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 오원명 『정토』 편집위원과의 대담 중에서
서암큰스님 (문경 봉암사 조실)
오원명: 교계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론으로서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는데, 스님께서는 돈오돈수와 돈오 점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서암스님: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목구비가 다 생겼지요. 커가면서 눈이 하나 더 생기고 코가 더 생기 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완전하게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완전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누군가 보호하여 키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어디가서 떨어져 죽거나 굶어 죽고 말겠지요. 따라서 부모의 정성과 사랑으로 따뜻하게 보호하여 키워야만 비로소 한 사람의 성인 이 됩니다.
비유하자면 돈오점수가 이와 같습니다. 결국 아기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완전한 사람과 똑같기는 하지만 그 상태로는 사람 구실을 못하고, 보호를 받고 자라야 어른이 되듯이,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도 일정한 수행과정을 거쳐야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방향을 확실히 알아 닦아 나가는 수행론이 돈오점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도(外道)들은 이 진리의 방향을 모릅니다. 도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내 마음을 깨치면 되는데, 외도들은 자신을 잊어 버리고 바깥에 의지합니다. 무슨 신이 나를 만들고 우주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죠. 이렇게 되면 진리의 근본에서부터 어긋나 버리게 됩니다.
'어느 신이 나를 만들었다' 자신이 우주의 핵심체다' 이 두 생각은 천양지차로 다릅니다. 앞의 생각은 돈오. 즉 깨달음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물을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치에도 안닿고 아무 근거도 없이 맹목적으로 추정하는 것이어서, 과학적으로나 이론적, 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 의하지 않은 깨달음은 출발부터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공부를 해봐야 성취 되지 않습니다. '돈오'란 깨침으로써 어린아이가 완전한 사람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성인의 상태로 비유할 수 있지요. 이를테면 어린아이를 놓아두고서, 돌덩어리나 나무 뿌리가 어린 아이인줄 알고 백날 키워봐야 사람이 안되는 것은 그 근본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오(품)는 완전한 진리를 파악한 것입니다. 어린애라고 사람으로서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점수라는 것은 자꾸 닦아서 완전하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알았더라도 스스로 수행하지 않으면 제대로 받아 쓰지 못함을 말하지요. 예로 어린애가 이목구비가 다 갖 추어져 있고 육신이 다 성장했다고해서 사람구실을 온전히 다하기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우리가 공부하면서 허무한 것이고, 몸 밖에 참으로 불생불멸하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육신의 허무한 이치를 잘 활용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몸에 대한 미련 을 갖게 돼요. 진정 허무한 것을 알았으면 누가 내 몸을 베려고한다 해도 선뜻 몸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고 몸에 대한 애착이 생겨 도사리게 되지요. 그것은 아직 점수가 되지 않아서 입니다.
이 몸이 불생불멸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마음대로 몸을 집어 던질수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잘 안되지요. 그러니까 공부를 해서 자꾸 행을 닦는데, 이 수행 공부가 돈오점수입니다. 돈오점수는 완전히 알아도 점점 닦아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돈오수는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어요.
맞은 편의 과녁을 겨냥하여 활을 힘차게 잡아 당기면 벌써 맞은 자리가 결정되고 맙니다. 그 자리는 누가 새로이 활을 당겨 쏠 수 없는 완전히 닦은 자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깨치는 동시에 완전히 할 일을 다해버린 경지이지요. 이렇게 되면 대근기라 할만 합니다. 그래서 옛날 조사 어른들도 깨치면서 그대로 할
(喝)을 했던 것입니다. 화살이 튕겨나와 과녁판이 찌그러진 다음에는 이제 내가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활시위를 당긴 다음에는 내가 낮잠을 자서 그 부분이 거 꾸로 서도 상관없고, 다시 더 닦을 필요없이 다 닦아버린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란 화살을 한번 쏘아 과녁을 틀림없이 맞춘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끊어짐과 같고,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일시에 물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지요. 이처럼 돈오수는 돈오, 즉 깨달음을 기본으로 하는 수행론으로서 더 이상의 깨달음이 있을 수 없는 단박에 깨치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공부입니다. 옛 조사 어른 들이 한번 척 알면 대번에 그 말이 공안도(公案道) 라서, 누가 목을 자른다 해도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치와 실제를 한꺼번에 닦는 돈오돈수라 말할 수 있지요.
