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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주석
불의한 청지기(누가복음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가 목적하는 것이 신적인 신비개념으로 우리를 위안시키거나 신적인 자비개념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그렇지 않다. 복음에 나타난 이 양자의 신적인 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제로 실행함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진 또 할 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고무시키려 함이다. 여기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많은 은혜의 청지기"임을 상기시켜서,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사실 우리는 여러 경우에 불(不)충성 했었고, 주님의 은총을 백안시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들을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 있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비유는 처음 말해질 때의 의도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 가진 것을 자비와 선행에 투자하면서 죽음과 무덤 저편 세상에서 벌을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즉 세상과 벗하고 다른 세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는 것처럼, 우리가 미래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선과 경건한 일에 우리의 부를 열심과 근면으로 쓰는 것이 정말 지혜 있는 태도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Ⅰ. 비유 이 자체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재물의 "청지기"로 표현되고, 우리가 바로 청지기임을 얘기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우리 주님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뿐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랍비 켐시의 말을 인용하여 "이 세상은 하나의 집, 하늘은 지붕이요, 별은 등불, 이 땅은 과일로 차려진 식탁. 그 집의 주인은 거룩하고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집안의 모든 재물을 맡은 청지기이다. 그가 잘 처신하면 주의 앞에서 은총을 입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맡겨진 직무를 박탈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보자.
1. 이 "청지기"의 "불성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 착복 횡령했고, 잘못 투자했으며 또는 부주의하게 관리하여 손실과 손해를 입혔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주인에게 고발되었다"(1절). 그런데 우리들도 똑같은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알자. "우리들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맡겨 주신 것들을 마땅히 증진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오히려 목적에 어긋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자신을 돌이며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청지기직의 "박탈". 주인은 "그를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나는 네가 잘 행하기를 바랬는데" 그는 청지기가 자기를 실망시킨 것을 유감스럽게 말하며 할 수없이 그를 해고시킨다. 즉 그는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했고, 청지기는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응당한 책임을 물어 곧 해고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2절). 이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짜여진 것이다.
(1) 우리는 모두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의 "청지기직"을 벗어나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곧 찾아와 청지기직을 우리로부터 "벗길" 것이며, 우리가 지금 가진 선행의 능력과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리와 우리가 가진 것들을 차지할 것이다.
(2) 죽음에 이르러서 우리의 청지기직 해고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화를 낭비했고 그래서 우리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래야 마땅하며, 불평할 근거가 하등 없는 것이다.
(3) 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날에 우리는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만 한다. 즉 "죽음 후엔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해고와 보고의 양면으로 경고되며 자주 이것들을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3. 그의 "각성". 이렇게 되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불(不)충성으로 좋은 자리에서 어리석게 쫓겨나기 전에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늦게라도 "생각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조만간에 청지기직을 반드시 그만 두게 되리라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 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살아야만 하는데 어떻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1) 그는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정도의 열심히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팔 수도 없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는 없구나." 왜 땅을 팔 수 없다는 것인가? 그가 나이가 많거나 절름발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그는 "게으른"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일을 잘 하지 못한 것은 자연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족했던 것이었다. 만약에 주인이 그를 청지기에서 해고시키고 노동에 종사시켜 그 위에 감독자를 두었더라면 그는 땅파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로도 우리 영혼의 생명을 얻을 수는 없으며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우리 영혼을 위한 목적에 맞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2) 그는 구걸로 자기의 빵을 벌도록 "겸비"함을 갖추지 못한 것을 알았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절). 앞의 것이 나태라면 이것은 그의 교만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함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청지기는 빵을 구걸하는 것보다 주인을 속이는 것에 더욱 부끄러움을 가졌었다.
(3) 그래서 그는 결심하기를 주인에게 빚진 자들과 친하고, 또는 소작료가 늦고 있는 고용주들과 사귀리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빚진 문서를 넘겨주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 주인은 나를 쫓아낸다. 내가 빚진 자들과 친하고 그들에게 여러 번 좋게 대해왔는데, 한 번 더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집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최대한으로 잘해 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한, 적어도 내가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들 집에 머물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빚진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이 주인에게 빚진 중에서 상당한 몫을 잘라버리고 실제보다 매우 적게 매기는 식이었다. 그에 따라서,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그와 같은 필수품으로 빚을 갚았었다) "네 증서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빨리 앉아 50이라고 쓰라" 일렀다(6절). 그렇게 해서 그는 빚을 반감해 주었다. 다음을 살펴보자. 그는 그 일을 행할 때에 급했다. "빨리 앉아라. 그리고 들키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고쳐 써라." 그는 또 "밀 백석"을 빚진 자를 불러 증서에서 5분지 일을 감해 주어, "80석"이라고 쓰도록 명했다(7절). 아마도 그는 장차 받을 친절을 예상해서 다소간 차이를 두면서 감해 주는 방식으로 다른 빚진 자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에 속한 재물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생각해 보자.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들은 재물을 관리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리하여 맡겨진 사람들이 "주인인 자기를 속일 수도" 있는 권한은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찰하는 게 귀찮기 때문이다. 또 신뢰하여 맡겨진 사람들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배신이 발견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 이다." 이 청지기는 부정직한 것이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것을 고치는 법은 참으로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인정(人情).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8절). 이 말씀 가운데 "주인"을 "그의 주인," 그 종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주인이 이 속임수를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이 자신을 위한 교묘한 꾀와 방책을 세웠음을 귀하게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위의 칭찬의 말씀을 "우리주님(Our Lord)"의 말씀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즉 위의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또 현재에 주어진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알며 앞날의 불행을 대비한 대책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주인에게 "거짓되게" 행했기 때문에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아니고,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지혜롭게" 행했기 때문에 칭찬하셨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서는 그 청지기가 주인을 위해서도 잘했고 빚진 자들에게는 마땅히 할 바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차용자들에게 "계약을 맺을 때 참으로 박하게 맺었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없었으며 그가 고집 세게 인색하였으므로 "빚은 자꾸만 밀리고," 그래서 차용인과 그 가족들이 파산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떠나려는 마당에 이르러서 그는 이것을 생각하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의로움과 자비로움을, 단순히 그들의 밀린 빚을 덜어 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앞날을 위해 그 빚을 감해 주려는 생각으로 베풀었다. "얼마나 빚졌느뇨?" 한 것은 "현재 얼마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느냐? 오너라. 내가 네게 꼭 갚아야 하는 것 이하로는 안 되겠지만, 좀 가벼운 계약으로 풀어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금까지 "오직 주인을 위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빚진 자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가 "주인의 신용"을 잃었을 때에 "그들의 호의"라도 얻을 수 있을까해서이다. 그들의 빚을 감해 준다는 것은 지속하는 친절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감해 준다는 것 이상의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이 생에서의 안락한 생존을 위해 이 청지기의 이와 같은 예비를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한 우리의 준비 없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생을 선택하고 여기서 몫을 가지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영혼과 영원을 관심하여 "자기 시대에서" 복음을 즐기는 "빛의 아들들"보다 "자기들의 당대를 위해선 더욱 현명하며" 세상적 이익과 모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고 더욱 신중히 고려한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는 이 세속적 일에 관심하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의 영혼에 관심하는 일에 "본받아야" 한다. 