때면 차갑게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벽을 깨뜨리고 전 교회의 목회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모여서 바른 목회를 해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이러한 동기 부여를 한 공헌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보람입니다. 창조 충동입니다. 소유 충동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으면 무얼 합니까? 그것을 지고 가겠습니까? 이고 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얼마를 가졌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남겼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남겼느냐?”라는 말은 얼마나 창조적인 일을 했느냐, 이며 얼마나 보람된 일을 했느냐, 이며 얼마나 공헌하는 일을 했느냐, 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시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계산하자는 때가 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예배당을 크게 지어 놓았습니다.“ ”자동차를 큰 것 타고 다녔습니다.“ ”저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내놓을 것입니까? ”얼마나 바른 교인을 키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를 바로 양육시켰느냐?“ ”정말로 양심의 부끄러움 없이 양육시켰느냐?“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로 인도했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지도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혜롭게 부단히 개발하느냐, 개발하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심리학자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100%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평생 동안 25%를 개발하고 75%는 사장한 채로 생을 마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25%를 개발해 놓고서는 내가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재는 100%를 개발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100%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25%만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나머지 75%를 개발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육이란 묻혀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 ‘education'라틴어로 ’educare'로서 ‘끄집어내다’ ‘끌어 잡아당기다’하는 뜻입니다. 즉 끌어내는 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은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집어넣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약점입니다. 주입식 교육은 집어넣는 교육입니다. 집어넣으면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꺼내놓으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서양인보다 우리가 앞섭니다. 그러나 대학을 가게 되면 창의력이 바탕이 된 저들을 따를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인을 향하여 어느 경우에는 적대시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창의력을 개발시키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집어넣는 주입식으로는 올바른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백련천마(百鍊千磨)의 훈련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듭니다.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든지 높은 수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발하여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각과 부단한 훈련이 훌륭한 지도자를 길러 냅니다.
누구나 지․덕․신을 겸비한 유능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공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도력을 가지기 위해서 목표를 가지고 부단히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이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도전을 받습니다. 바울 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얻었고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것을 잊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는 사람은 뒤의 것을 잊어버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자꾸만 말하는 사람은 전진을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말 많은 사람은 지난 날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왕년에는 어떠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과거의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한 것도 성공한 것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잘한 것, 성공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또한 실수한 것, 잘못한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자꾸 기억하면 사람이 비굴해집니다. 좌절하게 됩니다. 소심해집니다. 그러므로 성공도 실패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좇아갔다는 것은 이루었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눈이 목표에 가서 있으면 몸은 비록 목표에 도달해 있지 못하더라도 몸이 그쪽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넘어지기 전에 발을 옮겨야 합니다. 계속해서 서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실패한 것 때문에 한숨쉬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앞날이 있습니다. 밝은 내일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부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을 점령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고 힘차게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본받아 어떠한 어려움이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 가지고 확신 가지고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고 기대가 있어서 우리에게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소원을 다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왔습니다. 우리는 다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기대와 소원이, 우리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Ⅴ. 결론 : 하나님의 말씀 준비
일반적인 지도력, 가령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거나 학교의 지도자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상(vision)과 의욕과 학식을 가지고 할 수 있지만, 교회 지도자는 일반 지도자와는 다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 할지라도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에게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지도력의 요소들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잘해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 : 2~5).
우리의 직무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잘해도 말씀 전하는 것이 약하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자연히 그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지식을 가지고는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이지 다른 데에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의 다른 학문적인 서적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점과 특색 중의 하나는 'Bible said'입니다. 즉“성경이 말하기를”하고 말씀을 선포합니다. “누구 누구가 말하기를”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기를”이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기록되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 : 17)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세 가지의 내용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한 달에 한 번이건, 일 년에 한 번이건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에 이를 전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상황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성도님들, 지난 주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든 들리지 않든 말씀을 전해야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를 준비하는 노하우(know-how)가 어디에 있습니까?“ 노하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눈물과 피와 땀입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힘쓰면 말씀이 들립니다. 말씀을 들으려면 힘써야 합니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저 사람은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운이 좋아서 되었다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 운만 생각합니다. 노력한 결과이지 운으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들으려고 힘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스물네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35년이 되었는데도 설교가 잘 되지 않습니다. 목요일쯤 되면 설교 제목과 주보 원고를 내보내야 합니다. 시간이 다가오면 아직 되지 않았다고 사무원에게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때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내가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면 아내는 “잘하시던데.” 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이는 말입니다. 30여 년을 같이 살아도 모릅니다. 이것은 나만이 아는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conviction)'입니다. 확신이 있을 때 열의가 있습니다. 제 경험을 통해 보면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생기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찬송이 쏟아집니다. 이러한 설교를 할 때 은혜를 받는 것이지,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원고만 읽어 가지고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원고라 할지라도 어떠한 사람이 읽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나 자신의 확신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물건 하나를 팔아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없으면 물건도 제대로 팔지 못합니다. 양복지 파는 데에 가서 양복감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그 주인이 “글쎄요, 요새 들어오기는 했는데 제가 입어 보았어야지요,“라고 말한다면 손님들이 사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집에 가보니 아까 저 집에 있는 것이 다 있습니다. “이것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니 그 사람이 “아, 선생님 보시는 눈이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 양복지 업계로 말하면 환상의 옷감입니다. 이태리와 기술제휴로 이 옷감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드디어 성공했는데 한번 보세요. 선생님 품위가 달라집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왕이면 이런 집에서 살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양복지 하나를 팔아도 이러한 확신과 열의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복음, 생명을 건지는 복음을 전하는데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아라는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먼저 뜨거워져야 합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람은 진리를 전하다가 너무도 힘이 들어 이제는 그만두자 할 때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확신과 신념과 열의를 가지고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설득이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이 말씀 증거의 사명을 통하여 많은 심령이 구원을 받아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고 역사적인 사명을 다하는 데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 조 준 목사(갈보리교회)
첫댓글 3월입니다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지난달 공과금 통신료를 못내고..카페운영이 어렵습니다
카페를 잘 운영하도록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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