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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면 섬촌리와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1.섬촌리剡村里 마을영양 남씨의 세장(世庄), 섬촌리(剡村里) |
섬촌리는 장군천 따라 마을이 이루어진 열한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섬촌리를 이루는데, 본래는 영양군 북초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재인동(才仁洞)과 당하동(唐下洞)의 일부를 합하여 섬촌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속하게 하였다. 하나인 덕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덕봉거리라 했고, 조선 시대에는 행인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덕봉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원뜸이라 함은 덕봉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을 살린 이름으로 보인다. ‘동면 또는 독미원(獨美院), 독묘원(獨妙院)’이란 마을은 옛날 지금의 마을 동쪽 산허리에 황명운(黃明運)이 혼자 살면서 과수원을 만들어 살았는데, 이 과수원이 자리 잡은 터가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였으며 모양이 정원과 같다고 독미원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아릇독미원’이라 불리는 마을은 독미원의 과수원 아래쪽으로 강을 끼고 내려가면서 집 몇 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을인데 독미원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릇독미원이라고 한다. ‘웃독미원’이란 마을은 지금의 마을 동편 산허리의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독미원 과수원의 맨 위 쯤에 있다. 하고 매가 벼랑에 집을 지어 살고 있어 학과 매가 마을을 늘 지켜주므로 그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곳이다. 매배리 북동쪽 언덕 위에도 마을이 있는데 ‘청두들(請邱)’이라고 부른다. 한 뒤 그 터에 삼을 갈았더니 다른 곳보다 특별히 잘 되고 질 좋은 삼이 생산되었고, 그 뒤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삼을 심었다고 하여 삼밭골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당하동이라고 부르다가, 동학운동으로 말미암아 금씨가 망하였다. 이후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들어와 보니, 마을 형상이 섬처럼 장군천에 둘러싸였다고 하여 ‘섬마’ 또는 ‘섬촌’이라고 불렀다. (才仁邱)’라는 마을은 약 300년 전에 손씨(孫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200년 전부터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재주 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재인두들 또는 재인구라고 한다. |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愼菴公派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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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영양 남씨 입향조인 신암(愼庵) 남손(南蓀, 1415~1488)을 파조(派祖)로 하는 후손들이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거주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남손의 14대 주손인 남기영(南基永, 1853~1938)이 종택이 오래되어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거주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 가옥이 매물로 나오자 주위 친척의 지원을 받아 1893년 매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신암공파 주손들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향촌의 제반 문제의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유력사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해 왔다.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암공파의 집성촌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점. 인근의 남손이 만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신암정 정자와 더불어 섬촌리 신암공파 결속의 상징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점. 18세기 이 지역 민가양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등에 비추어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
건축 구성 |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초막골 안쪽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 좌측 전면에는 아래채가, 좌측 뒤쪽에는 방앗간 채가 각각 있었으나 모두 없어져 버리고, 현재는 ㄱ자형의 본채와 최근에 보수 정비된 건너채만 남아있다.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정지와 고방을 연결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우측에는 상방과 마루방을 두었는데, 상방 뒤에는 마루를 깔아 대청은 ㄱ자형을 이루게 하였으며, 마루방의 뒤에는 모방을 두었다. 않고 상부 더그매가 노출되면서 합각부분에 환기구멍을 두어 완연한 까치구멍집이 되게 하였다. |
* 요약설명
이 정자는 중종조 전 현감 및 병마절도사 신암 남 손 선생의 정자이다.
* 상세설명
일월면 섬촌동(剡村洞)에 있는 이 정자는 중종조 전 현감 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신암 남 손(愼菴 南 蓀)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영의공(英毅公 諱는 敏)의 후손으로 영양군 고려조 대광도첨의 찬성사(大匡都僉議贊成事) 홍보(洪輔)의
9세손이며 감찰어사 및 용담군수를 역임한 수(須 號 松亭)의 차자(次子)로서 1415년(태종 15년)에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용자(容姿)가 아름다웠으며 장성함에 따라 장신웅대(長身雄大)하고 재질이 뛰어나서 1435년
(세종 17년)에 21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 진주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선생이 만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 나와 영해로부터 영양에 입향 하였다.
선생의 자손이 일월면 섬촌동(剡村洞)으로 이주하여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섬촌(剡村)은 일명 섬계(剡溪)라고도
말하며 정자 앞에는 흥림산(興霖山)이 안대를 이루고 부근에는 촌락이 드물게 있으며 앞에는 일월산에서 흘러
내리는 반변천 맑은 물이 마을을 싸고돌아 산자수명하여 어조지락(魚鳥之樂)이 있는 곳이다.
이 정자는 선생의 후손에 의하여 중년에 세웠으며 정자 부근에는 자손들이 세거(世居)한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수차 중수하였으며 1947년에 신암 선생의 16세손 장흠(璋欽)이 신암정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