그들의 원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용하고, 가장 필요한 것을 즉시 실행하며, 겨울을 위해 여름과 가을철에 저장하고, 좋은 계약을 닿는 대로 맺고 "신실한 사람"은 신용하고 "불성실한 사람"은 믿지 않는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이처럼 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빛의 자녀들은 보통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진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진짜 현명"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세대에서"만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장래 일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여기서 늘" 살 것처럼 또 "이 생후의 내세는"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청지기직에 있을 때 "내세"를 준비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구하지 않는다. "빛의 자녀들"이라 하지만 우리는 앞에 놓인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 당연히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최선의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Ⅱ. 이 비유의 적용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내어지는 결론(9절). "내가 너희에게 즉 내 제자들에게 말하노니(그들에게 이 비유는 알려진 것이었다(1절)) 세상에서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라."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무엇을 권면 하시는가. 즉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와 즐기는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을 편안히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청지기가 빚진 자들을 친구로 만든 것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돈을 사용하여 단순히 현재만을 보지 않고 장래의 유익을 찾는다. 그러길래 이자를 놓든지 땅을 사든지 여기 저기 자본을 대는 것이다. 우리도 그들을 배워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장차 내세에서의 더 나음을 도모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이 땅 위에서의 미래에 더 나아지는 것을 바라지만 말이다. 그러나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우리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더구나 우리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우리 주님의 재산"을 가진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빚진 자"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 나쁜 일이 되기는커녕 우리 자신들을 위한 좋은 방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그분께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이다. 즉 졸렬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었다는 면에서 뿐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를 하고 만족과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속을 것이기 때문에 나쁜 "재화"란 뜻이다. 부란 사라져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실망하게 된다.
(2) 이 "불의한 재물"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과 "친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돈 자체를 목적 삼기 위해서가 아니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으며, 천사와 성도들을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도,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이같이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또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쓰려고 재물과 가까이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3) 죽음에 당도해서는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o]tan evkli,phte-즉 네가 빛을 잃게 될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죽음은 우리를 소멸케 한다. 상인은 "파산자가 될 때, 이젠 끝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 조만간에 이처럼 실패해야만 한다. 죽음은 상점 문을 닫고 손에 도장을 친다. 이 세상에서 받던 평안과 즐기던 것들 모두 다 "우리를 저버릴 것이다." 살아있는 육신도 우리를 내동댕이칠 것이다.
(4) "우리가 허무하게 죽을 때, 하늘의 영원히 거할 곳에 들어갈는지 스스로 분명히 확신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하늘의 "거주지"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영원한 손으로" "영속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고후 5:1).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가셔서, 지금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 즉 아브라함의 품은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천사의 무리"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면 "천사들의 합창"이 거기서 그들을 영접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가난하게 살다가 영광의 나라로 먼저 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들을 맞이해 줄 것이다.
(5) 이것이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하는 마땅한 이유인데, 즉 그렇게 함으로 그것들을 다가오는 영원, "찾아오는 그 때"의 좋은 기초로, 안전한 기반으로, "좋은 약정으로 저축해" 두고자 함이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잘 설명이 되어 있다.
2. 경건과 자선의 일에 위와 같은 일을 많이 할 것을 여러 말씀으로 설득하심.
(1)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영적인 은혜의 선물들"인 현재와 미래의 평안함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이 둘을 직접적으로 비기지는 않으시지만 그렇지만 보여 주시기를 이 세상 것들을 충실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구실이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들을 불성실하게 사용할 때는 틀림없이, 우리를 영광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몰수"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10-14절에서 말씀하신다.
[1] 이 세상의 부는 "아주 작지만,"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우리가 작은 것에 불(不)충성하고, 이 세상 것들은 주어진 목적을 벗어난 다른 목적에 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을 받을 때도 거꾸로 그러하고, 받아야 소용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거절될 것이란 점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자기의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고상하며 가치 있는 지혜와 은혜의 재주, 또한 영적인 은사, 그리고 하늘의 열심을 가지며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힘 쓸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가지고 묻어 놓는 사람은, 영적인 은사 "다섯 달란트"를 가져도 절대로 증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턱없이 인색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우리보다 더 잘 간파하시고 그들에 대한 그의 은혜를 보류하신다.
[2] 세상 재물은 "헛되고" "불확실하다." 그것들은 "불의한 재물"이다. 그것은 재빨리 도망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려면 급하게 손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진정한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하겠는가?(11절)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진실로" 부한 사람, "놀라운" 부자인 사람은, 신앙으로 부한 사람, "하나님께 대해" 부자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에서, 하늘에 대한 진정한 열심에서 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의 재화를 하늘에 쌓아 두고 하늘에서 몫을 받을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마음에 두자. 그리고서 다른 재화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면, 영적인 바탕에서 그것들을 사용하여서, 그것들을 잘 이용함으로 "참다운 부"를 더욱 견고히 잡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서 "더 많은 은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보시기에 선한 사람에게" 즉 열린 마음으로 자비로운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 바꾸어 말하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사람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3] 이 세상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들은 ta. allo,tria -즉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의 본성과 이익(흥미)에 낯선 것들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것,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는 우리들보다 앞선 것이며 우세하다. 그 권리는 하나님에게 남아 있고 우리는 다만 사용자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재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한다. "늘어가는 재산을 가진 소유자는"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 이외에 무슨 선한 게 있는가? 오히려 "재산은 쓸 때 불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화를 곧 누구인지는 모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부는 "우리 자신의 것"이며(그것들은 소유되는 즉시 영혼으로 들어간다)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우리의 선한 부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그분의 약속을 하늘나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들을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로 우리를 "부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2) 우리가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를 섬기기 위해 포기하고 우리들이 세속에서 얻은 재물을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하는 것밖엔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두 주인이라면 하나님과 "재물"의 경우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달라붙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멸시하게 된다. 그는 신앙 생활의 모든 겉치레를 이용하여 세속 이익과 계획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소유들을 세상을 섬기고 찾는 데에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상대적으로 그는 세상을 "미워하고"(하나님과 세상이 경쟁하게 될 때) 그것을 "멸시"할 것이며, 세상의 사업과 그 성공을 어떻게든 신앙생활의 확장에 건설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재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의 사업을 이루는 데에 도웁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간단하다. "너희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목적은 분명히 갈라지기 때문에 그 섬김은 절대로 화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했다면, 세상 섬기는 것을 버리고 영구히 버릴 것을 선서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다음에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어떤 대접을 들었는가와 그리스도가 그들을 비난한 것을 본다.
