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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빛고을마을이야기[KBS 1 라디오:즐거운 라디오 여기는 안동입니다]
<꽃빛고을 마을이야기 1회> KBS 1 라디오 안동방송국<즐거운 라디오 여기는 안동입니다.>
#2023년 1월 2일 오후 4시 ~ 5시 사이에 20 분 전화로 소개합니다.
오늘부터는 영양의 마을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영양이야기>로 함께 합니다.
첫 시간으로는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릴텐데요.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겠습니다.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영양 이야기 첫시간으로 주곡리부터
소개해 주시는 이유가 있다고요?
네 23년 검은토끼해의 토끼는 영리함과 지혜를 상징하는데요. 검은색 토끼는 동서남북 방향에서는 북쪽에 사는 토끼입니다.
그래서 땅과 물을 다스리는 신이 살고 있는 일월산 아래 마을인 꽃빛고을 영양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주곡리는 영양군의 북쪽에 있는 일월산 남쪽아래에 있는 마을로, 해와 달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마을입니다. 또한 검은
토끼해에는 해맞이 일출을 봐야합니다. 해맞이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 일월산이라서 소개를 하려 합니다.
1-1.그런데 영양을 꽃빛고을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네 영양군英陽郡의 한자글자가 꽃부리영英자와 볕(빛)양陽자 및 고을군郡자로서 한글표기로는 꽃빛고을입니다.
고전古典 사자성어 영상양명英爽陽明에서 英자와 陽자를 취하여 地名지명이 英陽이 되었습니다.
2. 네 그래서 꽃빛고을 영양이라고 하시는군요.
앞으로 전해주실 영양의 꽃빛마을 이야기들이 더욱 기대되는데-
오늘 소개해주실 주실마을이 있는 주곡리는 어떤 곳입니까?
네, 주곡리注谷里의 위치는 영양군의 북쪽에 있는 일월산日月山의 남쪽 아래에 있고, 일월산日月山의 해와 달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는 마을입니다.
주곡리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주실, 감복동, 법곡동을 합쳐서 주곡리가 되었으며 특히 주실은 일월산의 해와 달의 정기가 남쪽에 있는 장군천을 따라 내려오던 중 문필봉을 바라보고 잠시 갈길을 멈춘 곳에 한양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문화유적으로 공룡발자국화석,칠성별과 관련이 있는 성혈을 석각해 놓은 고인돌,호은종택,옥천종택,월록서당,만곡정사,창주정사,학파헌이 있고 자연경관으로 주실마을 8경이 있습니다.
3.네, 영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이 주곡리의 각 마을에는 어떤 분들이 살고 계십니까?
성씨별로 주실에는 한양조씨, 감복마을에는 경주이씨, 법곡마을에는 전주이씨들이 살고있으며 60호 130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4.그렇군요. 그럼 오늘 소개해주실 주실마을에 대해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죠.
꽃빛고을 영양군이 자랑하는 주실은 지조있는 선비들의 고향입니다.
조선중기 기묘사화 정암 조광조 선생과 관련된 환란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정착한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조선말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며 일제강점기의 서슬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아니한 유학자 선비들의 마을입니다.
5.말씀을 듣고보니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이
바로 주실마을이죠?
그렇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청록파 시인 조지훈,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일,조동걸,조동원교수까지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수 있는 많은 박사와 인재들이 배출된 마을입니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주실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선생의 옥천종택, 조선 영조49년(1773)에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월록서당과 같은 문화자원들이 남아있고요.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지훈시비가 있습니다.
6.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조지훈 시인에 대해 다시한번 살펴보죠.
지훈의 본명은 동탁(東卓)이고요. 1920년 영양 주실에서 태어나 15세까지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중 16세때 오일도 시인의 주선으로 서울로 가서,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현재의 동국대학교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고풍의상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같은 해 승무를 발표했고, 1940년 봉황수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이후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해서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는데요,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을 간행해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기여고 교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교수에 재직하시다가 향년 48세에 신선이 되시었습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시비, 영양 주실마을에 지훈시비를 포함해서 전국 87곳에 시비가 있고요, 1968년 5월17일 돌아가셨고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리 동쪽 야산에 안장돼 있습니다.
7. 그럼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은 어떤 곳입니까?
한양조씨 호은공파 종택이고요. 호리별천지로 신선이 사는 명당으로 유학자, 선비, 의병, 문학인,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인재가 태어난 곳입니다.
8.관련해서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 그리고
시비에는 어떤 내용들이 남겨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지훈문학관은 조지훈 시인과 관련된 제반 문학자료가 전시돼 있고요. 지훈문학 문화축제를 주관하는 곳입니다. 지훈시공원에는 지훈선생의 동상과 시 27편을 바위에 음각하여 게시해 놓았습니다.
지훈시비는 마을숲에 건립돼 있고,‘빛을 찾아가는 길’시詩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네, 오늘은 영양의 첫 번째 마을로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다음 시간에 이어서 들려주실
주실마을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기대해 보면서
오늘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주곡리 주실마을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꽃빛고을 마을이야기 2회>
KBS 1 라디오 안동방송국
<즐거운 라디오 여기는 안동입니다.>
#2023년 1월 9일 오후 4시 ~ 5시 사이에 전화로 소개합니다.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일월면 주실마을>에 대한 이야기 살펴볼텐데-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지난시간 조지훈 시인으로 대표되는 주실마을에 대해 알아봤었죠?
그렇습니다.
꽃빛고을 영양군이 자랑하는 주실은 지조있는 선비들의 고향입니다.
조선중기 기묘사화 정암 조광조 선생님과 관련된 환란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정착한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조선말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고요.
일제강점기의 서슬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은 유학자 선비들의 마을입니다.
2. 그만큼 많은 문화유산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 문화유적으로
우선 조지훈 시인과 관련된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지훈시비가 있습고요.
그리고 공룡발자국화석, 칠성별과 관련이 있는 성혈을 석각해 놓은 고인돌,
호은종택, 옥천종택, 월록서당, 만곡정사, 창주정사, 학파헌이 있습니다.
자연경관으로는 주실마을 8경이 있습니다.
3. 관련해서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에 대해서도 지난시간 살펴봤었죠?
그렇습니다.
한양조씨 호은공파 종택인 호은종택은 호리별천지로 신선이 사는 명당으로
유학자, 선비, 의병, 문학인, 교수를 포함해 많은 인재가 태어난 곳입니다.
호은종택에는 ‘삼불차’라는게 있습니다.
‘삼불차’는 재물·문장·사람을 빌리지 않는다건데요.
이런‘호은종가’의 독특한 가풍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습니다.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보았던 정신은 항일운동에서 솔선수범으로 나타납니다.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지조와 절개를 중시했습니다.
4. 그럼 다음으로 옥천종택은 어떤곳입니까?
주곡리 옥천종택은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 선생님의 옛집으로 살림채인 정침(正寢),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이루어진 17세기 말 대표적인 양반가의 주택입니다.
살림채는 안동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구성으로 돼 있고요,
정면 5칸에 측면 6칸 규모의 맞배지붕집입니다.
다만 안방을 동쪽에 배치하고, 사랑방을 서쪽에 둔 점이 다르다고할 수 있겠습니다.
오른쪽에는 마구간을 개조한 온돌방이 있고요.
부엌과 고방이 있습니다.
살림채의 몸채 전면에는 안마당 방향으로 개방된 6칸의 대청이 있는데요.
대청 오른쪽에 도장방과 안방이 있고, 안방은 마루 방향으로 1칸을 더 내어 2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상북도에 분포된 ‘ㅁ’자형 집 중에서 대청과 안방의 윗머리에 도장방을 만든 경우는 가끔 볼 수 있지만,
주곡리 옥천종택처럼 도장방, 바닥이 온돌 대신에 마루가 깔린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5. 네 그러고보니 온돌 대신 마루라고 하니 신기한 구조긴 합니다.
그런데 글을 읽는 별당은 초당, 이건 어떤 곳입니까?
초당은 1695년에 지어졌는데요.
노인이 머물거나 학동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입니다.
사당은 1790년에 건립된 것으로 3칸 규모인데요.
안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초당이 있고, 우측 뒤편의 사주문을 들어서면 사당이 위치합니다.
주곡리 옥천종택은 아주 전형적인 살림집으로,
世傳세전 家訓가훈은
‘志行上方 分福下比 지행상방 분복하비’입니다.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福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내용입니다.
후손들은 현재까지 잘 지키고 있습니다.
6. 네 선조들의 뜻을 잘 이어가고 계시군요.
이렇게 지조와 절개 있는 주실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화 유산이 더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학문현창으로 전해 오는 문집과 유고집에 대한건데요.
