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오고 있다. 끈질기게 버티던 밤나무잎도 갈색으로 물들었다. 오솔길은 가랑잎으로 뒤덮였다. 단풍진 나무들로 그득한 앞산도 비에 젖으니 저 함경도의 산만큼 문득 낯설어진다. 가을도 끝나가는가. 밤에 나와보니 마른 풀들이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바람과 놀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늦은 밤까지 읽다가 새벽에 일어나 다시 읽는다.
탐서주의자의 책, 나의 천년,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여행의 기술,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 순간 속에 영원을 담는다, 노자의 마음으로 도덕경을 읽다, 강석경의 경주산책,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사유의 공간, 잔혹한 책읽기, 행동과 사유, 그 남자네 집, 조연현 비극적 세계관과 파시즘 사이, 감각의 박물학, 마쿠라노소시, 기학의 모험 1, 2, 문자제국쇠망약사......
이 중에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두번째 읽고, 미쿠라노소시는 읽고 좋아서 여러번 다시 읽는다. 읽을 때마다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감각의 박물학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 명쾌함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에밀 시오랑은 귀여운 니체다. 염세주의자 안에는 힘없는 선량함과 굶주린 사악함이 결탁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에밀 시오랑이 귀엽지 않은가 ?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우상들을 파괴하고 그 잔해를 추종한다. 이 대목에서 어떻게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인간에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냉소주의는 종교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 그래, 에밀 시오랑은 뒤집어 읽기의 명수다. 동물이 정상 상태에서 약간 벗어나면 인간과 비슷해지기 시작한다. 성난 개나 힘 빠진 개를 보라. 하하하하...... 이미 20대에 쓴 책에서 삶에 진절머리를 치며 사람들이 왜 자살하지 않고 이 지루한 삶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가에 의문을 던졌던, 그래서 저는 곧 내일 죽을 것처럼 말하던 루마니아 철학자는 여든을 넘겨 4년을 더 살고 1995년 6월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죽었다. 자연이 그에게 준 수명을 다 누리고 간 것이다. 어쩌면 시오랑의 글을 읽고 염세주의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로 씌어진 것이라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순진한 것이다. 역설을 모르는 바보들을 희롱하는 사내. 주님, 당신 없이 나는 정신병자입니다. 당신과 함께 나는 더 심한 정신병자입니다. 그의 철학에 깊이가 없는 것은 그가 깊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깊이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게 에밀 시오랑이다. 아마 내일쯤 다시 온라인서점에 주문한 책이 또 도착할 것이다. 그 책 10권이 내 며칠을 풍요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