(1) 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도 예수님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직접 면박할 수는 없었고, "그를 비웃었는지라," 이점을 잘 생각해 보자.
[1] 죄를 낳는 "탐욕"의 열매로써의 "죄." 즉 그들의 "부정." 다음을 명심하자. 경건 생활에 대한 지식도 많고 체험도 많은, 입에 발린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멸망한다. 이것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적대하여 심정을 굳게 하는 것은 없다. 이 욕심 많은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장본인"인 불타는 욕심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evxemukth,rizon auvto,n -즉 그들은 예수님께 코를 들고 킁킁거리며 비웃었다. 즉 예수님께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극렬한 비난과 혐오의 표시였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긴다"(렘 6:10). 그들은 세상의 보통의 결과, 방법에 예수님이 거꾸로 말씀하시되, 그들이 굳게 붙들기로 작정한 죄에서 그들을 돌이키려하므로 비웃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말씀을 희롱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것이 농담으로 그렇게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 "주의 고통 당하심"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인들의 "반대"만 아니라, 그들의 "멸시"도 참아내셨다. 그들은 매일 "예수님을 조소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말씀하셨기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셨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조소받는" 충직한 목사들에겐 낙담시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업신여김'을 당했고,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크지 못하다."
(2) 예수님은 정당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예수님을 "조소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예수님은 "수치를 무시하시는" 방법을 아셨다) 경건의 능력과는 멀면서, 경건의 모양과 냄새만 피우며 스스로를 그들이 속이기 때문이었다(15절). 여기엔
[1] 그들의 "그럴 듯한 겉모양, 아니 차라리 그것은 "장려한 겉모양"이었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무슨 나쁜 것이든지 그들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을, 설령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더라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홀로 거룩하고 신앙 깊은 사람들로 보아주기를 주장했고, 그러기에 예수님의 아래와 같은 공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악한 자들이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잘 보이려고 전심을 기울이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려는 도다. 이러한 일에 너희를 당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사람 중에 높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비난을 "삼갔을 뿐"아니라, 오히려 "찬양했고," 선한 사람들"이자 나아가 "최고의 사람들"임으로 높이 추대했다. 그들의 몇 마디 말은 신탁으로, 그들의 지시는 법률로, 그들의 관습은 침범할 수 없는 규칙으로 여겨졌다.
[2] 그들의 "추악한 내면. 그것을 하나님이 감찰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너희들의 마음을 아시나니, 그가 보시기에 몹시 싫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사악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게 여김은"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의 악함을 모른다"는 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를 구출해 주고 지지해 주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악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점검해 보고, 스스로를 신뢰하는 마음을 점검케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심으로부터 아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많은 허위와 협잡이 거기에 있는가, 우리는 자신들을 낮추고 불신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둘째, 사람과 사물을 그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무지한 대중의 천박한 생각에 편승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는 것"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또 진리에 따라서 평가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멸시받고 저주받는 사람들 중에 주님께는 인정받고 칭찬 받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고후 10:18).
(3) 예수님은 욕심과 자만에 쌓인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잘 감화를 받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 요한의 때까지이다.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구약의 통치는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였다. 이때까지는 너희들이 의와 구원을 독점한 것처럼 보였고 또 너희는 이것으로 우쭐하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지만, 세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신약 시대의 통치에 의하면 사람이 율법에 능통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누구든 복음 왕국에서는 평등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출신이 좋다고 남보다 특권을 누릴 수 있다거나 또 통치자이나 바리새인이 그 나라로 이끌어 줄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통치는 구원이 유대인들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인의 통치 제도처럼 민족을 단위 하는 정치적 통치 기구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부주의와 사람들의 아첨에 현혹되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천심 해야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부와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약속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멸시하여 말씀하신다고 비웃었다. 하나님의 일군들 중 위대한 많은 사람들, 예로써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사람들도 부자였지 않는가? 라고 그들은 힐난했다. 그리스도는 대답하셨다.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가 새로운 방향 전환을 취하고 있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박해받는 이들이 지금은 복되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존경하는 백성들에게 보답으로 값싸고 쉬우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전파되면서 백성들의 눈은 열리고, 전에처럼 바리새인들을 우러르지 않을 때에, 전에 훈련받은 대로의 신앙 생활의 무관심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로 거룩한 폭력을 강행한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고통을 당해야 하고, 세태(世態)와 역행하여 싸워야 하고, 반대길로 가는 사람들과 대항하여 강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4) 그렇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을 무효화하려는 어떤 시도로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 보다," 땅의 기초와 하늘의 기둥이, 즉 그렇게도 굳게 세워져 있는 "하늘과 땅이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고하고 불변의 것이다. 그 일점이라도 빠뜨릴 수는 없다. 율법이 부과하는 의무는 여전히 의무이며, 율법이 금하는 죄는 역시 죄이다. 진실로 율법의 명령은 복음에 의해서 설명되고 강화된다. 또한 더욱 영적으로 나타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 안에서 완성되어지고 불분명한 곳은 복음으로 채워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령 율법이 복음 안에서 그 법으로서의 힘은 잃었더라도, 그 모습은 하나의 형으로써 찬란히 빛나며 복음 안에 뚜렷이 판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전에 율법은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해 눈감아 주는 몇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잘못을 사실상 허용치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에 해를 끼치는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이로써 복음은 율법을 율법의 근본 의도에 합치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5장 32절, 14장 9절의 이혼에 대한 사례에서 살펴보았었다. 그리스도는 이혼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과 정열을 밑둥째 치시며, 없애고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허용되면 더욱 맹렬히 줄기차게 뻗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허용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탕자의 비유가 우리 앞에 복음의 은총을 내어놓아 우리 모두를 격려해 준 것처럼 이 비유는 우리 앞에 "닥쳐 올 화"를 내놓아 우리의 경성을 촉구한다. 죄에 단단히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것으로는 깨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설교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그런 희롱자들을 심각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도는 우리를 가난과 고통에 화해시키고 또 세속과 육정의 유혹에 대항하여 무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얘기의 막을 열고 저 세상에서 위의 양자의 종말을 살펴보게 되면, 이 비유는 위의 두 가지 의도를 매우 잘 추구함을 보게 된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와는 다르다. 다른 비유들은 영적인 일들을 세상사(事)에서 끌어와 표현하고 있다. 즉 씨뿌리는 자와 씨의 얘기(염소와 양의 얘기는 제외하고), 탕자 등. 이것만을 제외하고서는 전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인 일 자체"가 이생과 내생에서의 선악의 상태에 대한 얘기와 표현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써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사에 진실로 존재하는 "사실성의 문제"이다. 즉 불쌍하고 신앙 깊은 사람들이 천대받고 소외당하다가 죽음으로 그 불행을 벗어나 천국에 가서 축복과 기쁨을 누린다. 그것은 전생의 슬픔이 있었기에 더욱 기쁜 일이다. 그런데 부한 쾌락주의자들은 사치와 향락 속에 살며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다가 죽어, 참을 수 없는 지옥의 고통에로 간다. 그런데 그것은 전생에 누리던 쾌락적인 생활이 있었기에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 데다가,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일까? 그렇다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브라함과 부자와의 담론의 사실은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담론처럼 얘기를 더욱 효과 있게 하기 위한 도입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구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세을 알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이 "저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에서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시고 계신다. 이 서사문(앞으로는 이 비유를 이렇게 부르겠다)에서 우리는 다음을 고찰해 보자.
