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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보건대학교 간호학과 명상학 강의자료 - 4
2013년 9월 23일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곽 준(묘원)
E-mail : vipassana-@hanmail.net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http://blog.daum.net/ehipassiko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차례
1. 명상의 세 가지 조건
2.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五根]
3. 알아차림
4. 분명한 앎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
1. 명상의 세 가지 조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에서 마음은 아는 마음이고, 무엇은 대상이고, 어떻게는 알아차림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의 요소가 갖추어져야 명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명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대상입니다. 대상이란 무엇을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대상이 없다면 구체적 목표가 없어서 마음이 방황을 합니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마음뿐만 아니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도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없으면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상의 출발은 알아차릴 대상이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여러 가지의 관념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과 마음의 실재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때의 대상을 법(法)이라고 합니다. 법(法)을 담마(dhamma)라고 하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로 법은 마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법이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두 번째로 법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성제와 함께 존재하는 것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말합니다. 수행자는 처음에 대상의 법을 알아차리다가 지혜가 나면 진리의 법을 발견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기능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있을 때 마음이 없으면 대상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아는 마음은 정신과 물질 중에서 정신에 해당됩니다. 또 아는 마음은 오온(五蘊)의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중에서 식온에 해당합니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이 몸을 알아차리고 다시 마음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이 외부에서 부딪쳐오는 감각대상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오직 한순간에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마음이 있어서 대상을 아는데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마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이끌지만 정작 모든 것을 이끄는 마음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 단지 보이는 대상만 표현하지 이것을 보는 마음은 표현이 생략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본다’라는 말을 정확히 표현하면 ‘대상을 보고 안다’입니다. 이때의 안다가 아는 마음이 있어서 대상을 보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리를 들을 때도 일반적으로 듣는다는 것만 말합니다. 그러나 ‘듣는다’는 말을 정확히 표현하면 ‘듣고 안다’입니다. 이때의 안다가 아는 마음이 있어서 소리를 듣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냄새나 맛이나 몸의 접촉도 모두 대상을 아는 마음이 있어서 아는 것입니다.
명상의 두 번째 조건인 ‘아는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때 아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대상과 아는 마음이라는 조건에 의해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건이 알게 하는 것이지 내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는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보는 것으로 그치고, 듣는 것으로 그치고, 냄새 맡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나 만약 보는 마음이 있고,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할 때는 평소의 아는 마음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그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상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아는 마음의 역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어야 명상의 조건이 성립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야 대상에 대해 시비와 분별이 생기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궁극의 행복을 얻습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모든 법을 앞에서 이끄는 지휘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법의 으뜸가는 요소입니다. 만약 알아차림이 없고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다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주의 깊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알아차림이 없다면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는 있지만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히 알아서 확실하게 아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때는 자신의 의지로 살기보다 살아 온 날들 동안에 생긴 축적된 성향으로 삽니다. 만약 이렇게만 산다면 괴로움뿐인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대상과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깨어서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대상을 무심히 지나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주의 깊게 알지 못합니다.
마치 기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듯이 모든 일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보다는 습관대로 살기 마련이라서 대상의 옳고 그름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관념으로 살기 때문에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이때 알아차림이란 각성된 행위가 있으면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하나 분명하게 알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수가 없고 그 결과로 지고의 행복을 얻습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 사이에 알아차림이란 행위가 있으면 집중이 되어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침투하지 못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인해 대상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계발됩니다. 지혜가 계발될 때만이 괴로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앞선 두 가지만으로는 명상이라고 할 수 없고 세 번째의 알아차림이 있어야 비로소 명상의 조건이 성립됩니다. 앞선 두 가지 조건은 무심히 사는 것이라서 괴로움이 있는 범부의 삶입니다. 마지막에 알아차림이 있는 세 가지 조건일 때 깨어서 아는 것이라서 괴로움이 없는 성자의 삶입니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할 때도 아는 마음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이때의 정확한 표현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안다’ 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아는 마음은 생략되고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알아차린다고 할 때의 알아차림이란 아는 마음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은 오온의 행(行)에 속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마음이 새로운 의도를 일으켜 깨어서 아는 행위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고 행위입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차림이란 행위와 아는 마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아는 마음은 항상 있지만 알아차림이라는 행위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차림이라는 행위를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명상이 어렵습니다. 명상은 앞선 두 가지 조건에 알아차림이란 행위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五根]
