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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두고 간 여자
14부 ― 삼촌이라고 불렀던 남자
문밖의 남자가 다시 나를 불렀다.
“미정아.”
나는 문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열지 마.”
“엄마.”
“제발.”
“누구야?”
어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 필요 없어.”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또 그 말이야?”
“미정아.”
“내가 쉰이 넘도록 내 이름도 모르고 살았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엄마가 살아 있는지도 몰랐어. 이제 와서 또 알 필요 없다고?”
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안 돼.”
나는 손을 뺐다.
“이번에는 내가 결정할게.”
문밖에서 남자가 말했다.
“선영아.”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아이한테 말해.”
“당신은 입 다물어.”
“언제까지 숨길 건데?”
“당신이 할 말은 아니야.”
“그럼 네가 해.”
남자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미정이 아버지가 누군지.”
나는 문에 손을 올렸다.
“내가 열게.”
우진이 내 앞을 막았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켜.”
“누나.”
처음으로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는데도 이상하지 않았다.
“괜찮아.”
“안 괜찮습니다.”
“그래도 봐야 해.”
서윤도 내 옆으로 왔다.
“같이 열자.”
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열지 마라.
아버지의 말이 이제야 조금 다르게 들렸다. 문을 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실 앞에 혼자 서지 말라는 뜻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함께 문을 열었다.
⸻
복도에 남자가 서 있었다.
회색 재킷.
희끗희끗한 머리.
조금 굽은 어깨.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삼촌…….”
그가 웃었다.
“그래.”
정민수.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알고 있던 사람.
명절이면 우리 집에 왔고, 아버지가 늦는 날이면 나를 학교에서 데려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빨간 책가방을 사 주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고, 결혼식에서는 아버지 옆에 서서 손님을 맞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가끔 전화했다.
밥은 먹었느냐.
힘든 일은 없느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라.
내가 평생 삼촌이라고 불렀던 남자.
“왜 여기 있어?”
“널 만나러.”
“어떻게 알았어?”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슨 뜻이야?”
정민수는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많이 늙었네.”
어머니가 차갑게 말했다.
“당신도.”
“살아 있을 줄 알았어.”
“그랬겠지.”
“그런데 이렇게 숨어 있을 줄은 몰랐어.”
“당신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 있었으니까.”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엄마.”
어머니가 나를 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야?”
정민수의 눈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해.”
긴 침묵.
그리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너무 많은 진실을 한꺼번에 들으면 마음에도 감각이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정민수가 한 걸음 다가왔다.
“미정아.”
“오지 마.”
그가 멈췄다.
“내가 네 아버지다.”
“아니.”
“미정아.”
“내 아버지는 김태식이야.”
정민수의 얼굴이 굳었다.
“피는 속일 수 없어.”
“피가 뭘 했는데?”
“뭐?”
“내가 아플 때 업고 병원 간 사람이 누구였는데? 운동회 때 달리기 꼴찌 했다고 울던 나한테 아이스크림 사 준 사람이 누구였는데? 대학 등록금 마련한다고 밤새 일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정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
“당신은 내게 뭘 했어?”
그의 입술이 떨렸다.
“멀리서 지켜봤다.”
나는 웃었다.
“또 지켜봤대.”
이번에는 서윤도 웃지 않았다.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정민수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에는 왜 그렇게 나를 지켜본 사람이 많아?”
“미정아.”
“아무도 내 옆에는 없으면서 다들 멀리서 지켜봤다고 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지켜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야.”
눈물이 흘렀다.
“그냥 아빠가 필요했어.”
정민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그 말도 싫어.”
나는 눈물을 닦았다.
“왜 이제 나타났어?”
그가 내 손에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걸 찾았으니까.”
순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네.”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럼?”
“원본 명부를 넘겨라.”
역시.
나는 웃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을 처음 만나서 하는 말이 그거야?”
“그 명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
“그래서 없애려고?”
“그래.”
어머니가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
정민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영아.”
“당신은 그걸 없애려는 게 아니야.”
“그럼?”
“다시 팔려고 하는 거잖아.”
정민수의 표정이 사라졌다.
⸻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이름을 사고파는 일을 만든 사람이 저 사람이야.”
“아까 그 여자가 아니었어?”
