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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3일 주일예배_요 9:24-34 (모세종교의 장막 뒤에 숨은 어둠의 자식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그들이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
요한복음 9장에서는 언뜻 읽었을 때는 이해되지 않는 속 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예수의 정체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예수가 만일 죄 중에 태어난 죄인이라면, 신성모독죄라면 예수가 창세 이후로 한 번도 뜨지 못했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논법을 구사하는 맹인과 유대인의 자치기구 산헤드린 대표자 심사 위원이었던 바리새인 대표들은 예수가 일단 네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둘째로 네 눈을 뜨게 했다면 그는 귀신의 힘을 빌려 뜨게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24절에 보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다는 이 논쟁,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귀신들린 자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마태복음 12장 22절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귀신들린 자가 아니면 날 때부터 소경될 리가 없다는 암묵적 전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때 예수가 눈멀고 벙어리 된 귀신을 쫓아내자마자 귀신의 왕을 힘입어 쫓아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논법, 예수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을 뜨게 했을 리가 없다, 했다 하더라도 그는 귀신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무효다, 이런 논법을 바리새인들이 구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는 일단 귀신들린 자처럼 나를 고치지 않았다, 예수는 수공업적인 진흙과 침을 내 눈에 발랐고, 수리수리 마수리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수공업적인 작업을 통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을 했지, 절대로 귀신의 힘을 절대로 빌리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했는지 강조하는 겁니다. 진흙을 눈에 발라서 실로암 물가에서 씻으라고 말했다고 반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먼 자를 고쳐주었다는 암묵적 전제를 격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신학적으로 소양이 탄탄한 사람으로서 눈만 감았을 뿐이지 굉장한 사람이다, 신학적 소양은 어느 정도 대단했느냐? 삼단논법을 구사할 수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미 이해했습니다. 두 번째로 창세 이후로 눈 뜬 사람의 역사를 다 조사했고 통계에 밝았습니다. 그다음 산헤드린의 무시무시한 제복을 입은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고,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사람의 용기, 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에요? 물불 안 가리는 사람,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 바리새인 대표단을 이렇게 대담하게 물리치려면 바닥 사람의 독특한 배짱과 배포가 있어야 합니다. 숱한 세월 동안 바닥에 누워서 거지 생활을 했던 이 사람 마음속에 이렇게 놀라운 신학적 소양이 있고, 이렇게 자기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엄청난 열망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은 탁월한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맹인 되었던 사람에게 네 눈을 뜨게 한 방식을 말해주어라,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귀신의 왕을 힘입어 예수가 눈을 뜨였다는 두 번째 전제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왜? 눈을 뜨게 했다는 전제는 부정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느냐 하는 두 번째 전제에서 귀신의 힘을 본받아 신성모독적 방법으로 눈을 뜨게 했다면 그것 또한 무효라고 말하는 겁니다. 9장 24절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것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검찰과 똑같습니다. 아주 대전제를 놓고 서빙고에서 물 고문하듯이, 그런데 바닥사람인 이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렇게 담담하고 강렬하게 확신했습니다. 26절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그들이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귀신의 힘을 빌렸느냐? 아니면 다른 방법이냐? 이렇게 하니까 이 사람이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왜 당신은 내가 말했던 최초의 말, 진흙을 이겨서 실로암 물가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내가 눈을 떴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지 않고 두 번 반복하여 진술하게 합니까? 그다음 아주 유머 장렬한 말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부정문입니다. 메헤 메이스, 데 레테 게네스다이스 마테타이트 아우토, 헬라어로 하면,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원래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신들도 이렇게 진지하게 그에 대해서 배우려고 하는 것 보니까 제자가 되려고 작심했습니까? 