Ⅰ. 이 세상에서의 "사악한 부자"와 독실한 빈자"의 다른 생활 상태가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흔히 옛날의 유대인들도 번영을 참다운 교회, 선한 인간, 하늘로부터 은총 받는 사람의 표시로 보았다. 그래서 "가난한"를 거의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경우를 통하여 바로 이 오해를 시정하신다. 여기서도 전적으로 그러하시다. 우선 살펴보면
1. 악한 인간,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한 불행에 빠질 사람(19절). "한 부자가 있었다." 라틴말로 보면 Dives-즉 한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틸롯슨(Tillotson) 감독이 지적한 대로, 이 얘기의 가난한 사람도 가진 이름을 그는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서사문에서 어떤 특정한 부자의 이름을 부른다면, 남에게 미움을 살 수 있고, 나쁜 감정을 일으키거나 사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지적하기를, 그리스도는 부자의 이름을 불러 주는 영광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그렇지만, 이 부자가 자기의 땅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면, 이 얘기에도 보존되어 있는, 거지의 이름만큼이나 오래 갈 것이지만, 이 부자의 이름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이 부자에 대해서 다음을 보게 된다.
(1)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다. 그것이 "치장"이었다. "쾌락"을 위해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의심할 바 없이 매일 세탁했다. 낮에 입는 베옷과 밤에 입는 베옷을 또한 그는 "거드름"을 피우기 위해 "자색 옷"을 입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왕자들이 입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선 헤롯을 보고 얘기 하셨으리란 추측들을 하게 한다. 그는 언제나 밖에 나갈 때는 장엄하게 차려 입었었다.
(2) 그는 "날마다" "사치스럽고" 즐겁게 "지냈다." 구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산해진미로 차려놓은 식탁, 요리 접시로 그득한 보조 식탁, 제복을 입고 시중드는 종들, 물론 식탁엔 초대받은 손님들, 이런 것들이 자기의 사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리라 그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무슨 해될 것이 있단 말인가? 재산이 넉넉하여 할 수 있다면 부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풍성한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또한 그가 자기 재산을 사기나 압제나 강탈로 모았다는 얘기도 없고, 자신이 술 취하고 또 남들을 술 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그러나
[1] 그리스도는 여기서 사람들이 세상의 큰 재산과 허영과 만족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밑에 놓여 있고 멸망한다고 알려 주신다. 우리는 잘사는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시도록 그를 사랑하시는지,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시기 "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추리할 수 없다. 행복은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2] 풍요와 쾌락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사치와 육정, 하나님과 저 생(生)에로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이 부자는 큰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3] 육신에 매달리고, 그 편안과 쾌락을 좇음은 많은 영혼을 파멸케 하며, 영혼의 이익을 해친다. 고기를 먹고 좋은 옷을 입음은 사실 타당한 것이나, 때때로 그것들이 교만과 사치와 재료와 연료가 되어 죄로 이끄는 것도 사실이다.
[4]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노하시게 하며 영혼에게 저주가 된다. 이 부자의 죄는 그의 옷이나 음식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었다.
2. 여기 독실한 사람. 역경과 고난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영원히 행복할 사람(20절)이 있다. 본문에는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었다"고 했다. 신앙이 매우 깊고, 큰 고난 가운데 있었던 이 이름의 거지는 당시 선량한 사람들 가운데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거지에게는 엘르아살이나 나사로라는 이름이 흔히 붙여지곤 했었다. 어떤 이들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이 가난한 사람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엘르아살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뜻하는 이름이었고, 또 이름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불쌍한 사람은 외부적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1) 그의 몸은 욥처럼 "종기로 뒤덮였다." 육신의 병과 약함은 큰 고통이다. 그러나 종기는 환자에게는 "더욱 괴로운" 것이며 또 그 주위의 사람에게는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다.
(2) 그는 먹고 살기위해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고, 부잣집 문간에서 얻을 수 있는 상 부스러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처투성이요 절름발이었기에 혼자 힘으로 다닐 수 없었으나 몇몇 동정적인 손길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 옮겨졌고, "부잣집 대문가에 놓여졌다." 생각해 보자.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마땅하다. "한 페니"를 꾸어 줄 수 없는 사람은, "손 하나"라도 빌려주어야 마땅하다. 도움을 베풀 힘이 없는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데려다 주거나 찾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사로는 먹고 살아갈 게 없었고, 찾아 갈 친척도 없었다. 더구나 종교 기관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다. 나사로같이 독실한 사람이 필요한 양식의 결핍으로 죽게 되도록 고생한다는 것은 이때의 유대 교회의 타락의 한 예였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부자의 식탁에 거는 나사로의 기대.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다"(21절).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으로부터 한 접시의 음식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당연히 훌륭한 한 상을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 밑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부자가 먹다 남긴, 아니 개를 주려고 남긴 고기 찌끼라도 감사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간청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얻는 것들에 만족해야만 한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 주는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나사로의 곤경과 그 성질. 그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난하였다." 즉 만족스러운 가난이었다. 그는 부자의 대문 곁에서 불평하고 소리지르며, 시끄럽게 누워 있지 않고, 조용히 또 얌전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기를" 바라면서 누워 있었다. 이 비참한 한 인간은 선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었다. 하나님의 성도나 종들 중의 귀한 사람들의 운명이 이 세상에서 큰 고난받는 것은 흔히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에 반해서 사악한 사람들은 선영하고 유복하다. 시편 73편 7, 10, 14절을 보라. 집안에는 호화롭게 지내는 진노의 자식이요, 지옥의 상속자가 앉아 있고, 문간에는 배고파 죽는, 사랑의 자식이요, 천국의 상속자가 누워 있다. 한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그 순간의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인가?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기분(성미). 우리는 여기서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했거나, 문간에 있지 못하게 했거나 어떤 해를 끼쳤다는 얘기를 들을 수 없지만 그를 경시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고 돌보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진정한" 자선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의 외모는 참으로 가련한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부자의 문간에 앉아 있었다. 이 불쌍한 사람은 착한 성품과 선한 행위로 칭찬 받을 만한 모든 것을 갖추었었다. 그에게는 "하찮은" 일이라도 "큰" 친절이 되련만 부자는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는 이 거지를 데려다 헛간에라도 거하게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고, 다만 거기에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짓밟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을 구조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주님의 불(不)충성한 종이라고 밝혀질 것이다. 그가 가장 무서운 운명에 처하는 이유는 "나는 굶주렸다. 그러나 너는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고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비참함에 자주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란다.
