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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발효되는 바이러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제25회 시안신인상 시 당선작 / 이혜순
-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다 외 4편/ 안정혜
- 머위쌈 외 4편 / 박홍
- 곤줄박이 수사일지 외 4편/ 이혜순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다 / 안정혜
시조새 화석 바이에른의 새
반은 공룡이고 반만 새인 어중간한 몸, 지상과 허공의 유전자를 동시에 품은 절반의 새였다 비상과 추락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청록빛 하늘을 영토로 삼았다 날아다니는 존재의 시원이 되었다 몸에 돋아난 최초의 날개, 오직 새가 되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명제 앞에서 생각을 고르느라 밤새 깃털을 접다가 펼쳤다 바람의 어깨에 올라타기 위해 바람보다 더 가벼워져야 했다 주저앉고 싶은 몸의 저항을 털며 밤을 지새웠다 뼛속까지 비운 후 날아오른 쥐라기의 무한 허공, 한 자루 붓이 되어 날갯짓할 때 바이에른의 새는 제 영토가 된 하늘 어귀 짬에다 어떤 문장을 기록했을까?
다이어트 식단표를 짜다가 문득
맨 처음 날아올라 새의 전범이 된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는다. 임계를 훌쩍 넘어 무변창공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모든 새들이 날아가 죽고 싶은 그 하늘, 일필휘지로 그려낸 그의 필법이 궁금하다
셰르파, 소파 / 안정혜
셰르파, 그는 오늘도 만년설이 쌓인 카트만두로 간다
아프리카 물소 한 마리
제 잔등에 엎드려 낮 꿈에 빠진 사내의 잠꼬대를 받아주느라
검붉은 가죽은 색이 바래고 뱃구레는 우묵해졌다
물소는 일생토록 강물에 잠긴 별과 달을 건졌으나
이 집에 와서부터는 네팔의 물소처럼
짐짝 같은 사내의 하루를 업고 살게 되었다
사내는 하릴없이 그 등짝에 엎드려 설산을 올라보자 하고
뼛속까지 얼리는 빙하계곡도 함께 가자고 한다
두통을 앓고 고산증에 시달려 끙끙거릴 때면
코카 이파리 한 줌을 어금니에 물린다
잉여의 햇살이 넘치는 실내, 샤갈의 시계는 늘어져 있고
청년백수, 사내의 무료한 오후는 아득한 몽유의 길에 든다
곳곳에 눈사태와 크레바스, 아찔한 트레킹을 하며
물소는 입가에 침버캐를 묻힌다
늙은 물소 한 마리가 엎드려 있다
잔등에 올라탄 사내는 온종일 시간을 짓뭉갠다
백일몽에 빠진 사내의 셰르파, 물소가죽 소파
길 밖의 꿈을 찾아 서툴게 등짐을 지고 간다
대왕오징어 / 안정혜
버스정류장 앞 전봇대에
오징어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무담보 대출, 즉시 가능
갑오징어 등 위에 바다체로 찍혀 있다
가위질로 가랑이진 다리에
빨판처럼 붙어 있는 휴대폰 번호
불량한 신용도 다 떠맡아주겠다고
꾸덕꾸덕 말라가는 피데기에서
난바다 파고를 헤치던 숨소리가 들린다
담보물 없어도 즉시 수혈해
명줄을 이어주겠다는 대왕오징어
허울만 좋은 대왕의 말에 속아
저 다리 덥석 찢어 질근질근 씹다가
송곳니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던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대왕오징어
저 검은 흡반으로
사정없이 피를 빨아댈 텐데
대왕오징어의 낚시질에 코가 걸렸나?
