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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을 죄악처럼 증오한다.“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사회민주당 당수(1913-19), 독일국 대통령(1919-1925).
7. 빗자루와 카메라
공산당이 109석을 얻었든, 거리와 공장에서 난동을 부렸든, 어쨌든 정부는 세워야 했습니다. 독일 정치는 자주 무너졌지만, 장관 명단을 인쇄하는 기술만큼은 여전히 훌륭했습니다. 제국의 관료제는 혁명보다 오래 살았고, 위기보다 더 자주 복사되었습니다.
1930년 7월 총선 이후 정계에는 온갖 산술식이 난무했습니다. 우선 대전제는 분명했습니다. KPD와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나치와도 당연히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습니다. 공산당은 공화국을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가면이라고 불렀고, 나치는 이제 그 가면을 벗기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술병과 몽둥이로 얼굴을 망가뜨린 상태였습니다.
DNVP와도 정부를 구성하기 어려웠습니다. 영 플랜을 비준한 이래, 후겐베르크의 DNVP는 단순한 보수정당이 아니라 독일 의회정치가 아직도 1918년 11월의 굴욕을 씹어 삼키지 못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건전한 보수주의자”로서 공화국 정치가들과 협력하자는 이들은 이미 1930년 초 보수인민당(Konservative Volkspartei, KVP)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살림을 차렸습니다. 보수주의자들조차 후겐베르크의 신문제국 안에서 계속 살다가는 자기들도 활자가 되어버릴 것을 깨달은 셈이었습니다.
SPD부터 DVP와 바이에른인민당(BVP)까지, 좌파에서 중도우파를 아우르는 대연정은 산술적으로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정치가 산술보다 무례하다는 점이었습니다. SPD는 더 이상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오토 벨스(Otto Wels)와 아르투어 크리스피엔(Arthur Crispien) 등 중도마르크스주의자들로 구성된 공동의장단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공산당에게 노동자들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당 총리 밑에 들어가 실업보험을 깎고 예산 긴축안에 서명하는 일은, 당원증을 들고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은 길은 하나였습니다. 중앙당, DDP, DVP 등 중도파와 중도우파가 내각을 구성하고, SPD가 그것을 “지지”하지는 않되 “용인”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그럴 거면 비르트가 무너지기 전에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냐”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언제나 그렇듯,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학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문에는 책임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SPD가 용인할 수 있으면서도, 내각이 유지될 만큼 너무 좌파적으로 보이지 않는 후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습니다. 초반에는 요제프 비르트의 재등판이 가장 유력하게 검토되었습니다. 비르트는 공화국의 언어를 알았고, SPD가 최소한 들을 수 있는 문장을 말할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그 문장을 힌덴부르크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SPD의 용인을 받는 소수내각이 입법을 통해 제대로 통치하려면 결국 바이마르 헌법 제48조, 즉 대통령 비상대권에 기대야 했습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이미 비르트에 대해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노인은 공산당을 싫어했지만, 비르트를 좋아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독일 정치는 늘 절박했지만, 힌덴부르크의 취향은 더 오래 버텼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선택된 것은 더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 이미 네 차례나 총리를 지냈던 중앙당 원로였습니다. 위대한 새 출발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서랍에서 다시 꺼낸 양복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이라는 기이한 이름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가톨릭 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다섯 번째로 해석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독일이 또 한 번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고른 가장 덜 흥분되는 선택이었습니다.
2년 반 만에 돌아온 마르크스 총리는 집무실에 앉자마자 공산주의자들의 공장점거와 가두폭동, 자본가들의 공장폐쇄, 그리고 여전히 골칫거리인 SA의 몽둥이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세상은 마르크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총리직은 그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독일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배달해주는 우편함을 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중 가장 위협적인 것은 KPD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문어발처럼 뻗어 있는 그들의 각종 세포조직들이었습니다. KPD는 더 이상 의회에서 고함을 지르는 정당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RGO는 공장 안으로 들어갔고, 실업자위원회는 구호소 앞에 섰으며, RFB는 거리의 어두운 모퉁이를 기억했습니다. 당 신문은 분노를 인쇄했고, 청년조직은 그 분노를 배달했습니다. 협동조합 회의, 노동자 스포츠클럽, 세입자 모임, 폐쇄된 공장문 앞까지, 공산당은 국가가 느리게 도착하는 곳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총리의 명줄을 쥐고 있는 힌덴부르크는 생각했습니다. 왜 권한을 줬는데도 저 무도한 빨갱이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만약 그 말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각하처럼 모든 일을 쉽게 생각하면 얼마나 인생이 편하겠습니까.
물론 그는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총리가 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절제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대통령이 당신의 내각을 내일 아침 해고할 수 있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 언제나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잘릴 수는 없었습니다. 1929년 5월, 정말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은 선택은 불과 1년여 뒤 KPD가 원내 제2당이 되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정말로 치명적이고 재기불가능한 타격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줄 집단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국군(Reichswehr).
국내 급진세력 진압에 군을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정치인인 마르크스에게 안 그래도 경제적 파탄을 겪는 나라에 내전까지 선물하겠다는 뜻과 같았습니다. 게다가 ‘국가 안의 국가’로 불리는 군부에게 그런 커다란 빚을 져버린다면, 빨갱이들을 때려잡고 난 뒤의 공화국은 다시 옛 프로이센의 그림자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이 싫다는 이유로 공화국을 장군들의 예비역 모임에 담보로 잡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은 실제 역사의 브뤼닝 내각의 ‘부드러운 버전’이 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절충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우물쭈물하느라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긴축정책을 펼치고 복지비용을 줄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ADGB와 기독교 노조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실업 구제를 위한 공공근로사업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회계장부의 적자를 걱정했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했고, 기업가에게는 조금만 책임져달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너무 차갑다고 했고, 기업가들은 정부가 너무 물렁하다고 했습니다. 마르크스 내각의 장점은 모든 사람이 정부를 조금씩 싫어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단점도 같았습니다.
정부가 아무것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면 거리의 정치가 지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에 정말로 공산혁명이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습니다. 신문은 매일 새로운 붕괴를 발견했고, 카페의 남자들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내전을 예언했습니다. 실업자는 줄을 섰고, 상점 주인은 계산대를 닫았고, 중산층은 누가 자신들의 아파트 계단을 지켜줄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대 인물들의 주관적 판단과 달리, 독일이 정말로 공산혁명 직전이었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1930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확보한 득표율은 19% 남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80%의 유권자는 독일을 적색 공화국으로 만드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을 전부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리자”고 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독일인은 혁명보다 안정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독일은 대전쟁 말기의 파탄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대공황의 여파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루르 강점과 초인플레이션을 넘긴 뒤 몇 년간의 호황은 독일에 꽤 많은 수혜층을 만들었습니다. “먹고 살 만했던” 시절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다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때 자연스럽게 내놓는 반응은 “그래, 뒤집어엎자!”가 아니었습니다.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자.
그 말이 더 흔했습니다. 혁명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안정은 과거를 약속했습니다. 과거는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이 중산층과 숙련노동자 계층의 안정에 대한 갈망은 정책으로 해갈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숫자, 장관의 연설, 총리의 신중한 표정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장 눈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더 이상 무절제한 폭력과 불확실한 미래에 맞닥뜨려 벌벌 떨며 문을 걸어잠그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절실했습니다.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는 실질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신기루로 덮어버리는 데 전문가였습니다. 1884년생인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독일 연극계의 스타였고,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배우, 연출가, 극작가, 영화감독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공화국 수립 이후로는 DDP의 ‘얼굴’이었습니다. 다른 정치인들이 강령을 읽을 때, 도리나는 조명을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대중을 설득하려 할 때, 도리나는 대중이 어떤 표정을 보고 싶어 하는지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DDP와의 연합이 진지하게 거론되던 청년독일인기사단(Jungdeutscher Orden)의 가치를 새롭게 재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단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아르투어 마라운(Artur Mahraun)은 우익이면서도 공화국 질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계급갈등을 독일민족의 대단결로 극복하자는 파시즘스러운 주장을 하면서도, 그 결론은 정책적 타협과 공화국-반공화국 세력의 화해로 귀결되었습니다. 위험해 보이는데, 막상 끝까지 들으면 회의록이 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애매한 스탠스는 막스 폰 프렌츨라우 대령의 입장과 기묘하게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브란덴부르크 출신의 전형적인 프로이센 참모장교였던 그는 1916년 베르됭의 지옥과 1919년의 난장판을 겪은 뒤, 매우 독일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공화국이 현재의 사실이라면, 대단한 반혁명을 꿈꾸기보다는 독일을 위해 공화국에 충성한다. 공화국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독일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분간 공화국이라는 불편한 그릇을 깨지 않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막스는 친구 도리나에게 적극적으로 바람을 넣었습니다. 도리나는 대부분의 DDP 당원들처럼 처음에는 기사단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명색이 자유주의 정당이 당세가 기울어간다고 거리의 제복정치와 결합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을 리 없었습니다. 남성성을 숭상하는 데다, 근본부터가 자유군단(Freikorps)의 하위조직이었던 기사단과 손잡는 것은 추레한 산도적에게 약탈혼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도리나는 이미 1928년에 외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1년 초의 기사단은 이전의 기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우익 단원들이 빠져나간 뒤, 기사단은 그저 제복을 입고 등산을 다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어색하니 길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독일민족이 단결해서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는 집단이었습니다. 위험한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대부분 지쳐 있었습니다. 독일 정치에서 지친 제복은 아직 상품성이 있었습니다.