주실마을 사람들은 문명과 학문을 잃지 않고
장려하기 위해 문집과 유고집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무려 73[일흔셋]명이 문집과 유고집을 편찬했고요.
또 주실마을에는
영양군 안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습니다.
영양군에는 예배당이 43[마흔셋]곳이 있는데,
이 중에 주곡교회가,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회입니다.
1905년에 석농 조병희 선생님에 의해
기독교 개신교문화가 들어오게되어 전파되었습니다.
7.또 유명한 주실8경은 어딜지 궁금해집니다?
제 1경은 문필봉이고
제 2경은 현재 장군천으로 불리는 매계천입니다.
제 3경은 마을숲이자 시인의 숲인 주실숲이고요.
제 4경은 지조를 상징하는 매방산입니다.
제 5경인 부용봉과 장군봉은 지혜를 상징하고-
제 6경은 월록서당,
제 7경은 침천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8경은 만곡정사입니다.
8. 그리고 또 한가지, 주실마을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서요?
네 주실마을에는 조동걸 작사 조동건 작곡의 주실의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는 총 3절까지로- 오늘 이 자리를 통해 1절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훈기찬 매봉산의 아침해 받아 영남의 개명천지 열어가던 주실
영웅의 산발로 찾는 새모습 긴수풀 거친길을 다시 딱는다’ 그리고
후렴으로 ‘ 아 아 주실아 새사조 받아서 새역사 새천지를 이루어 가자’로
이어집니다.
일월산의 정기를 받아 지조와 절개 있는
주실 마을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주실마을 노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주실마을에 대한 이야기 살펴봤습니다.
오늘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 [2023년 1월 16일 오후 4:20~ 4:40 방송분] [ 3 회]
[안동방송국]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네 오늘은 영양 일월면의 어떤 마을에 대해 소개해 주십니까?
네 오늘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2리 감복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려 합니다.
주곡2리 감복동은 흥림산 동쪽산록에 위치한 마을로 동북쪽에 주곡1리 주실마을,
남쪽에 영양읍 황룡기, 서쪽에 청기면 정족2리 나방마을, 북쪽에 청기면 산운리 새뉘(새눈)마을이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곡2리 감복동 입구에 지방도 918번 재일로가 있고요, 도로 동쪽옆으로는 장군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을안에는 흥림산의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 장군천에 합류하는 마을하천이 있는데, 이 하천은 전형적으로 서원동류西源東流인 감복동천甘伏洞川입니다.
2. 마을 이름은 왜 감복동으로 불리게 된겁니까?
네 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물을 다스리는 물신(水神)과 땅을 다스리는 땅신(土神)이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마을은 1600년 무렵부터 감복동(甘伏洞)이 였지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주실(注室)과 법곡동(法谷洞)에 통합돼 주곡리가 된 후에 감부골, 감북골, 감북곡(甘北谷)이라고 부르고 있던중, 2018년 7월 주곡 2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감천, 감내, 감복의 '감甘'은 물신이자 땅신을 상징하는데요. 최남선의 "신자전"을 보면 신을 '검' 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감은 검과 같은 뜻으로서 거북신앙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감이 검과 어떤 연관성이 있길래
거북신앙을 드러내는 걸로 해석되는겁니까?
거북은 옛말로 거붑인데요. 이건 또다시 '검'에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양산 민요 중에 '왕거미 노래'가 있는데, 이걸 보면 거미에서 검으로, 또 다시 거북으로 향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을의 이름을 보자면 모든 삶의 가능성은 물과 땅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땅신을 중심으로 하는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 감내를 이에 가까운 한자로 대응을 두어 감천이라고 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감복동甘伏洞은 가마실의 사마 - 감과 같은 계열의 마을 이름으로 종교적인 뜻으로라면 물신과 땅신의 동네라는 말이 됩니다.
4. 그럼 물신과 땅신의 동네인 감복동을 대표할만한 장소가 있습니까?
네 감복동(甘伏洞)의 주산인 흥림산에 최근 자연휴양림이 조성됐는데요.
『여지도서』(영양편)에 "흥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고,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산을 미쳐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올 정도로 영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과 장마를 뜻하는 '림(霖)'으로 산 명칭을 부르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흥림산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절터와 기와조각이 발견됐는데, 기와조각에 흥림사(興林寺)로 표기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이름의 한자 표기도 예전에는 '흥림산(興林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흥림산은 옛 군현지도와 전국지도 대부분에서 표시돼 있고요. 그만큼 영양에서 중요시되었던 산으로 여겨집니다.
5. 마을뿐 아니라 영양 전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이 흥림산은 어떤 곳입니까?
흥림산은 일명 흑림산( 767m) 또는 흑림산(黑霖山)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일월산 중간지맥이 일월면과 청기면 사이를 뻗어 내려온 거대한 산입니다.
옛날부터 이 산은 산봉이 높고 잡목이 울창해서 바라볼 때 항상 검푸른 빛을 이뤘기 때문에 흑림산이라 불렀습니다.
이 산의 모습은 변하는 모양이 변화무상한데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돼 비를 갈망할 때는 구름이 산허리를 돌아서 터져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단비가 내리기때문에 흥림산(興霖山)이라 불리게 됐다고 하고요.
가뭄이 심할 때는 산정에 검은 구름이 단비를 내리게 한다고해서 예로부터 이 산의 영험이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하의 사람들이 예로부터 가뭄(旱期)이 심할때, 雨期가 있을 때에 이 산을 바라봤다고 합니다.
6.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올 만큼
흥림산은 영험하게 여겨지던 곳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면 관가에서 처음에 사직단에 기우하고 그 다음에 이 산에서 기우하고 마지막에 일월산에서 기우하는 것이 관례가 될 정도로 영험있는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산의 서쪽에 있는 나방촌(羅方村)에는 옛날에 흥림사(興霖寺)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항재 이숭일선생의 흥림산기를 보면 흥림사와 흥림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이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음시간에 이어서 들려주실
감복동의 흥림산과 흥림사에 대한 기록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기대됩니다.
오늘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23년 01월 30일 오후 4시 20분 부터 4시 40분까지 방송분]
<즐거운 라디오 안동입니다>
*질문자 : 안동방송국
*답변자 : 박원양
[안동방송국]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네 지난 시간에
영양 일월면의 감복동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었죠?
그렇습니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2리 감복동은
흥림산 동쪽산록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감복동(甘伏洞)에는 주산인 흥림산이 있는데요.
『여지도서』(영양편)에 "흥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고,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산을 미쳐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올 정도로 영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과 장마를 뜻하는 '림(霖)'으로
산 명칭을 부르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흥림산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절터와 기와조각이 발견됐는데,
기와조각에 흥림사(興林寺)로 표기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 이름의 한자 표기도
예전에는 '흥림산(興林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흥림산은 옛 군현지도와 전국지도 대부분에서 표시돼 있고요.
그만큼 영양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산으로 보입니다.
2. 이 흥림산에서 눈여겨 볼만한 기록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면 관가에서 처음에 사직단에 기우하고
그 다음에 이 산에서 기우하고
마지막에 일월산에서 기우하는 것이 관례가 될 정도로
영험있는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산의 서쪽 나방촌(羅方村)에는
옛날에 흥림사(興霖寺)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항재 이숭일선생의 흥림산기를 보면
흥림사와 흥림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3. 해당 기록은 어떤겁니까?
예, 해당 기록은 항재 이숭일 선생의 관점에서 기록됐는데요.
선생이 1160년 겨울에 조군이라는 사람을 따라
이웃에 집터를 잡았습니다.
이윽고 산과 익숙하게 되고
또 날마다 조군의 이야기를 들으니,
흥림산이 영혐함이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됐는데요.
다음 해에 마침 큰 가뭄이 들어
무지개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합니다.
선생은 산의 이름을 생각했기 때문에
구름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의 모습이 타들어갈 뿐,
비가 올 기색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조군을 힐난하길,
"그대가 '흥림'으로 이 산을 이름 붙인 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한 해 동안 큰비가 내리느냐 가뭄이 드느냐에 따라
한 때의 풍흉이 관계되고
- 한때의 풍흉은 실로 백성의 행불행에 관련됩니다.
이런 점으로써 말한다면,
그 가뭄과 큰비가 관련있는게 매우 중대하기때문에
일개의 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게다가 군자가 사물을 명할 때,
사실로써 이름 붙이고 공허한 것으로 하지 않는데
- 지금 체험해 보니,
'흥림'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산을 거짓되게 말한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4. 네 조군도 마을에서 흥림산이 영험하기 때문에
선생에게 그렇게 소개했을 뿐인데...
물론 힐난하는 선생의 마음도 말씀도 이해는 가지만
조군이 뭐라 답을 주기는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네, 실제로도 조군은 무안해하면서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이 다시 해명하길,
"상심하지 마십시오.
