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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천경교무의 원불교와 가정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정천경
진짜 복 있게 간 죽음
2009. 10. 17/원불교경장교당
"관장님! 1시 45분에 돌아가셨데요."
점심을 먹고 다시 한번 복지관을 순시하고 가정봉사원파견센터 주방에 들렀더니 담당 사회복지사가 전한 말이다.
"그래, 가셨구나!" 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옆에 있는 직원이 "그래도 복 있게 가셨어요."한다.
복지관 점심시간이 되어 길게 줄지어 서 계신 어르신들을 일일이 악수하며 맛있게 드시라고 인사를 한 뒤, 식당에 가서 또한, 미리 앉아서 드신 어르신들께 맛있게 드시라고 권했다.
특히, 오늘은 미역국이 나와서 "제 생일이니까 맛있게 드세요."라고 농담을 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두루두루 살펴본 뒤 사무실로 돌아와 있는데 식당에서 공익요원이 급하게 뛰어와 119를 불러달라는 것이다. 어르신이 갑자기 식사를 하다가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바로 가서 봤더니 식탁에 밥을 절반 정도 남기고 주방 바닥에 누워 계시는데 관리팀장이 응급조치를 하며 간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기도에 있는 음식을 빼내는 사이에 119 구조대 차가 와서 싣고 나갔다. 누워 계시는데 맥은 뛰고 있으나 아주 불안한 상태였다. 복지관의 재가 대상자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담당 선생과 가정봉사원이 응급차에 같이 타고 갔다.
일단, 보내놓고 점심을 먹으면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관리팀장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호흡기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워 계시는 것이 도통 의식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성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으니 마음이 착잡하다.
이 어르신은 평소에 허리가 꾸부정하게 다니면서 자식들이 모두 미국에 갔다고 얘기하며 식당의 조리사를 딸이라고 하여 평소 과일도 챙기고 먹을 것도 챙기시는 어르신이다. 그리고 점심을 드실 때는 식판에 엄청스럽게 밥을 많이 놓아 드셔서 기억에 남고 특히, 머리는 배코를 치고서 중절모를 쓰고 꾸부정한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왕래를 하시기 때문에 차 조심하라고 부탁을 종종 한 바 있는 어르신이다.
다행히 쓰러지자마자, 바로 담당직원이 가족에게 연락이 되었다. 나한테는 미국에 자녀들이 다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 자식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며칠 전, 복지관 직원이 자식들 연락처를 묻자, 무척 화를 내기도 하셨단다.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관내에 퍼지자, 복지관에 계신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근 거린다. 대체적으로 '살 만큼 사시고 고통 없이 잘 가셨다'는 평가다.
만약에 거동도 못하고 방에서 똥오줌 못 가리고 그랬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또한, 숨을 딱 거두었기에 다행이지, 의식은 없고 식물인간으로 있으면 그것도 또한, 딱한 노릇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또 어떤 어르신은 "그 양반 참 죽음 복 타고난 양반이여! 그렇게 쓰러지자마자 갔으니...." 하기도 했다.
그래 언젠가 글에서 본 것 같다. 어르신들이 제일 선호하는 죽음이 누워서 잠자듯이 가는 것이고
그 다음이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큰 고통 없이 명을 달리하기 때문에. 이 어르신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 보통 사람들은 복 있는 죽음을 생을 마감할 때 고통 없이 벽에 똥칠하지 않고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진짜 복 있게 가는 것은 1)생사의 원리를 철저히 알고 2)생에 대한 애착이나 불안 공포, 두려움 없이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3)원력을 굳게 세워 청정일념으로 거래를 자유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하옇튼,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우리 어르신이 생사거래에 바른 소견을 갖고서 그 동안 한평생 가졌던 세간의 모든 착심을 여의고 꼭 선도 수생하여 성불제중의 대업에 동참하길 간절히 염원해본다.
이 글은 2008년도 2월 1일날 “그래도 복 있게 가셨어요”란 제목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카페에 올린 글이다.
진짜 복 있게 간 죽음!
진짜 복 있게 간 죽음이란 어떤 죽음을 말할까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상 어르신들이 말하는 고통 없이 벽에 똥칠하지 않고 가는 죽음을 말할까요? 오늘은 우리 경장교당 교도님들과 “진짜 복 있게 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진짜 복 있게 간 죽음은
첫째는 생사의 원리를 철저히 깨치고 알고 간 정각의 죽음이다.