막스의 말을 들은 도리나는 곧바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DDP의 점잖은 교수님들을 도리나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회의록에는 “심도 있는 논의 끝에”라고 적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정치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심도 있는 논의란 누군가가 세 시간 동안 반대하고, 누군가가 마지막 10분 동안 현실을 설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DDP는 기존에 논의되던 국민자유주의 성향의 DVP, 자유협동조합주의 정당인 경제당(Wirtschaftspartei, WP)과의 삼당합당에 성공했습니다. 자유국가당(Freie Staatspartei, FStP)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 세력을 규합하는 어려운 숙제를 끝내고 나자, 기사단과의 연합 문제도 예상보다 금방 합의되었습니다. 한 번 문턱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습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의사결정이 느리기로 유명했지만, 절벽을 본 뒤에는 꽤 빨리 걸었습니다.
도리나는 곧바로 기사단을 “팔리는” 조직으로 만드는 방법을 실행했습니다. 기사단 산하의 봉사단체라는 명목으로, 국민생활의 질서 수호를 위한 청년단(Jugendbund zum Schutze der Ordnung des Volkslebens)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어답게 길었고, 관료답게 엄숙했으며, 대중이 외우기에는 불친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 짧게 줄여 질서단(Ordnungsbund)이라고 불렀습니다.
질서단은 RFB와 SA의 난동이 끝나고 나면 깨진 유리창을 청소하고, 망가진 거리를 수리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혁명도 반혁명도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들은 빗자루와 양동이, 판자와 못, 붕대와 수프통을 들었습니다. 독일 정치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물건들이었습니다.
막스가 본 것은 제복도, 등산도, 공허한 민족구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명령을 받을 준비가 된 청년들, 주소가 적힌 명부, 행진보다 덜 위험해 보이는 규율, 그리고 국가가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회색지대를 보았습니다. KPD가 공장과 구호소에 당번표를 붙이고 있다면, 공화국도 언젠가 자기 당번표를 가져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공화국의 이름으로 붙일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사라는 단어가 필요했습니다.
막스가 끌어온 군 주변의 돈, 정확히 말하면 쓸데없이 돈만 많은 늙은 장군들과 예비역 후원자들의 정치자금이 질서단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 돈으로 단원들에게 소정의 수고비를 줄 수 있게 되자, 직업을 못 구했지만 그렇다고 RFB나 SA에 가담할 정도로 막 나가기는 싫었던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들은 혁명가가 되기에는 겁이 많았고, 깡패가 되기에는 부모가 너무 가까이 살았습니다. 질서단은 바로 그런 청년들을 위한 조직이었습니다.
물론 RFB나 SA가 질서단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았습니다. RFB는 질서단을 “부르주아의 이익에 봉사하는 반동집단”이라고 불렀습니다. SA는 “민족단결을 말하며 나약한 정치인들에게 민족을 팔아먹는 집단”이라고 불렀습니다. 양쪽 모두 질서단을 싫어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질서단은 중도층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처럼, 자신이 혐오하는 이들이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한번은 긍정적인 관심을 가져볼 만했습니다.
곤봉 대신 빗자루를 든 이들은 언제나 맞고 다녔습니다. RFB는 그들을 쓰러뜨렸고, SA는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RFB나 SA가 거리에 나오면 창문과 문을 걸어잠그던 다수의 보통 독일인들이, 질서단이 얻어맞고 오면 대문을 열어 붕대를 감아주고 점심을 차려주었습니다.
SA가 오면 사람들은 커튼을 내렸습니다. RFB가 오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안으로 불렀습니다. 질서단이 오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문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 분 뒤, 빗자루 하나를 더 내주었습니다.
도리나는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찍어 배포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연예인이자 종합예술인인 그녀의 세련된 감각이 더해지자, 곤봉으로 얻어맞는 비참한 장면마저 시청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했습니다.
거리의 난동꾼들이 혼란을 가져올 때, 누군가는 깨진 유리창을 치운다. 독일의 아들들이 짓밟히고 있을 때, 여러분은 무얼 할 것인가?
이 프레임은 단순하고도 강했습니다. 질서단원들은 싸움만 났다 하면 얻어맞고 도망치기 바쁜 오합지졸들이었지만, 생활은 곤란하고 나라를 뒤집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가뭄의 단비였습니다. 독일 중산층은 영웅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자기 빵집 앞 유리 조각을 치워줄 사람을 요구했습니다.
수백만의 단원을 보유한 공화국 방위조직이라고 자랑하던 흑적금국기단도 나름의 역할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너무 자주 행진과 방어와 충돌의 언어에 갇혀 있었습니다. 질서단은 시작부터 다른 물건을 들었습니다. 깃발보다 빗자루, 연설보다 붕대, 행진보다 깨진 유리창이었습니다.
그 결과 질서단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진작에 모체인 청년독일인기사단의 단원 수를 뛰어넘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마라운은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자기 조직의 아이가 너무 빨리 자라 부모의 성을 헷갈리게 만드는 상황이었습니다.
우익의 문법을 사용하고, 민족을 말하며, 실제로 중도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제복조직이 탄생하자, 이제는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치가 SA에게 잡아먹힌 깡패집단으로 전락한 뒤, 다시 DNVP의 반동주의자들에게라도 돌아가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보수혁명주의자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질서단과 기사단이 손잡은 “자유주의자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들 눈에 자유주의자는 독일의 아름다운 전통을 훼손하고, 프랑스인들이나 즐길 법한 의회의 협잡질에 조국을 맡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유기체적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복무하고, “도덕”으로서 독일민족을 중흥시키는 모습은 보수혁명주의자들의 이상 그 자체였습니다. 비유하자면, 며칠 밤낮을 굶으며 황무지를 배회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고급 레스토랑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레스토랑의 간판에 “자유”라고 적혀 있었다는 점뿐이었습니다.
그 무렵 히틀러를 비난하는 데에도 슬슬 신물이 나던 쿠노 백작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8. 비상, 비정상
1931년 6월 20일,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미국 대통령은 전쟁배상금 지불과 전시부채 상환 의무를 1년간 유예하자는 선언을 내놓았습니다.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엄(Hoover Moratorium)이었습니다. 독일에게는 큰 숨통이었습니다.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은 구원 같은 말을 믿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회계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만큼은 베를린의 재무관료들이 펜을 잠시 내려놓고, 아직 세상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을 부유하게 만들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의 낙관은 이미 전후 혼란과 대공황이 가져가버렸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더 소박했습니다. 다음 분기까지 국고가 비명을 지르지 않고, 다음 달까지 실업자 구호비가 지급되며, 다음 주까지 외국 은행가들이 독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대 초 독일의 정치에서 그것은 거의 야심찬 목표에 가까웠습니다.
게오르크 치머만 재무차관과 빌헬름 ‘빌리’ 슈타들러(Willy Stadler) 외무차관은 공화 독일의 숨통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치머만은 스위스 로잔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어떻게든 배상금 지불 중단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독일은 이미 지불능력의 끝에 가까웠고, 실업자는 늘었으며, 은행은 떨고 있었고, 국고는 날마다 얇아지고 있었습니다. 치머만에게 배상금 유예는 외교적 승리가 아니라, 독일이라는 환자의 호흡을 한 계절 더 붙잡아두는 산소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자신들의 전시부채도 계속 모라토리엄 해준다면 독일 배상금 문제를 검토해볼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말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국제금융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빚을 졌고, 그 누군가는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습니다. 문제는 독일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파리와 런던이 “검토”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베를린에서는 실업자가 줄을 섰고 은행 창구 앞의 표정이 굳어갔습니다.