예로부터 산천의 명칭 가운데
혹 그 주인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에 따라
영화와 욕됨이 가해진 경우가 있으니,
예를 들자면 우계. 한림석*• 승지암* 과 같은 호칭입니다.
이런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혹 다른 날 이 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흥기할 수 있어서 상가의 임우가 될 수 있을는지요.
이것은 아직알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군이 흔연히 웃으며 말하길,
"홀륭합니다. 원컨대 그대는 이것을 기록해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5. 그렇군요. 선생이 산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지
이 기록을 통해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쓴 항재 이숭일 선생은 어떤 분이십니까?
네 항재(恒齋) 이숭일(1631~1698년)
선생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 호는 항재(恒齋)입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시명(李時明)이시고요,
어머니는 정부인안동장씨로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딸입니다.
이숭일은 아버지와
형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을 비롯해
부덕이 출중했던 어머니를 둔
훌륭한 교육적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이후 학자로 대성하기까지 했는데요.
젊은 시절부터 과거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6. 네 그럼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학문 그 자체에 더 집중하셨겠어요?
네, 숙종 15년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됐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의령현감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흔쾌히 받아들여 부임했습니다.
이숭일은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고을사람들에게 ‘이불자(李佛子)’라 불리었습니다.
한편,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권장해
그 영향이 이웃 고을에까지 미쳤고요,
시국의 변화로 2년 뒤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과 저술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숭일의 저술 중
「존재형안성유씨우선설변후(存齋兄安城劉氏右旋說辨後)」를 비롯한
몇몇 작품이 『동유학안(東儒學案)』
도산사숙학안조(陶山私淑學案條)에 채록돼 있고요.
저서로는 『항재문집(恒齋文集)』 8권 4책이 있습니다.
네, 이렇게 오늘 영양 일월면 감복동의
흥림산과 흥림사에 대한 이야기 살펴봤습니다.
오늘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2023년 2월 6일 오후 4시 20분 부터 4시 40분까지 방송분]
<즐거운 라디오 안동입니다>
*질문자 : 안동방송국
*답변자 : 박원양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네 지난 시간에
영양 일월면의 감복동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들려주십니까?
네, 지난 시간에는 영양 일월면 감복동의 흥림산과 흥림사,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항재 이숭일 선생에 대해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감복동에 대한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들려드리려 합니다.
2. 네 지난 시간에 항재 선생에 대해 소개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 다시 한번 짚어보면서
이번 시간 시작해 볼까요?
네, 항재(恒齋) 이숭일(1631~1698년) 선생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응중(應中)으로
호는 항재(恒齋)입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시명(李時明)이고요,
어머니는 정부인안동장씨로 경당 장흥효(張興孝) 선생의 딸입니다.
이숭일은 아버지와
형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을 비롯해
부덕이 출중했던 어머니를 둔 훌륭한 교육적 환경에서 성장해
뒤에 학자로 대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과거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경학 연구와 심성 수련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3. 그래서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학문을 백성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하는데 힘 쓰기도 하셨죠?
그렇습니다.
1689년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됐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그로부터 2년 뒤 다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의령현감에 제수되자,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있는 길이라 여기고 흔쾌히 받아들여 부임했습니다.
이숭일은 모든 행정을 백성을 위하는 방편으로 수립하고,
민폐를 혁신시켜 고을사람들에게 ‘이불자(李佛子)’라 불리었는데요.
한편,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권장해
그 영향이 이웃 고을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다 시국의 변동으로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4. 선생과 관련돼 마을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은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항재 이숭일선생이 1670년경에 유학을 가르치던 흥림정사가 있었는데요.
흥림산 산록에 선생이 직접 흥림정사를 건립해
주실마을을 포함한 각처에서 이 곳에 와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항재문집에 흥림산 유산기에 기록이 남아있고-
많은 유학자 선비를 배출했습니다.
이 곳에는 옛날에 사용했던 빗살무늬
기와 조각과 토기가 옛 터에서 발견되고 있고
현재는 '대명사'라는 암자가 있습니다.
5. 그렇군요. 또 감복동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네 우선 감복동마실 서남쪽에는 황룡이 사는
黃龍基마실이 있습니다.
황룡은 영양군청 소재지인 영양읍 중앙에
황룡천을 이뤄서 강물이 반변천으로 흐르고 있고요.
새의 눈을 상징하는 새뉘(새 눈)마실이 서북쪽에 있어서
기복신앙에서 발원하는 소원을
새들이 하늘에 전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감복마실 남쪽의 산에 좁쌀을 쉰섬이나 생산할 수 있는 분지가 있고
옆에는 닭이 사는 터가 있어 살기좋은 곳이라고
믿도록하는 분지의 땅이 있는 쉰섬지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감복동 마을에는 물과 땅을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6. 네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고
또 영험한 산까지 갖춘 아름다운 마을인데요.
물과 땅을 다스리는 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겁니까?
네 감복동은 물과 땅을 다스리는 신이 사는 마실로
흥림산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흥림산 서쪽에서 강이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있어
명당이 있다고 하고요.
물을 숭배해 엎드려 소원을 기원한다는
이미지가 지명에 내포돼 있습니다.
일찍이 주희가 노래한 무이산 詩를 살펴 보면
감복동마실의 물과 땅을 다스리는 神에 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산에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못하고,
물은 산이 없으면 깨끗하지 못하네.
골짜기 골자기마다 산이 감돌아 들고,
봉우리마다 물이 감돌아 흐르네.” 라는 내용입니다.
흥림산을 감복천이 감돌아 흐르는
흥림산 동쪽마을이 감복마실로
물과 땅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살아 왔고요.
그래서 자연을 잘 보존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땅신(土神)이 두루보살펴 준다고 믿어 오고 있습니다.
* 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마을 주민들이 끝까지 잘 간직해서
아름다운 감복동의 이야기가 후세까지
잘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일월면 감복동에 대한 이야기 마무리 해보고요.
오늘도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23년 2월 13일 월요일 영양 일월 용화리 대티골 이야기 1 <案>
- 영양문화원 영양학연구소 소장 박원양
1. 용화리 대티골 마을 개요
해발1219미터 일월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전통종교 황씨부인과 천도교(동학), 천주교, 기독교 구세군 등 종교성지가 많이 있는 마을입니다. 자연치유마을로 지정된 마을이여서 인기가 대단합니다.
상주 인구는 50여호에 120명정도이며 여러성씨가 살고 있습니다.
낙동강 상류 반변천 발원지가 있으며 풍류도의 용화동천 유적과 문화재로 용화동삼층석탑 등 문화유적이 있습니다.
2. 영양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
일월산 자락에 일제 수탈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한(恨) 서린 길이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이다. 경북 영양· 봉화·청송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240㎞가 넘는 도보 길인 ‘외씨버선길’에서 일곱 번째 ‘치유의 길’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영양으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으로 가득했고 며칠 내린 비로 미세먼지도 없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다.
눈부신 5월 햇살에 온통 초록 물감 가득한 풍광이 잠시 세속을 잊게 한다.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봉화로 향한다. 길을 따라 좌우를 오가며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반변천이다.
영양을 이야기할 때 물줄기는 반변천, 산줄기는 일월산(日月山)을 빼놓을 수 없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은 영양을 남북으로 종단한 뒤 청송을 지나 임하댐 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물줄기다. 길이는 109.4km, 반변천 발원지는 윗대티에 있다.
북쪽으로 달리는 길 좌우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거대한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다. 절벽 퇴적층을 따라 나타나는 초록 물결이 아무리 잘 그린 진경산수화인들 여기에 비하랴. 길옆 곳곳에 심어진 붉은 단풍나무가 녹색 푸르름과 묘한 대비를 일으키며 눈길을 끈다.
옛 국도 길은 원래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31번 국도였다. 산의 등줄기와 목덜미를 잘라 길을 냈다.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군 장군광업소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에는 일월산의 질 좋은 소나무를 베어내 옮기는 임도(林道)로 사용됐다. 이처럼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恨) 맺힌 길은 새롭게 포장된 직선도로 가 생기면서 우리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져 갔다.
자연스레 발길이 끊어졌고 길은 방치됐다. 금강송이 즐비한 옛 국도길 중간에 서 있는 ‘영양 28㎞’라는 빛바랜 이정표가 수탈과 훼손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대티골 경로당, 대티골 숲길 입구, 진등 반변천 발원지 쉼터, 칠(칡)밭목 삼거리(옛마을길 끝 지점), 반변천 발원지 이정표, 큰골삼거리, 대티골 주차장, 숲길입구, 일월산자생화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7.6km 정도 거리다.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하지만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어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출발지인 ‘일월산자생화공원’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경북 내륙의 가장 깊은 일월산까지 들어와 광물을 수탈해 갔다. 일월산 광산에서 캐낸 금, 은, 동, 아연은 일본 나카가와광업주식회사에서 건설한 선광장으로 옮겨 광물을 제련했던 곳이다.