조롱과 익살까지 있습니다. 이 사람 대단합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아주 무생물 수준으로 등장했다가 점점 커지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모세가 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의 종교가 무엇이길래 예수님을 배척할만큼 대담한 확신을 심어주었을까? 모세의 종교가 무엇이기에 예수를 이렇게 배척할 만큼 대단한 확신을 주었을까를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이 논쟁이 왜 중요한가? 10장 21절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보십시오. 10장 21절까지 계속 예수님이 귀신들렸다는 오해를 받고 있죠? 요한복음 8장 48절, 요한복음 10장 21절, 전부 다 예수가 귀신들렸다고 말하는데 이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것은 모세의 종교라는 criterion 기준에 따라서 그런 겁니다. 모세 종교의 특징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사하는 종교입니다. 모세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한 표적을 행사했습니다. 모세의 표적은 대표적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출애굽기 7-12장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이 있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은 모세가 전부 지팡이 하나로 다 했습니다. 그다음 모세가 지팡이로 하기 전에 모세의 특별한 개인기, 일종의 예선전에서 펼쳤던 개인기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문둥병을 만들었다가 새로 만드는 겁니다. 이게 모세의 개인기입니다. 두 번째 개인기는 지팡이 던졌다가 뱀 만드는 것, 이건 모세의 사적 개인기인데, 이건 애굽의 술사들과 예선전을 펼쳤다가 보인 건데 애굽의 술사들도 다 했습니다. 세 번째 나일강 물을 핏물로 만드는 것, 이가 나오고 개구리가 나오게 하는 것은 애굽의 술사들이 따라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압도적으로 로마제국 같은 권력자들, 이스라엘 백성을 지배하는 이민족의 권력체계를 무력화시키는 표적만 참 표적이고, 이런 표적을 행해야만 하나님 보내신 자가 되는 거죠. 이 사람들이 어떤 딜레마에 빠졌는가 볼까요? 9장 30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29절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건 출애굽기에 나오잖아요.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모세가 혈혈단신으로 이집트 궁정에 가서 이집트 18왕조 또는 19왕조를 초토화시키면서 10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낸 유명한 표적 사건, 그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압니다. 출애굽기 3장 6-14절 보세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즉각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 공적으로 표적을 통해서 위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예수님에게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출생성분이 매우 불리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자처럼 어떠한 신화적 외피도 뒤집어쓰지 않은 채 너무 평범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너무 존재가 미미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의 표적은 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을 충족시키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표적은 민족단위로 한을 풀어줍니까? 개인단위로 한을 풀어줍니까? 12년 동안 혈루병을 겪은 여인을 고쳐주시고 가버나움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치는 것은 민족을 초월하여 애국자 매국자 가릴 것 없이 능력을 베풀어주셨지만 개인단위죠? 예수의 표적은 하늘로 온 것 같은 것은 아니죠. 예수의 표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매우 사적공간에서 나타난 표적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표적을 통하여 민족전체의 신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만일 모세와 같은 인정을 얻으려면 누구 앞에서 이런 표적이 나타나야 합니까? 빌라도의 법정이나 헤롯의 궁궐 앞에서 이런 표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민족 대 민족의 나눔 위에서 표적을 행하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표적을 했고, 개인의 양심을 회복시키고 모든 초민족적 경계를 뛰어넘는 개인에게 호소하는 표적을 행했기 때문에 모세 같은 표적종교를 창설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러 오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한편, 이방인 한편으로 나누어놓고 이스라엘 민족의 열등감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맺힌 역사를 신원해주실 수 있는 표적을 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표적을 행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두려워할 만큼 무시무시한 가운데 율법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5장 24-27절에 보면 시내산에서 폭풍과 무시무시한 구름이 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가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공적으로 