파랑지는 물살 헤쳐 오느라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 하나가
대왕의 다리를 찢고 있다
나무늘보의 독법 / 안정혜
복날 탑골공원
느티나무 아래 기어드는 나무늘보 한 마리
팔자걸음 느릿느릿 끌고 와 그림자를 부려놓는다
구부러진 어깨, 주름 가득한 피부
무가지신문 펼쳐 손가락으로 촘촘 짚어가며
활자를 떼어내듯 읽어나간다
손끝으로 열어보는 돋보기 너머 세상 소식들
속도전 치르듯 숨 가쁘게 찍혀있지만
나무늘보의 눈길은 더디게만 나아간다
이 빠진 하루의 퍼즐을 맞추는 노인 곁으로
쒜-ㅇ, 배달 오토바이 지나갈 때마다
활자가 우르르 엎질러진다
돋보기 바짝 들이대고 늘보가 신문을 읽는 동안
바람도 늘보걸음으로 걷고 있다
한때는 그도 속도를 숭배해
지름길 찾아다니고 탱고 리듬에 춤추고
더딘 사랑에 불편해했을 것이다
한땀한땀 손바느질 자국 같은 독법의 시간
노년의 읽기는 생의 속도를 벗어나 있고
간이역에서 후루룩 삼키던 국숫발 같던 어휘들은
하릴없이 뚝뚝 끊어진다
폭염이 쏟아져도 꿈쩍 않는 늘보의 그림자
끊어지는 소식 찬찬히 이어 다시 읽는 동안에
시계풀꽃은 무심히 피어나고 또 지고 있다
능수바람 / 안정혜
버드나무 아래 흰 말 한 마리 서 있다
늘어진 실가지가 시위 당기는 쪽 바라보며
백마는 바람의 전신욕을 즐기고 있다
희디흰 갈기와 물오른 잎사귀의 반짝거림은
바람의 또 다른 몸짓이다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오직 한 자리
나무에 묶인 것은 고삐가 아니라
흰 말에 발목 잡힌 능수버들의 시간이다
푸르른 그늘 아래 묶여 있는 백마의 환한 응시
흰 말의 영혼도 은빛으로 반짝인다
편자가 따각따각 발소리를 내거나
히잉, 말울음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실은 그것은 능수바람의 야들야들한 손바닥이
묶여 있는 흰 말을 씻어주는 소리다
저 백마와 함께 능수 바람 목욕하고 싶다
능수능란한 바람의 애무를 받고 싶다
윤두서의 그림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얼마나 오래 바라보아야
저 바람의 결이 내게로 올까
버들잎들이 백마의 허리께에다
풀빛 바람을 퍼붓고 있다
안정혜 시인
경북 봉화 출생. 국제청소년연합 링컨학교 교사.
[당선소감]
한 그루 사탕단풍나무처럼
나는 한 그루 사탕단풍나무를 알고 있다. 북아메리카 서부지역 록키산맥, 영하의 눈보라를 견디며 조금씩 자라는 나무, 찬바람과 따뜻한 볕을 번갈아 맞으며 마디를 키우는 나무, 혹한을 잘 이겨낼수록 내 나무의 몸엔 세상 가장 달콤한 물이 차오른다.
좋은 문장 한 줄을 얻기 위해 여러 개의 펜혹을 키우고 깎아냈다. 흰 종이에 질린 채 희붐한 새벽빛을 무수히 맞았지만, 언어를 벼릴수록 나의 계절은 혹독하게 추웠다. 몇 개의 미혹을 더 넘어서야 말라르메의 목신에 닿을 수 있을지, 목마름이 밀려올 때마다 록키산맥 외딴 곳, 나의 사탕단풍나무를 떠올렸다. 그의 몸속에 차오르는 달콤한 수액을 생각하며 오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드디어 당선통보를 받는 순간, 내 나무의 붉은 뺨에서도 맑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도 누군가의 사탕단풍나무가 되고 싶다. 철저하게 외로움을 먹고 자라는 나무가 되어 시의 자당을 높이고 싶다. 쓸쓸한 그 마음에 달콤한 수액을 보낼 수 있을 때까지, 지금보다 더 고독한 처소로 들어가려 한다.
생활의 면면에서 시의 푸새밭을 보여주신 아버지로부터 나의 시는 시작되었다. 시 쓴다는 핑계로 대충 하는 아내노릇 엄마노릇 다 눈감아준 남편과 두 아들이 고맙다. 격려해 준 「바림」 동인, 「시울회」, 「합평 글벗들」평생 함께할 문우들이다. 미숙한 사람을 오래오래 지켜봐주신 스승님껜 큰 절 올린다. 하늘나라 시인이 된 단짝 양경진과 닻별에 살고 있을 사랑하는 아우 안효기에게도 기쁜 소식을 띄운다.
손을 꼭 잡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안)사엔, 수굿한 글품쟁이가 될 것을 약속드리며, 내 안의 주인께 영광을 올린다.