슈타들러가 맡은 임무는 제네바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군축회의였습니다. 그가 받아내야 했던 것은 베르사유 조약상 국군 병력 및 무장 제한의 일부 완화, 다시 말해 부분 재무장이었습니다. 마르크스도 슈타들러도 군국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좌우에서 얻어맞는 내각은 우익이라도 만족시킬 무언가를 얻어내야 했습니다. 배상금에서는 양보하고, 긴축에서는 국민에게 고통을 요구하면서, 국방문제에서조차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마르크스 내각은 그날로 후겐베르크의 신문과 철모단의 연설 속에서 매장될 것이었습니다. 슈타들러는 독일민족의 영광을 외치는 자들과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자들을 똑같이 혐오하는 건조한 인간이었지만, 국가가 상징 없이 버틸 수 없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은 점잖았습니다. 거절하는 문장에도 예의를 충분히 묻히는 나라답게, 영국 대표단은 프랑스처럼 날카롭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습니다. 독일에게는 아직 더 많은 군대가 허락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보기에는 독일의 거리에서 KPD가 109석의 이름으로 행진했고, RFB와 SA가 몽둥이를 휘둘렀으며, 정부는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라에게 재무장을 허락하는 것은 프랑스식 상식으로는 정신 나간 짓이었습니다. 독일식 상식으로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재무장이 필요했습니다. 같은 사실을 놓고도 양국은 서로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외교는 이견을 몰라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를 정확히 이해한 뒤에도 물러서지 못할 때 더 깨끗하게 실패했습니다.
결과는 마르크스 내각에게 또 하나의 실패였습니다.
우파는 말했습니다. 배상금은 못 없애고, 군대도 못 늘리고, 세금만 늘린다. 좌파는 말했습니다. 실업자는 굶기면서 장군들에게 새 장난감을 사주려 한다. 마르크스 내각은 또 모두에게 조금씩 미움을 받았습니다. 독일 정치에서 이 정도의 균형을 달성하는 내각은 흔치 않았습니다.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은 모든 진영을 거의 같은 정도로 화나게 하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통령 힌덴부르크도 사실상 살아 있는 재난이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 내각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는 의회정치 전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서명해야 하는 문서가 자꾸 의회정치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문제는 동부에서 터졌습니다. 1926년 낙후된 동부 농촌지역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동부구호정책(Osthilfe)이 실제로는 잘못된 예산집행과 정치적 편의 속에서 융커들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공화국은 이미 실업자에게 참으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동부 대지주들에게만 국고가 한없이 관대하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 정부가 가진 마지막 도덕적 권위마저 허물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구상한 새 프로그램은 융커 소유의 농지를 지정가격으로 사들여 그들이 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토지를 현금화하고, 낡은 동부 농촌귀족을 근대 경제로 밀어 넣는 정책이었습니다. 쿠노 백작처럼 실제로 영지를 팔아 산업계의 큰손이 된 이들은 그 방향이 옳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르크스를 도와줄 의리는 없었습니다. 방향이 옳다는 것과 공개적으로 그 방향을 지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특히 동부의 친척들이 저녁식사에서 당신을 배신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융커들은 대폭발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보조금을 주면 조국이었고, 토지에 손을 대면 빨갱이였습니다. 힌덴부르크의 친구이자 동부 융커의 대표적인 얼굴인 엘라르트 폰 올덴부르크야누샤우(Elard von Oldenburg-Januschau)는 곧바로 대통령을 충동질했습니다. 총리가 농촌볼셰비키주의자(agrarbolschewist)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브뤼닝을 빨갱이라고 부른 사람이 마르크스라고 그렇게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비상대권을 시혜로 생각하던 힌덴부르크는 곧바로 조치에 나섰습니다. 긴급명령에는 조건을 달았고, 장관 인선에는 불평했으며, 온갖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치를 싫어한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그가 싫어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 정치였습니다. 그는 당파를 경멸했지만, 자기 기분을 국가적 판단으로 바꾸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너그러웠습니다.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은 헌법 제48조의 서명을 필요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 서명이 한 나라의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한 노인의 기분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르크스 내각은 SPD의 인내심과 힌덴부르크의 서명, 두 개의 얇은 기둥 위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만 흔들려도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힌덴부르크는 매우 잘 흔들리는 기둥이었습니다.
1932년 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제도권 정당들은 마침내 힌덴부르크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오른쪽의 히틀러와 왼쪽의 텔만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정당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힌덴부르크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히틀러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했고, 나치는 SA와 분열과 실패한 반공쇼의 냄새를 아직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막아야 할 것은 KPD에서 나온 헤르만 레멜레(Hermann Remmele)였습니다. “500일 계획”의 그 레멜레.
그렇다면 왜 자신들이 이 노망난 늙은이의 기분을 7년이나 더 관리해야 한단 말인가. 중앙당과 BVP, FStP의 상당수 인물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힌덴부르크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 생각 자체가 힌덴부르크에게는 거의 반역이었습니다.
힌덴부르크는 원역사에서 그랬듯, 선거가 아닌 “의회에 의한 임기 연장”만을 받아들이겠다고 강짜를 놓았습니다. 그에게 천한 서민들의 표를 다시 받는 일은 모욕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그는 독일을 위해 희생하는 심정으로 대통령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힌덴부르크의 희생은 늘 남들이 먼저 간청해주어야 시작되었습니다.
중앙당과 자유국가당의 대답은 후보 제출이었습니다. 그들은 칼 야레스(Karl Jarres)를 내세웠습니다. 야레스는 뒤스부르크 시장으로 프랑스군의 루르 강점 때 저항을 주도했고, 제1차와 제2차 마르크스 내각에서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1925년 대선 1차투표에서는 38%의 득표율을 기록한 바 있었습니다. 그는 구세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도권 정당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독일은 구세주를 너무 많이 겪었고, 그때마다 장부가 나빠졌습니다.
민족주의 우익은 히틀러 대신 철모단 지도자 프란츠 젤테(Franz Seldte)를 내세웠습니다. 히틀러는 더 이상 우파 전체가 걸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리쳤지만, 너무 많이 틀렸고, 너무 자주 망신당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주변에는 아직도 술 취한 갈색셔츠들이 너무 많이 보였습니다. 젤테는 적어도 제복이 단정했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과거가 아직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습니다.
SPD는 그들 나름대로 프로이센 주총리 오토 브라운(Otto Braun)을 선거에 내보냈습니다. 브라운은 대통령이 될 가능성보다, SPD가 아직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힌덴부르크는 잔뜩 토라져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정계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모두가 자신에게 와서 원수님 없이는 독일이 끝장난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판단해야 했습니다. 불행히도 독일 정치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위기를 겪은 탓에, 한 노인의 감정노동에 예전만큼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는 달랐습니다.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의 뜻을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힌덴부르크가 내일 자신의 뜻이라고 믿게 될 문장을 오늘 밤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어심’을 보았고, 그 어심을 정치적 무기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제도권 정당들은 대통령 없이도 공화국을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슐라이허는 그들에게 대통령궁이 아직 독일 정치의 문손잡이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 했습니다.
1차투표에서 야레스는 선전했습니다. 브라운도 SPD의 체면을 지켰고, 레멜레는 KPD의 분노를 전국적 숫자로 바꾸었습니다. 젤테는 우파 표를 일정하게 갈라먹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과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독일 민주주의는 또다시 결선으로 향했습니다. 결선은 선택을 명확히 하라고 만들어진 절차였지만, 바이마르에서는 협박을 정교하게 만드는 시간으로도 쓰였습니다.
슐라이허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군 주변에서는 야레스가 국군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보수언론은 브라운과 레멜레의 결선 위험을 과장했습니다. 산업계에는 야레스가 중도정당의 허약한 타협일 뿐이며, 독일이 더는 회의록으로 버틸 수 없다는 이야기가 흘러들어갔습니다. BVP와 중앙당 우파에는 원수 없이 레멜레를 막을 수 있겠느냐는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젤테의 참모들에게는 철모단의 명예가 힌덴부르크의 명예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 정중하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모든 말은 각기 다른 입에서 나왔지만, 문장은 비슷했습니다. 원수가 나서야 한다. 나라가 부른다.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야 한다. 힌덴부르크는 독일을 위해 다시 희생해야 한다. 그 “나라”의 목소리를 가장 부지런히 흉내 낸 사람은 슐라이허였습니다.