대종사 서울 박람회에서 화재 보험 회사의 선전 시설을 보시고 한 감상을 얻었다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항상 말하기를 생사고락에 해탈을 하자고 하지마는 생사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해탈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니, 만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회복되는 이치가 없다고 생각할진대 죽음의 경우를 당하여 그 섭섭함과 슬픔이 얼마나 더하리요. 이것은 마치 화재 보험에 들지 못한 사람이 졸지에 화재를 당하여 모든 재산을 일시에 다 소실한 것과 같다 하리라. 그러나,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이 육신이 한 번 나고 죽는 것은 옷 한 벌 갈아 입는 것에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니, 변함에 따르는 육신은 이제 죽어진다 하여도 변함이 없는 소소(昭昭)한 영식(靈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고, 또 다시 다른 육신을 받게 되므로 그 일 점의 영식은 곧 저 화재 보험 증서 한 장이 다시 새 건물을 이뤄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이 또한 사람의 영생을 보증하고 있나니라. 그러므로,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생사에 편안할 것이요, 모르는 사람은 초조 경동할 것이며, 또는 모든 고락에 있어서도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은 정당한 고락으로 무궁한 낙을 준비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러한 희망이 없고 준비가 없는지라 아득한 고해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나니, 생각이 있는 이로 이런 일을 볼 때에 어찌 걱정스럽지 아니하며 가련하지 아니하리요.」하며 천도품 6장에서 말씀하셨다.
생사의 원리를 철저히 깨치고 안 사람은 죽음을 당해서 초조하거나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며 침착하고 오히려 즐거워한다.
박연폭포와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유명한 서화담 선생이 임종할 때 이야기이다.
오랜 투병 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로 지쳤고 죽음을 목전에 앞둔 시점에서 제자 한명이 물었다. "선생님 지금 돌아가시기 전 심정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화담 선생은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지 내 이미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야 알았다. 최고의 진리는 죽을 때 웃으며 죽는 것이다. 오호 통재라, 아무리 유능하고 많이 가지면 무엇하나? 죽을 때 웃으며 죽는 것이 삶의 진정한 진리다."고 말하고는 얼마 후, 돌아가실 때 정말로 미소를 띠며 가셨다. 이러한 죽음이 바로 진짜로 복 있게 간 죽음이 아닐까요?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부촉품 14장에서 "생(生)은 사(死)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 하였나니, 생사라 하는 것은 마치 사시가 순환하는 것과도 같고, 주야가 반복되는 것과도 같아서, 이것이 곧 우주 만물을 운행하는 법칙이요 천지를 순환하게 하는 진리라, 불보살들은 그 거래에 매하지 아니하고 자유하시며, 범부 중생은 그 거래에 매하고 부자유한 것이 다를 뿐이요, 육신의 생사는 불보살이나 범부 중생이 다 같은 것이니, 그대들은 또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며, 각자 자신이 생사 거래에 매하지 아니하고 그에 자유할 실력을 얻기에 노력하라.“고 하셨다.
진짜 복 있게 간 죽음의 둘째는 생사연마를 통해 착심 없이 기쁘게 맞이하는 해탈의 죽음이다.
대종사님께서는 천도법문에서 「또 들으라. 이제 네가 이 육신을 버리고 새 육신을 받을 때에는 너의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하여 애착이 많이 있는 데로 좇아 그 육신을 받게 되나니, 그 즐겨하는 바가 불보살 세계가 승(勝)하면 불보살 세계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한 낙을 얻게 될 것이요, 또한 그 반대로 탐·진·치가 승하고 보면 그 곳에서 그 육신을 받아 무량겁(無量劫)을 통하여 놓고 무수한 고를 얻을 것이니라. 듣고 듣느냐. 아무야 또 들으라. 네가 이 때를 당하여 더욱 마음을 견고히 하라. 만일 호리라도 애착 탐착을 여의지 못하고 보면 자연히 악도에 떨어져 가나니, 한 번 이 악도에 떨어져 가고 보면 어느 세월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대업(大業)을 성취하고 무량한 혜복을 얻으리요. 아무야 듣고 들었느냐.」고 하셨다.
영가가 새 육신을 받을 때 꼭 명심해야 할 것을 간곡히 말씀해주고 계신다. 절대적으로 착심을 끊으라고 말이다. 왜냐면 사람이 죽어 새 몸을 받을 때는 평소 짓던 바에 즐겨해서 그곳에 애착이 있어 육신을 받기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몸 받을 기회가 없으면 악도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게 되니 절대적으로 애착, 탐착, 원착을 여의라고 했다. 그래야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아 성현의 회상을 찾아 성불제중의 대업을 성취하고 한량없는 복을 받고 혜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들었던 이야기다. 김제 원평 교당의 50대 교도님 한분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여 왜 그런가 싶어 대학병원에 정밀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위암 말기 진단이 나온 것이다. 가족들은 당사자에게 위암이라는 병명을 감추고 거기에 좋다고 하는 특효약이라는 약은 다 해서 바쳤다. 그래도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이에, 하루는 서울에 사는 처제가 와서 서울에 암을 고치는 유명한 의사가 있는데 꼭 한번만 같이 가자고 애원을 하더란다. 가족들도 모두 원하고 해서 “그럼 한번 올라가보지”하고 따라 올라갔더니 그 유명한 의원이라는 곳이 바로 순복음교회였다. 이 교회에서는 불치병도 고친다고 하여 이렇게 형부한테 거짓말을 하고 모셔왔다고 처제가 이야기하더란다.