공원을 지나 31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왼편으로 ‘자연치유 생태마을 대티골’을 알리는 커다란 녹색 표지가 눈에 들어오고 좀 더 걸어가면 ‘토속신앙 본거지 총본산’, ‘일월산 황씨 부인당’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바로 오른쪽 봉화로 향하는 새로 난 포장도로가 있지만 지금 걸어야 할 길은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길이다. 곧바로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황토구들방 집 앞에 쉼터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그대로 올라가면 대티골 주차장과 큰골 삼거리로 가게 되고, 오른쪽 외씨버선길을 알리는 리본과 안내판을 따라 옛 국도로 향한다. 길 옆에는 전봇대와 통신선이 나란히 한다. 새 도로가 생기면서 용도 폐기된 국도가 전국에 한두 곳이랴마는 이 곳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예전에 차가 다녔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신작로 길이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슬픈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길이라는 점 때문이다. 수십 굽이를 돌고 돌아 일월산 자락을 아우른 뒤 봉화로 넘어간다.
일월산은 해발 1219m로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새로 난 국도는 영양과 봉화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뚫리면서 길이 직선으로 나기 전까지 옛 국도는 이렇게 산 중턱을 돌고 돌며 꼬불꼬불 길을 냈다. 일제가 일월산 용화광산을 개발하고 광물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길이다. 삽이나 곡괭이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 이 험한 산에 길을 내거나 광물을 옮겨간 이들 모두 시대를 앞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하지만 새로 국도가 개설되자 쓸모없는 길로 방치되었고, 광산도 문을 닫게 되자 물자 수송로의 역할도 자연스레 끝났다. 옛 국도는 평탄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굽이도 심하지만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잘생긴 소나무들 사이로 나 있다. 네댓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혼자 생각에 잠겨 걸어도 좋고 여럿이 수다를 떨며 걸어도 좋을 길이다.
옛 국도를 따라 천천히 주변 풍경을 보면서 가다 보면 첫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 좋다. 정말 이 길로 차가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군데군데 돌로 쌓고 무너져 내린 흙을 치우며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왼쪽으로 일월산 정상에 설치된 군사시설물과 초록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내리막은 진등 방향 반변천 뿌리샘 가는 길이다. 칠(칡)밭목 삼거리 방향으로 향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영양 28km’라는 녹슬고 칠이 벗겨진 오래된 이정표를 보니 반가우면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 조금 오래된 것이라면 무조건 없애거나 버리는 것이 예사인 요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소중한 물건들이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고, 일제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 때문에 살아남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이정표가 남다르게 보이는지 모른다. 쓸모없고 보기 싫다고 뽑아다 고철로 녹여 버렸다면 슬픈 역사의 흔적 하나가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들 발길과 관심이 없었던 오지에 있었기에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아닌지.
다시 옛 국도를 따라 걷다 보면 외씨버선길 끝나는 곳에 칠(칡)밭목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봉화로 가는 외씨버선길이다. 칠밭목 또는 칡밭목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칡이 산을 덮고 있어 칡을 일부러 심어 놓은 밭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주변은 울창한 낙엽송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계곡 옆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피어나는 야생화가 볼만하다고 한다.
대티골에서 가장 윗 쪽에 자리 잡은 집을 보며 시멘트로 포장된 내리막을 가다 끝나는 곳에서 왼쪽 흙길로 접어든다. 조금 진행하면 반변천 발원지 뿌리샘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잠시 반변천 뿌리샘을 찾아 나선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다녀올 만하다. 내려가는 길 주변은 산림자원보호구역을 알리는 팻말이 줄에 매달려 있다. 반변천 발원지인 뿌리샘은 동굴처럼 둥근 암반에서 많은 물을 쏟아내고 있다. 물이 차갑고 시원하다. 반변천 발원지에서 큰골로 가는 옛 마을길로 내려가도 처음 출발지로 갈 수 있다.
일단 왔던 길을 다시 올라 서서 왼쪽으로 가다 묘가 있는 곳으로 진행한다.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숲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중간에 마을 주민이 설치한 그네와 긴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월산 0.8Km 이정표를 뒤로하고 계속 걷는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계곡을 건너면 급한 내리막이다. 크고 작은 돌과 쌓인 낙엽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계곡 물소리 들으며 내려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큰골 갈림길에 다다르면 거의 다 온 셈이다.
텃골, 깃대배기, 깨밭골, 칠(칡)밭목, 말머리등, 샘물내기, 왕바우골, 그루목, 쿵쿵목, 진등 등 걸으며 만나는 옛 마을 이름을 딴 이정표가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일월산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인 수달과 2급인 담비, 삵을 비롯해 너구리, 족제비, 노루, 고라니, 멧토끼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국도 주변은 온통 금강송으로 빼곡한 송이밭이기도 하다. 한동안 송이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등 갈등을 빚었지만 지금은 사시사철 찾아갈 수 있다.
대티골 숲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대티골 사람들이 막히거나 무너진 숲길을 보수하고 정비해 생태 치유의 길로 가꾸어 옛 국도뿐만 아니라 댓골길, 옛마을길, 칠(칡)밭길 등을 ‘아름다운 숲길’로 되살려냈다. 길 중간중간에 그네와 의자 등을 갖춘 쉼터를 만들고 이정표를 세웠다. 이 같은 노력으로 대티골 숲길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부문‘아름다운 어울림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켰던 제주 올레길보다 1년 먼저 열린 길이 바로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이다. 길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방치되었던 옛길이 그 어느 길보다 아름다운 숲길로 태어난 것이다.
<글: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3. 천주교 우련전 성지
천주교성지 '일월산우련전'은 200여년전인 1801년 조정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교도들의 삶이 녹녹히 스며있는 자리, 일월산 우련전에 천주교 집단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이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에 사는 김성문 (남,69세)씨를 통해 내력을 들어 보자.
'그 당시에는 높은 산으로 막혀있어 바깥 사람들과의 통행이 없었고, 나물캐는
약초꾼과 산짐승을 포획하는 포수들이 산속 신앙생활을 외부로 전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도회지 사람의 별장 건물이 들어선 우련전 골짝 심처에 당시는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고,교회 규모는 토굴 이나 움막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현재는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던 돌담뚝이 여러 곳에 남아 있을 뿐이다.'
천주교 안동교구청에서 발간한 학생 하계연수 자료에 당시 피신온 교도들의
신앙 생활 일부가 전해 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의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가 신유년 박해를
피해 30명의 교도들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우련전에 터를 잡은 뒤 이들은 기도와 성서 읽기에 전념했고,동틀녘이면 어김없이 터밭을 일구고,밤에는 교리 공부에 힘썼다 고 했다.
기도 도구랄 것도 없이 손엔 묵주가 고작 이었고, 제단은 양초 대신 호롱불이 차지 했고, 나무토막으로 십자가상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영글게 했다고 한다.
영양성당 초창기부터의 신도인 이낙현 이디오니시오(남,55세)씨는 "당시교우촌을
형성했던 신도들은 깡조밥과 소금으로 생활하는 검소함을 실천했음을 전해 들었다"면서 "그들의 공동체 신앙생활이 지금의 나눔과 섬김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인근 화전민들에게 일심한 기도와 모범생활로 포교에 열성을 다하여
교우촌을 넓혀 가면서 고난속에서도 사순절의 극기생활과 매일매일의 대제를
엄격히 지켜 나갔다고 전해 진다.
지금도 우련전 곳곳에 천주교도들이 제단으로 사용한 듯한 석축이 남아 있다.
화전의 밭뚝을 만든 석축과는 다른 작은 형태이다.
아무 말없이 사람들을 받아 안았던 일월산,해와 달의 품으로 찾아든 많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고통받지 않는 평온한 세상,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었다.
이젠 첩첩산중이라는 옛모습은 많이 변했다.경북 영양읍내에서 승용차로
30분거리에 있다.
영양에서 봉화로 연결되는 국도 31번도로 를 가다가 영양터널이 나오면 즉시 우회전 으로 진입하면 울창한 낙엽송림과 마주한 첩산 마을은 화전이 펼쳐진다.
바로 이곳이 우련전, 한국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이며,애틋한 순교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참고문헌:영양군지,봉화군지 및 매일신문사 취재기사'접신의 땅 일월산 (2001년2월28일 발간)'
4. 천도교 동학 일월산 성지
동학은 인간을 한울님처럼 존귀하게 여기며 자기 수행을 통해 한울님의 뜻과 일치함으로써 스스로 역사를 창조해 가는 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또 동학은 현세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이를 위해서는 '보국안민'을 주장한다.