[2] 개로부터 받는 대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이 부자는 한 떼의 하운드, 아마도 이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 개일지도 모르나, 오락 삼아 혹은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르고 있었다. 나사로가 살기 위해 필요한 음식도 없을 때, 이 개들은 배부르게 먹여지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개는 기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내세에 책임을 질 것이 많을 것이다. 곤경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준다면 필요하고 또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재물을 오락과 어리석은 일에 소모해 버리는 많은 부자들의 몰인정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그들의 책망을 더욱 중하게 할 것이다. 개나 말은 배불리 먹이면서 이웃집 가난한 식구들은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내시게 하며, 인륜을 어기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나사로의 불행을 가중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사로의 상처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들이 와서 핥도록 자극시켰다. 마치 나봇과 아합의 일처럼(왕상 21:19) 또한 시편 68편 23절에서 보듯이, "원수의 피에 개들의 혀를 잠그듯" 하는 것이다. 개들은 마치 나사로가 시체가 되어 그들을 물리칠 힘이 없는 듯이 그를 공격했고, 개들이 그렇게 못하도록 말리는 예절을 가진 종이 한 사람도 없었다. 개들도 집주인처럼 인간의 핏덩어리를 맛있게 즐기면서 사치스럽게 지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비참한 지경에 있는 나사로에게 위로가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본문에
a,lla, kai,라 했는데 이 말은 주인은 나사로에게 "냉정" 했지만, "그러나" 개들은 "와서 헌데를 핥아 줌"으로 나사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편하게 했다고 하겠다. 개들이 상처를 "빨아먹다"라고는 하지 않고 "핥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상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개들은 주인보다는 친절했던 것이다.
Ⅱ. 다음엔, 이 "독실한 가난한 사람"과 그 "악한 부자"가 "죽은 후," "내세"에서 "다른 상태"에 가 있다. 이제까지는 악한 사람이 유리한 삶을 살아 왔었다. 그러나 Exitus acta probat-즉 끝을 보기 위해 조금만 기다리자.
1. 둘 다 죽었다(22절).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믿음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공동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한 사람은 "평안한 가운데"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의 비통함을 안고" 죽으나, 이 둘이 "일반적으로 흙 속에 눕는 것이다"(욥 21:26). 죽음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차별이 없이 닥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성도는 죽어 고통을 마감으로 영원한 즐거움에 들어갈 것이나, 죄인은 죽어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될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을 준비하여야 한다. 죽음은 둘 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Mors sceptra ligonibus oequat-즉 죽음은 제왕의 홀과 농부의 삽을 섞어 놓는다. aequo pulsat pede pauperum tabernas, Regumque turres-즉 죽음은 같은 걸음으로, 공평한 운명으로 오막살이를 노크하듯 왕궁을 노크한다.
2. 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직 죄인들이 번창하는 때, 독실한 사람들을 먼저 세상에서 불러 가신다. 그의 불행을 빠르게 마감하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다른 피난처나 쉴 곳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자가 쉼을 구하는 무덤 속에" 그는 "숨은 것이다."
3.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사로의 매장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다.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어떤 의식도 없이 시신을 집어쳐 넣었을 것이다. 그는 "짐승의 시체처럼 땅 속에 묻혔다." 아니 개가 상처를 핥도록 내버려두었던 그들이니 그들의 개가 그의 뼈를 뜯지 않도록 땅에 묻기라도 했다면 큰 호의를 베푼 것이라고 간주해야 하리라.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가졌다. 유해가 정장으로 안치되고, 무덤까지 애도객이 줄을 지으며 묘 비석이 세워졌다. 아마도 그와 그의 관대한 인생, 그가 차려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칭찬하던 좋은 연회등을 찬양하는 연설도 행해졌을 것이었다. 악한 자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수고도 없이 "무덤으로 메어가고," 가능하다면, "골짜기의 흙덩어리를 달게 여기게" 된다고 말해진다(욥 21:32, 33). 장례식이란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4.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의 호위를 받고 천사들 가운데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렇게도 크고 장엄한 의식으로 무덤에 들어간 부자의 영광을 능가하고 그 영혼에는 얼마나 큰 영예인가! 고찰해 보자.
(1) 그의 영혼은 몸과는 떨어진 상태에서 존재했다. 영혼은 "죽지" 않았고, 즉 몸과 함께 "잠든다." 그의 영혼의 촛불은 그와 함께 꺼지지 않았고, 살아 움직이며, 무엇이 되어지며 어떻게 되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2) 그의 영혼은 내세에로 즉 영들의 세계로 옮겨갔다.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옮겨졌다"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인간의 영은 위로 향해 올라간다.
(3) 천사들은 영혼을 보살폈다. 영혼은 "천사들에 의해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받을 자들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에 그들을 지도하는 영이다. 또한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로의 여행을 "손으로 잘 보살피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또 미지의 안전치 못한 땅에서 안내와 보호자가 된다. 사람의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영혼과는 달리 이 땅에 얽매여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의해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자신 탄력이 있는 덕성을 가져서, 그것으로 인해 육체를 벗어나자마자 곧 "하늘로 솟구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시고, 그러기에 그들을 자신에게는 데리고 올 특별한 사자를 보내시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천사라도 충분할 것 같지만 그러나 엘리야에게 많은 천사를 보내셨듯이 많은 천사를 보내신다. 애굽의 왕 그의 마차를 왕들로 끌게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영광이 되는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힘입어 하늘로 오른다. 거기에 천사들이 호위를 함으로 더욱 위엄과 예절이 따른다. 성도들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오게 되는 것이다. 부자의 상여를 메고 나갔던 상여꾼들은 아마도 일류급의 사람들이었겠지만 나사로의 상여를 운반한 사람들과 비길 수 있을까? 천사들은 누더기진 상처가 "몸"에 있다고 해서 나사로의 몸을 만지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혼"을 꺼려하지도 않았다. 그 "영혼"은 "흠 없고 점 없이 다른 아무 이상 없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었다. 한 선한 사람은 죽으면서 말했다. "자 축복의 천사여, 이제 오시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행하시오."
