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가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오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듯 떨어지고 터지는데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죽을 줄 알면서도 달려 나갑니다. 그것은 상사의 명령에 따라서 죽음을 생각지 않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모진 훈련을 받고 아무리 규율이 엄해도, 작전이나 전술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휘체계와 조직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정의와 국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가끔 데모를 하는 사람들과 전경들이 그토록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장은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은 명령을 따르는 관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그 고백은 항상 들어도 아름다워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받고 그 종의 병도 치유의 은총을 입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서로 사람들을 잘 만나야 하는데 특히 윗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신하들은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왕은 신하들을 잘위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위지기사'(士爲知己死)라는 말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이죠. 백인대장처럼 노예의 병을 걱정하여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권위를 버리고 간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종은 당장 죽는다 해도 행복할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고 이기적으로 살고 자신의 이익에 중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백인대장과 같이 부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부럽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살려주고자 하고,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고 중병을 앓고 있는 종을 '측은지심'으로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에서 백인대장이 자신의 지붕 아래에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백인대장이 생각하는 자격은 과연 무엇인가요? 주님을 모실 자격은 어떤 기준인가요?
첫째, 자격지심(自激之心)은 대인관계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준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기준을 만들고 그 안에서 맴도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상대적이어서 자신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재산이나 기타 모든 것을 상대방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월의식(優越意識)이나 열등의식(劣等意識)을 가짐으로써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열등감을 심어주는 것은 대인관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열등감을 심어주기도하고, 자신이 열등감에 빠져 사람들과 교분을 꺼리기도 합니다. 혹시 그런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그들과 만나는 것을 꺼리고, 또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니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처럼 자신을 뉘우치며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루카 18,13) 겸손한 경우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은 맹자의 4단 중에서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입니다. <자신의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의롭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말하지요. 그래서 모든 선과 덕의 근원이신 주님을 차마 뵈올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기준을 삼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백인대장은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실 수 없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백인대장처럼 영성체 전에 <제 안에 주님을 모실 수 없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고백하는데 진정 우리 죄와 '수오지심'의 마음에서 나온 고백입니까?
세째, 바로 이방인(異邦人)이라는 생각입니다. 백인대장은 로마의 군인이었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뵈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관념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택된 사람들로서 이방인이 아닌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항상 이방인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간택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은총으로 축복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망설이고 쑥스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든 기준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다시 설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를 당신의 자녀로 부끄럽지 않게 불러 주시는 주님!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여 매달릴 수 있는 마음을 가득 담아 주소서. 언제나 삶 속에서 주님을 초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으로 당신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소서. 세상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슬픔과 기쁨과 괴로움과 어려움과 고통까지도 함게 나누게 하시어 저희가 이기적인 생각으로 높아진 벽을 허물고 주님과 이웃이 서로 긴밀한 친교를 이루게 하소서. 언제나 저희를 감싸 안아주시는 주님!!! |
첫댓글 ,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니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저희의 이기적인 생각의 벽을 허물게 이끌어 주소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늘 좋은 말씀감사드립니다. 영육간의 건강을 빕니다
힘있는 말씀 한 마디로 백인대장의 노예는 깨끗하게 치유받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루에 건네는 말들이 무수히 많은데 기쁨을 주고 생명을 주는 힘 있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습니다. 악한 것을 입에 담기를 즐겨하지는 않는지...묵상해봅니다. 좋은 글 날마다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