동학은 '천도교'로 종교단체가 되어 발전하고 있다.
동학(천도교)의 첫번째 성지는 교조인 수운 최재우 대신사(1824~1864)가 나고 자랐으며 묻혀 있는 경북 경주시 가정리 용담(龍潭)성지다.구미산(해발594미터)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186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최재우 대신사가 경주관아에 체포되어 그해3월10일 좌도난정(左道亂正:이단사상으로 사회를 어지럽힘)이라는 죄목으로 대구 장대에서 처형되었다.
최재우 대신사가 체포될 때 그의 가족과 제자들도 함께 처형되거나 중형을 받았고 남은 제자들도 경주 일원에서는 활동이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 지역을 관장하던 최시형은 일월산아래 현재는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벌매마을에 포교활동을 하던중이고 이곳이 첩산오지인 관계로 체포되지 아니하여 탄압을 피할 수 있었고,1870년 그를 중심으로 다시 교단이 재건됐다.
동학의 기본교리는 최재우 대신사가 집필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로서,초고본은 최재우 대신사 처형 당시 모두 불태워져 없어졌다.
동학(천도교)2세 교주가된 최시형은 1864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벌매마을 일월산속에 피신하였다. 이곳은 열열한 신도가 많았고,험준한 지형 지세 등 자연여건이 피신겸 포교에 적합한 곳이었다.
최시형은 1871년 까지7년간 용화동 벌매마을에 정착하여 없어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 집필,재현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원고를 1880년 강원도 인제군 진부령 산속에서 출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용화리는 한때 동학의 총본부 역활을 했다는데 연유하여 '용담성지'사상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용화동'이라 이름 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동학의 2세 교주 최시형 선생도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하여 1898년에 관군에게 체포되어 6월2일 광화문 밖 형장(刑場)에서 순도하였다
제3세 교주 손병희는 1905년 12월1일 '동학'을 '천도교'로 바꾼 이후 4계명과 5관을 규정하여 교도의 자격을 규정하고 교리의 현대화,의식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이렇게 동학이 종교단체로 변화한 탓으로 일제하에 모든 단체가 해산된 경우에도 예외로 인정되어 1919년3월1일 다른 종교단체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5.‘일월산 황씨부인당’이야기
*해와 달 정기 모인 곳에서 신을 만나다 - 일월산과 황씨부인당
일월산(日月山)은 주(主) 산맥인 태백산맥의 남쪽 끝에 위치한 고봉으로 위쪽으로는 태백산과 연결되고, 아래로는 주왕산과 맥을 이루고 있다.
일월산은 봉화군 재산면과 영양군 일월면과 청기면 청기리의 경계가 되는 산이며,
모난 데가 없이 덩치가 큰 육산으로, 동으로는 동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 부르며 정상부에는 1천219m의 월자봉(月字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도 철종 12년(1861)에 작성한 '대동여지도(大動與地圖)'에 일월산을 눈부시게 표기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쪽은 영동(嶺東), 남쪽은 영남(嶺南)이라 일컫고 이 세 곳의 정기를 모은 곳이 일월산이라 했다.
△신비의 영산(靈山) 일월산
일월산 일자봉에서는 경북 내륙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매년 해맞이행사가 열리고, 월자봉에 오르면 태백산맥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서쪽으로는 청량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이 일자로 흐르는데 그 중에서 백암산이 뚜렷하게 보인다.
낙동강의 상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이 이곳 일월산에서 발원하며, 천축사라는 사찰터와 산령각, 황씨부인당, 용화선녀탕 등 볼거리가 있고 참나물, 금죽, 나물취, 더덕, 고사리등의 산나물이 유명하다.
특히 일월산은 태백산의 가랭이에 위치하고 있어 음기가 강한 여(女)산으로 알려져
그믐날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이 산을 찾아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하
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해 무속인들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 산이기도 하다.
일월산에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기도하고, 영험을 캐는 흔적들이 많으며, 무(巫),
민초들이 막걸리로 목을 적시며 굽어 살피라고 절절이 애간장 끓이며 간청했던 신
앙이 있다.
용화세계, 미륵세상이 곳곳에 있듯이 이렇듯 수 백년의 역사를 거듭하며 일월산을
지킨 끝에 남겨진 우리 것의 전형(典型)이며, 거기엔 영웅신화를 비롯한 우리 고대
문학의 원형이 담겨 있고, 여기서 노래와 춤가락이 흘러 나왔으며, 그 대표적인 영험의 상징이 바로 황씨부인당을 비롯한 산령각, 용화사, 선녀골, 선녀탕 등이 있다
일자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동해에서 떠올라 한반도를 비추는 첫 햇살을 맞이할 수 있는 곳으로 아련하게 동쪽으로 뻗어있는 산마루에서 솟는 해는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와는 또다른 신비감과 장관을 이루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공군기지가 있는 관계로 상시적으로 개방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황씨부인당과 설화
31번 국도를 타고 봉화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영양터널이 나오고 영양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3.5㎞ 남짓 오르면 해발 940m의 일월재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길로 3㎞ 남짓 더 달리면 황씨부인당 앞에 다다른다.
일월산은 산신령이 살았다는 전설을 낳았을 만큼 신비로운 영산(靈山)으로 추앙되돼왔고 그로 인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토속신앙이 깊이 뿌리내렸지만 지금은 수많았던 당집들이 모두 정리되고 월자봉 아래에 황씨부인당이 남아있을 뿐이다.
황씨부인당에 여러가지 설화가 남아있는데 그 중 신랑의 어리석은 오해로 인해 첫날밤을 치르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한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로 다양하게 원용됐는데, 대표적인 작품에 조지훈(趙芝薰)의 시 '석문(石門)'과 서정주(徐廷柱)의 시 '신부(新婦)'가 있다.
당집은 원래 판자로 엮어 지은 남향집이었는데, 그 뒤 퇴락해 가로와 세로 2.8m의 벽돌집으로 개축되고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시렁을 놓고 그 위에 황씨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당리에 신심이 깊은 여자관리인이 있어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당에 올라가서 촛불을 켜고 빌며, 일정한 제사일이 없고 때때로 부인들이 찾아와 촛불을 켜고 쌀과 과일들을 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이들은 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몸이 아프거나 재수가 없으면 찾아와 빈다고 한다. 그러나 당리 마을사람들은 이 신을 그 지방의 수호신이요 안토신(安土神)으로 믿으며, 안녕과 풍요는 이 여신의 조화라고 믿고 있고 있으며, 1976년 당 옆에 산령각(山靈閣)을 지었다.
△일월산 천화사와 선녀탕
황씨부인당에서 남쪽 산길로 30분 남짓 내려가면 청기면 당리리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천년 고찰 천화사도 둘러볼 수 있다.
비구니 사찰로 경북 의성 등운산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고운사의 말사로 195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력은 알 길이 없으며, 대웅전과 요사채가 하나씩 있을 뿐인 아담한 절로 소박한 산사의 정취가 그윽하고 옆으로는 맑은 계곡이 흘러 운치를 더한다.
일월산 동쪽 기슭에는 용화선녀탕이 숨어있는데 선녀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2~3분쯤 산길을 오른 뒤에 계곡으로 내려서면 용화선녀탕이 반긴다.
높이 10m쯤 되는 폭포 아래로 파인 웅덩이가 욕조를 닮아 신비스러우며, 선녀를 다스리던 신선이 내려와 살펴보고는 물이 맑고 부드럽다며 선녀들의 목욕을 허락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웅덩이를 선녀탕, 이를 품은 골짜기를 강림골이라고 일컬으며 지명을 따서 용화계곡이라 하며, 백옥 같은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새소리를 벗 삼아 목욕하는 선녀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듯하다.
6. 금수강산삼천리의 정동쪽에 있는 일월산
"금수강산삼천리"에서 '삼천리'의 내용은 우리나라는 '해좌사향'으로
정남쪽은 해남 정남진이고,정북쪽은 함경도 은성이며 상호거리가 2998리이다.
따라서 삼천리금수강산이라 한다.
정동쪽있는 산은 영해(지금의 영양) 일월산이며.정서쪽의 산은 풍천에 있는
구월산으로 상호거리는 1280리다.
백두산은 2744m이며 일월산은 1219m이다.
따라서 일월산은 해와 달의 맑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이는 명산이다.
또한 내륙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 계묘년 설날에 해맞이는
일월산 해맞공원을 추천합니다.