1) 오근의 기능
명상의 기본을 형성하는 세 가지 조건이 대상과 아는 마음과 알아차림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기능을 향상 시키는 다섯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을 오근(五根)이라고 하는데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지혜입니다. 명상은 오근이 바르게 기능을 하고 정상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첫째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정신적 기능은 바른 이해를 통해서 얻습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의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확립된 이해를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에 대한 탐구를 해야 비로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약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정신을 우매하게 하여 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 없게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하게 됩니다. 확신에 찬 믿음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명상은 의심에서 해방된 마음가짐으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만약 의심이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노력을 할 수 없으며 알아차리지 못해 집중의 고요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의심을 하면 불필요한 일에 마음을 빼앗겨 노력하는데 힘을 집중할 수 없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정신세계로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바른 이해를 하게 될 때 믿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믿음이어야 흔들림이 없이 굳건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수행을 해서 생긴 지혜가 함께 있을 때 더욱 확고해집니다. 수행은 몸과 마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동굴탐험입니다. 전혀 가보지 않은 위험한 동굴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지혜라는 등불이 앞에서 길을 밝혀주어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둘째가 노력입니다. 노력은 여러 가지 형태의 힘을 기울이는 정신적 기능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명상은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력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확신에 찬 믿음이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게으름이나 해이해진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나 기울임을 지속하는 것도 노력이고, 괴로움을 참는 것도 노력입니다. 이런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력이 없으면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아 명상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은 명상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노력에는 바는 노력과 바르지 않은 노력이 있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알아차림을 해야 바른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오근은 하나씩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가 연기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선 원인이 뒤를 이끌고 다시 뒤가 앞선 원인이 되어 하나의 완성된 구조를 형성합니다. 오근은 이런 유기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더 보태어 서로간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노력은 네 가지의 바른 노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하지 못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미 일어난 선하지 못한 것들이 사라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것들이 일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이미 일어난 선한 것들이 더욱 커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겨냥하는 정신적 기능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선입관 없이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하고, 노력을 해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오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 비로소 수행이 성립되므로 정신적 기능에서 알아차림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넷째가 집중입니다. 집중은 고요한 마음이 지속되는 정신적 기능입니다. 마음이 대상에 오래 머물면 고요함이 생겨 집중이 됩니다. 이런 집중의 힘에 의해 지혜가 계발됩니다. 집중이 되지 않은 들뜬 상태에서는 어떤 안정도 얻을 수 없고 지혜도 계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중은 지혜를 얻는 전단계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하는 행위는 알아차림이고 다음 행위는 알아차림을 지속시켜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모든 수행은 집중을 위해서 다양한 형태의 방편을 사용합니다.
집중은 수행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을 합니다. 이때의 목표는 오직 고요함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을 합니다. 이때의 목표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알아차림을 가지고 어떻게 집중하느냐에 따라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으로 구별합니다.
다섯째가 지혜입니다. 지혜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성품을 꿰뚫어보는 정신적 기능입니다. 어리석음은 모르는 마음이고 지혜는 아는 마음입니다. 어리석으면 모르기 때문에 집착을 하여 움켜쥐고 지혜가 나면 알기 때문에 집착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모든 번뇌를 끊는 특성이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수행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지혜가 해탈에 이르게 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난 지고의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지혜는 진리를 아는 마음인데 사성제의 진리와 무상, 고, 무아를 알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수행자가 믿음을 가지고 노력해서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생긴 지혜로 모든 욕망을 끊게 될 때 열반을 성취합니다.
앞에서 믿음이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을 하게 하면 마지막으로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는 이런 결과로 인해 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앞선 조건에 의해 오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먼저 수행의 조건을 충족시키면 자연스럽게 지혜라는 결과를 얻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지혜는 다시 믿음을 갖게 하여 더욱 오근을 계발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지혜가 앞에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근이 바르게 기능을 할 때 지혜가 생기고 이렇게 생긴 지혜는 다시 앞에서 믿음과 힘을 합쳐 수행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이 이끈다고 말합니다.