그러자, 그 교도님께서 처제한테 “처제의 성의는 고맙네만 나는 원불교에 다니는 교도 아닌가. 원불교에서는 천지에 성주괴공의 변화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생로병사가 있음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어찌 내가 교회에 가서 암이 치료되길 바라겠는가?” 하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이 교도님은 교당에서 독경테이프를 사고 가서 죽는 날까지 천도 독경테이프를 듣고 교전을 펴들고 봉독하며 염주를 돌리면서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정력을 모으면서 근심하는 가족들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기쁘게 생사에 대해 해탈한 모습으로 가셨다고 한다.
이렇게 가신 죽음이 정말로 복 있게 가는 죽음이 아닌가요?
진짜 복 있게 간 죽음의 셋째는 원력을 굳게 세워 청정일념으로 거래를 자유로 하는 자유의 죽음이다.
박 제권(朴濟權)이 물었다. 「무엇이 천도의 가장 큰 요건이 되나이까.」정산종사 대답하셨다. 「서원 일심과 청정 일념이니라.」제자가 또 묻었다. 「어떠한 것이 서원이며, 어떻게 하여야 청정해 지나이까.」정산종사 또 답하셨다. 「욕심을 떠나 마음을 발함이 서원이요, 밉고 사랑스러운 데 끌리지 아니하면 청정해 지나니라.(생사편 8장)
정산종사는 유허일 영가에서 생사편 27장에서 「사람이 세상에 처하여 무슨 일을 할 때에는 최초의 한 생각이 잘 나기가 어렵고 또한 한 세상을 끝마칠 때에는 최후의 한 생각을 잘 챙기기가 어렵나니, 그 일 그 일에 최초의 한 생각이 바르면 일생에 모든 일이 발라질 것이요, 일생을 끝마칠 때에 최후의 한 생각이 바르면 영원한 장래가 능히 바를 수 있는지라, 바른 생각으로써 오시고 바른 생각으로써 가시면 오고 가는 사이에 항상 미한 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바로 부처님 회상에 돌아 오게 되시리니, 이것은 영가의 평소 소원이요, 미래 길이요, 우리 대중의 함께 기원하는 바라, 영가시여 거듭 부탁하노니, 서원은 부처되어 중생 제도하는 데 세우시고, 마음은 바르고 조촐한 한 생각에 의지하소서.」라고 하시어 서원은 부처되어 중생 제도하는 데 세우고 마음은 바르고 조촐한 한 생각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원불교 베스트 셀러인 인과의 세계를 쓰신 양산 김중묵 종사님은 지난 2001년 5월 4일 새벽 4시 30분경 당신의 육성으로 녹음해놓은 정전 테이프를 들으시면서 조용히 잠자리에 누워 두손을 가슴에 얹은 상태로 영을 날리셨다.
평소에 양산님은 "노모님 가시면 나도 갈 것이다"고 자주 말씀을 하셨는데, 노모께서 98세의 일기로 지난 3월에 돌아가시고 4월 24일에 종재를 마치자, 얼마 안있어 가신 것이다. 노모님 종재를 마친뒤 양산종사님은 꽃집을 운영하는 자부한테 "이제는 어머니도 가셨으니까 나도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며 자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와같이 양산종사님은 아들 며느리, 주위 인연, 어른들을 모두 찾아서 챙기고 돌아가신 것이다.
또한, 양산종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모든 수용품과 통장, 그리고 가까운 인연들을 정리하셨다. 그 동안 모아놓은 적금통장은 전국 교당의 교무님들로부터 받은 공금이기에 도장과 함께 종법사님께 유용하게 쓰라고 맡겼고, 대산상사님과 종법사님께도 시봉금과 더불어 인사를 올리고, 같이 원로원에서 살았던 다른 어른들께도 시봉금을 일일이 챙기셨다. 또한, 평소 복용하던 약도 공익부에 연락해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시기 전날 점심과 저녁을 굶으시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신 뒤 목욕을 하고 새벽에 가신 것이다. 모두들 이러한 양산종사님을 두고 참으로 죽음을 미리 예견하셨고 또한, 최후를 아주 깨끗하고 훌륭하게 보냈으며 생사에 대해 해탈한 어른이라며 저마다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양산종사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종법사님을 찾아 뵙고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고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아무 걸림이 없으니 해탈은 된 것 같은데 생사의 자유는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대로 영을 날릴 수 있을지 그건 조금 의문스럽습니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양산종사님은 해탈뿐만 아니라 영을 마음대로 날리는 생사의 자유까지 보여주셨다. 그것도 올해 들어와서는 새부처님이신 대종사님의 일원대도 정법을 꼭 백독하리라 계획을 세우고 당신의 육성으로 한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영을 날린 것이다.
이렇게 가신 죽음이 정말로 진짜 복 있게 가신 죽음이 아닐까 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