*일출시간 아침 7시 20분경입니다*
#2023. 2. 13. 16:00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네 오늘은 영양 일월면의 어떤 마을에 대해 소개해 주십니까?
네 오늘은 일월면 용화리 대티골 마을에 대해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대티골 마을은 해발1219미터인 일월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요. 전통신앙 황씨부인과 천도교(동학), 천주교 등 종교성지가 많이 있는 마을입니다. 50가구 정도가 이 마을에 상주하고 있고, 여러성씨가 살고 있습니다. 또 낙동강 상류 반변천 발원지가 있고, 풍류도의 용화동천 유적과 문화재로 용화동삼층석탑이 있습니다.
2. 네 오늘 이 영양 대티골 마을에 대해
먼저 어떤 곳부터 소개해주십니까?
네 대티골 마을의 아름다운 숲길부터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경북 영양· 봉화·청송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240㎞가 넘는 도보 길인 ‘외씨버선길’에서 일곱 번째 ‘치유의 길’ 일부 구간인데요. 이 길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군 장군광업소로 실어가는데 쓰였고, 해방 후에는 일월산의 질 좋은 소나무를 베어내 옮기는 임도(林道)로 사용됐습니다. 어쨌든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대티골 경로당, 대티골 숲길 입구, 진등 반변천 발원지 쉼터, 칠(칡)밭목 삼거리(옛마을길 끝 지점), 반변천 발원지 이정표, 큰골삼거리, 대티골 주차장, 숲길입구, 일월산자생화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7.6km 정도 거리입니다.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하지만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어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습니다.
3. 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면서
아픈 옛 역사부터 수려한 풍경까지...
대티골 마을을 오롯이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앞서 이 마을은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져 있다고 말씀해 주셨었죠?
네 대티골 마을에는 전통종교부터 천주교, 천도교를 포함해 다양한 종교들이 있어 여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오늘 한번 풀어보려 하는데요. 먼저 천주교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을에는 천주교성지 '일월산우련전'이 있습니다. 이곳은 200여년전인 1801년 조정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교도들의 삶이 녹녹히 스며있는 자리인데요. 일월면 용화리에 사는 김성문씨를 통해 우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높은 산으로 막혀있어 바깥 사람들과의 통행이 없었고, 나물캐는 약초꾼과 산짐승을 포획하는 포수들이 산속 신앙생활을 외부로 전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련전 골짜기 깊은 곳에는 지금은 도회지 사람의 별장 건물이 들어섰는데요. 당시는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고, 교회 규모는 토굴이나 움막으로 추정되고 현재는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었던 돌담뚝이 여러 곳에 남아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4. 네 다음으로는
마을에 어떤 종교와 관련된 흔적이 남아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동학, 그러니까 천도교인데요. 이미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동학 2세 교주가된 최시형은 1864년 영양 일월면 용화리 벌매마을 일월산속에 피신했습니다. 최시형은 1871년 까지 7년간 용화동 벌매마을에 정착해서 없어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집필과 재현에 성공했는데요. 이런 원고를 1880년 강원도 인제군 진부령 산속에서 출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용화리는 한때 동학의 총본부 역할을 했다는데서 비롯됐고요. '용담성지'사상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용화동'이라고 이름을 짓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5. 네 이렇게 천주교와 천도교에 대한 이야기 전해주셨는데,
또 어떤 종교가 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토속신앙에 대한건데요. 일월산은 태백산의 가랭이에 위치하고 있어 음기가 강한 여자 산으로 알려져있다보니, 아주 오랜 옛날부터 토속신앙이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았던 당집들이 모두 정리되고 월자봉 아래에 황씨부인당만 남아있는데요. 이 황씨부인당에 여러가지 설화가 있습니다. 그 중 신랑의 어리석은 오해로 첫날밤을 치르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한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로 다양하게 인용됐는데, 대표적으로는 조지훈(趙芝薰)의 시 '석문(石門)'과 서정주(徐廷柱)의 시 '신부(新婦)'가 있습니다.
6. 네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황씨부인당 근처에
또 다른 볼거리도 있다고요?
네 황씨부인당에서 남쪽 산길로 30분 남짓 내려가면 청기면 당리리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천년 고찰 천화사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천화사는 비구니 사찰로, 대웅전과 요사채가 하나씩 있을 뿐인 아담한 절입니다. 소박한 산사의 정취가 그윽하고 옆으로는 맑은 계곡이 흘러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또 일월산 동쪽 기슭에는 용화선녀탕이 숨어있는데 선녀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2~3분쯤 산길을 오른 뒤에 계곡으로 내려서면 용화선녀탕이 반깁니다.
이곳은 높이 10m쯤 되는 폭포 아래로 파인 웅덩이가 욕조를 닮아 신비스럽고요, 선녀를 다스리던 신선이 내려와 살펴보고는 물이 맑고 부드럽다며 선녀들의 목욕을 허락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웅덩이를 선녀탕, 그리고 선녀탕을 품은 골짜기를 강림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지명을 따서 용화계곡이라고 합니다.
7. 네 그럼 이 시간 끝으로,
대티골 마을과 관련해 한가지 이야기 더 전해주신다면...
어떤게 있습니까?
네 금수강산삼천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실겁니다. "금수강산삼천리"에서 '삼천리'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정남쪽은 해남 정남진이고, 정북쪽은 함경도 은성인데 정동쪽있는 산은 영해, 그러니까 지금의 영양 일월산입니다. 일월산은 해와 달의 맑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이는 명산인데요. 내륙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보니, 계묘년 해맞이는 일월산 해맞이공원을 추천드려 봅니다. 참고로, 일출시간은 아침 7시 20분경입니다.
네, 이렇게 오늘은 내륙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만나볼 수 있는
대티골마을의 일월산 해맞이 공원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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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3 방송분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일월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네 오늘은 영양 일월면의 어떤 마을에 대해 소개해 주십니까?
네 오늘은 일월면 용화리 대티골 마을에 대해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대티골 마을은 해발1219미터인 일월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요.
전통민속신앙 황씨부인과 천도교(동학), 천주교 등
종교성지가 많이 있는 마을입니다.
50가구 정도가 이 마을에 상주하고 있고, 여러성씨가 살고 있습니다.
또 낙동강 상류 반변천 발원지가 있고,
풍류도의 용화동천 유적과
문화재로 용화동삼층석탑이 있습니다.
2. 네 오늘 이 영양 대티골 마을에 대해
먼저 어떤 곳부터 소개해주십니까?
네 대티골 마을의 아름다운 숲길부터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경북 영양· 봉화·청송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240㎞가 넘는
도보 길인 ‘외씨버선길’에서 일곱 번째 ‘치유의 길’ 일부 구간인데요.
이 길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군 장군광업소로 실어가는데 쓰였고,
해방 후에는 일월산의 질 좋은 소나무를 베어내
옮기는 임도(林道)로 사용됐습니다.
어쨌든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대티골 경로당, 대티골 숲길 입구, 진등, 반변천 발원지 쉼터,
칠(칡)밭목 삼거리(옛마을길 끝 지점), 반변천 발원지 이정표,
큰골삼거리, 대티골 주차장, 숲길입구, 일월산자생화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7.6km 정도 거리입니다.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하지만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어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습니다.
3. 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면서
아픈 옛 역사부터 수려한 풍경까지...
대티골 마을을 오롯이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앞서 이 마을은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져 있다고 말씀해 주셨었죠?
네 먼저 천주교인데요.
마을에는 천주교성지 '일월산우련전'이 있습니다.
이곳은 200여년전인 1801년
조정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천주교도들의 삶이
녹녹히 스며있는 자리인데요.
일월면 용화리에 사는 김성문씨를 통해 우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높은 산으로 막혀있어 바깥 사람들과의 통행이 없었고,
나물캐는 약초꾼과 산짐승을 포획하는 포수들이
산속 신앙생활을 외부로 전했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도회지 사람의 별장 건물이 들어선 우련전 골짝 심처에
당시는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고요,
교회 규모는 토굴이나 움막으로 추정되고
현재는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었던 돌담뚝이 여러 곳에
남아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4. 네 다음으로는
마을에 어떤 종교와 관련된 흔적이 남아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동학, 그러니까 천도교인데요.
이미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동학 2세 교주가된 최시형은
1864년 영양 일월면 용화리 벌매마을 일월산속에
피신했습니다.
최시형은 1871년 까지 7년간 용화동 벌매마을에 정착해서
없어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집필과 재현에 성공했는데요.
이런 원고를 1880년 강원도 인제군 진부령 산속에서
출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용화리는
한때 동학의 총본부 역할을 했다는데, 있는데요.
'용담성지'사상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용화동'이라고
이름을 짓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5. 네 이렇게 천주교와 천도교에 대한 이야기 전해주셨는데,
또 어떤 종교가 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토속신앙에 대한건데요.