머위쌈 / 박홍
대청에 앉아 머위쌈을 먹는다. 뭉게구름무늬로 뜯긴 것들이 있다. 새털구름무늬로 뜯긴 것들도 있다. 햇살이 오래 머물렀던 자리가 초록으로 남았다. 쌈장을 듬뿍 묻혔다. 얘야, 입에 쓴 게 몸에 좋은 거야. 구름무늬 틈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주위를 살폈다. 햇살이 바람에 뼘가웃씩 부풀고 있다. 벌레 먹고 남은 구름무늬를 살금살금 펼쳐본다. 벌레들이 비비고 간 흔적을 따라 엽록소의 하늘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오글오글 움츠리고 있었다. 얘야, 벌레들도 다 제가 좋아하는 하늘이 따로 있어 야아. 그러면서 어머니는 잡은 벌레들을 멀리 던졌다.
뼘가웃씩 부풀고 있는 햇살을 보다가 머위쌈을 쌌다. 벌레들이 먹고 남긴 초록하늘에 구름 그늘이 한결 더 환하게 쓰다.
우주포도주 / 박홍
옥상에서 포도주를 담그는 날은 우리도 쾌활한 수공업자가 되는 거야
터질 듯 까맣게 익은 포도알을 으깨면 까만 여름밤의 즙액들이, 아득한 거리를 달려온 황도십이궁의 별빛들이, 밤새 어딘가로 흘러가던 은하수의 물소리가, 은하전파를 타고 날아 온 우주의 씨앗들이, 알 수 없는 암흑물질들이, 물결처럼 출렁이던 보름달빛과 초승달빛들이 부화하는 알 속의 핏줄처럼 툭, 툭 터지면서 향기를 내뿜는 거야.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던 여름 한낮의 고요도 하늘에다 울컥울컥 단내를 토해내지. 희미하지만 잠깐씩 폭우와 폭풍의 냄새도 풍긴다네. 쉬고 있으면 먼 곳의 천둥소리가 거품이 되어 떠오르는 것도 보인다네.
그때쯤이면 근처에 있던 벌과 나비들이 날아오기 시작하는 거야
꽃등에가 방향을 잘못 잡은 어리호박벌을 데리고 온다네
도시처녀나비와 시골처녀나비가 손잡고 날아오고
검은테떠들썩팔랑나비도 날아온다네
간간이 아내와 딸아이는 어리호박벌에게 호통도 치는데
멀찍이 하늘 끝으로 내려앉은 뭉게구름은
하늘을 또 하나 항아리로 만들고 있지
그런 뒤에 바람과 햇살과 천둥소리와 밤의 즙액들이
빠져나가지 않게끔 꼭꼭 밀봉하는 거야
부글거리면서 저희들도 새롭게 태어나려고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네
그때 한 번쯤 뒤집어주는 거야
다시 힘든 시간을 기다렸다가
육탈시키듯 걸러버린다네
냉장고에 넣고 자게 해 두면
육신의 희미한 기억들까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붉은 영혼이 만들어진다네
병에 넣고 조심스레 눕혀서 잠을 재우는 거야
어느 날
주먹처럼 커다란 별들이 내려와 둥둥 떠다닐 때가 있을 거야
우리 어렸을 때처럼 말이야
그러면 잠재웠던 영혼을 하나씩 흔들어 깨우는 거야
투명한 붉은 영혼 속에서 깨어난 별들이 춤을 춘다네
그때부터 은하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네
꽃의 순장殉葬 / 박홍
아침 일찍 상리마을에 가서
병꽃나무울타리의 병꽃을 따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깨진 유리조각에 닭의장풀꽃을 넣고 바닷물을 출렁거리며 놀았다.
해는 아직도 하늘 가운데 묶여 있고 세상은 오래된 경첩처럼 헐거워져 있었는데
어느 집 울타리 너머 혓바닥을 붉게 빼문 칸나 꽃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웠다. 눈길 가는 곳마다 혓바닥처럼 휘감기는 붉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세상은 이름으로 분류할 수 없는 색깔들의 목숨 건 전시장이었다.
같은 모양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세계가 시작되고
꽃들은 나의 현미경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영안실에 가지런히 놓이는 꽃들을 본다.
가장 아름다울 때에 순장殉葬된다.
