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安重根)의사(義士)
1派30世참판공파(叅判公派)
安重根義士 | 안중근 | 安重根 | 참판공파 | 30世 | 重根중근 己卯生一九○九年己酉十月二十六日(陽) | ||
父 | 安泰勳안태훈 | 叅判公派 | 29世 | 朝鮮侵略元兇伊藤博文哈爾賓射殺倭憲兵遠捕旅順監獄苦 | |||
一九一○年庚戌三月二十六日絞首刑 一九六一年辛丑三月一日建國功勞大韓民國章退敍 | |||||||
配 安陵金氏 父鴻燮夫沒廬墓三年仍居兆下 |
안중근(安重根) 순흥인 참판공파-1派30世
義 士 탄 생
의사는 1879년 7월 16일(양력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 동부동에서 순흥안씨 28世인 진해현감 안인규의 손자로 태어났다. 29世 성균관 진사 안태훈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참판공파의 후손이다. 등에 북두칠성과 같은 점 일곱개가 있어 이름을 應七이라 불렀다. 응칠은 字이고(경신보 7권 54쪽) 譜名은 중근이다.
어 린 시 절
의사께서 여섯살 때,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봉산 밑 청계동이란 곳으로 이사를 간다.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기고 또 7살때부터 말타기 와 활쏘기에도 천부적이었다. 승마와 사냥, 사격술 및 무술을 연마하고 한학을 공부하였다.
학 문 연 구
근엄한 부친의 교육방침에 따라 사서삼경은 無不通知이고 한역 만국사와 조선사 등으로 역사를 연구했다. 김홍섭공의 따님 亞羅와 결혼 한 후 서구문물을 배우고져 천주교에 입문한다. 프랑스 신부 윌헤름에게 불란서 언어와 신학문을 배우며 인격수양 과 지식을 배양하게 된다.
항일운동의 첫걸음
1905년, 의사가 27세되던 해 치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구국항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일본의 불법 무도한 만행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일제의 침략 근성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응징하겠다는 각오와 실천의 첫 발이다.
학교 설립
식민통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면 무지하고 몽매한 국민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남포에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한다.(1907년). 학교설립때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몽땅 처분하여 쏟아 부었다. 구국의 애국자를 양성하고 독립투쟁에 헌신할 인재를 발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의병 참모중장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교육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08년 의사는 만주를 거쳐 러시아의 불라디보스톡으로 또 다시 망명했다. 대한의병 참모중장, 特派獨立大將및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 수 많은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 회령지방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섬멸하고 본진으로 귀환했다.
단 지 동 맹
31세때 러시아의 카리에서 대한독립을 쟁취하는데 목숨걸기로 맹세한 11명의 동지들과 결사동지회를 결성했다.이 때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란 네 글자를 혈서하였다. 의사께서 남긴 친필 유묵을 살펴보면 掌決(손바닥 싸인)에도 의사의 무명지는 그 때 혈서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랐음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것을 단지동맹이라 한다. 동맹회원 (강두찬, 김기용, 김백춘, 김춘화, 김태훈, 박봉석, 백락금, 엄인섭, 유치자, 황길병)
일본 추밀원 의장 이등박문 암살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받음
안중근(安重根)
정의(正義)를 위한 쾌남아(快男兒)
그는 1879년에 황해도 해주 동문 밖에서 출생하였는데 나이 열두살이던 1890년에 부친 태훈(泰勳) 또는 진해(鎭海)와 같이 신천군 두라면(信川郡 斗羅面)에 이주하여 그의 일가인 숙부 태현(泰賢). 태건(泰健). 태민(泰敏)과 함께 한 동리에서 살았다.
원래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군수를 지냈으며 또 부친도 진사의 벼슬을 하였으나 일체 관직에는 봉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중근의 나이 16세 되던 1894년에 전라도에서 학정의 쇄신을 부르짖는 동학농민의 의거가 발생하여 탐관오리를 살육하고 관아의 군고(軍庫) 및 양반부호의 집들을 파괴하여 외세의 배격을 부르짖자 잠시 동안에 그 세력은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 까지 파급되었다.