(4)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유대인들은 의인이 죽어 누리는 행복을 세 가지고 표현했다. 즉, "에덴 동산으로 간다." "영광의 보좌 아래 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다." 세 번째 것이 예수님께서 이 얘기에 사용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의 영혼은 그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비로운 아버지같이 그 영혼들을 "품에 안는다." 또한 그는 그들이 첫 번 나아옴을 환영하며, 이 세상의 슬픔과 피로로부터 나아오는 사람들을 깨끗이 씻겨 주신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옮겨졌다.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손님은 잔치에서 다른 사람의 가슴에 기대는 것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의 성도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한자리에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한 사람이었으나 불쌍한 나사로를 가슴에 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부한 성도나 가난한 성도나 같이 만난다. 이 불쌍한 나사로는, 땅 위의 부잣집에선 문간 안에도 못 들어갔으나 하늘의 궁전에서는 거실 침실로 안내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뉘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개의 무리와 함께 처해 있으라고" 부자들로부터 꾸중듣던 사람이었다.
5. "부자가 죽고 매장된 후" 그에 대한 다음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
(1) 부자는 처지는 이제 매우 비참하다. 분리되어진 영혼들의 상태로 "그는 지옥에 떨어졌고 즉 하데스에 있다." 거기서 그는 "극심한 불행"과 "극도의 고뇌"에 처해 있다. 신실한 영혼들이 "육체의 짐을 벗어놓자마자 곧 환희와 경사스러움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사악하고 깨끗이 못한 영혼들은 죽음으로 육체의 쾌락에서 떨어지자마자 곧 끝없고 치료 불가능한 비참과 고통에고 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그들의 비참과 고통은 그들의 부활시에는 더욱 증가되고 가장 극도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이 "부자"는 완전히 그 자신을 세상 쾌락에 바쳤고, 온통 그것으로 "채웠으며," 자기 몫을 그것들로 "탕진해 버렸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영적인 세계"의 즐거움엔 부적당했다. 부자의 마음과 같은 속세적인 마음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즐거움이 될 수 없었으며, 아무런 맛도 볼 수가 없고 따라서 전적으로 그런 것들과는 무관했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정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는 단절된 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이 없는 엄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에 즐기던 것들을 상실한다는 벌"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벌"까지 받게 되었다.
(2) 그의 비참은 나사로가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더욱 가중되어졌다. 그는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고통 중에 있는" 것은 그 영혼이었다. 또 들려진 것은 마음의 눈이었다. 그는 이제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니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생시에 보듯 확실히 분명하게 쳐다보았다. 저주받은 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은 이미 본적이 있다(13:28). "너희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쫓겨나리라."
[1] 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멀리서 본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의 가까이에는 악마와 저주받은 동료들과, 무시무시한 광경,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멀리 아브라함을 쳐다본 것이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을 더하는 것뿐임을 명심하자.
[2] 그는 "아브라함 품의 나사로를" 보았다. 그가 그렇게도 꾸짖고 멸시했으며 쳐다 볼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던 바로 그 나사로가, 천국에서 우대 받고 이제는 시새움을 받게 된 것이다. 나사로를 쳐다보자 그의 마음엔 과거에 그를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대했던 행동이 생각났고, 나사로가 행복에 처한 것을 보게 되자, 자기의 불행이 더욱 통렬해짐을 느꼈다.
Ⅲ.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 간 얘기. 이것은 부자와 아브라함이 떨어져 있으며 동시에 이 둘은 이 현세에세도 떨어져 있다. 영광의 성도와 저주받은 죄인 사이에 어떤 대화나 대담이 있지도 않고, 있을 것도 아니지만, 이 양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하는 대화로, 특별히 애처롭게 보이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을, 여기서처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또한 "어린 양 앞에서"(계 14:10) 고통받는 죄인들을 보았고, "벌레가 죽지 않는"(사 66:23) 곳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언약을 범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이 같은 대화는 그렇게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안들 것이다. 이제는 그 대화를 살펴보자.
1.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고통을 감해달라고 애원함(24절). 아브라함을 멀리 보자 "그는 외쳤다." 큰 소리로 불렀다. 아주 급한 경우에 있거나 고통과 아픔 중에 있는 사람이 비명과 함께 청원하여, 등정을 억지로 자아내는 것처럼 소리쳤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자가 이제는 큰 소리로, 나사로가 문간에서 하던 것보다 더 큰 소리로, "구걸하게" 된 것이다. 술 먹고 떠들며 흥청대던 때의 노래가 이제는 모두 슬픈 탄식으로 변했다. 여기서 살펴보자.
(1) 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며, 육체로 보아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들일 지옥에는 많다. 또 이름과 입으로만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마도 이 부자는 그의 현세적인 환락에 처해 있었을 때는 아브라함과 그 얘기를 우습게 생각하고 놀렸을 것이다. 마치 후세에 종교를 경멸하던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께 존경의 칭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가벼이 보지만, 억지로라도 그들을 가까이하고 친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날이 옴을 명심하자. 여기서의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심판이 위임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지금 가볍게 보는 자들은 얼마 안 있어 그분께 "주여 주여"하고 하소연할 것이다.
(2) 그의 현재의 통탄할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함. "내가 불꽃 가운데에서 고민하나이다." 그가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은 영혼의 고민이었다. 불꽃이 곧 가책 받는 양심에 달라붙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마음의 무서움의 불꽃이 그의 영혼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불꽃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육신에 더욱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주받은 영혼의 비참과 고뇌는 표현된다.
(3) 이 비참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요청함.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것을 열심히 청할 그날이 옴을 명심하자. 오! "자비를! 자비를!" 하고 긍휼히 여기는 시대가 끝나면 부르짖겠지만, 더 이상 긍휼은 베풀어지지 않는다.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나사로가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한다. 그가 그런 긍휼을 바란 이유는 "나사로가 자기보다 좋은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구걸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1] 여기서 그는 특별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한다. 마치 다른 어느 몸의 부분보다 죄에 보응하는 벌로써 특별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고통 당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항해서 말하고, 저주와 맹세와 하나님 모독과 모든 "각박한 말들" "불결한 말들"을 했던 그 말들을 생각나게 된다. 이제 그의 말들에 의해서 "그는 저주받고," 따라서 그의 혀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혀는 "맛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혀를 고통 당하면 그것으로 육욕의 즐김의 무질서한 기호를 생각할 것이다. 과거에 그것을 "혀 밑에서 굴렸었다."
[2] 그는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원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나사로가 누워있는 당신의 품으로 보내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하늘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도 없다. 또한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이 비참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 나를 이 구덩이에서 꺼내 주소서"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상황에 "완전히 절망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그의 혀를 잠시라도 식혀 줄 "한 방울의 물"을 요구했다.