야레스는 버티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도권 정당들은 선거를 이기는 것보다 대통령궁과 군부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젤테는 사퇴했고, 우파 표는 힌덴부르크에게 모였습니다. 야레스도 끝내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차투표는 사실상 힌덴부르크와 레멜레의 대결이 되었습니다. 500일 안에 독일을 적화시키겠다는 후보를 이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다수는 힌덴부르크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레멜레의 달력을 더 싫어했습니다.
힌덴부르크는 재선되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슐라이허가 나라의 목소리를 흉내 낸 뒤 그 소리를 힌덴부르크의 귀에 아주 정중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재선 직후 힌덴부르크는 마르크스 내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내각은 자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기를 충분히 간절하게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내각이었습니다. 헌법상 이유는 나중에 붙이면 되었습니다. 바이마르 헌법에는 이유를 붙일 종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의 불충을 심판했습니다.
SPD는 지쳤고, 힌덴부르크는 토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도 이제 가야 했습니다. 제5차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독일이 조금 더 점잖게 망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그 정도면 바이마르에서는 꽤 성실한 성과였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사람은 힌덴부르크의 ‘카마릴라(Kamarilla)’ 일원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이었습니다.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총리에 임명되어 이른바 ‘남작들의 내각’을 세웠습니다. 파펜은 총리가 되기에는 너무 가벼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무거운 사람은 자기 무게를 가졌고, 파펜은 남의 손에 들기 좋았습니다.
제도권 정당들은 당장 불신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파펜은 그들이 절차를 시작하기 전에 제국의회 해산과 조기총선을 선포했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선거전술이 아니었습니다. 파펜은 의회 안에서 버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의회 앞에서 물러나버렸습니다. 이미 해산된 의회가, 이미 선거를 향해 해산된 상황에서, 다시 총리에게 불신임을 행사한다는 것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습니다. 총리는 아직 총리였지만, 그를 끌어내릴 의회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파펜은 그렇게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끌어내릴 자리를 없앴습니다. 두 달 동안 그는 아무도 제대로 건드릴 수 없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독일 민주주의는 절차를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절차가 너무 정확하게 작동한 탓에, 권력을 견제할 손잡이가 잠시 사라졌습니다.
파펜 뒤의 실력자는 슐라이허였습니다. 그는 국군장관으로 입각했습니다. 파펜 내각의 등은 비어 있었습니다. 슐라이허는 그 등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측근들을 내각 곳곳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쿠노 백작이었습니다.
쿠노에게 주어진 직책은 국민질서 및 청년동원 담당 특임장관이었습니다. 애매한 직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매한 직책은 명확한 직책보다 더 멀리 뻗을 수 있었습니다. 명확한 장관은 명확한 책임을 졌지만, 애매한 장관은 책임의 테두리를 흐리며 여러 문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쿠노는 총칼을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총칼을 선물 포장지에 싸 고급스러워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1930년 이후 내무관료, 군 연락장교, 대통령궁 법률고문들은 선거폭력과 공장점거, 주정부 불복종 사태에 대비한 여러 장의 종이를 이미 만들어두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내각은 그 종이들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비상권에 의존하면서도 비상권이 국가의 평상언어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파펜 내각은 달랐습니다. 서랍은 열렸고, 빈칸에는 날짜가 적혔습니다.
방아쇠는 루르에서 당겨졌습니다. 임금체불과 폐쇄 위협이 겹친 몇몇 제철·광산 시설에서 RGO와 KPD계 공장위원회가 점거를 확대했습니다. 공장문에는 당번표가 붙었고, 식당과 구호소에는 적색완장을 찬 청년들이 나타났습니다. 철도노동자 일부가 연대파업을 논의한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프로이센 SPD 정부는 군 투입에 신중했습니다. 오토 브라운과 프로이센 내무관료들은 공장문 앞에 군대를 세우는 순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슐라이허와 보수언론은 그 신중함을 곧바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소극성. 무능. 공산당에 대한 묵인. 프로이센 경찰이 공공질서를 당파적으로 운영한다는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베를린의 대통령궁에서는 같은 문장이 더 단정한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국은 선거의 자유와 공공질서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주정부가 그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면, 제국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쿠노는 막스 폰 프렌츨라우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는 도리나 리하르츠슐러도 있었습니다. 7화에서 질서단을 카메라와 빗자루로 독일 중산층의 보호본능 속에 밀어 넣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쿠노는 공산당 대선후보 레멜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백작은 장갑을 벗으며 웃었습니다.
레멜레에게는 500일이 필요했던 모양이오. 우리는 한 달이면 되오.
막스는 웃지 않았습니다. 도리나도 웃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했습니다. 무언가를 세우기에는 부족했지만, 무언가를 무너뜨리기에는 넉넉했습니다.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경악 안에는 불편한 안도도 섞여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습니다. 군대가 공산주의자들과 돌격대원들을 짓밟으면, 온건파는 군의 잔인함을 비판하며 옳은 소리를 하면 되었습니다. 얼마나 편한 일입니까. 독일에서 자유주의자를 한다는 건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기술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거의 동의어였습니다.
다음 날, 헌법 제48조에 근거한 대통령 비상명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공공안전 및 질서 회복을 위한 대통령령(Verordnung des Reichspräsidenten zur Wiederherstellung der öffentlichen Sicherheit und Ordnung)‘이었습니다. 선거기간 중 공공질서 위협을 해소하고, 반국가세력 KPD와 그 연계조직의 공장점거 사태를 해결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문장은 단정했습니다. 단정한 문장은 폭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독자를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신문에서는 ”비상상태(Ausnahmezustand)“라고 불렀고, 좌파는 좀 더 직접적인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계엄령(Kriegsrecht)”.
이 비상명령은 RFB와 SA의 공개활동을 금지했습니다. 정치제복, 준군사행진, 무장집회, 공장점거, 철도 및 우편시설 점거 시도는 모두 엄단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요 산업지대와 대도시에는 군경합동 지휘체계가 설치되었습니다. 지방경찰이 명령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는 경우, 라이히 차원의 직접개입이 가능하다는 조항도 붙었습니다. 명목상 좌우 극단을 함께 겨냥한 조치였습니다. 대통령궁은 균형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균형은 집행되는 순간 늘 방향을 가졌습니다.
기껏해야 곤봉이나 싸구려 권총으로 무장한 준군사조직들은 기관총과 장갑차로 무장한 군대가 움직이자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모든 곳에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병력도, 그럴 의지도 없었습니다. 대신 표적을 골랐습니다. 점거된 공장, 철도분기점, 우편시설, RGO가 강한 산업지대, RFB가 공개적으로 집결한 거리였습니다. 군대는 정면을 열었고, 프로이센 경찰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대통령궁과 보수언론에게 공산당에 무르다고 공격받던 프로이센 경찰이, 이제 국군의 뒤를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RFB 지부는 폐쇄되었고, 인쇄소는 수색당했으며, 공장문 앞의 당번표는 찢겨나갔습니다. 몇몇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저항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총격은 짧았습니다. 군대가 장갑차를 세우고 기관총을 보이자, 적색완장을 찬 청년들은 자신들의 용기가 금속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사상자는 곳곳에서 나왔지만, 국가는 그것을 내전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전이라는 말은 양쪽이 비슷한 무게를 가졌을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이 경우 한쪽에는 명령서와 장갑차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구호와 당번표가 있었습니다.
SA도 얻어맞았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령의 중립성을 증명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몇몇 SA 사무실이 폐쇄되었고, 선거행진이 금지되었으며, 갈색셔츠들이 경찰서 마당에서 욕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SA는 이미 망가진 조직이었습니다. 국가가 정말로 겨냥한 것은 RFB와 RGO, 그리고 KPD가 생활세계에 꽂아 넣은 작은 깃발들이었습니다. 공장위원회, 실업자위원회, 구호소 당번, 노동자 스포츠클럽, 세입자 모임, 인쇄소, 배급장부, 연락명부. 군대는 혁명을 박살낸 것이 아니라, 혁명이 아직 혁명이 아니라고 믿고 있던 행정망을 뜯어냈습니다.
