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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2주_내 일을 마치리라.
누가복음 13:31-35
31. 바로 그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자
32. 예수께서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여라.
3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35.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사순절(四旬節, Lent)은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일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정비하는 시간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죽음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40일간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죠. 부활절 46일 전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에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인 성 토요일(Holy Saturday)에 끝나죠. 총 46일이지만, 일요일은 부활을 축하하는 날로 제외해 40일을 기간으로 삼습니다. 40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과 시험, 모세의 시내산에서의 2차례 금식과 1번의 중보기도(각 40일씩), 엘리야의 소명(호렙산 40일) 등의 상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기간 동안 신자들은 회개와 기도, 금식, 선행을 통해 영적 성장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순절 둘째 주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본문이죠. 그 내용을 살펴볼까요.
<어느 날 오후, 예루살렘 근처의 한 마을에서 있던 일입니다. 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광장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두 서기관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염려와 초조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선생님, 서둘러 이곳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한 서기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습니다. "헤롯이 선생님을 죽이려 합니다.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며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 여우에게 전하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든 이를 고치고, 제삼일에는 내 일을 완성하리라. 분명히 알라.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은 내가 길을 떠나야 하니, 어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겠느냐?"
예수님의 목소리엔 결의가 가득했지만, 이내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눈빛에는 슬픔이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그분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늘에서 보낸 이를 돌로 치는 자들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 내가 너희 자녀들을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치 않았도다." 예수님의 손이 떨렸습니다. "보라, 너희의 집이 황폐하게 버려지리라. 너희가 말할 때까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이 있도다' 하고 외칠 그때까지,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돌아서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분의 마음은 오직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는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정에 잠겼고, 광장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눈물이 공기 속에 맴돌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날 예루살렘 근처의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유월절을 맞아 성전 순례를 목적으로 갈릴리에서 유대 지경으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죠. 예루살렘 근처에서도 그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늘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를 목도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성전 제사장들은 혹시 폭동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배 카르텔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들과 로마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웠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예수의 일행을 유대 지경 밖으로 쫓아내려 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을 시켜 예수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하며 협박을 합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고 그가 예수를 죽이려 하니 빨리 유대지경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꾸민 일입니다..
BC. 4년 헤롯 대왕이 죽자 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들이 분할 통치를 하게 됩니다. 헤롯 대왕의 유언장에는 왕국의 대부분은 장남인 아켈라오에게, 그리고 변방은 안티파스와 빌립에게 몇개의 도시는 딸 살로메에게 준다고 되어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신의 계승자로 큰아들인 아켈라오를 지명한 것입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영토인 유대(예루살렘 포함)와 사마리아, 이두메를 영지로 받았습니다. 아켈라오가 왕위 계승을 위해 로마로 떠나려 할 때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폭동이 일어납니다. 아켈라오는 폭동을 진압하며 3천여 명의 유대인을 죽입니다. 이렇게 임기를 시작한 아켈라오를 반대하는 운동은 계속되었고 잔인한 진압은 더 큰 폭동을 불러일으켰죠. 재능도 없이 아버지의 악한 성품만 물려받은 아켈라오는 자기 영지의 거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결국 로마가 개입하게 되고, 시리아 총독 바루스가 들어와 폭동을 진압합니다. 아켈라오는 A.D. 6년에 폐위되었고 이후 로마는 빌라도를 보내 유대를 직접 통치하게 되죠.
오늘의 조연인 헤롯 안티파스(BC.20 ~ AD.39)는 갈릴리와 뵈뢰아를 영지로 받은 분봉왕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후 갈릴리에서 발생한 오순절 반란을 제압했고,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며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도시는 갈릴리의 수도인 디베랴였습니다.
안티파스는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와 결혼 했으나 이혼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죠. 헤로디아는 유대 정통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아버지처럼 유대인과 결혼을 통해 신분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지만 나중에 파멸의 원인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 결혼에 대해 비판했고 이에 분노한 안티파스는 요한을 붙잡아 처형하죠(마 14:1-12). 유대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사건은 안티파스를 악명 높은 통치자로 만들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죽인 진짜 이유는 요한의 민중들에 대한 영향력이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안티파스의 말년은 비참하게 끝나죠. 헤로디아와의 재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러운 이혼에 분노한 전처의 아버지 아레타스 4세가 쳐들어옵니다(AD. 37년), 안티파스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사이가 나빴던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시간을 끄는 바람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칼리굴라가 로마 황제로 즉위한 뒤, 안티파스는 반역죄로 왕위에서 쫓겨나, 헤로디아와 함께 유배지 갈리아에서 숨을 거둡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사역도 갈릴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두드러지자, 헤롯 안티파스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그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자신이 처형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마태복음 11:11)고 칭찬하고 높이셨기에 적대감이 더 생겼을 것입니다. 아니 안티파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마다 혹시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은 아닐까 착각했을 정도로 혼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 안티파스는 누가 복음서에도 등장하는데 예수의 수난과 재판에 관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붙잡혀 수난을 받을 당시 안티파스는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죠. 빌라도는 체포되어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를 관할 분봉왕인 안티파스에게 보내어 재판을 받게 합니다. 안티파스는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전부터 듣고 있어서 예수를 만나자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요구하죠. 하지만 예수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안티파스는 그를 조롱하며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에도 안티피스의 행적이 나옵니다. 베드로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명령은 빌라도가 아닌 헤롯이 내린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와는 달리 '손 씻기'를 거부한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 상황을 핑계로 예루살렘의 지배 카르텔은 매우 위험해 보이는 예수님과 일행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으로 쫓아 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살펴볼까요?