“그 여자는 관리자였어.”
“그럼 삼촌은?”
어머니가 말했다.
“설계자.”
정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신원보호 시스템을 만든 건 국가기관이었어. 위험에 처한 증언자나 정보원을 숨기기 위해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는 비공식 조직이 있었지.”
“아빠 테이프에서 들었어.”
“처음 목적은 나쁘지 않았어.”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민수는 다른 가능성을 봤어.”
정민수가 낮게 말했다.
“그만해.”
“왜? 이제 와서 무서워?”
“선영아.”
“죽은 사람 이름 하나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지.”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고 땅을 사고 회사를 만들 수 있었어.”
“그래서 개발 비리가 시작됐어?”
“그래.”
“박정호는?”
“고객이었어.”
나는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모든 악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박정호조차 더 큰 시스템을 이용한 사람이었다.
“한재수도?”
“처음에는.”
“김태식 아빠는?”
어머니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 사람은 끝까지 막으려고 했어.”
정민수가 비웃듯 말했다.
“그래서 죽었지.”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어머니가 소리쳤다.
“민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정민수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아빠 죽음.”
그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했어?”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그럼?”
“사고가 나도록 만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
찰싹.
복도에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민수는 맞은 뺨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래.”
그가 말했다.
“그럴 자격 있다.”
“닥쳐.”
“하지만 태식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어.”
다시 손을 들려는 순간 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누나.”
“놔.”
“이 사람 말부터 들어야 합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우진이 정민수를 바라보았다.
“왜 김태식을 죽였습니까?”
“장부를 가져갔으니까.”
“그 장부가 이거예요?”
“아니.”
정민수의 시선이 306호 안쪽 금고로 향했다.
“저건 명부일 뿐이다.”
“그럼 장부는?”
“태식이가 죽기 전에 숨겼다.”
나는 아버지의 테이프를 떠올렸다.
“아무도 못 찾았어?”
“십구 년 동안.”
정민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만 빼고.”
“나도 몰라.”
“알고 있어.”
“뭘?”
“태식이가 네게 말했어.”
“기억 안 나.”
“기억해야 해.”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진이 내 앞을 막았다.
“거기 서세요.”
정민수가 멈췄다.
“미정아. 2007년 4월 18일.”
날짜.
“기억해 봐.”
호수.
벤치.
단팥빵.
초록색 사진첩.
그리고—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미정아.’
‘왜?’
‘혹시 아빠가 아주 오래 여행을 가게 되면.’
나는 웃었다.
‘어디 가는데?’
‘멀리.’
‘얼마나?’
‘아주 오래.’
그때 아버지가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었다.
“숫자.”
내가 말했다.
정민수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숫자?”
“몰라.”
“기억해.”
“안 나.”
“기억하라고!”
그가 소리쳤다.
순간 어머니가 내 앞을 막았다.
“그만해!”
정민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당신 때문에 다 망가졌어.”
“아니.”
어머니가 말했다.
“당신이 망가뜨렸어.”
두 사람의 눈빛 사이에 내가 알 수 없는 세월이 있었다.
“엄마.”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잡았다.
“나하고 이 사람 사이에 어떻게 내가 태어난 거야?”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정민수의 표정이 굳었다.
“말하지 마.”
“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 딸이라며.”
“맞아.”
“그럼 뭐가 두려워?”
“선영아.”
어머니는 천천히 말했다.
“미정아.”
“응.”
“네가 태어난 건 사랑 때문이 아니야.”
복도가 조용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이 사람 밑에서 일했어.”
신원 기록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은행에서 발견한 이상한 자금 흐름을 추적하다 조직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내부에서 증거를 찾기 위해 들어갔다.
그러나 빠져나오지 못했다.
“민수는 내가 자료를 빼돌린 걸 알았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나를 협박했어.”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들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어.”
정민수가 고개를 숙였다.
우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서윤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어머니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를 낳았어?”
“그래.”
“왜?”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너였으니까.”
“…….”
“어떻게 생겼든 내 안에서 자라는 순간 너는 그냥 내 아이였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식 아빠는 알았어?”
“처음부터.”
“그런데 나를 키웠어?”
“그래.”
“왜?”
어머니가 웃으며 울었다.