분재(盆栽)들 / 박홍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베란다로 나갔다
어둠 속에 분재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철사에 친친 감긴 소나무, 소사나무가
난쟁이 같은 명자나무와 가문비나무 분재들이
어둠을 끌어안고 속까지 흠뻑 젖어
어둠보다 짙은 어둠을 만들어 내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말 못할 설움도 서로 이불처럼 덮어주고
얼굴 붉혔던 부끄러움도
터진 실밥 같은 비행들도 서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밤이 밤 같지도 않은 도시의 밤이
구석진 곳에 흩어져 있는 어둠을 끌어 모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희들만 아는 비밀로 결속한 듯
버티고 있었다
윤회를 꿈꾸다 / 박홍
망둥이가 3초 정도만 기억한다는 것은 행운일 수도 있다
그들은 3초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왔던 길을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가 되어
그 큰 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다
얽힌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삶도 삶이지만
싸늘하게 식은 사랑을 확인하고 돌아다니는 나의 그림자가
외포리 바닷가의 전봇대보다 길게 뻗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했던 장소를 찾아 바람처럼 떠돌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늑하게 녹아내리는 사랑의 입맞춤이 그리워
밤마다 느낌의 주위를 맴도는 불면의 밤도 없을 것이다
마음 속 높은 곳에 수시로 뛰어올라 올라
목 놓아 이름을 부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의 흔적을 찾아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외포리 앞바다에서, 문득
3초 정도만 기억하는 생에 스며든다면
툭 불거진 눈과 커다란 입으로 텀벙거리는 망둥이가 된다면
그건 공평하게 한 번씩 나눠 가지는
행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홍 시인(본명 박홍식)
부산 출생. 경희대 화학과 중퇴. 방송대 중국어과 중퇴.
곤줄박이 수사일지 / 이혜순
도로 위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신원미상의 죽음을 놓고 햇빛들만 모여 웅성거렸다
바퀴자국이 비껴간 자리
한줌의 어둠이 고여 있었다
날개가 꺾여있는 걸로 보아 자살로 단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타살로 볼 수도 없었다
높새바람이 주변 새둥지들을 일일이 수색해 봤지만
그럴만한 알리바이는 없었다
플라타너스에 사는 까치부부도
그날 밤 수상한 기척을 느끼거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하루해가 다가도록 죽은 새를 찾는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종신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바람만 뻔질나게 현장을 들락거렸다
조사 결과 곤줄박이라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어떻게, 왜 이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도로와 맞닿은 야산 어딘가에서
혼자 둥지를 빠져나와 길을 잃고 헤매다
실족사 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죽음은 아무 것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낙타가 있는 풍경 / 이혜순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낙타의 등은
모래언덕을 닮았다
몸속 사막의 유전자가 바닷바람에도 변하지 않는 건
짜디짠 바람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밑에 밟히는 모래의 감촉을 추억하듯 낙타는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관광객들이 등 위를 오르내리며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동안
무심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을 뿐
길게 꼬리를 문 카라반의 행렬로 걷던 밤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오아시스를 만나 타는 목을 적시고
종일 등을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으면
밤은 꿈처럼 달콤했을 것이다
끝없이 되풀이 되는 길 위의 날들이
어느 날 문득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느껴져
한 발 옆으로 내디딘 걸음이
이 먼 땅 돗토리*까지 흘러와
몇 푼의 풍경으로 서게 된 것은 아닐까
그에겐 이곳이 사막일지 모른다
콧구멍을 파고드는 습한 바람과 빛과 소음에 취해
잠들지 못하는 밤들
몇 발짝만 걸어도 발굽을 파고드는 통증에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은 날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 끝으로
신월도 낮달 한 자루가 덩그러니 걸려있다
*돗토리- 일본 중서부 지방
금제경식왕비* / 이혜순
몇 겁의 시간을 건너오고도
흠 하나 없는 온전한 모습이다
어떤 장식이나 문양도 없이
살짝 휘어진 육각의 금 막대들이 작은 고리로 연결되어
깔끔하고 세련된 멋을 풍긴다
백제 무령왕비**는 단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일곱 마디와 아홉 마디,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목걸이가
왕비의 성품을 말해주듯 은은한 빛을 뿜는다
권력과 부귀영화를 다 가진 그녀에게도
말 못할 고통으로 잠들지 못한
수많은 밤이 있었을 것이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져가는 달을 보며
둥글게 차오르던 슬픔과 한숨
얼마나 많이 비워냈을까
걸음걸이 하나도 조심스러웠을 왕비의 삶
할 수 있는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더 많아
늘 목을 조여 왔을 것이다
들여다볼수록 그윽해지는 빛이
왕비의 눈빛만 같아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공주 박물관 한켠 아득한 전설이 된 역사 속
외롭게 누워있던 왕비가
문득 일어나 내 뒤를 따라온다
*돗토리: 일본 중서부 지방.