이상이 오근의 유기적 관계입니다. 다음에는 오근의 균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오근의 균형
다섯 가지의 정신적 기능은 원인과 결과로 상속되어 수행을 돕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합니다. 노력을 해야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집중이 됩니다. 집중이 되어야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가 생겨야 믿음과 결합하여 수행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것이 오근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러한 기능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근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근의 정신적 기능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알맞게 작용할 때만이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오근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좋은 것이 각각의 역할을 균형 있게 할 때만이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믿음도 적절해야 합니다. 믿음이 많으면 맹목적이고 부족하면 불신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많아 맹신에 빠지면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모든 것을 의심하여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노력도 적절해야 합니다. 노력이 많으면 들뜨고 부족하면 나태해집니다. 노력이 많아도 대상에 잡을 수 없고 부족해도 대상을 잡을 수 없습니다. 노력이 많으면 욕망으로 하기 때문에 이익이 없고 부족하면 게으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알아차림은 전에 해보지 않은 정신적 기능입니다. 알아차림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오근 중에서 유일하게 많을수록 좋습니다. 알아차림이 다섯 가지 기능을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게 합니다.
집중도 적절해야 합니다. 집중이 많으면 졸음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지고 부족하면 산만해집니다. 수행에서 집중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한쪽은 집중이고 한쪽은 졸음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노력과 알아차림입니다.
지혜도 적절해야 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간교해지고 부족하면 믿음이 없고 어리석어서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삿된 견해가 아닌 바른 지혜일 때만이 믿음을 갖게 하여 앞에서 수행을 이끕니다. 지혜가 없고 어리석으면 무상을 항상 하다고 알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고, 자아가 없는데 자아가 있다고 알고, 더러움을 깨끗하다고 봅니다. 이런 어리석음으로 인해 괴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이 각각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가 상대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믿음과 지혜가 짝이 되어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많으면 맹신을 하게 되고 지혜가 많으면 간교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많거나 적으면 지혜가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지혜가 많거나 적으면 믿음이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수행은 믿음과 지혜가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이끌 때 더 단단해집니다.
다시 노력과 집중이 짝이 되어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해야 합니다. 노력이 많으면 마음이 들뜨고, 집중이 많으면 졸음에 빠집니다. 그래서 노력이 많거나 적으면 집중이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집중이 많거나 적으면 노력이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수행은 노력과 집중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이끌 때 더 단단해 집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그룹의 네 가지 기능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중간에서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지휘자의 역할을 하므로 믿음과 지혜가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돕고 노력과 집중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명상에서 알아차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둡니다.
오근은 다섯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요소이지만 실제 수행을 할 때는 노력, 알아차림, 집중이란 세 가지가 항상 수행의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기능의 역할이 수행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바로 이 세 가지가 하는 것입니다. 오근에서 믿음은 앞에서 이끌고 지혜는 뒤따라 생긴 결과라서 실 수행에서는 직접적인 영향보다 간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 수행이 잘 되고 안 되고 것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라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처럼 수행은 반드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란 세 가지가 일정한 영역을 확보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황금 분할로 이상적인 힘의 균형입니다. 노력의 영역과 알아차림의 영역과 집중의 영역이 일정한 경계를 유지해서 넘치거나 부족하게 않게 하면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노력이 많으면 다른 영역이 줄어들어서 균형이 깨집니다. 집중의 영역이 많으면 다른 영역이 줄어들어서 균형이 깨집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력이 많으면 다른 영역이 줄어들고 들뜨는 장애가 생깁니다. 노력이 적으면 다른 영역이 커지고 집중이 안 되는 장애가 생깁니다. 집중이 많으면 다른 영역이 줄어들고 졸음이란 장애가 생깁니다. 집중이 적으면 다른 영역이 커지고 들뜨는 장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세 가지는 각각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다른 영역이 커지거나 줄어들면 조화가 깨집니다.
이런 영역분할 균형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많으면 항상 노력과 집중이 균형을 이루도록 합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있는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아도 만용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을수록 좋습니다.
알아차림에는 순도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낮은 순도일 때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상에 침투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지나갑니다. 알아차림이 높은 순도일 때만이 대상에 침투하여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알아차림의 순도를 높여주는 것이 바로 노력과 집중입니다. 알아차림이 노력과 집중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지만 노력과 집중의 조화도 알아차림을 순도를 높이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오근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하나의 완성을 위해서 균형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수행은 의식을 고양시키는 정신세계의 문제라서 매우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이 길은 가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길이라서 알맞고 충분한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어두운 동굴에서 미로를 헤매는 탐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앞서간 스승들의 가르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항상 자신의 적절한 성찰이 따라야 합니다.