“그 사람도 똑같이 말했어.”
“뭐라고?”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나는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평생 나를 사랑한 아버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사랑을 작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도 나를 딸로 선택했다.
나는 그의 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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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진이 낮게 말했다.
“누군가 옵니다.”
계단 쪽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민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명부 줘.”
“싫어.”
내가 일어섰다.
“미정아.”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내 딸이야.”
“아니.”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김태식의 딸이야.”
정민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는—”
“피 얘기 그만해.”
나는 명부를 가슴에 안았다.
“아버지는 피로 되는 게 아니야.”
그때 계단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세 명.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이선희 행세를 했던 사람이었다.
“정민수.”
그녀가 말했다.
“시간 끌지 마.”
정민수가 손을 내밀었다.
“열쇠.”
우진이 금속 막대를 움켜쥐었다.
여자가 말했다.
“그거 하나 때문에 다들 죽을 필요는 없잖아.”
서윤이 내 옆으로 왔다.
어머니도 섰다.
우진은 우리 앞을 막았다.
“뒤로 가세요.”
“같이 있자고 했잖아.”
서윤이 말했다.
우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 웃었다.
“그랬죠.”
우리는 네 사람이 나란히 섰다.
어머니.
나.
서윤.
우진.
피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순간 우리는 가족이었다.
여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열쇠.”
그때 복도 끝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열쇠는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모두 돌아보았다.
윤상호였다.
그 뒤로 경찰들이 들어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정민수가 뒤로 물러났다.
경찰들이 순식간에 복도를 막았다.
나는 윤상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한재수 씨가 연락했다.”
“한재수는요?”
윤상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밖에 있다.”
“왜 안 들어와요?”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미정 씨.”
“말해요.”
윤상호가 천천히 말했다.
“오다가 사고를 당했다.”
우진이 앞으로 나왔다.
“아버지가요?”
처음이었다.
그가 한재수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어디 있습니까?”
“구급차.”
우진이 달려갔다.
나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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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밖에는 구급차가 서 있었다.
한재수는 들것에 누워 있었다.
셔츠에 피가 번져 있었다.
“아버지!”
우진이 달려갔다.
한재수가 눈을 떴다.
“우진아.”
이번에는 우진이 그 이름을 막지 않았다.
“왜 이래요?”
“별거 아니다.”
구급대원이 말했다.
“말씀하지 마세요.”
한재수가 손을 들어 우진을 불렀다.
우진이 몸을 숙였다.
“미안하다.”
“나중에 말하세요.”
“지금 해야 한다.”
“안 죽어요.”
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까 나중에 하세요.”
한재수가 아주 조금 웃었다.
“한정희가 너를 잘 키웠구나.”
우진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분한테 평생 빚졌어.”
“그럼 살아서 갚으세요.”
한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들것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정 씨.”
이번에도 ‘씨’를 붙였다.
“왜요?”
“태식이한테 약속했는데.”
“…….”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아버지인 척한 것을 용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알았다.
그가 아버지의 이름을 훔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약속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것을.
“살아서 직접 사과하세요.”
그가 웃었다.
“태식이 딸답네.”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맞아요.”
나는 말했다.
“나 김태식 딸이에요.”
한재수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급차 문이 닫혔다.
우진이 함께 올라탔다.
차가 떠났다.
나는 붉은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경찰이 우로역을 봉쇄했다.
정민수와 이선희 행세를 했던 여자는 체포되었다.
수십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조직의 기록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부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원본.
돈과 이름과 죽음이 어떻게 거래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
경찰이 306호를 수색하는 동안 나는 혼자 승강장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뒤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낡은 벤치에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
“응.”
“이제 어디 갈 거야?”
어머니가 웃었다.
“갈 데가 있을까.”
“있지.”
“어디?”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우리 집.”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도 되니?”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십칠 년의 세월이 한 문장으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모르겠어.”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를 미워할지도 몰라.”
“그래도 된다.”
“왜 안 왔냐고 계속 물을 수도 있어.”
“그래.”
“밥 먹다가 화낼 수도 있고.”
어머니가 웃었다.
“그래.”
“어느 날은 엄마 얼굴도 보기 싫을 수 있어.”
“그것도 괜찮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와.”