중개하고 해석해주도록 백성들로부터 위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그런 통과의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통과의례는 없었지만 이스라엘 모든 구약예언의 완성자였던 세례요한으로부터 인정받고 이스라엘 무대에 등단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모세 수준의 스케일은 없지만 구조상 똑같은, 하나님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모세종교의 승인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세종교 만큼의 웅장한 스케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서 어떤 왕조나 외국을 초토화시키는 표적을 행하지 않고 살리는 표적을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사 같았습니다. 엘리사는 아람장군 나아만을 고쳐줬죠? 이방인의 장군, 적대국 원수 장군을 고쳐준 겁니다. 우리나라 사명대사가 풍신수길 도요토미히데요시 참모를 고쳐준 것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사명대사가 금강산에서 도를 오래 닦으신 분이 지팡이로 머리를 쳐서 풍신수길 임진왜란 코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적장의 암을 고쳐준 것과 같은 파급효과가 있는 것이 나아만의 사건입니다. 고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뜻이란 겁니다. 엘리사가 열왕기하 5장에서 기적을 베풀 때 엘리사의 모든 표적들은 백성들의 삶을 고쳐주는 것이었고 모세만큼 웅대한 스케일을 가진 표적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은 모세가 아니라 엘리사의 표적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표적을 이어 받은 표적, 민중의 삶을 고쳐주는 표적, 적대세력을 와해시키고 파괴시키는 표적이 아니라 살려내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종교 장막, 이 논리에 갇혀서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원리를 깨닫습니다. 차선의 논리는 최선의 논리가 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차선의 논리가 모세의 종교, 우리가 어느 정도는 모세의 종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일학교 때, 모세의 종교의 특징은 간결한 죄와 벌의 논리입니다.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다음 죄 짓지 않고 순종하면 상을 받는다는 원리가 모세의 종교입니다. 모세의 종교는 하나님이 우리 편 아닌 다른 편은 혼내주는 종교입니다. 우리 정신의 유아기 때는 이 모세의 종교가 맞습니다. 어린이 유아적 단계 때는 모세종교의 논리가 상당히 호소력이 있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어린아이가 친구한테 매를 맞고 왔습니다. 이 어린 아이에게는 대속사상이 없습니다. 매를 맞았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한테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네가 매를 맞은 것은 평화를 위함이다, 너는 1동 아이한테 매를 맞고 2동 아이한테도 매를 맞고 이 동네 모든 악동의 죄를 지고 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집에 찾아 가서 때려줘야 합니다. 꿀밤을 때리든지 약간 보복성 응징을 해줌으로써 유아기 마음에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나 초월적으로 10살 어린 아이가 감당이 안 되는 수준에 이사야 53장 논리를 인용하면 안 되는 거죠. 유아기 단계의 표적종교의 논리는 against enemy, 적을 와해시키는 종교, 우리가 가끔은 유아기적 퇴행종교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복지사 9급 공무원 8급 공무원이 한 명씩 자살했습니다. 복지 예산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낱낱이 동네 마을마다 험악하게 사는 사람들을 실명으로 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정확하게 데이터를 입력하고 돈을 전달하는 것이 사회복지사 공무원입니다. 어린이재단 같은데 공무원으로 등록하면 사회복지사 공무원들이 120만원 받으면서 어린 아이들이 폭력을 받는 현장에 출동해서 그걸 카메라로 찍으면서 현장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칼을 든 아버지가 어린 사회복지사를 찔러버립니다. 업무가 너무 과중하기 때문에 사회복지사 공무원이 자살합니다. 그런데 제 조카가 사회복지사입니다. 많은 월급을 받지 못하는데 밤늦게 오는데 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몇 달 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합격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 무서운 어린이재단의 칼 든 아버지 폭력의 사정권 내에 출입합니다. 사회복지사가 왜 죽느냐? 이 아이를 너무 괴롭히고 일찍 퇴근하지 못하게 하는 나쁜 직장상사가 있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고난을 듣고 네가 모든 모순을 지고 가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부장의 이름을 주라, 실명 저주 기도를 한 달만 해보자, 내가 저주기도 전문가 아니냐? 실명저주를 해주겠다, 나는 돈을 원치 않는다, 정의를 원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너무 기뻐했는데 아직까지 문자로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실명저주 기도를 바로 해버립니다. 시편 109편에 바로 이름만 집어넣으면 됩니다. 시편 109편은 대표적인 저주기도입니다. 시편 142편, 이런 것을 보면 바로 저주기도가 입에서 나옵니다. 모세종교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비례적 응징을 통하여 정의를 회복하고 싶은 종교, 우리 대다수에게 있지만 이것은 유아기단계의 종교입니다. 