[3] 그는 물을 나사로가 가져오기를 바랐다. 나는 때때로 그가 여기서 나사로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만약에 나사로가 손에 닿을 수 있 곳에 다다르면, 다시는 아브라함의 품에 못들어 가도록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분노를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도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받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비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부자는 나사로를 존경함을 보여 주기 위해 즉 나사로를 기쁨으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이러한 요청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부자는 나사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부자는 그를 "알았고," 나사로가 구면인 자기를 위해서 이 선한 일을 기꺼이 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서 악한 영혼들의 고통을 묘사하는 플라톤(Platon)의 말을 인용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살인했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 해달라고"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찾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그들로부터의 친절을 기쁘게 받을 날이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2. 이 요청에 아브라함이 준 응답. 간단히 말해서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부자의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지옥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어떤 조그마한 형벌의 감소나 경감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어진 기회의 날을 잘 이용하면, 자비로운 주님께로부터 충만하고 영속하는 만족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주어진 것을 가벼이 여기면, 지옥에 떨어져 한 방울의 물을 기대해도 헛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이 부자는 자업자득하는가를 보자. 부스러기 하나를 거절한 그는 한 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하라. 구할 것이요"를 생각나게 한다. 만약 우리가 때를 다 지난 다음에, 구한다면 그때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단지, 좀 안 되긴 했지만 "네 고통을 경감해 줄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거기에다가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이 되겠지만 고통을 더하게 하고, 불꽃을 더 뜨겁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다.
(1) 그는 부자를 친절하고 예절 있는 명칭으로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선 단지 그의 요구를 거절하는 정도를 크게 하는 것뿐이다. 즉 그로부터 아버지의 연민의 정을 막아 버린다. 부자는 전에는 아들이었으나 반역적이었다. 이제는 내버려져 의절되어진 자식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라고 "간청"하는 것에 의지를 두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잘 보살피자. 우리가 지옥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리고 영원히 거기서 있을 것같이 보이는 사람을 아브라함은 "아들"이라고 부른다.
(2) 그는 부자에게 그들이 "살았을 때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상기시킨다. "아들아,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참으로 가시같이 찌르는 말이다. 저주받은 영혼의 기억은 이제는 의식에 고문을 가할 것이며, 양심은 깨어 일어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죄인들은 그것을 참지 못한다. "아들아, 생각해 보아라"는 말은 부자에게 있어서 가뜩이나 굉장한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죄인들에게 "기억할 것"이 요청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하려하지도 않는다. 다만 피할 길만 찾는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를, 구원주를, 기억하여라. 너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아라"는 말씀이 지금도 울리고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 수 있는 일도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결국 영원히 계속되는 비참한 지경에서 "아들아 기억해 보아라" 하는 말소리를 또 듣게 되며 그때는 그 말을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귀에 이러한 소리가 들릴 때, 얼마나 무서운 울림이 될 것인가. "아들아 기억해 보아라. 네가 이런 곳에 오지 말도록 수많은 교훈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명심하도록 얘기되어진 것은 다음과 같다.
[1]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가 아니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나를 기억해 보아라. 얼마나 너에게 선을 베푸시기를 즐겨하셨나를 생각해 보아라.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니 물 한 방울이라도 빚진 게 전부이다. 너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받았다는 영수증도 드리지 않았고, 그것들을 인하여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감사의 보답이나 진보시키려는 노력은 더욱 없었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이 묻혀져 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뿌려져도 수확이 없는 들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너는 그것들을 받아서 마치 그것이 네 것인 양 써버렸다." 너는 그것들에 대해서 전혀 책임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써, 네가 선택하여 사용하는 필수품이었다. 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가장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이 모든 것들이 네가 행복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너의 상이요, 위안이요," 네가 "동의하여 바란" "상급"이었다. 너는 그것들을 가졌었다. 너는 "살아 있었을 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생에서 더 좋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너의 "좋은" 때는 다 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너의 "악한 것들의" 때, 네가 행한 악한 행위의 보상의 때인 것이다. 네가 너에게 주어지도록 바랄 수 있는 "자비의 잔에서 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이미 마셔버렸고 오직 남은 것은 단지 순수한 그대로의 진노의 잔"뿐인 것이다.
[2] "나사로가 받은 고난을 기억해 보아라. 너는 지금 그를 부러워하고 있으나 그가 살았을 때에 받은 불행과 비참의 양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네 악한 것에 비하여 지나치리 만큼 최대의 좋은 것을 가졌었고, 그는 선한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는 최악의 것들을 가졌었다. 그는 좋지 못한 것들을 받았다. 그는 인내로 그것들을 참고, 욥과 같이[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은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약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약은 효력을 발생했다." 악한 사람들은 이 생에서 단지 "좋은 것들"만을 가지고 있다가, 죽을 때는 그 좋은 것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신실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단지 악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그것들과는 영원히 관계없게 된다. 이것들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킴으로 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깨워서 그가 "좋은 것"을 즐기고 나사로가 "나쁜 것"에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나를 기억나게 한다. 그래서 그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나사로가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당시 만년에 나사로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해졌더라면, 나사로는 부자를 구원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그는 전에 불친절을 가지고 지금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상과 보복의 미래의 그날에는, 지금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받을 만한 이상으로 좋게 대접받는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보답 받을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3)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을 인식시킨다. "그러나 지금은" 상은 바뀌어졌고 이제는 그렇게 영원히 살아야 한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절). 부자는 "고민을 받는다"는 것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당연한 값으로 여기고 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품안에 있는 나사로가 그렇게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를 다른 하나와 비교하여서, 부자가 "하나님의 의로우심," 즉 "그의 백성을 고생시키는 사람들에게 벌"을, "고생 받는 사람에게는 쉼"을 주시는 그것을 알아차리게 한다(살후 1:6, 7). 다음을 자세히 살펴보자.
[1] 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요, 지옥은 "통곡"이요, 완벽한 아픔이다.
[2] 영혼은 육신을 떠나자마자 천국이나 지옥으로, 위로 받든지 아니면 고통받으러 즉시 떠나게 된다. 잠을 자거나 연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3] 천국은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은총 속에 살던 사람에게는 그리 위로가 크지 않을 것이다(아마도 그들의 영혼은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잠들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제 그들은 위로를 받는다.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어지고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고 할 것이다. 천국엔 영원한 위안이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 연락과 쾌락을 즐기다 가는 사람에게는 진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통은 더욱 크고 마치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아니하던"(신 28:56) 자에게 닥치는 덧없는 재앙과 같을 것이다.