어머니가 울었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죽은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
그때 승강장 끝에서 바람이 불었다.
보라색 우산이 굴러왔다.
경찰이 증거물로 가져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산은 바람을 타고 철로 가까이까지 굴렀다.
나는 일어나 우산을 주웠다.
“이 우산 정말 누구 거야?”
어머니가 웃었다.
“처음에는 선희 언니 거였어.”
“그다음은?”
“내가 썼고.”
“그다음?”
“한정희 씨가 보관했고.”
“그리고?”
“너한테 왔지.”
나는 우산을 펼쳤다.
낡고 군데군데 색이 바랬다.
“이제 버려도 되겠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고칠 거야.”
“이렇게 낡았는데?”
“낡았다고 버릴 필요는 없잖아.”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잠시 웃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 긴 이야기가 끝나 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우산을 접으려는데 손잡이 안쪽에서 무언가 딸깍거렸다.
“또 뭐야.”
나도 모르게 웃었다.
어머니도 웃었다.
“그 우산 참 지독하다.”
나는 손잡이를 흔들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이미 열쇠도 찾았고 편지도 찾았다.
그런데 무언가 하나 더 있었다.
손잡이 밑부분을 돌렸다.
이번에는 쉽게 열렸다.
작은 종이 두루마리가 떨어졌다.
나는 펼쳤다.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계좌번호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소도 아니었다.
맨 아래 아버지 글씨.
미정아, 네가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마지막이다.
심장이 뛰었다.
다음 문장.
장부는 종이가 아니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왜?”
“장부가 종이가 아니래.”
어머니 얼굴이 굳었다.
“그럼…….”
나는 다음 줄을 읽었다.
사람이 장부다.
그 아래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을 멈췄다.
어머니가 내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말도 안 돼.”
“엄마도 알아?”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알지.”
“누구야?”
어머니의 입술이 떨렸다.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증언할 수 있어.”
“어디 있는데?”
어머니가 종이 맨 아래를 가리켰다.
주소가 아니라 한 장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구역 3번 물품보관함.
그리고 날짜.
매월 마지막 금요일, 오후 다섯 시.
나는 웃음이 나왔다.
“또 다섯 시네.”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왜?”
“미정아.”
“응.”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금요일.
그리고 달력을 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지막 금요일.
시각은 오후 4시 21분.
대구역까지 가면 빠듯했다.
“가야겠네.”
어머니가 내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나도 간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위험할 수도 있어.”
어머니가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멀리서 지켜보지 않을게.”
그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보라색 우산을 들었다.
“그래.”
“같이 가자.”
우리는 승강장을 걸어 나왔다.
뒤에서 경찰 불빛이 번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름을 잃고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씩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박서연이었든 김미정이었든 상관없었다.
나를 안아 준 사람이 있었고, 나를 딸로 선택한 사람이 있었고, 죽는 순간까지 내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역사를 나서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문자 한 통.
발신자는 알 수 없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대구역.
3번 물품보관함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모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 아래 문장이 있었다.
늦으면 또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
이번에는 우산을 두고 오세요.
나는 손에 든 보라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문자를 읽었다.
“누구야?”
나는 종이에 적힌 마지막 이름을 다시 보았다.
그 이름은 우리가 지금까지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군데?”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김태식 씨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야.”
나는 숨을 멈췄다.
“누구?”
어머니는 대답했다.
“한정희.”
나는 손에서 우산을 떨어뜨릴 뻔했다.
“한정희 씨는 죽었잖아.”
어머니가 대구역 사진을 확대했다.
검은 모자 아래 여자의 입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
그녀가 속삭였다.
“저 사람은 한정희 씨가 아니야.”
“그럼?”
어머니는 사진 속 여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김태식 씨의 아내.”
나는 웃었다.
“우리 엄마가 아빠 아내잖아.”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미정아.”
잠시 침묵.
“나와 태식 씨는 법적으로 부부였던 적이 없어.”
바람이 불었다.
내 손의 보라색 우산이 펄럭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말을 꺼냈다.
“김태식 씨에게는 너도 몰랐던 진짜 가족이 있었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이야기는 이제 이름의 비밀을 넘어, 김태식이라는 한 남자가 평생 숨겨 온 또 하나의 가족을 향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