이건 맞기는 하지만 이 단계로만 가면 이 세상의 만화영화 아마겟돈 수준, 할리우드 영화수준의 단순화된 초과보복, 훨씬 더 넘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쉽기 때문에 이런 모세종교 장막에 찌들어 가면 안 됩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을 보세요.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라고 했죠?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8절 보세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모세가 하나님을 본 게 아닙니다. 누구 앞에서는? 예수님 앞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 품속에 있던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품속에 있던 독생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달하는 진실과 아버지와 얼굴을 맞댔던 하나님의 집 사환이었던 모세가 들려주는 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납니다. 모세종교의 특징,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교는 보복과 응징의 종교임을 인정했습니다. 힌두교는 아무리 고상해도 보복과 응징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는 종교다, <바가바드기타>, <리그베다>, 힌두교의 모든 경전은 전사 이미지가 납니다. 전사이미지는 욕망과의 전쟁을 일종의 서사적으로 그린 겁니다. 힌두교의 경전에 나오는 모든 전쟁이미지는 우리 안의 욕망과 전쟁을 벌이는 일종의 도덕적 격려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이 그렇게나 많이 읽었던 <바가바드기타>는 폭력과 응징과 보복의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이 사람의 주장입니다. 간디가 한 말입니다. 산상수훈에 와서야 인류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영원히 종결지을 수 있는 논리를 발견했다, 왼쪽 뺨을 맞고도 오른쪽 뺨을 댈 수 있는 종교, 예수의 산상수훈종교, 이 종교야말로 인도를 구원할 수 있는 종교다, 인도는 산상수훈종교로 가야 구원받는다, 이것이 간디의 주장입니다. 다른 경전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좋은 것을 압니다. 성경이 얼마나 좋은지 알려면 다른 종교의 경전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이것만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이렇게 그냥 다니는 겁니다. 우리 신학자들은 항상 그것을 읽어야 합니다. 코란도 읽어야 하고, 저도 지금 <대승기신론소> <반야바라밀다> 불경만 5권을 사 놓았습니다. 죄와 욕망의 문제를 도대체 불교도들은 어떻게 해결하나 싶어서요. 불교도 똑같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불교도는 불교가 타락했다고 불교가 엉망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불교도 엉망입니다. 도시와 화목한 종교는 기본적으로 영성과 도력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도시 속에서 질풍노도 같은, 폭풍 같은 설교를 외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감수성이 없는 겁니다. 도시에 살면서 질풍노도 같은 외침을 그친다면 그건 영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룩하신 영성은 이 도시와 끊임없는 위격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이 도시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없어요. 요새 비싼 음식점에 스님들이 너무 많이 오십니다. 물론 목사님도 많이 옵니다. 목사님, 권사님 하면서 5만 원짜리 먹고 다닙니다. 그럴 때는 선사님,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아요. 바로 목사님 권사님 해요. 모세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유아기 도덕감을 나름대로 인정해주는 종교입니다. 모세의 표적을 이렇게 사무치게 바라는 이유는 로마제국의 권력을 초토화시키는 표적을 보여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를 한 번 살려 달라, 이것이 예수에게 한 요청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요청이었고 유대인들의 요청입니다. 이 모세종교의 화려함속에, 민족주의적 고양감속에서 예수를 바라보니까 예수는 너무 보편적이고 너무 착하고 너무 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 빈부격차, 그 모든 것들의 차이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와 어른들, 유대종교가 설정했던 모든 인위적 경계들을 허물어뜨리고 대화합의 평화의 식탁을 만드시고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막힘없는 교제를 나누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아버지와 등거리에 배치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원에 세우고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똑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원의 정의입니다. 중심으로부터 똑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이 원입니다. 원과 같은 공식을 원하셔서 차별을 없앴습니다. 바울도 이런 차별을 없애는 복음의 보편적 능력을 선포하다가 비난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일 화해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빈부격차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부딪히는 일정량의 싼 노동력이 없으면 기업의 생산력이 됩니까? 제가 지금 기업을 운영합니다. 제가 17만 명짜리 종업원을 가진 대기업입니다. 