(4)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임을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26절) "이뿐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다." 건널 수 없는 "큰 균열이" 있기 때문에, 영광의 성도와 저주받은 죄인 사이엔 연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 천국은 가장 친절한 성도라도 한 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죽어 저주받은 무리에게로 방문할 수가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여도 할 수 없다(26절). 너에게 물을 날라주기 위해 아버지의 영광을 얼굴을 늘 쳐다보는 것을 그만 둘 수 없고, 보좌를 위한 일을 쉴 수 없다. 그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닌 것이다."
[2] 지옥의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도 그 옥(獄)을 힘으로 벗어날 수는 없으며, 그 큰 구렁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자비의 문은 닫혔고 그 다리도 거두어졌기에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또한 집행 유예나 보석 석방으로 출감하는 것도 없다. 아니 단 한 시간도 안 된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엔 틈이 없어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서 죽으면, 파멸의 구렁텅이에 스스로 빠지고 다시는 나올 수 없다. 그곳은 "마실 물도 없고" 또한 "거기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령과 계획은 이 구렁을 고정시켜 놓아, 아무도 그것을 메울 수 없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절망에 처하게 한다. 또한 그의 상태의 여하한 변화나, 최소한의 구제도 때가 늦었다. 그러한 구제는 "이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게 되었다. 저주받은 죄인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선언에 의해 묶여버린 것이다. 다시는 굴려낼 수 없는 하나의 돌이 구렁이의 문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3.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행한 다른 요청. 그는 입이 막혔다. 아브라함이 물 한 방울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들이 받은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을 대항해서 항의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비참을 가볍게 할 수 없다. 그가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하기를 "목말라 혀를 깨물었을" 것으로 안다. 마치 하나님의 분노의 "잔"이 쏟아진 것처럼(계 16:10), 우리가 지금 상상하기로는 그가 발했을 비명과 외침은 무시무시했으리라. 그러나 말할 기회가 있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친척들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자 이것을 살펴보자.
(1) 그는 나사로가 심부름으로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지기"를 간청한다. "아버지여 그러면 구합니다"(27절). 그는 아버지를 다시 불러서 아주 끈질기게 요청한다. "간청하오니 이 일은 거절하지 마소서." 그가 땅 위에 살 때는 간청하면 응낙받았을 것이나, 지금은 헛일이다. "처음 요청한 것은 거절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만은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동정심이 많을 줄 확신합니다." 즉 "여기엔 큰 구렁이 끼어있어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으니, 그러므로 나사로를 보내어 그들이 여기로 오지 못하도록 하소서." 바꾸어 말하면 "당신들과 나 사이엔 큰 구렁이 있지만, 당신들과 그들 사이엔 그런 구렁이 없으니 나사로를 그리로 보내소서. 나사로를 나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소서. 그는 예전에 거기 여러 번 있었고, 거기서 상부스러기를 여러 번 거절당했었기 때문에, 집에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압니다. 나사로는 내가 거기 다섯 형제를 둔 것을 알고, 그가 나타내면 그 형제들은 나사로를 알 것입니다. 또 그가 정직한 사람인줄 알기에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소. 내가 어떤 처지에 있고, 사치와 육욕으로 스스로를 이런 처지에 전락하도록 만들었고, 가난한 이에게 무심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알려 주게 하소서. 그들은 내 전철을 따르지 않고, 내가 가는 길도 따라오지 않으며,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도록 그런 것들을 떠나도록 일러주게 하소서(28절).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다섯 형제"만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자식이 없음"을 추측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식들에 대하여 언급했을 것이다. 그가 부양할 자식까지 두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몰인정한 자인가 함을 실감하게 된다. 이제 부자는 자기 형제들의 죄된 생활을 고쳐 주려 한다.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 주소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이에 "큰 구렁"이 있음을 안다. 또 그에게 그처럼 좋은 허락이 내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 수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얘기는 덜 무섭겠으나, 그러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킬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또한 그는 그들의 성미, 유혹, 무식, 불(不)신앙, 무사려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달려나가고 있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을 건져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에게 그 "고통의 현장"에 온다면, 그들을 그곳으로 오도록 가르쳐 준 사람이 자기인데 나사로를 보았을 때 더욱 큰 괴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들을 본다면 더욱 괴로움이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죄짓는 동무와 함께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한 다발에 묶여 불에 던지운 독초들처럼, 그들은 서로 서로 불행이 된다.
(2) 아브라함은 이 호의도 역시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허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올린 부자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그런 자들은 부자의 기도가 헛되이 끝나고 만 것을 본삼아 그 같은 기도를 하지 말도록 해야 하리라.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그것이 일반적인 신복과 회개의 수단인 것이다. 그들은 쓰여진 말씀인 성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고 듣는다. "그들로 예언의 그 확실한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하여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평범한 은혜의 방법을 거부하시지 않을 것이다"고 아브라함은 말한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인데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로 신앙을 삼고, 그것이 그들을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 않게 막는 데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구약 성서의 모세 율법서와 "예언서"에, 이 세상이 가면 다음 세상이 있고, 선악간에 상벌이 있다는 상태가 있다는 것을 공평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확신시키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로 이것이 부자가 형제들에게 확신시켜 주어야 할 것이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모세의 선지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3) 그는 요청을 더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얘기하게 하소서.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충분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고, 그리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 하리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에 익숙해 왔기에 별로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것이요,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그들을 회개시킬 것이며, 악한 습관과 잘못된 생활을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자.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뽑으셔서 인정하신 것보다는 다른 확신의 방법을 더 낫게 생각하기가 쉽다.
(4) 아브라함은 결론적인 이유로써 이것을 부인하심을 계속 주장하신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주는 증거와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공적인 계시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적인 증거도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할 것이다."
[1] 시련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오는 사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얘기하신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증거한다 할지라도, 성서에 있는 이상으로 말할 수 없고, 또 그 이상 권위를 가질 수도 없다.
[3] 성경을 의심한다면, 하물며 모든 일에 속이고 기만당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바 이유가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경우를 의심하는 사람은 다른 경우도 분명히 그렇다.
[4]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함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증거를 듣는 사람도 분명히 부셔뜨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죄인이 그러한 증언에 처음엔 놀랄지라도 그 놀람이 가라앉으면, 그는 곧 더욱 굳어진 마음이 될 것이다.
[5] 성서는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한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다른 어떤 길을 요청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요청한 것이 거절되고 젖혀놓아진다 해도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길을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거나 기대할 근거도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 구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안에서 곧 증명되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다음에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어도"(아마도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나사로를 부르신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모의했었고, 그를 살린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어도" 절대로 그에게 설득 당하지도 않았다. 유두고가 살게 되었을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었지 그를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행 20:10, 11). 그러므로 우리는 환상과 귀신을 바라지 말자. 또한 "죽은 자"도 찾지 말자. 다만 "율법과 증언"만 구하자(사 8:19, 20). 그것만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