일월산은 태백산 아래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사이,
사람의 양다리 가랭이에 위치하고 있어
음기가 강한 여자 산으로 알려져있다보니,
아주 오랜 옛날부터 토속신앙이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았던 당집들이 모두 정리되고
월자봉 아래에 황씨부인당이 남아있을 뿐인데요.
이 황씨부인당에 여러가지 설화가 남아있습니다.
그 중 신랑의 어리석은 오해로
첫날밤을 치르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이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한을 품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로 다양하게 원용됐는데,
대표적으로는 조지훈(趙芝薰)의 시 '석문(石門)'과
서정주(徐廷柱)의 시 '신부(新婦)'가 있습니다.
6. 네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황씨부인당 근처에
또 다른 볼거리도 있다고요?
네 황씨부인당에서 남쪽 산길로 30분 남짓 내려가면
청기면 당리리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천년 고찰 천화사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천화사는 비구니 사찰로,
대웅전과 요사채가 하나씩 있을 뿐인 아담한 절입니다.
소박한 산사의 정취가 그윽하고 옆으로는 맑은 계곡이 흘러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또 일월산 동쪽 기슭에는 용화선녀탕이 숨어있는데
선녀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2~3분쯤 산길을 오른 뒤에
계곡으로 내려서면 용화선녀탕이 반깁니다.
이곳은 높이 10m쯤 되는 폭포 아래로 파인 웅덩이가
욕조를 닮아 신비스럽고요,
선녀를 다스리던 신선이 내려와 살펴보고는
물이 맑고 부드럽다며 선녀들의 목욕을 허락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웅덩이를 선녀탕,
그리고 선녀탕을 품은 골짜기를 강림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지명을 따서 용화계곡이라고 합니다.
7. 네 그럼 이 시간 끝으로,
대티골 마을과 관련해 한가지 이야기 더 전해주신다면...
어떤게 있습니까?
네 금수강산삼천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실겁니다.
"금수강산삼천리"에서 '삼천리'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정남쪽은 해남 정남진이고, 정북쪽은 함경도 은성인데
정동쪽있는 산은 영해, 그러니까 지금의 영양 일월산입니다.
일월산은 해와 달의 맑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이는 명산인데요.
내륙에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다보니,
계묘년 해맞이는 일월산 해맞이공원을 추천드려 봅니다.
참고로, 일출시간은 아침 7시 20분경입니다.
네, 이렇게 오늘은 내륙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만나볼 수 있는
대티골마을의 일월산 해맞이 공원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도움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감사합니다.
<영양,일월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2023. 2.20. 월요일 소개할 마을이야기 자료
오늘은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이야기입니다
<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1.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유래
석보石保는‘끝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돌석石자에 보전할보保자로 '石保석보'라 하였으며, 원리는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이어서 원리라하였고, 두들마을은 언덕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원리리(院里里) 두들마을은 동쪽에 영덕군 창수면과 남쪽에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에 영양읍의 양구리를 연접하고 있습니다.
석보면 소재지 마을이며. 석보면행정복지센터ㆍ경찰서파출소와 석보초등학교ㆍ석보중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ㆍ농협 등의 기관들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위한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1640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들어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마을입니다. 지금은 60여호에 1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앞에 흐르는 인지천(주남천) 가에 있는 언덕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세심대, 낙기대, 동대, 서대 등의 글씨가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가 마을의 앞 낙기대 언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조 선조 때부터 양반가 음식 요리에 관한 서책을 한글로 쓴 분이며, 詩, 書,畵, 음식,가정화목에 기여한 공로가 많아 여중군자로 불리어 오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입니다.
원리(院里) 두들마을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이 곳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리두들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입니다.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것입니다.
2. 석계 이시명이 터를 딱은 마을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 독립운동가 등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 이기도 한 이곳에는 여산정사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 (인치천)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섬들(섬모양의 농지)'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3. 두들마을 재령이씨'의현당'의 가훈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
"내 재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길거리의 사람의 생명이다."를 강조하는 가훈입니다.
"지고 밑지며 살아라" "지고 살면 사람을 얻는다, 밑지고 살면 세상을 얻는다."는 가훈이 전해 지고 있습니다.
4. 두들마을에 있는 문화재
석계고택, 석천서당, 유우당, 석간고택, 주곡고택, 광록정, 만석꾼지지집, 병암고택 등이 있습니다.
5. 두들마을 8경
두들마을에는 아름다운자연경관 8경이 있습니다. 두들마을 8경은 광려산, 병암산, 낙기대, 세심대, 동대, 서대, 석천서당, 광록정입니다.
6. 석계고택
조선 인조,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으로 석계선생은 안동에서 임종하였으나 정부인은 이곳에서 임종 때까지 살았습니다.
이 고택은 4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웠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습니다.
사랑채는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습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상방이 연접해 있는데 안방옆의 마루 후면에는 판벽을 둘러 고방을 설치 하였습니다.
상방의 우측벽에는 상.하방 사이에 문꼴을 내어 문을 달았는데 밖으로는 세살문을 안쪽으로는 판장문을 설치 하였으며 안방에는 코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안채 역시 가구는 삼량가의 간결한 구조입니다.
7. 石川書堂석천서당
석천서당은 1640년(인조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터를 잡고‘석계초당’을 지어 13년 동안 살았던 곳입니다. 1674년에 석계 선생이 안동에서 세상을 떠나자 1676년(숙종2)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업을 이었습니다.
이숭일이 세상을 떠난 뒤 70여 년 만에 만와(晩窩) 이인훈(李仁壎)의 주도로 퇴락한 초당을 개축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선친인 이시명의 호 ‘석계(石溪)’를 피해서 ‘천(川)’자로 바꿔서 이름을 지었다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기문에 실려 있습니다.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살펴보면 석천서당은 1891년에 다시 한 번 중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석간고택
영양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위한 살림집인 정침과 독서공간인 정사이며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유명 합니다.
좌해공 이수영은 1832년(순조32년) 석보면 화매에서 학문연마와 심신 수신에 노력하고,수양에 심혈을 기울리기 위해 형제들과 시를 짓고 유람을 하였습니다.
1852년(철종3년) 태백산에서 돌아온 이수영을 위해 문중형제와 친구들이 8칸(서실4칸,살림집4칸) 규모의 집을 지어 주어, 살았으나, 1859년 (철종10년) 산불이 나서 불타버렸습니다.
그 후 1883(고종20년)제자들이 이수영을 위해 원리리에 살림집을 지은후 강학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여산정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여산정사는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입니다.
한국전쟁(1950년)이 끝난후 이문열의 조모가 집안 친척인 이철호에게 집을 팔고난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 및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석간고택은 사랑채.안채.고방채가 있다.살림집인 정침은 정면4칸,측면 5칸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독서실인 정사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입니다.
좌해공 이수영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아들 항재 이승일의 7세손으로 1800년대 가학을 이어 정리하고 기록한 학자입니다.
석천서당,광록초당,남악정을 중수 하도록 했으며.저서로 좌해 유고9권과 부록2권이 있으며 -좌우명은 "공경함으로서 안을 바르게 하고 옳음으로 밖을 곧게 한다"입니다.
9. 유우당
재령인 이상도(1733-1835)가 건립한 가옥인데.장자인 이기찬의 호를 따라 당호를 유우당이라 하였습니다.
이 집은 원래 주남리에 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가 현위치인 두들마을로 이건하였는데,이돈호는 파리장서 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이바지한바 있으며, 몽구 이병각시인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당초 'ㅁ'자형태였으나 이후 기능이 부가되어 '날개집'형태가 되었으며.사대부들의 예학사상과 엄격함.그리고 도덕성을 느낄 수 있는 고택입니다.
10. 주곡고택
경북도민속자료제114호96.12.5 지정된 고택으로 조선시대의 가옥,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도'가 지었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30년 (1830)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입니다.
'ㅁ'자형 구조이며 사랑방의 편리를 위하여 다양하게 꾸민 벽장과 감실방,벽장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있는 널로된 제사상이 돋보입니다.
또한 부엌에 물을 담아 두고 쓰는 큰 독인 물두멍이 남아 있느며.경북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건물로 보기드믄 옛생활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 원리리도사댁 만석꾼집
1800년대 건립. 두들마을의 좌후측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인근에서는 이 집을 만석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4 칸 반 규모의 초옥인 방아간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침은 정면 9칸.측면 5 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과 2칸씩의 온돌방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습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연접시켰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230220방송분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 석보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오늘은 영양 석보면의 어떤 마을에 대해 소개해주십니까?