또한 그 여세가 북으로 번져 황해도 신천에까지 이르게 됨에 지방에서 수천석의 부호로 지내던 안중근의 부친은 자기 토지의 소작인을 중심으로 천여명의 동학진무군(東學鎭撫軍)을 편성하여 험준한 청계동 일대에 진을치고 난의 평정에 나서서 관군에 가담 협조함으로써 많은 토지와 재산을 지켰다. 이때 소년 안중근은 부친을 따라서 다년간 단련된 그의 용맹성과 놀라운 총술로 동학군을 해산하게 하여 인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악한 일본의 정치적 침략행동에 대해서 수시로 듣고 그 때마다 소년 안중근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의협심이 남달리 강하여 불의에 대하여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다.
안중근의 생애는 한말의 주체적 역량의 부족으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해져 국운을 겨우 부지하고 있던 시기로부터 시작되어 1910년의 실국(失國)의 비극을 보게 된 것과 함께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1875년 9월 운양호(雲揚號)사건이라는 교묘한 사건을 만들어 이것을 구실로 일찍부터 집요하게 침략근성을 내포한 수교를 요구하여 오던 일본은 그 다음해(1876) 2월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꾸준히 잠식적으로 침략과 약탈을 계속하여 오다가 동학란으로 인하여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하자 그들은 전면적으로 한국 침식의 준비를 갖추었었다. 그리하여 8월 20일에 일본공사 <오오도리. 大鳥圭介>와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 사이에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 7개조가 조인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의 단순한 상품시장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지배의 야망이었던 것이다.
구국전선(救國戰線)의 선두(先頭)에 나서서
안중근은 26세 되던 해에 집안이 평남 삼화군 진남포(三和郡 鎭南浦)로 이사하게 되자 가까운 평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보와 새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 및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 등에 의하여 정치사상을 함양하였으며 또 평양에 가서 항일지사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고무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고 외세의 터전이 된 비극의 풍토에서 일제를 비롯한 침략세력에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주먹을 불끈 쥐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은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05년 11월 10일에는 침략의 원흉 <이토오>가 다시 특파대사로 파견되어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군대의 삼엄한 경계와 포위 속에 덕수궁에서 어전회의가 개최되고 국중내부의 친일주구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주동으로 하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기묘한 협조로 그 달 17일에 조인을 하게 되니 이로써 우리나라는 외교권마저 박탈당하고 그 대신 일제의 통치기관이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나라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된 것이며 그 후 1910년에 체결된 합병조약은 다만 형식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침략(侵略)의 원흉(元兇)을 쓰러뜨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 날은 소위 일본 제국의 추밀원 의장이며 공작인 <이토오>가 일찍이 한국에서 발휘하던 그의 솜씨를 구사하여 노일간의 여러 문제와 만몽(滿蒙)의 이권을 담판하여 청국침략의 길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으로 하르빈에 이르러 노국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는 날이다. <이토오>가 통과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각 역은 삼엄한 경계에 휩싸였고 더구나 하르빈의 경비상태는 철통 같았다.
이날의 환영 준비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어서 수천의 러시아 군대와 의장대, 외국사절단 및 일본 거류민단의 도열과 장중한 국악과 경축화포의 터지는 소리는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이 환영식의 환희가 <이토오>의 장례식이 되고 경쾌하던 음률이 장송곡으로 변할 줄은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외에는 지구상에 아무도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9시 10분 <이토오>를 태운 러시아 철도국의 총독 특별 열차가 플래트홈에 미끌어져 들어와 가벼운 반동과 함께 멈추자 채가구(蔡家溝)를 무사히 지나 <이토오>의 운명은 이제 불가피 안중근 자신의 손으로 결정짓게 되었다.
<이토오>는 기차가 정거해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코코프체프>와 차안에서 약 25분간 회담한 후 그와 나란히 러시아 북경 주차공사(駐箚公使) <코로스도에프>, 일본총영사 <가와카미.用上俊彦>. 만철이사<다나카.田中淸次郞>,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등에 호위되어 만족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는 의장대 앞을 지나 각국 영사관 직원들이 도열한 앞으로 가서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러시아 장교단의 앞으로 서서히 발을 옮겼다.
이때 장교단의 뒤에서 초조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안중근은 전광석화와 같이 뛰어 나가서 브라우닝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이토오>에게 명중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원로, 백발의 정객은 욕심 많은 흉계를 가슴에 간직한 채 <다 틀렸다(시맛다)>라는 한 마디를 최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역만리 하르빈역에서 힘없이 거꾸러졌다. 계속하여 <가와카미>총영사와 <다나카> 만철이사, <모리>비서관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니 환영장은 일순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러시아 병정이 안중근에게 달려들어 붙잡으니 그는 순순히 권총을 내어주고 <코리아 후라. 大韓萬歲>를 3창하면서 포박당하였다.