ADGB와 흑적금국기단도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허가를 받아야 했고, 보고해야 했고, 설명해야 했습니다. SPD는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선거기간이었고, 비상명령이 있었고, KPD가 실제로 거리와 공장에 있었으며, 군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분노는 많았지만, 명령계통은 적었습니다. 오토 브라운의 프로이센 정부는 굴욕을 삼키며 경찰을 움직였습니다. 이제는 프로이센 내무장관이 된 구스타프 뵐러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기다렸다는듯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뒤따른 것은 사실 공화국의 명령이 아니라 대통령궁과 군부가 만든 길이었습니다.
질서단에 대한 취급은 RFB나 SA와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이들은 “비정치적 봉사단체”라는 이유로 규제에서 예외를 적용받았습니다. 공식 임무는 치안이 아니었습니다. 구호, 복구, 선거장 주변 안내, 부상자 후송, 상점 보호, 공공시설 정리였습니다. 문서상으로는 그랬습니다. 현장에서는 조금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느 거리에 RFB 연락소가 있는지 알았고, 어느 공장문 앞에 RGO 당번표가 붙어 있는지 보았고, 어느 골목에서 SA가 다시 모이려 하는지 군경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군대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프로이센 경찰이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질서단은 그 뒤에 도착해 깨진 문짝을 세웠습니다. 기록영화에는 세 번째 장면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막스는 그 실무과정을 책임졌습니다. 그는 군대와 질서단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려 했습니다. 너무 가까우면 사병조직이 되었고, 너무 멀면 쓸모가 없었습니다. 질서단은 명령받은 적이 없다는 형식이 필요했고, 국가에는 명령하지 않았지만 도움이 되었다는 변명이 필요했습니다. 막스는 그 회색지대를 정리했습니다. 군인답게, 그는 회색지대에도 선을 그었습니다. 다만 그 선이 법률책에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리나는 또 한 편의 기록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이번에는 질서단이 깨진 유리창을 치우는 장면만이 아니었습니다. 장갑차가 지나간 뒤, 청년들이 거리를 정리하고, 노인에게 물을 건네고, 상점의 판자를 다시 세우고, 아이들을 길 건너편으로 안내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카메라는 기관총을 오래 비추지 않았습니다. 기관총 뒤에 도착한 빗자루를 오래 비추었습니다. 그것이 도리나의 재능이었습니다.
KPD는 박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박살날 당이었다면 109석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격은 분명했습니다. RGO의 몇몇 거점은 무너졌고, RFB는 공개활동을 잃었으며, 인쇄망과 연락망은 구멍이 났습니다. 실업자위원회와 공장위원회 일부는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구호소 앞의 당번표는 사라졌지만, 당번을 서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고, 장소를 바꾸고,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문제는 타격의 정치적 해석이었습니다.
피셔와 마슬로는 국가폭력의 확대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른 군경합동 진압까지는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생활노동전선을 넓히고, SPD와 ADGB의 현장기반을 흔들고, RGO를 통해 공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파펜과 슐라이허는 선거 전 두 달의 빈틈을 이용해 그 생활전선의 목을 눌렀습니다. 피셔-마슬로 지도부는 당의 급진성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국가와의 전면충돌은 피하려 했습니다. 그 애매한 계산이 이제 약점으로 보였습니다.
레멜레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했습니다. 그는 500일 계획이 조롱받던 시기를 기억했습니다. 모스크바는 시간표를 죽였고, 피셔와 마슬로는 당을 통제했으며, 현실파는 공장을 실제로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레멜레에게 그것은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부르주아 국가는 우리에게 500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 파시스트들에게 시간을 더 주어야 합니까?
그 말은 당 안에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파시스트’라는 별칭은 공산주의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부르는 통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RFB의 잔존 간부들, 실업자위원회의 젊은 조직가들, 진압당한 공장위원회 대표들, RGO의 분노한 현장활동가들이 레멜레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레멜레의 왼팔과 오른팔 격인 하인츠 노이만(Heinz Neumann)이나 에른스트 슈넬러(Ernst Schneller)는 레멜레의 분노를 당의 새 노선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피셔처럼 지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피셔보다 거리의 언어에 가까웠습니다. 마슬로처럼 계산할 줄 알았지만, 마슬로보다 계산을 숨기는 데 서툴렀습니다. 그 서툼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습니다. 진압을 겪은 KPD 하부조직은 더 이상 세련된 중앙전술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분노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모스크바는 처음에 불편해했습니다. 레멜레류 조기혁명주의는 이미 한 번 제동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에서 도착한 보고서는 냉정했습니다. 피셔-마슬로 지도부는 당을 크게 만들었지만, 비상질서명령 앞에서 당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브란들러-탈하이머식 현실파는 공장의 실제 운영능력을 말했지만, 군대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 능력은 방패가 되지 못했습니다. KPD 안의 분노를 방치하면 당은 여러 갈래로 찢어질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는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는 형식 아래, 인물을 바꾸는 편을 택했습니다.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는 격렬했습니다. 피셔는 국가폭력 앞에서 당이 무모한 봉기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슬로는 당의 조직망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실파는 RGO가 아직 살아 있으며, 공장 안의 영향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회의장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폐쇄된 지부, 체포된 동지, 군홧발에 찢긴 당번표, 장갑차 앞에서 흩어진 공장위원회를 기억했습니다.
레멜레는 그 기억을 연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당이 맞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맞고도 살아남은 당만이 다음번에는 먼저 때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문장은 거칠었고, 위험했고, 많은 사람에게 필요했습니다.
결국 피셔-마슬로 지도부는 물러났습니다.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당 안에서 영향력을 가졌고, 특히 도시 지식인층과 일부 중앙조직에는 지지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의 얼굴은 바뀌었습니다. 헤르만 레멜레가 KPD 위원장에 올랐고, 노이만과 슈넬러는 새 지도자의 ‘사도’처럼 도열했습니다. 당의 공식 문건은 이것을 지도부 재정비라고 불렀습니다. 현장에서는 더 간단하게 이해했습니다. 피셔와 마슬로의 시대가 끝났고, 스파르타쿠스의 시간이 왔다고.
독일은 아직 독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독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서명은 대통령에게, 명령은 국군장관에게, 돈은 백작들에게, 얼굴은 파펜에게, 거리의 청년들은 질서단에게 주어졌습니다. 공산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거칠어졌습니다. 국가는 혁명을 막겠다며 비상질서를 꺼냈고, 혁명가들은 그 비상질서를 자신들이 옳았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책임은, 언제나처럼, 나중에 정하기로 했습니다.
9. 공화국의 민낯
1932년 5월의 비상명령은 KPD를 박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을지는 바꾸어놓았습니다.
하인츠 노이만과 에른스트 슈넬러는 당원과 KPD 계열 노동자들의 분노를 새 노선의 문장으로 바꾸었습니다. 프리츠 헤커트(Fritz Heckert)와 빌헬름 플로린(Wilhelm Florin)은 공장전선의 복구를 맡았고, 한스 키펜베르거(Hans Kippenberger)는 지하연락망을 다시 짰습니다.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는 세포조직 명부를 정리했습니다. 혁명은 연설로 시작될 수 있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소록과 암호문과 회의시간표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이름도 장엄하기 그지없는 ‘반파시스트 행동(Antifaschistische Aktion, Antifa)’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안티파는 원역사의 그것보다 더 증오의 범위가 넓고 불길했습니다. 레멜레의 KPD는 파시즘을 갈색셔츠에만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파펜 내각, 대통령궁, 비상명령, 질서단, 철모단, 그리고 공산당에 맞서 국가와 협력하는 SPD 관료층까지 모두 같은 전선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제복과 언어를 사용했지만, KPD에게는 모두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세력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자율적 행동을 막고, 거리와 공장을 국가의 명령계통 아래로 되돌려놓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KPD의 새 구호는 간단했습니다.
파시즘은 갈색 셔츠만 입고 오지 않는다. 때로는 청회색 제복을 입고,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온다.
그 문장은 질서단을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도리나의 카메라가 질서단을 중산층의 보호본능 속에 밀어 넣었다면, KPD는 그 이미지를 뒤집으려 했습니다. 빗자루는 봉사가 아니라 진압 뒤의 청소도구였습니다. 붕대는 자비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후처리였습니다. 질서단은 싸우지 않는 척하면서, 싸움이 끝난 뒤 승자의 장면만 남기는 조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난은 일부 노동자 지구에서 효과를 냈습니다. 질서단원들은 노동자 주거지에서 야유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RFB 잔존조직은 질서단을 “장갑차 뒤의 흰 장갑”이라고 불렀습니다. SA도 질서단을 증오했습니다. 그들에게 질서단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거리의 권위를 자유주의자들이 훔쳐간 결과였습니다. 공산당과 나치는 서로를 증오했습니다. 그러나 질서단을 향한 혐오에서는 이상한 공통점을 보였습니다.