이런 완성을 위해서 수행자는 항상 수행이 끝나고 지금 이 시간에 노력은 적절했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알아차림은 부족하지 않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집중은 적절했는지 알아차리려야 합니다. 만약 수행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 세 가지 중의 어느 것이 부족하거나 많아서 생긴 일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과 지나친 것을 조절해야 합니다. 세 가지의 영역이 균형을 이루어 확고해질 때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확인을 거치는 성찰이 있어야 수행이 발전합니다. 자신의 성찰이 부족하면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조절해야 합니다.
오근의 균형을 현악기의 줄에 비유합니다. 현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당기면 줄이 끊어져서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조율이 필요합니다. 오근 중에서 알아차림이 현악기의 줄을 알맞게 조율하는 기능을 합니다. 수행은 근기에 따라 많으면 빼주고 부족하면 채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기능으로 중도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될 때 믿음이 굳건해지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노력이 힘차고 강해집니다. 알아차림이 예리해지고 지속이 됩니다.
집중으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이 됩니다. 지혜가 대상을 꿰뚫어 법을 관통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기능이 바르게 역할을 하면 오근(五根)이 오력(五力)이 됩니다. 오근이 오력이 될 때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어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3. 알아차림
알아차림을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억이라는 뜻과 알아차림이란 뜻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란 명상의 용어 중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과 알아차림이란 두 가지 뜻을 가진 우리말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사띠의 첫 번째 뜻은 기억입니다. 이때의 기억은 현전(現前)하는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금 현재 여기로 와서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수행을 실천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잊지 않고 항상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고 지속해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의 기억은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는 다르게 지금 여기에서 항상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알아차리는 것과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사띠의 두 번째 뜻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주시, 지켜본다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한문으로는 생각한다는 뜻으로 염(念)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하거나 노팅(noting)이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쳐 팔만 사천 법문이라고 합니다. 팔만 사천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입니다. 37조도품은 수행을 실천하는 방법들입니다. 다시 37조도품을 줄이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다시 팔정도를 줄이면 계정혜입니다. 계정혜는 계율과 고요함과 지혜를 의미하는 덕목으로 이것을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다시 계정혜를 줄이면 알아차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팔만 사천 법문을 한마디로 줄인 가장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에 속합니다. 선업의 행에서 알아차림은 믿음, 양심, 수치심,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중립 등과 함께 깨끗한 마음의 작용을 이루는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행동, 말, 좋음, 싫음, 기호, 판단, 생각 등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대상을 맞이할 때 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쳤을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청정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모두 알아차림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습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문지기 있으면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만얀 알아차리지 못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통 도둑에게 맡기게 되어 도둑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에 번뇌라는 바이러스를 감염시키지 않도록 하여 청정하게 합니다.
알아차림은 물위에 떠있는 공과 같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대상과 함께 있습니다. 이는 물위에 떠있는 공처럼 항상 대상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위에 떠있는 공은 가라앉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 위로 튀어 오르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물과 함께 있으면서 물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봅니다. 만약 물위에 떠있는 공이 물위로 튀어 오르면 들떠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만약 물위에 떠있는 공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게으름으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맛은 수행을 해서 얻는 법의 맛입니다. 바로 알아차림에 의해 이 법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은 항상 그 뜻이 잘 나타나 있으며,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가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며,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열반으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람에 의해 직접 체험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법의 맛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자유롭게 맛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여섯 가지 대상이 부딪쳤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에 개입을 해서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변화하기를 원하면서도 때로는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없이 아는 마음만 가지고 주시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모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성품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누구나 번뇌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도모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는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계행이 청정하여 죄가 없어 깨끗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는 마음이 제어됩니다. 그리고 복잡한 일에 휩쓸리지 않고 평안을 얻게 되며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밖에 없다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지고의 행복을 얻습니다.