문고리 변천사 / 이혜순
옛 문고리들은 쉽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걸인이나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도 기꺼이 물 한 모금 밥 한 덩이를 나눠주었다 숟가락 하나 달랑 꽂아 놓고 마실을 나가던 문고리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조금씩 모양이 변하면서 서로 제 집처럼 드나들던 이웃들도 뜸해졌다
살붙이처럼 살갑던 얼굴들이 점점 낯선 얼굴이 되어가고 마주치면 인사 한 마디가 끝이었다 가슴에 채워진 빗장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사라진 동네, 밤이면 수상한 그림자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튼튼한 새 문고리들이 생겨났다
그림자들은 수시로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을 찾아 용케도 집안으로 스며들었다 처음엔 골목 안쪽 파란대문 문고리가 떨어져나갔다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두 번째 집 문고리 역시 쉽게 뜯겨졌다 그 집 남자는 칼에 찔려 영영 일어서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문고리를 믿지 않았다 입력된 숫자와 지문이 있어야만 열린다는 암호 같은 자물쇠들 그러나 그 문들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림자는 힘이 셌다 드디어 문들도 CCTV를 달기 시작했다
두 개의 창고 / 이혜순
할머니가 팔봉산으로 긴 유람을 떠나신 뒤
늘 바깥을 내다보시던 안방 작은 유리문 속에
커다란 창고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풍으로 누워계신 삼년 동안 할머니가 바라본 세상은
유리문만 했다
그 좁은 문으로 바람과 햇살을 끌어들여 하루를 채우고
밤이면 쏟아지는 달빛에 가쁜 숨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창고 속 남루한 살림살이들
할머니의 손길을 잃어버린
낡은 농짝이며 모서리 깨진 서랍장이
온기를 잃고 우두커니 앉아있다
사십구재를 마치고 돌아와 누운 밤
내 안에 들어있던 창고 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창고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들
방안을 가득 채웠다
창고 안엔 할머니가 평생을 모아주신
온갖 귀한 보물들로 그득했다
잔칫집에서 손수건에 싸다 주시던 떡이며 사탕들
설빔으로 사 오신 꽃신 한 켤레
쌈짓돈을 털어 시집 올 때 장만해 주신 은수저 두 벌
만져보는 보물마다 영롱한 빛깔로 눈부셨다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창고 안의 보물들을
다 꺼내보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을 바쳐도 다 보지 못할 것이다
이혜순 시인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시창작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소감]
비유의 변주, 역설, 그리고 추리적 기법
이번 신인상의 최종심사에서는 몇 번 기분 좋은 놀라움을 경험하였다. 심사에 오른 일곱 분들의 작품 수준이 다들 상당해서 누구를 당선으로 고를까 당황해야 할 지경이었다.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작품화의 개성적 기술이라 해야겠다.
먼저 안정혜씨의 경우를 설명해보자. 안씨는 이미지가 분명한 비유적 사물을 발견하고 변주하는 데에 능숙하다. 「셰르파, 소파」에서는 소파에서 시작한 이미지를 아프리카 물소-네팔의 들소로, 여기에서 다시 세르파라는 비유로 변주하는 것, 이 이미지의 대척점에 짐짝 같은 백수 사내가 있다. 안씨는 소파에 누운 사내라는 단순 정물화에 그치지 않고 그 변주를 통해 스토리가 있음직한 커다란 동영상을 이루었다. 「대왕오징어」에서는 오징어 같은 대출광고지를 갑오징어-대왕오징어-대왕으로 변주하고 있다. 오징어를 대왕으로 변주함으로써 시의 마지막 2행,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 하나가/ 대왕의 다리를 찢고 있다”는 종결에서 독자는 기묘한 극적 안도와 비장한 대결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박홍씨의 역설도 독특하다. 시 「윤회를 꿈꾸다」를 보겠다. 망둥이가 정말 3초의 기억만 가지는지, 강화도 외포리 바다에서도 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순간적인 두리번거림-떠돎-맴돎 그리고 텀벙거림이야 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해준다. 「꽃의 순장」도 아주 자연스런 역설이다. 혀를 빼문 칸나 꽃을 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시행, 세상은 꽃들의 목숨 건 전시장이라는 시행은 꽃이 영안실에서 순장된다고 진행되어도 극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다. 순장이란 스스로 죽음에 참여하는 것 아닌가.