그 공통점이 7월 알토나(Altona)에서 터졌습니다.
알토나는 원래부터 조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함부르크와 붙어 있는 노동자 지대였고, 공산당 조직이 깊었으며, SA와 철모단도 자기 깃발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비상명령 이후 RFB와 SA의 공개활동은 금지되었지만, 금지된 조직들은 이름을 바꾸고, 추모행사와 유세와 청년모임의 형태로 돌아왔습니다. 금지라는 건 생각보다 자주, 명칭 변경 신청서와 비슷한 기능을 했습니다.
그날의 직접적인 발단은 질서단의 선거질서 봉사행진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상점가 보호와 유권자 안내, 그리고 며칠 전 충돌로 깨진 창문 수리를 위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그들은 곤봉 대신 빗자루와 구호가방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청회색 제복은 이미 중립의 색이 아니었습니다. KPD에게 그것은 비상질서명령의 민간 얼굴이었고, SA에게는 자신들이 빼앗긴 거리의 권위를 점잖게 훔쳐간 가짜 제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야유였습니다. 곧 돌이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산당원들과 나치 돌격대원들은 서로에게도 욕을 했지만, 정말로 달려든 대상은 질서단이었습니다. 누가 먼저 손을 댔는지는 곧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질서단 제복을 입은 청년들이 쓰러졌고, 구호가방이 찢겼으며, 빗자루가 부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찰이 진입했습니다. 총성이 들렸습니다. 알토나의 거리는 피와 유리조각과 선전문으로 뒤덮였습니다. KPD는 질서단이 경찰을 끌고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SA는 경찰이 공산당을 핑계로 민족청년을 탄압했다고 외쳤습니다. 질서단은 자신들이 봉사활동 중 공격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도리나는 당연히 그 진술도 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카메라는 알토나의 전체 진실을 찍지 않았습니다. 대신 쓰러진 질서단원, 피 묻은 붕대, 부러진 빗자루, 겁에 질린 상점 주인, 깨진 유리창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오래 비추었습니다. KPD의 삐라와 SA의 구호는 배경에서 스쳐 지나갔습니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강했습니다.
알토나에서 총을 먼저 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수사문제였습니다. 각 진영이 시체를 어느 문장 안에 눕힐 것인지는 정치문제였습니다.
파펜 내각과 슐라이허 주변에서는 선거 무기한 연기론이 나왔습니다. KPD가 안티파를 내세웠고, SA 잔당이 다시 움직였으며, 알토나에서는 두 극단이 서로 싸우기보다 질서단을 때렸습니다. 보수언론은 “내전 선거”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쿠노 백작의 주변에서는 선거보다 질서가 먼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대통령궁에서는 그 문장이 조금 더 품위 있게 다듬어졌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SPD는 그것을 공화국의 공개적 살해라고 부를 것이었습니다. KPD는 총파업을 외칠 것이었습니다. FStP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습니다. 도리나조차 선거 자체를 미루자는 말에는 얼굴을 굳혔습니다. 자유주의자로서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전부 다 버리고 국가주의자로 전향한다는 건 조금 더 깊은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선거는 치러지기로 했습니다. 파펜은 선거를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선거가 치러지는 공간을 더 단단히 묶었습니다. 비상명령은 유지되었고, 군경합동 지휘체계는 해체되지 않았으며, 질서단은 비정치적 봉사단체라는 예외 속에서 더 바빠졌습니다. 투표소 앞에는 선거의 자유가 있었고, 투표소 밖에는 그 자유가 지나치게 멀리 걷지 않도록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더 이상한 사건들이 터졌습니다.
작센의 몇몇 도시, 루르의 일부 노동자 지대, 베를린 외곽의 몇몇 선거구에서 KPD 지역조직과 나치 또는 SA 잔당이 사실상 공동유세를 벌이거나, 서로의 집회를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공식 합의문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한쪽은 “파펜의 비상독재”를 공격했고, 다른 한쪽은 “11월의 범죄자들(Novemberverbrecher)과 금융노예정권”을 공격했습니다. 서로의 말은 달랐지만, 공격대상은 자주 같았습니다. SPD 사무소, 질서단 사무실, FStP 유세장, 그리고 비상질서명령이었습니다.
나치와 공산당이 손을 잡았다는 표현은 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문을 발로 찬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레멜레는 격노했습니다. 그는 공세주의자였고, 대통령궁과 질서단과 SPD 관료층을 모두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파시스트와 손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는 SA와의 지역협력에 연루된 당원들을 출당시켰고, 관련 지구당을 재편했습니다. 노이만은 더 거칠게 말했습니다. 갈색 놈들과 함께 걷는 자는 붉은 깃발을 들 자격이 없다고.
그러나 이미 사건은 벌어졌습니다. 독일 정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좌우 극단은 서로를 증오했습니다. 그러나 그 증오가 언제나 서로를 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체제를 향한 증오가 충분히 커지면, 서로를 미워하는 세력들도 잠시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7월 말 총선은 그런 공기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모두에게 불편했습니다.
KPD는 132석을 얻어 원내 제1당이 되었습니다. 원역사 나치의 230석 같은 폭발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군부와 대통령궁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이었습니다. 5월 비상명령, 제한적 군 투입, 공장점거 진압, RFB 활동금지, 질서단 예외, 알토나 이후의 선거질서 강화까지 모두 동원했는데도 공산당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결론은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제한적 개입만으로는 KPD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SPD는 119석을 유지했습니다. 패배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거대했고, 승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이 잃어버린 정당이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살아 있었지만, 독일 노동자정치의 중심이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FStP는 약진했습니다. 질서단과 도리나의 카메라, 반공질서의 언어, 나치에 대한 혐오, 공산당에 대한 공포가 자유국가당으로 몰렸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살롱과 강령의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빗자루와 붕대와 선거장 안내완장을 가진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당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중앙당과 BVP는 버텼습니다. DNVP는 입장을 바꿔 파펜 내각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나치는 굴욕적으로 생존했습니다. 히틀러는 신문 만평에서 우스꽝스럽게 등장하는 극우 정치인의 표본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거리에 독을 풀고 음모론, 체제혐오, 그리고 때로 공산당 지역조직과 같은 방향으로 발을 맞출 수 있는 불쾌한 능력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과반내각은 불가능했습니다. KPD와 SPD를 합쳐도 과반에는 한참 모자랐고, 둘이 함께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중앙당, BVP, FStP, SPD를 묶으면 수학적으로는 정부를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비상명령과 질서단과 프로이센 경찰 문제를 놓고 서로의 상처가 너무 깊었습니다. 우익과 중도만으로도 부족했습니다. 나치를 넣으면 숫자는 조금 나아졌지만, FStP와 중앙당이 나치와 한 내각에 들어갈 이유는 없었습니다.
의회에는 파펜을 싫어하는 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펜 이후를 합의할 다수는 없었습니다. 대통령궁은 바로 그 빈칸을 권력이라고 불렀습니다.
파펜은 원역사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버티는 대신 개조내각을 구성했습니다. 남작들의 내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은 그도 알았습니다.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이 된 상황에서 독일은 더 많은 남작이 아니라 더 많은 장부와 성직자와 외교문서를 필요로 했습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이름은 게오르크 치머만이었습니다. 중앙당의 재정전문가였던 그는 재무장관으로 입각했습니다. 치머만은 파펜 같은 인간을 싫어했습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도 혐오했습니다. 대통령궁 카마릴라가 국가를 사유물처럼 다루는 방식은 그의 취향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독일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의 직업의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내각을 구하러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산을 구하러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이는 작아 보였지만, 그에게는 결정적이었습니다.
빌리 슈타들러도 입각했습니다. 그는 당적은 없었지만 중앙당계 인사로 분류되었고, 새 직책은 ‘주권회복 담당 특임장관’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세동맹 협상, 제네바에서의 제한적 재무장 협상, 베르사유 체제의 실질적 완화 시도를 총괄하는 자리였습니다. 직책은 장황했고, 실권은 모호했으며, 책임은 넓었습니다. 슈타들러에게는 어울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정치를 혐오했지만, 정치가 외교문서를 망치는 것을 더 혐오했습니다.