알아차릴 때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항상 현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상을 깨어서 볼 수 있습니다. 과거나 미래는 생각으로 관념에 속합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시간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대상의 일어남과 알아차림 사이에 틈이 생기면 번뇌가 침투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대상과 일치해야 합니다. 대상과 알아차림이 따로 작용하면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이런 알아차림은 반드시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중력이 생기고 마지막에 지혜가 생깁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현장성, 즉시성, 일치성 정확성, 지속성이란 기능이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은 나무를 계속 비벼서 불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를 계속해서 비비면 불이 나듯이 알아차림을 지속하여 조건이 성숙되면 통찰지혜가 납니다. 이때의 불이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지혜의 불이 나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지혜의 불이 어둠을 밝혀야 사물의 이치를 알아 어리석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혜의 불은 번뇌를 태어고 어둠을 밝혀 갈 길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에 대하여 어떤 욕망을 일으켜서도 안 되며 대상의 흐름을 정지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흐름을 주시해야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일치시켜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에 정확하게 겨냥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해야 하고, 철저함과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활을 쏠 때 과녁을 겨냥하듯이 대상을 향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떼지 말아야합니다. 대상을 겨냥하는 것은 대상을 주시하려는 의도를 내는 것이며,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치되면 정확하게 겨냥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대상에 보내서 알아차려야하며, 차츰 아는 힘이 생기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이나 마음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집중할 때는 무리하지 않게 적절한 힘으로 해야 됩니다. 무리하면 노력이 지나친 것으로 마음이 대상에 붙지를 않고 자꾸 튕겨져 나옵니다. 또 알아차리기 위해 너무 강하게 힘을 주면 두통과 상기의 위험이 따릅니다.
알아차림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알아차림이란 것은 해탈로 가는 표입니다. 수행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근기를 가지고 합니다. 이런 근기를 하나로 묶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란 표가 있으면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며, 알아차림이란 표가 없으면 태어남과 죽음이 반복되는 공동묘지로 갑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선한 행위는 반드시 선한 과보를 받는데, 이것이 바로 조건이며 원인과 결과입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선하지 못한 행위는 불선업입니다. 불선업은 반드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번뇌의 불을 끄므로, 먼저 자신이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움을 줍니다. 번뇌의 불을 끈 자는 자애가 일어나고 이 자애가 넘쳐 상대를 편안하게 하므로 자신과 남을 함께 돕게 됩니다. 더 나아가는 지혜가 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알아차림은 바라고 없애려하지 않는 비 작용적인 행위라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습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단순화시켜 번뇌를 무력하게 하고 평등심이 생기게 하여 지혜가 나도록합니다. 알아차림은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일 뿐입니다. 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흙탕물을 없애려고 다시 흙탕물을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일이나 알아차림 없이 욕망을 가지고 하면 욕망의 과보가 남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감각기관의 문을 열어 놓고 욕망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욕망의 특성은 항상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욕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불만족 속에서 괴롭게 살아야 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율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어 고통을 겪고 남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즐거울 때 감각적 쾌락에 빠지며, 괴로울 때는 비탄, 슬픔, 좌절, 분노에 빠지고, 덤덤할 때는 게으름에 빠집니다. 즐거움은 향락적인 것을 바랍니다. 괴로움은 성냄의 불길을 일으켜 스스로를 불태웁니다. 게으름은 바른 것을 바르지 않게,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봅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항상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즐거우나 괴로우나 덤덤하거나 단지 느낌으로 알아 오직 고요함만 있습니다. 이 고요함이 지혜로 이끌어 열반을 성취하게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이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데, 이 두 가지 중에 선택은 오직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알아차림을 할 때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몸과 마음이 긴장을 푼 뒤에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해야합니다. 한번이라도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면 두 번, 세 번을 계속할 수 있어 바른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한다는 것은 대상을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모아 오롯하게 대상에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대상에 보낼 때는 정확하고 가볍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통증, 졸림, 망상, 선심, 불선심 등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릴 대상이 많아도 혼란을 느끼는데, 결코 혼란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에 나타난 것들은 모두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이라면 대상이 아닌 게 없습니다. 어느 의미로 통증, 졸음, 망상, 가려움, 하기 싫음 이런 것들이 대상으로 나타났을 때는 알아차릴 대상이 많이 생겨서 수행자에게는 기쁨이라고 아셔야 됩니다.