이혜순씨는 현대시의 한 특징적 세계인 불가해에 추리적 기법으로 도달한다. 「곤줄박이 수사일지」와 「문고리 변천사」를 보면 이씨가 풀어가는 그 기법이 보인다. 추리적 기법은 현대소설의 기법이지만 이제 우리 시에서도 차용이 시작되고 있다. 아시다시피 소설은 문제 해결의 장르다. 우리 시는 이와 달리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의 역할에 나섬직 하다.
위 세 분을 당선에 올리고 나니 김우진씨가 여간 안타깝지 않다. 시 「적막」에도 잘 드러나지만 시어의 정확함, 어조와 태도의 집중력, 주제의 탁월함 등을 보면 당선에 버금간다. 다시 기운 내시고 다음 기회에 꼭 참여하시기 바란다. / 박의상(시인)
생의 감각이 금빛으로 빛날 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일곱 명의 작품은 상당한 기량을 갖추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예심에서 탈락된 작품들 중에도 신인으로 등단할 만한 작품이 상당수 있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곱 명의 작품들이 안고 있는 유사한 성향은 다양성의 결여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이 일곱 명의 작품은 모두 서정의 밀도가 높고 매우 안정된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인다운 패기라든가 모험심 같은 것은 거의 드러내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하여 실험적·전위적 경향의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착실하게 공부하고 정성껏 수련하여 시의 정도를 닦아가는 모범적인 탐구자들의 성과물인 것이다.
이혜순의 작품은 일견 서술적인데 서술의 단층 속에 시적 윤기가 단아하게 빛난다. 평담한 서술을 시로 전환시키는 요소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무심한 듯 진행하는 관조의 어법이다. 그러나 무심한 관조가 시적 사유의 노출에 틈을 보일 때 그의 시는 불안해진다. “죽음은 아무 것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신월도 낮달 한 자루가 덩그러니 걸려있다”, “외롭게 누워있던 왕비가/문득 일어나 내 뒤를 따라온다” 같은 구절이 그러한 예다. 그래서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며 비유의 축을 밀고나간 「문고리 변천사」 같은 작품에 더 큰 방점을 찍었다.
안정혜의 작품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호흡에 따라 시행을 조절하는 기량이라든가 시어를 아끼며 이미지의 허공에 사유를 서려 넣는 방법 등이 일품이다.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다」는 일상의 체험보다 상상의 직조가 우위에 놓인 작품이다. 상상의 편력 속에 생의 감각이 금빛으로 빛날 때 개성적인 시행들이 창조된다. “바람의 어깨에 올라타기 위해 바람보다 더 가벼워져야 했다”, “뼛속까지 비운 후 날아오른 쥐라기의 무한 허공” 같은 구절은 외워두고 싶은 명구다. 윤두서의 그림 ‘유하백마도’를 바탕으로 쓴 상상의 또 다른 편력 「능수바람」 역시 금빛 감각의 빛나는 시행이 있다. “나무에 묶인 것은 고삐가 아니라/흰 말에 발목 잡힌 능수버들의 시간이다” 여기서 한정된 공간이 무한의 시간으로 변환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어법이 탄생한다. 여기에 비하면 「대왕오징어」, 「나무늘보의 독법」 같은 작품은 현실의 풍경이 알레고리의 축으로 무겁게 자리잡고 있어 바람보다 날렵한 상상의 애무를 받지 못한다.
박홍의 작품은 오랫동안 창작에 힘써온 적공의 무게가 느껴진다. 여기에 오기까지 적지 않은 인고의 성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머위쌈, 분재, 망둥이, 상리마을의 꽃들, 포도주와 별밤 등 다양한 체험과 상상이 시간의 온축 속에 시적 발효의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오늘의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 분발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다.
당선작에 꼽히지는 못했으나 김우진의 작품이 보여준 점착력 있는 감각의 연쇄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 감각의 회오리가 든든한 사유의 축으로 수렴된다면 그의 시 역시 적공의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세 시인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며 당선되지 못한 분들의 분발과 정진을 기대한다. / 이숭원(문학평론가·서울여대교수)
심사위원 : 박의상, 이숭원, 오태환
<시안> 2010.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