대기업인 제가 삶의 부조리에 운명 속에 매여서 비굴할 정도로 직장을 찾는 대중이 필요합니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면서 주체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개인이 필요합니까? 저한테는 노예적인 굴종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시퍼렇게 고개 들고 다니면서 맞짱 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존 러스킨이라는 영국의 사회사상가, 간디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이 사람을 정말 많이 읽으셔야 해요. 존 러스킨의 모든 책을 여러분이 읽으셔야 해요. 간디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존 러스킨 같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을 비굴한 처지에 몰아넣는 경쟁업체, 노동자들을 절대다수의 무기력한 을의 위치에 놓는, 다시 말해 불리한 비대칭적인 계약관계의 파트너로 만들어놓고 있는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고용불균형 사회는 엄청난 악이다, 여기에 동조하면 선해질 수 없다, 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은 이겁니다. 우리 모두 삶의 벼랑 끝의 비굴한 처지에 빠져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자기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한 일만 있다, 이게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내가 일할 때는 어쩔 수없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도덕성을 표현하고 내 기술과 존재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만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해당 없는 일만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노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노동은 호구지책을 위해서 내 몸과 정신을 저당 잡혀 가면서 내 영혼을 축소시켜 가면서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관료질서에 몸을 사려가면서 내 몸을 작게 하면서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노동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노동은 도덕적 자기표현성 노동만 있는 겁니다. 이게 이 사람의 사상입니다. 이게 영국 공산주의 생시몽,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난을 퍼부었던 그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참된 사상가입니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계급투쟁으로 인간의 증오심을 폭발시켜놓으면 끝이 없습니다. 사랑과 자기부인과 절제를 통해서 자기 도덕 감정, 자기의 윤리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만 노동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동하면 불리한 노동조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대규모 생산 공장이 불가능합니다. 왜? 전부 다 6시에 퇴근하려는 사람만 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여러분을 다 고용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1남 3녀, 3남 1녀가 다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겁주면서 막 합니다. 윤구형제가 고개를 빳빳이 들면서 사장님 난 퇴근합니다, 하면서 고개 빳빳이 들고 가버립니다. 이강희 자매님도 다 가고, 그렇게 되면 6시에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두고 어떻게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주체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과 갑과 을의 비대칭적 고용계약이 가능하며, 어떻게 무한한 노동생산성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간신히 먹고 사는 공장만 돌아갑니다. 돈 계산하고 나니까 남는 게 없는, 약간만 돈이 남는 공장만 있기 때문에 협동조합적 공장만 있고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공장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일종의 공동체입니다. 노동이 지금처럼 비굴할 정도로 불리한 위치에서 세상에서 굴리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겁니다. 그런데 이 모세종교는 이런 공로주의, 죄와 벌의 세상,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 공로가 없는 세상에서 구원을 빼앗아 버리는 게 모세종교입니다. 거대한 모세종교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와 너무나 같은 겁니다. 모세종교의 특징은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어디서 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지방적 기원을 가진, 소박한 기원을 가진, 갈릴리적 기원을 가진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 종교는 힘 숭배종교입니다. 모세종교는 권력숭배종교입니다.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을 숭배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소박한 자기 감춤과 은닉의 종교입니다. 