깨달음으로 가는 그 방법에 이렇게 비유로써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살펴보았는데 현재 돈오돈수설이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기도 하지요. 이 외에 점오점수(漸悟漸修)가 있고, 점수돈오(漸修頓悟) 등의 7대 돈점이 있는데 그 설명이 각각 다르지요. 이 7대 돈점 중에서 점오점수는 뭐와 같으냐 하면 큰 고목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쓰러뜨리려 했을 때, 도끼로 한번 내리쳤다고 해서 넘어가지는 않지요. 한 번 친 것 만큼 끊어져 나가고, 두 번 치고 세 번 치고 해서 백 번. 천 번 치다 보면 마지막에는 넘어가 버리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때 깨달음과 행이 동시에 다 된 것입니다. 고목나무가 한 번 쳐서 다 안넘어가더라도 내리친 것 만큼 넘어갔고, 그렇게 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 힘이 모아져 넘어간 것 처럼 점점 닦아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이 점오점수라는 것 입니다.
오원명:점오점수의 수행론은 깨달음과 닦음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군요.
서암스님: 그렇지요. 한번 탁 쳐서 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친 것만큼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쳐서 나무가 넘어갔다고 해서, 마지막에 친 것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고 여러번 친 힘이 모두 합해져서 넘어가는 과정을 점오점수라 비유할 수 있지요.
오원명: 점오돈수도 있습니까?
서암스님 아, 있지요.
점오돈수는 내가 점점 깨달음을 얻는 것이지요. 점점 깨닫는 것은 완전히 깨닫는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점점 깨닫는 것만큼 완전히 닦아 깨달음에 들어가는 수행이 점오돈수지요. 비유하자면, 밥을 한 숟가락 먹었다 하면, 한 숟가락이라 해서 아무 것도 안먹은 것과 같을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밥을 한 숟가락 먹으면 한 숟가락 먹은 만큼 배가 부르고, 또 한 숟가락 먹음으로 해서 더 배가 부르듯이, 이제 점점 수행을 닦아서 모아가면 마지막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 점오돈수입니 다.
오원명: 깨달음과 닦음에 대한 논쟁이 상당한데 그 논쟁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서암스님: 논쟁이 나와봐야 알지, 그냥 무조건 어느 것이 옳다고 볼 수 없는 일이지요. 논쟁할 때 그 상황에 따라서 논쟁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논쟁에 대한 견해를 말할 수 없어요.
오원명:교계에서는 해인사 성철스님께서 돈오돈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서암스님: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을 말하는군요. 송광사쪽, 보조불일선사는 견성을 먼저 하고 닦는다 해서 돈오점수를 말씀하셨는데, 이제 성철스님은 조사 가풍에는 돈오돈수지 돈오점수 있을 수 없다. 즉, 한 번 깨치면 더 깨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지요. 이러한 의견은 이제 그 주장하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어요. 아무튼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한번 딱 깨치면 그대로 부쳐여서 더 이상 닦을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그런 경지를 자기 스스로 체득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한테는 돈오돈수가 맞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돈오점수 쪽에서는 내가 분명히 부처되는 이치를 깨달아 알았지만 당장 부처님처럼 될 힘이 없으니 차차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다시 돈오돈수 쪽에서는 그렇게 하면 잘못된 수행이다. 깨달았으면 다 된 것이지 따로 닦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둘이 서로 싸울만한 수행방법론이고 또 싸 워봐야 시비가 가려지겠지요.
오원명: 스님께서는 저마다 다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 입장이신가요?
서암스님: 아니지요. 그것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지요. 그것은 깨달은 사람의 말씀만 시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즘 학자들이 얘기하는 논쟁은 그저 희담 밖에 안되고 있어요.한번 생각해보세요. 성철스님의 말씀이 옳은지, 안옳은지는 성철스님 이 되어봐야 알 수 있지요. 옆 사람이 시비를 가린 다고 판정되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성철스님께서 '한번 깨쳐 꿈을 깼으면 되는 것이지, 꿈을 깬 뒤에 꿈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 깨어 있으면 됐지, '한번 깨치면 부처가 됐지 따로 부처 가 될 까닭이 어디 있느냐'하시는 말씀 등은 다 돈오돈수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문제는 그런 경지에 이르렀는지 안이르렀는지는 진정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서 대결해 봐야 아는 것인데 그렇게 싸울만한 사람이 안나타난 것입니다. 싸움이 본래 그렇잖아요. 내가 돈오해서 닦을 행위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부처가 다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실력 대항을 해봐서 그렇게 되었다면 성철스님 말씀이 틀림 없는 것이고, 자기가 돈오해서 그렇게 안되었다면 그것은 자기와 안맞는 말이겠지요.
돈오해서 생사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안고 자유자재하다면 그 말이 옳지만 만약에 그렇게 안됐다면 돈오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돈오했다면 일체법에 자신만만하게 대항하고, 자 재하는 입장인데 돈오점수 쪽에서 견성을 하기는 했는데 신통도 안되고, 자기 완성이 안되었으니 좀 더 닦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 를 하지못한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소리지요.
월간정토 7월호에서 전재
199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