이때의 안중근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리었으니 그것은 기쁨에 넘친 환희의 눈물이었다. 이윽고 한민족의 원수 <이토오>는 불의(不義)의 피를 흘리다가 약 25분후 완전히 지옥으로 사라진 것이다.
http://www.shahn3.com/html/bo/bo3.htm
안중근(安重根)
11世 祖 안휘(安犧) 여기에서 참고로 부기(附記)할 것은 이 할아버님의 아우이신 서령공(署令公 = 諱 ?)의 19대손이 바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이시다.
안의사는 이조말(李朝末) 한국침략(韓國侵略)의 원흉(元兇)인 일본통감(日本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射殺)하여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교란자(攪亂者), 야만(野蠻) 일본(日本)을 규탄응징(糾彈膺懲)하므로써 조국수호(祖國守護)와 동양평화(東洋平和)에 거대(巨大)한 공훈(功勳)을 떨치셨다.
안의사는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향년(享年) 32세에 조용히 순국(殉國)하셨다. 슬하에 준생(俊生), 현생(賢生) 남매를 두었으며 손자(孫子) 웅호(雄浩)가 있는데 미국(美國)에 거주(居住)한다. 그리고 현재(現在) 우리 순흥안씨 종친회장이며 대한민국(大韓民國) 독립(獨立)기념관장인 안춘생(安椿生)씨가 바로 안의사의 당질(堂姪)이시다.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 계보(系譜)=시조(始祖) 安子美*中略*4世 文成公 珦*中略*9世 ?判公 從信(派祖)* 中略*28世 祖 仁奎(一名仁洙)=鎭海縣監, 29世 父 泰勳=成均進士, 30世 重根=安義士, 31世 子 俊生, 32世 孫 雄浩=在美博士 (直系)
註:4世 文成公(諱 珦)의 26代孫, 9世 ?判公(諱 從信)의 21代孫임.
1. 안중근安重根)
O1급: 대한민국장
강우규(姜宇奎)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좌진(金佐鎭)김창숙(金昌淑)민영환(閔泳煥)서재필(徐載弼)손문(孫文)(중국인)손병희(孫秉熙)송미령(宋美齡)(중국여인)////안중근安重根)안창호(安昌浩)오동진(吳東振)윤봉길(尹奉吉)이강년(李康秊)이승만(李承晩)이승훈(李昇薰)이시영(李始榮)이준(李儁)임병직(林炳稷)////장개석(蔣介石)*중국인조만식(曺晩植)조병세(趙秉世)조소앙(趙素昻)진과부(陳果夫)*중국인진기미(陳其美)*중국인최익현(崔益鉉)한용운(韓龍雲)허위(許蔿) ====================계=29명
2. [벌열(閥閱)]
●절의(節義): 안중근(安重根) (한말구국운동(韓末救國運動) 및 순절제인(殉節諸人))
重根중근
己卯生一九○九年己酉十月二十六日(陽)
朝鮮侵略元兇伊藤博文哈爾賓射殺倭憲兵遠捕旅順監獄苦
一九一○年庚戌三月二十六日絞首刑
一九六一年辛丑三月一日建國功勞大韓民國章退敍
配安陵金氏父鴻燮夫沒廬墓三年仍居兆下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安從信안종신 |
叅判公(참판공) |
安進안진 |
安掄안륜 |
安世良안세량 |
安慮안려 |
安純福안순복 |
安孝信안효신 |
安淑覲안숙근 |
安瑠안류 |
安三春안삼춘 |
安義吉안의길 |
安信貞안신정 |
安震望안진망 |
安益暹안익섬 |
安聖宅안성택 |
安光得안광득 |
安起玉안기옥 |
安知豊안지풍 |
安定祿안정록 |
安仁壽안인수 |
安泰勳안태훈 |
安重根안중근 |
安重根義士 |
동생
安定根(안정근)
定根정근
甲申生 中國亡命 獨立運動活動 上海別世
建國功勞勳章 退敍
配 全州李氏
동생
安恭根(안공근)
恭根공근
己丑生 中國亡命 祖國獨立을爲하여 臨政에서
上海南京에서 活動하다가
重慶에서 別世
建國功勞勳章 退敍
配 光州李氏
父 안태훈(安泰勳) 母 백천조씨
父 안태훈(安泰勳)
泰勳태훈
進士
壬戌生 乙巳卒
○墓 信川 淸溪洞
配 白川趙氏 父濟弘 進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