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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음으로 어둑어둑한 공장.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화로를 드나들던 놋쇠덩이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징의 형체를 닮아간다. 당초 40㎏을 조금 넘던 놋쇠덩이는 네핌질(집게로 바둑이라 불리는 쇳덩이를 잡고 돌리면서 망치질로 펴는 작업)과 우김질(네핌질로 펴진 쇠를 여러 장 겹쳐 하나로 만드는 작업), 닥침질(완제품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불에 달구며 망치질을 반복하는 작업)을 통해 서서히 1미터 남짓한 징으로 거듭났다. 아직까지 밖은 추운 날씨임에도 실내 현관에서 선풍기가 돌아가는 이곳은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시화공단 5바 810호, 방짜유기장 이봉주 옹의 공방이다. 닥침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고정틀 위에 앉은 이봉주 옹은 두터운 덧신을 착용한 채 벌겋게 달아오른 놋쇠덩이가 고정틀에 놓여지면 왼발바닥을 이용해 기계의 망치질이 고르게 되도록 바쁘게 손을 놀려 쇳덩이를 조금씩 돌린다. 쇳덩이가 식으면 다시 화로에 들어가고, 달궈지면 다시 망치질. 귀청을 괴롭히는 쇳소리와 텁텁한 공기, 그 사이에 스며있는 쇳가루가 얼굴과 몸에 내려앉아 불쾌하지만 수백도를 넘는 고열과 쇠망치질의 반복은 자칫 사고를 동반할 수도 있기에 대여섯 명에 달하는 팀원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있다. 이 과정을 거친 유기는 담금질과 울퉁불퉁한 표면을 펴는 벼름질과 산화된 표면을 한 꺼풀 벗겨내는 가질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 만들 수 있는 제품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와 식기, 징과 꽹과리, 종과 촛대와 놋동이 등인데 주전자와 나팔, 심벌즈 등과 같이 공정이 난해한 작품도 만들어 낸다. 이봉주 옹의 고향은 방짜유기로 이름난 평안북도 정주. 어머니 역시 유기행상을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그는 인근에 위치한 납청에 가서 공방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당시 놋제품 제작기술은 아무에게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혈연이나 ‘빽’이 있어야 심부름꾼이라도 시켜줄 정도로 인기 있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22세의 나이로 월남했던 이봉주 옹은 서울 용산에 문을 열고 있는 납청양대유기공장에 취직을 했다. 평안도 납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이곳에서 어느 정도 기술을 익혔을 무렵, 6·25전쟁의 발발로 제주도까지 피난을 내려가야 했다. 전란 후 혼란기를 거쳐 1957년 강서구 염창동에 평북양대방짜유기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업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스테인레스와 알루미늄의 보급에 두 손을 들어야 했다. “60년부터는 1년에 요강하나 주문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심지어 집에 있던 유기제품을 갖다 버리는 경우도 발생했으니까요. 그러다 연탄이 들어오면서는 더욱 유기제품이 천대를 받았어요. 유기는 민감해서 연탄가스가 있는 부엌에서는 금세 변색이 되고 말아요. 그만큼 인체에 무독한 식기란 걸 국민들이 몰랐던 거죠.” 이봉주 옹이 들려주는 당시 상황이다. 먹고 살기가 어렵다보니 공장 문을 닫은 채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고, 아내 역시 호떡장사를 1년 이상이나 했단다. 유기제품에 대한 세간의 식어버린 관심은 20년이나 이어져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관심은 되살아났다. 인고의 세월은 결국 1981년 안양시 박달동에 납청유기공방을 세우면서 꽃을 피웠다. 이듬해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한데 이어, 1983년에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으로 지정됐다. 그렇다고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1983년 작업 도중에 불똥이 오른쪽 눈에 튀어 들어가 실명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니 말이다. 1988년 올림픽을 맞아 폐막식용 바라 4백 쌍을 제작, 기증하기도 했던 이봉주 옹은 이후 8년간 (사)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1991년 ‘납청양대’를 저술하기도 했다. 또 1993년에는 세계 최대의 징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지름 161cm 무게 98kg의 이 징은 단순히 한국 유기기술을 입증하고픈 욕심의 발로에서 비롯됐다. 그의 작품은 이밖에도 1983년 작인 ‘방짜좌종’과 12첩 반상기인 ‘임금님수라상’ 등이 있다.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자를 일컫는 말이다.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주물유기와 방짜유기, 반방짜유기로 나뉜다. 주물유기는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드는 방법이고, 방짜유기는 달군 쇠를 두드려가며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구리와 주석을 78대 22의 비율로 합금하여 만드는 것이 방짜유기인데 합금비율과 성분에 따라 황동유기, 백동유기 등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방짜유기는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북한의 납청유기가 가장 유명하다. 제작과정은 바둑알같이 둥근 놋쇠덩이를 불에 달궈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형태를 만들게 되는데 용해→네핌질→우김질→냄질→닥침질→제질 및 담금질→벼름질→가질 등 8가지로 나누어진다. 유기제작기술은 한국 수공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방짜유기를 북한에서는 양대라고 불렀는데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유기제작으로 유명했던 곳이 평북 정주군 마산면 청정동인데 이곳을 납청정(納請亭)이라 부른데서 ‘납청’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후 해방을 전후해 남한에 전해져 ‘방짜’라는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방짜유기는 오염된 물질이나 일산화탄소 등 유해한 공기와 접촉할 경우 산화해 색깔이 변질되는데 저공해 세제를 이용해 수세미로 닦으면 금세 광택이 살아난다. 조상들이 1천여 년 동안 생활식기로 사용해온 방짜유기는 독성이 완전하게 빠진 무독성 제품이다. 방짜유기 양푼 등에 야채를 담궈 씻으면 해충이 제거된다는 점에서도 선조들의 지혜로움을 알 수 있다. 사찰에서 불전에 놓여지는 그릇들이 대부분 방짜유기이고, 불가에서는 삭발시 살을 베어도 덧나지 않도록 방짜로 제작한 삭도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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