그리고 루트비히 카스가 부총리로 입각했습니다. 중앙당 당수이자 가톨릭 신부인 그는 파펜 개조내각에 종교적 엄숙함과 의회적 중량을 조금 공급했습니다. 그것이 양심의 보증인지, 알리바이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사람들은 쉽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파펜에게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는 이제 남작들의 내각만이 아니라 중앙당의 이름 일부까지 빌릴 수 있었습니다.
FStP의 많은 이들은 이 개조내각을 불편하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이미 자유주의자로서의 많은 것을 내려놓은 도리나조차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중앙당 우파, 힌덴부르크 일파, 일부 보수세력, 파펜과 슐라이허의 계산이 서로 얽힌 내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유국가당이 꿈꾸던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아직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양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한히 선거를 하며 공산당 좋은 일만 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KPD는 132석이었습니다. 레멜레는 안티파를 발표했고, 알토나에서는 공산당과 나치가 이상하게도 같은 방향으로 질서단을 때렸습니다. FStP는 파펜 개조내각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내각을 무너뜨린 뒤 무엇이 올지 상상하는 것을 더 싫어했습니다.
자유국가당은 불신임 표결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지지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내각을 무너뜨리는 일에는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독일 정치에서 그런 문장은 지지보다 더 쓸모가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파펜 개조내각을 끌어내릴 수 있는 조합은 기괴해졌습니다. KPD, 나치, 사민당이 기타 반체제주의자들을 몽땅 끌어모아야 겨우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DNVP는 이미 비판적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중앙당과 BVP는 자기 당수와 인사들이 내각에 들어간 상황에서 바로 불신임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FStP는 빠졌습니다.
SPD에게 남은 선택지는 고약했습니다. 공산당, 나치, 기타 반체제주의자들과 함께 파펜을 끌어내릴 것인가. 브뤼닝 비상내각을 무너뜨릴 때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때 SPD는 긴축과 복지삭감에 맞섰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원내 제1당 KPD가 안티파를 외치고, 일부 지역조직은 나치와 병렬행동을 벌였으며, 파펜 내각에는 치머만과 카스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SPD가 불신임에 참여하려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지도부는 용기를 내는 데 능했지만, 그 용기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를린이 멈췄습니다.
1932년 11월, 베를린 교통공사(BVG)의 총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단은 임금과 고용이었습니다. 대공황 속에서 교통공사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시 당국과 회사 측은 임금삭감, 근무시간 조정, 일부 인력 감축을 추진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차와 지하철과 버스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적게 받았고, 충분히 오래 일했으며, 충분히 많은 동료가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회사는 도시가 움직이려면 노동자가 더 조용히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SPD와 ADGB 지도부는 파업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RGO가 파업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교통망을 멈추는 순간 시민 여론이 악화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BVG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까지 부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임금삭감은 실제였고, 해고 위협도 실제였으며, 노동자들의 분노도 실제였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를 누가 가져가느냐였습니다.
RGO가 먼저 움직였습니다. 레멜레의 KPD는 BVG 파업을 비상질서체제에 대한 첫 대규모 반격으로 보았습니다. 교통은 도시의 동맥이었습니다. 공장을 점거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시민의 하루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전차가 멈추면, 공화국의 심장박동도 잠시 엇박자를 낼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SA와 민족사회주의공장세포조직(NSBO)도 움직였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일부 차고지와 정류장 주변에서 파업 대열과 충돌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통 차단을 도왔습니다. 공식적인 공동전선은 아니었습니다. KPD 지도부는 그런 말을 들으면 분노했고, 나치 지도부도 자신들이 공산주의자와 손잡았다는 말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의 몇몇 거리에서 결과는 같았습니다. 붉은 완장과 갈색 셔츠가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같은 전차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동맥이 마비되었습니다. 출근길은 끊겼고, 상점은 늦게 열렸으며, 공무원은 걸어서 관청으로 향했고, 노동자들은 정류장 앞에서 서로를 설득하거나 욕했습니다. 질서단은 곧바로 투입되었습니다. 공식 임무는 노약자 안내, 임시수송 보조, 정류장 질서유지, 부상자 후송이었습니다. 질서단이 끌고 온, 앞코에 검은 쌍두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큼직한 흑적금 삼색기를 매단 임시수송버스는 곧바로 RGO 노동자들에 의해 박살나고 뒤집혔습니다.
프로이센 정부는 이번에는 파펜 내각과 군부의 뜻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공산당과 나치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파업 자체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SPD와 ADGB 지도부는 RGO의 장악을 경계했지만, BVG 노동자들의 처지를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노동자정당이 노동자의 파업을 국가질서의 이름으로만 판단하는 순간, 그 정당은 자기 이름의 절반을 잃게 됩니다.
구스타프 뵐러를 중심으로 한 SPD 내부의 방위주의자들은 격렬히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공산당과 파시스트가 사실상 같은 교통차단 행동을 벌이고 있는데, 아직도 망설일 것이 무엇이냐고. 파업의 이유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 파업을 RGO와 NSBO가 함께 이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통상적인 노동쟁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를린이 멈추면 공화국도 멈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SPD는 민주적인 정당이었습니다. 민주적인 정당에서 중대한 이견이 생긴다는 것은 대개 결정이 느려진다는 뜻이었습니다. 회의가 열렸고, 반론이 제기되었고, 절충안이 논의되었고, 문안이 수정되었습니다. 그동안 베를린의 전차는 계속 서 있었습니다.
파펜 내각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미뤄두었던 조치가 실행되었습니다. 두 번째 대통령 비상명령이었습니다. 이번 명령은 프로이센 경찰대를 라이히 내무부 휘하에 임시배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원역사의 1932년 7월 프로이센 쿠데타처럼 요란한 조치는 아니었습니다. 장관들이 체포되고 청사가 포위되는 식의 장면은 없었습니다. 대신 서류 몇 장이 돌았고, 지휘계통이 바뀌었고, 관보에 문장이 실렸습니다. 국가가 가장 조용하게 움직일 때, 가장 깊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라이히 내무장관은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였습니다. 대전쟁 말기의 제국 마지막 제1병참감, 그리고 에베르트-그뢰너 협약의 한쪽 당사자였던 그 인물입니다. 그뢰너는 군인이었고, 관료였고, 공화국의 탄생 순간에 군대가 어느 쪽으로 설지를 결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프로이센 경찰을 자기 지휘 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그뢰너는 구스타프 뵐러를 불렀습니다. 뵐러는 프로이센 경찰과 SPD 방위주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는 공산당을 혐오했고, RFB를 공화국의 적으로 보았으며, 거리에서 질서를 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 경찰이 라이히 내무부 휘하로 임시배속되는 것은 굴욕이었습니다. 그것은 프로이센 사회민주주의가 자랑하던 국가운영능력에 대한 공개적 불신이었습니다.
그뢰너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농담 반, 명령 반이었습니다.
소령, 병력 배치 계획을 보고하게.
뵐러는 잠시 굳었습니다. 그의 계급, 그의 과거, 그의 당, 그의 현재 직책이 그 한 문장 안에서 뒤섞였습니다. 치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뵐러는 공산당을 막고 싶었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바랐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그뢰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루덴도르프가 아닌 게 어디입니까.