대상이 많은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많다는 것은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아무리 많아도 대상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같은 것으로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지혜가 나면, 그 다음에 괴로움의 지혜가 나고, 마지막에는 무아의 지혜가 나서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이때까지는 누구나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의 일곱 가지 이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둘째, 슬픔을 극복합니다. 셋째, 비탄을 극복합니다. 넷째, 육체적인 고통이 소멸합니다. 다섯째, 정신적인 고통이 소멸합니다. 여섯째, 올바른 길인 팔정도에 도달합니다. 일곱째, 열반을 성취합니다. 열반의 성취가 지고의 행복입니다.
알아차림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피안으로 가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는 온전하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만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피안으로 건너가는 뗏목은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이고 알아차림이 뗏목의 노를 젓는 일입니다. 이제 모두 알아차림으로 뗏목을 저어서 피안으로 건너가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누립시다.
4. 분명한 앎
분명한 앎을 빨리어로 삼빠잔냐(sampajanna)라고 합니다. 삼빠잔냐는 분명하게 아는 것, 또는 여러 가지를 완전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외에도 주의, 분별, 이해, 용의주도함이란 뜻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한문으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하고 분명한 앎을 정지(正知)라고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알아차림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수행이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상호 보완하는 작용을 합니다. 수레가 하나의 바퀴로 가기가 어렵듯이 수행도 두 가지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상호의존적이라서 수행의 기본적인 구성 요건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겨냥하는 행위고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이해하고 분별하는 행위입니다. 이때의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수용하는 지혜와 같습니다. 하나의 마음이 적극적일 때 다른 하나의 마음은 대상을 수용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알아차림으로 대상을 겨냥하고 분명한 앎으로 대상에 내려앉아서 여러 가지를 살필 때 알아차림이 지속되고 지혜가 증장합니다.
수행자가 분명한 앎을 할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뒤로 돌아갈 때, 앞을 볼 때, 주위를 볼 때,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 옷을 입을 때, 먹을 때, 마실 때, 씹을 때, 맛볼 때, 대소변을 볼 때, 가고, 서고, 앉을 때, 잠자리에 들 때, 잠에서 깨어날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등 일상의 모든 행위에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분명한 앎은 일상의 모든 행위를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분명한 앎을 일상의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앎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셋째,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넷째,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첫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는 일이 유용한 일인지 아니면 해로운 일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익이 있으면 하고 이익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라고 해서 이익과 손실을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과 손실은 경제적인 측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를 살피고 지혜가 나는 일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장소에 가려는 마음과 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하거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또 자신이 수행을 하는 것이 이익인지 이익이 아닌지를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성적으로만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감상적으로만 사고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두 가지 사고를 함께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감각적 욕망에 빠져 바르게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시 이 일이 이익이 있는 일인지 아니면 괴로움을 겪는 일인지를 지혜로 통찰해야 합니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나 시기나 상황이 적절한지 알아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할 시간에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와 상대가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적절한지 살피는 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사람들은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해서 바람직하지 않고 적절한 일을 하지 못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적절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한 일을 해서 바람직하고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아서 바람직합니다. 이렇듯 잘된 행위는 두 가지의 이익이 있고 잘못된 행위는 두 가지의 손실이 있습니다.
이상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과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에 대입을 하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경우에도 지속적인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과보를 받아 괴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은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의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수행자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일정한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에게 필요한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관념적인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관념에 머물러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실재적인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지혜를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무엇을 대상을 알아차릴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추론적이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대상은 수행자의 영역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삼아서 알아차리면 확실한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괴롭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킬 위험이 따릅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대하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전한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정신적 영역에서는 단지 정신적 영역에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으로 인해 몸까지 아픕니다. 물질적 영역에서는 단지 물질적 영역에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으로 인해 마음까지 아픕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을 삼는 것은 행복의 기본조건입니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고, 현재에 있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진실은 언제나 현재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장 바람직한 영역 안에 있습니다.
넷째,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미혹하지 않은지 알아야 합니다. 미혹하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부딪치는지는 것일 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서고, 도는 것이나 구부리고, 펴는 것이 모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과 물질이 조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이렇게 분명하게 알 때 자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아의 발견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입니다.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은 실존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지혜에 속합니다. 누구나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분명한 앎으로 이해할 때 내가 있어서 몸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압니다. 몸과 마음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고 아는 것이 무아의 바른 견해입니다.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기 위해서는 앞선 세 가지의 분명한 앎이 선행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성숙되어 네 번째의 분명한 앎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세 번째의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을 확실히 하면 차츰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을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실천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도록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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