네, 오늘은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곳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자면
- 石保는 ‘끝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보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돌석石자에 보전할보保자로 '石保'라 했고요,
원리는 조선시대에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이어서 원리라했고, 두들마을은 언덕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두들마을은 동쪽에 영덕군 창수면과
남쪽에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에 영양읍의 양구리를 연접하고 있고, 석보면행정복지센터ㆍ영양경찰서석보파출소와 석보초등학교ㆍ석보중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 농협같은 기관들이 있습니다.
2. 네 그러면 지금부터
이 두들마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죠?
네, 두들마을은
1640년 丙子胡亂을 당해서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이면서
생긴 마을입니다.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 마을로,
지금은 60여호에 1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앞에 흐르는 인지천,
그러니까 주남천 가에 있는 언덕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恒齋 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세심대와 낙기대, 동대, 서대같은
글씨가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3. 그리고 또 유명한 분을 기리는 유적비가
두들마을에 있죠?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장계향으로 알려진
정부인 안동장씨에 대한 유적비인데요.
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가 마을의 앞
낙기대 언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장계향 선생은 조선조 선조 때부터
양반가 음식 요리에 관한 서책인
음식디미방을 한글로 쓴 분이고요,
詩, 書,畵, 음식,가정화목에 기여한 공로가 많아
여중군자로 불리어 오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입니다.
4. 그렇다면 여중군자로 불리는 이 장계향 선생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네. 음식 디미방은 워낙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음식디미방 말고
정부인 장계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정부인 장씨를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는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쓴 <정부인 행실기>입니다.
정부인의 생애와 삶에 대해서
기록한 것으로는 매우 긴 글이고,
구체적인 일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요.
물론 갈암 선생이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였으니
바람직한 유교문화에 부합되는 내용이 많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해당 내용을 압축해보자면
정부인 장씨는 지극한 효녀이자 좋은 아내,
현명한 어머니,
사회 봉사자,
성현의 가르침실천자의 모습이었다고
알 수 있습니다.
물론 17세기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인데요,
당시로서는 모범적인 여성상이고,
성취한 여성상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5. 네 장계향 선생이라고 하면 음식 디미방만 떠올렸는데
음식 조리서를 집필한 것 말고도
당시 여러방면에서 본받을만한 여성이었군요.
또 앞서 이 두들마을에 광제원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광제원은 어떤곳이었습니까?
네,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위한 곳이
광제원이었는데요.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 둔 기관입니다.
두들마을의 광제원은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건데요.
院里 두들마을라는 명칭 자체가
두들에 위치한 광제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원리두들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5-1. 그럼 두들마을이라는 이름은 왜 붙게 된겁니까?
네, 마을 들머리에는
언덕밑에 주남천인 인치천이 흐르고,
마을 안산인 병암산 밑으로
화매천이라는 시내가 흐릅니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섬들, 그러니까 섬모양의 농지'가 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 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고해서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
6. 광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원리,
그리고 물이 돌아 드는
언덕머리에 자리잡아 두들마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거군요.
그럼 두들마을의 입향조라고 할 수 있는
석계 이시명 선생에 대해서도 알아보죠?
네,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한국문학의 거장인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 이기도한데요.
여기는 여산정사를 비롯해서
석계고택이나 석간고택.
주곡고택. 석천서당을 포함한
30여채의 전통가옥들이 있고요.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예절관과 유적비,
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 "전통주체험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돼 있습니다.
7. 네 석게 이시명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또 어떤게 있을지 궁금해지는데요?
석계 이시명 선생의
재령이씨 '의현당'에는
세가지 가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요.
먼저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내용이 있고요.
다음으로
"내 재산보다도 더 중요한건 길거리의 사람의 생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고 밑지며 살아라"
"지고 살면 사람을 얻는다,
밑지고 살면 세상을 얻는다."는
가훈이 전해 지고 있습니다.
두들마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장계향을 비롯해 석계 이시명 선생과
다양한 인물들을 배출해낸 영양 두들마을 이야기,
다음 시간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 전해주실기 기대해보면서-
오늘 도움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잘들었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영양, 석보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230227방송분
계속해서 꽃빛고을 영양 곳곳에 대해 알아보는
<영양, 석보 이야기>전해드립니다.
오늘도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하고요.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세요.
1. 오늘은 영양 이야기 마지막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영양 석보면의 두들마을에 대해 전해주시기로 하셨죠?
그렇습니다.
이 두들마을은 우리에게 음식 디미방으로 널리 알려진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비롯해
석계 이시명 선생과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낸 곳입니다.
또한 이 두들마을에는
다양한 문화재가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석계고택과 석천서당,
유우당, 석간고택, 주곡고택, 광록정,
만석꾼지기집, 병암고택이 있고요.
두들마을에는 아름다운자연경관 8경도 있습니다.
두들마을 8경은 광려산과 병암산,
낙기대, 세심대, 동대, 서대, 석천서당, 광록정입니다.
2. 그럼 지금부터 두들마을의 문화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 가져보죠.
먼저 석계고택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네 석계고택은 조선 인조,
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인데요.
석계선생은 안동에서 임종했지만,
정부인은 이곳에서 임종 때까지 살았습니다.
3. 네 그럼 다음으로 석천서당은 어떤 곳입니까?
네 석천서당은 1640년(인조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터를 잡고
‘석계초당’을 지어 13년 동안 살았던 곳입니다.
1674년에 석계 선생이 안동에서 세상을 떠나자
1676년(숙종2)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고향으로 돌아와 선업을 이었습니다.
이숭일이 세상을 떠난 뒤 70여 년 만에
만와(晩窩) 이인훈(李仁壎)의 주도로
퇴락한 초당을 개축해 ‘석천서당(石川書堂)’ 이라고
이름을 붙인겁니다.
선친인 이시명의 호 ‘석계(石溪)’를 피해서
‘천(川)’자로 바꿔서 이름을 지었다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기문에 실려 있습니다.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의
『석천서당중수기(石川書堂重修記)』를 살펴보면
석천서당은 1891년에 다시 한 번 중수를 거쳐서
오늘날의 규모를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네 지금의 석천서당이 되기까지
다양한 과정을 거쳤군요.
석계고택과 석천서당에 대해 소개해주셨는데,
이번에는 석간고택이에요?
네 영양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위해 만들었는데요.
살림집인 정침과 독서공간인 정사로 구분되고,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유명 합니다.
이곳은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와
여산정사로 불렸었는데요.
한국전쟁(1950년)이 끝난후 이문열의 조모가
집안 친척인 이철호에게 집을 팔고난뒤
석간정사 혹은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5. 계속해서 다음으로는 두들마을의
어떤 문화유산에 대해 소개해주십니까?
네 이번에는 유우당인데요.
유우당은 재령인 이상도(1733-1835)가
건립한 가옥입니다.
장자인 이기찬의 호를 따라 당호를 유우당이라 했습니다.
이 집은 원래 주남리에 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가 현위치인 두들마을로 이건했는데,
이돈호는 파리장서 사건에 가담해서
독립운동에 이바지했습니다,
또 몽구 이병각시인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당초 'ㅁ'자형태였지만,
이후 기능이 부가돼 '날개집'형태가 됐습니다.
집의 형태에서부터 사대부들의 예학사상과 엄격함.
그리고 도덕성을 느낄 수 있는 고택입니다.
6. 네 사대부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는 유우당
어떤 곳일지 궁금해지는데...
두들마을에 위치한 주곡고택은 또 어떤 곳입니까?
네 주곡고택은 96년 12월 5일,
경북도 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조선시대의 가옥,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도'가 지었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30년 (1830)에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입니다.
'ㅁ'자형 구조이고,
사랑방의 편리를 위해
다양하게 꾸민 벽장과 감실방,
벽장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있는 널로된 제사상이 돋보입니다.
또한 부엌에 물을 담아 두고 쓰는 큰 독인 물두멍이 남아 있고요.
경북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건물로 보기드문
옛생활문화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 네 우리지역의 생활문화가 그대로 담겨있는
의미있는 곳이군요.
이 시간 끝으로 두들마을의 원리리도사댁 만석꾼집까지 살펴보죠?
네 이 집은 1800년에 건립돼
두들마을의 좌후측에 남향해서 자리잡고 있는데요,
인근에서는 이 집을 만석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있고요.
정침의 우측에는 4 칸 반 규모의 초옥인
방아간채가 배치돼 있습니다.
여기서 정침은 정면 9칸.
측면 5 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을 말하고요.
사랑채는 중문칸의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평면은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과 2칸씩의
온돌방을 연접시켰고,
전면에는 퇴칸을 뒀습니다.
또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연접시켰고요.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했습니다.
네 오늘 영양 이야기 마지막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또 다양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두들마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도움말씀 잘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영양, 석보 이야기>, <영양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원양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