진압은 빠르고 거칠었습니다. 프로이센 경찰대가 전면에 섰고, 라이히 내무부의 지휘가 그 뒤를 눌렀습니다. ADGB 조합원들도 합세했습니다. 이들은 파업파괴자라는 욕을 들으며 차고지와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노동자를 배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조합을 RGO와 NSBO의 손에서 되찾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이라고 해서 덜 잔인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BVG 노동자들과 공산당원, NSBO 조직원들은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전차 차고지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몇몇 곳에서는 총성이 들렸습니다. 경찰 곤봉과 노동자들의 쇠파이프가 부딪혔고, 질서단은 부상자들을 호송해준다는 명목 하에 경찰과 ADGB 조직원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배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파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SPD는 사실상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오토 벨스와 아르투어 크리스피엔은 공산당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KPD의 사회파시즘 노선을 혐오했고, 레멜레의 공세주의를 공화국에 대한 재난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정당의 기구들이 ‘이유 있는 파업’을 잔혹하게 짓밟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시절로 족했습니다. 사민당이 다시 노동자에게 곤봉을 드는 정당으로 보이는 순간, SPD가 파펜 일당과 다른 이유를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자유고용인총연맹(AfA-Bund)의 위원장 지크프리트 아우프호이저(Siegfried Aufhäuser)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역시 임금삭감과 고용불안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교통노동자들의 파업이 RGO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해도, 노동자의 절박함 자체를 경찰작전으로 처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당내 좌파와 일부 노동조합 활동가들, 젊은 사회주의자들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뵐러와 방위주의자들이 당 지도부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당 지도부의 미온주의가 베를린의 심장박동을 며칠간이나 멎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공산당이 나치와 병렬행동을 벌였는데도 노동자정당의 체면을 걱정하고 있을 때냐는 것이었습니다. ADGB 위원장 테오도어 라이파르트(Theodor Leipart)는 뵐러의 편에 섰습니다. 노동조합을 지키려면 먼저 노동조합이 RGO에게 먹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옛 방위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도 그 이름만으로 한쪽 진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중앙정치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방위주의자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할 정도로 유용한 기억이었습니다. 단명했던 뮐러 내각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던 루돌프 비셀(Rudolf Wissell)은 경제민주주의와 조직노동의 질서를 말하며 지도부의 우유부단을 비판했습니다. 국기단 내부의 몇몇 간부들, 프로이센 경찰계 사민당원들, 그리고 공산당과의 거리전에서 동료를 잃은 지역당 활동가들이 뵐러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익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은 공화국을 방어하는 사회민주주의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어의 대상에는 점점 노동자의 파업도 포함되기 시작했습니다.
당 지도부는 징계를 준비했습니다. 뵐러와 방위주의자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 중앙을 자체 선출하겠다고 선언했고, 바이에른 장교 출신이자 우파 사민당원인 오스카 에렌코펜(Oskar Ehrenkofen)을 위원장으로 옹립했습니다. 사회민주당 반대파(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 Opposition, SPO)라는 이름의 사실상 새 조직이 생기자,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정말로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KPD는 처음에 이 사태를 환영하려 했습니다. 사회파시스트들이 드디어 자기 정체를 드러냈다고 말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곧 당황이 뒤따랐습니다. RGO와 ADGB의 갈등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같은 노동전선 내부의 싸움이었습니다. 서로를 배신자라고 부르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노동조합과 공장과 임금이라는 같은 언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SPO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국가에 맞서 파업하는 것 자체가 빨갱이들의 수법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은 물론이고, 공산당이 장악한 파업에 연루된 노동자들까지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KPD가 수년간 외치던 “사회파시즘”이라는 말이 마침내 살과 뼈를 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선전문 속 괴물이 실제 거리에서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그 괴물을 만든 사람도 잠시 말을 잃게 됩니다.
레멜레는 이 사태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노이만은 SPO를 “곤봉을 든 사민당”이라고 불렀고, 슈넬러는 노동자방위조직의 재건을 더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KPD 내부의 현실파들은 더 어두운 결론을 보았습니다. 이제 SPD의 분열은 단순히 좌우파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노동운동 자체가 세 개의 적대적 언어로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레멜레의 공세, 벨스와 크리스피엔의 방어적 민주주의, 뵐러와 에렌코펜의 공화국 방위주의. 모두 자신이 노동자를 지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서로 다른 노동자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파펜 개조내각은 그 분열을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스타프 뵐러는 파펜 내각의 교통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했습니다.
그 임명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BVG 파업을 진압한 사람, 교통망을 회복한 사람, 프로이센 경찰과 ADGB 방위주의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교통과 체신을 맡는다는 논리는 관료적으로는 깔끔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폭발물이었습니다.
벨스와 크리스피엔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보았습니다. 레멜레는 그것을 증거라고 불렀습니다. 도리나는 아무 말 없이 신문 사진을 보았습니다. 뵐러가 장관 임명장을 받는 사진 속에서, 그는 승리자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래 기다린 명령을 이제야 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파펜 내각은 사회민주주의의 한 조각까지 자기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정상정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상이라는 단어가 매주 조금씩 다른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게오르크 치머만(Georg Zimmermann), 1931년 로잔 경제재무회의에서.
빌리 슈타들러(Willy Stadler), 1932년 한 만찬장에서.
질서단(JBSOV, Ordnungsbund) 단원들의 단체사진. 1931년 11월, 컬러 복원.
디디 리하르츠슐러(‘Didi’ Richartz-Schuller), <푸른 제복은 떠나지 않는다>, 193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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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사회파시즘이라니 너무 경악스럽군요...
노동자를 짓밟는 사회주의자들에 비하면 보수혁명주의자라서 빨갱이 짓밟는 당연한 행동을 한 쿠노는 범부네요...
김일성도 노조 진입한 적 있었습니다.
‘본인이 콧수염 정병 히읍읍 손절한 이유.fact’
‘ㄹㅇ ‘사회파시스트’들 ㄹ황.spd’
어흐.... kpd는 spd를 사회파쇼라고 저주하더니 spo로 진짜 소환해버렸네요(?) 그리고 이젠 나치와 반쯤 한몸이 되어버렸고요(....)
파쑈짝꿍 vs 사회파시스트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결구도죠(…)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리고 이렇게되면 아나키즘하고 공산주의(레닌주의계열)와 좀더 사이가 개판이 되나요?
@E.E.샤츠슈나이더 누군가 이유없이 파쑈라고 욕하면 그 파쑈를 꼭 해줘라의 전형이군요 ㅋㅋㅋ
@dnjdss 독일자유노동자연맹(FAUD)이 있기는 한데.. 컨셉이 겹치는 KAPD가 복당까지 한 마당에 숨쉴 공간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dear0904 가짜 광기에겐 진짜를 보여주는게 좋 읍읍.....(?)
@dear0904 사회민주당 반대파 특)
사회주의: 안함
민주주의: 버림
당: 진짜 당도 아님
반대파: 파펜 지지함
(…)
@E.E.샤츠슈나이더 독일에 신성로마제국이 돌아왔군요(?)
@dnjdss 정석적인 해결법이죠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저런! 국가주의자들이랑 투탁거렸는데 그 국가주의자들이 커져버렸군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국가수상으로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호소드립니다.
지금까지 국가의회는 우리 내각 출범 이후 22건의 내각불신임결의를 발의하였으며 지난 7월 7대 국가의회 출범 이후에도 10명째 각료 탄핵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1871년 건국 이후에 전혀 유례가 없던 상황입니다.
국가수상을 겁박하고, 다수의 장관을 탄핵하는 등 행정 업무를 마비시키고 대규모 가두시위 조장, 공장 점거 운동, 의회 등원 거부, 인프라 파업 등으로 국가 자체마저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국가 예산 처리도 국가 본질 기능과 기업 구제금융, 경찰 무장을 위한 모든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하여 국가 본질 기능을 훼손하고, 독일국을 실업자들의 천국, 민생 치안 공황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내년도 예산에서 중산층 임대료 보조금 5억 마르크, 기업 및 은행 구제금융 30억, 실업자 일자리, 라인란트 탄광 개발 사업 등 3억 4,000만 마르크를 삭감하였습니다. 심지어 경찰 간부 및 봉급과 수당 인상, 당직 근무비 인상 등 경찰 처우 개선비조차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러한 예산 폭거는 한마디로 독일국 국가 행정을 농락하는 것입니다. 시급한 경제구재책까지도 오로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러한 공산당과 나치당의 만행은 민생 악화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국정은 마비되고 국민들의 한숨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도이칠란트의 헌정 질서를 짓밟고, 헌법과 법에 의해 세워진 정당한 국가내각을 교란시키는 것으로서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 행위입니다.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내각불신임과 파업, 가두시위로 국정이 마비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의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정국 혼란을 부추기는 행태를 통해 국가의 입법 사법 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의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독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극우 극좌 극단주의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도이칠란트를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소 숭이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저는 이 비상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유도이칠란트를 재건하고 지켜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 이는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 그리고 국가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며 미래 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입니다.
저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국가를 정상화시키겠습니다. 계엄 선포로 인해 자유도이칠란트 헌법 가치를 믿고 따라 주신 선량한 국민들께 다소의 불편이 있겠습니다만은 이러한 불편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치는 자유도이칠란트의 영속성을 위해 부득이한 것이며 독일국이 국제 사회에서 책임과 기여를 다한다는 대외 정책 기조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국가수상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 드립니다. 저는 오로지 국민 여러분만 믿고 신명을 바쳐 자유도이칠란트를 지켜낼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프란츠 폰 파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