먼저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규정하며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전하라 하십니다(32절). 이스라엘에서 ‘여우’라는 표현은 교활함과 속임수의 상징으로, 지도자나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가 사용한 여우란 용어는 당시 안티파스를 지칭하는 호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평생을 로마 제국에 아부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던 그의 교활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한 어조로 안티피스를 조롱하며 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역을 계속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3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과 해방 사역의 완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주 우리 국민들은 또다시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3월 8일 내란수괴 윤석열이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법을 명백히 위반하고 구속취소 인용을 결정한 지귀연 판사와 즉시항고 하라고 요구한 판시에도 불구하고 블법적으로 석방 지휘를 한 심우정 검찰총장의 자의적 소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구속취소 사태는 판사와 검사 두 명의 불법적인 ‘윤석열 탈옥 방조’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윤석열 구속 취소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고, 법원행정처장의 즉시항고 할 수 있다는 권고에도 검찰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법 집행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만을 위해 작동하는 봉건 왕조시대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석열 통치 3년간의 기간은 우리나라에 극우 파시즘을 이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파시즘은 언제나 국가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무제한 힘을 부여하고, 노동자나 사회적 소수자, 외국인 등 약자들의 기본권은 완전히 박탈하는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불법적인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윤정권은 생명경시, 언론장악, 노동자 탄압, 친일, 친미 사대 외교,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한 정책 시행, 부자 감세, 민생파탄과 경제위기 초래, 헌법 무시 등 온갖 해괴한 일들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불법무도의 최고봉은 비상계엄 선포와 내란이었습니다.
이 내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윤석열이 심어 놓은 행정, 입법, 사법부의 극우 인사들, 아니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100년 넘게 깊숙이 자리 잡은 이 나라 기득권 카르텔들이 내란 진압을 가로막고 제2의 내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중심에는 일제에 부역하고 해방 후 미군정에 달라붙어 호의호식한 극우 기독교 세력이 있습니다.
윤석열 탄핵소추 선고를 앞두고 극우 내란 세력들은 헌법재판소에 대한 협박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뱉는 말을 들어볼까요?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을 강행한다면 산산조각 날 것(손현보)", ”헌법재판관을 처단하라(김용현)“ ”탄핵소추를 인용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황교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서부지법, 헌법재판소 판사들 모두 야당에 장악돼 야당의 지시를 받는 느낌이 든다(전한길)”, "이 시간부로 국민저항권이 완성이 됐습니다. 저항권은 헌법 위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판사 검사들이요. 야 이 개XX들아. 공수처 너희들 용서 못 해. 헌법재판소를 지금부터 해체하겠습니다". 이 말은 사탄에게 포획된 전광훈이 3.1절에 한 개소리입니다.
예수시대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BC. 63년,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이스라엘은 주권을 상실합니다. 로마는 대리인으로 헤롯대왕을 임명하여 간접 통치를 하였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는 로마의 식민지가 된 지 거의 100년 가까이 된 시기였습니다. 그 1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상층부는 로마 부역자들로 가득 채워졌고, 그들은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을 만들어 백성들을 수탈하고 민족 운동가들을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중들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우리 민족과 비슷한 성향인지, 각성한 민중들은 그런 체제와 정권을 향해 끝없이 항거했죠. 하느님의 통치, 공의와 정의가 회복된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메시아를 대망하며 싸웠던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싸움에 나섰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르침과 행동에 열광하였습니다. 기득권 카르텔은 예수를 자신들을 위협하는 공적으로 여기고 그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알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군중들을 향해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그의 사역이 민중들의 억압된 삶을 해방하고 구원하는 것이며, 곧 완성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부활(눅 24:7)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고난과 십자가,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해질 운명을 생각하여 탄식합니다. 34, 35절의 기록은 그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다가올 미래 모든 피조물이 해방과 구원을 이루게 될 희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올 때까지 너희는 정녕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란 표현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고, ‘너희 성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란 말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하는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의 재림 때 완성될 구원을 암시합니다. ‘찬미받으소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때 그를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말입니다.
어제 광화문에는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100만 시민들의 응원봉 집회가 있었습니다. 윤석열 석방으로 분노한 국민들이 결연한 의지를 모아준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파면 결정이 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우리 국민들은 늦어지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내란사태는 윤석열 파면으로 1차 정리가 되어야 함에도 극우 폭도들의 저항으로 늦어지고 있습니다. 절차상 문제를 없애려고 한다지만 헌재는 국민의 준엄한 의사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하신 선언처럼 우리는 윤석열 파면과 내 세력의 완전 진압의 그날까지 우리의 일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 철산역에서 윤석열 파면을 축하하는 집회를 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새하늘 새땅, 새날을 꿈꾸는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그 길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