출처가 어딘지 몰라서 무시당하기 쉬운 알짬 종교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자기 은닉,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할 만큼 갈릴리 지방민의 소박함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이 세상을 활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갈릴리적 소박함, 모세적 대단한 위력 말고, 다른 사람을 굽질려서 굴복시켜서 와해시키는 표적종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고요히 치료해주고 홀로 잠적하고 가나안 혼인잔치에 왔다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놓으시고 홀로 잠적하신 예수님, 숱한 병자를 고치시고 홀로 산으로 잠적하신 예수님, 이 놀라운 소박한 자기겸양, 자기은닉, 이것이 예수님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모세종교, 인간의 유아기 종교, 보복종교, 공로종교, 이런 게 몸에 배이면 모든 사람들을 연봉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사람을 달리 대합니다. 야고보서 보세요. 밍크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면 ‘어서 오세요’, 하며 자리를 권하지만 가난하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오면 ‘앉으려면 앉고 말려면 마세요’, 야고보서 초대교회에서 벌써 이런 짓을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순결무구한 교회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죄와 의가 각축하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건 초대교회를 지나치게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도 순수한 초대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순간 벌써 파벌이 있었고 당파가 있었고 빈부격차가 있었고 교회가 빈부격차를 정당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종교입니다. 한 번 보세요. 야고보서 읽어보세요. 부자가 오면 명함을 받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오면 너무나 매몰찹니다. 전화 없습니다, 주말에는 전화 안 받습니다, 몰래 의사한테 전화해서 우리 뷔페 먹으러 갑시다, 이런 인간의 탐욕, 힘에 대한 숭배, 권력에 대한 숭배, 돈에 대한 숭배, 출신성분에 대한 숭배, 이런 숭배가 지금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MB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아무리 난파해도 학벌이 좋은 사람이 다 장관이 되고, 지금 지방 충남대 나온 사람 동아대 나온 사람 경남대 나온 사람 지방인재가 많고 그런 인재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요임금은 순임금을 찾기 위해서 천하를 방랑했습니다. 순임금은 요임금의 아들 밑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됐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모세의 종교 속에 있습니다. 헌금 많이 한 사람이 행세를 한 것이 모세종교입니다. 그런데 헌금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교회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돈이 필요한 프로젝트에 교회가 뛰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돈이 필요 없고 진리만 필요하고 진실만 필요한 회동, 그런 회중이 성령이 임하는 회중입니다. 실제로 돈이 무슨 필요 있어요? 우리 만남이 필요하고 우리 만남이 핵심이지, 돈이 드는 일이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건물이 없으면 예배 못 드립니까? 건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미쳤다 할까봐 못합니다. 저는 건물이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은 파주, 이번 주에는 하늘공원에서 만납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15분 걸으면 나옵니다, 내일은 파주 굴다리 밑에서 만납니다, 내일 안양천에서 만납니다, 이렇게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내 위신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이런 좁은 교회보다 산야를 다니면서 명산대첩을 다니면서 순례하는 공동체가 되는 게 제 신학에 더 맞습니다. 이런 사무실에서 만나는 것, 돈 160만원씩 주고 만나는 것은 돈이 아깝습니다. 고리대금업자들, 임대소득업자들은 내가 반대하는 사람들인데 그에게 내가 을의 위치에서 굴종적으로 사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싶고 여러분이 저를 미쳤다 할 것 같고 댓글에 사모님 목사님 안전합니까? 이렇게 물을까 싶어서 감히 못합니다. 저는 이런 건물이 필요 없습니다. 나에게는 사람도 많이 필요 없고 하나님 앞에서 순례하는 여정입니다. 갈릴리 주유를 천하하면서 이리저리 다녔던 제자공동체가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간판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 예수 치유센터, 온라인 구좌,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으는 돈은 바로 그 순간 써버려야 합니다. 건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아다 임대소득자한테 갖다 바치고 불리한 을의 위치에서 이렇게 경치도 더러운 곳에서 살면서, 이렇게 멋지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이것도 하나의 고난입니다. 이렇게 더러운 도시 서울에 사는 것 자체가 벌 받는 겁니다. 이 세상의 도시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세상에 아름다운 도시는 정말 많은데 대한민국 도시는 탐욕으로 일그러진 도시입니다. 힘을 모아주십시오. 이걸 뒤엎어야 합니다. 거룩한 전복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이신 하나님이 접합되고 영이신 하나님께 추동되고 영이신 하나님께 격동되는 성도들이 사회요소요소에 퍼져야 하고 사회 길목을 지켜야 하고 정의의 길목을 지켜야 하고 부조리한 뇌관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런 부당한 이익들의 통로를 차단해야 하고 이 세계가 존재하지 못하도록 틈을 내야하고 사단의 나라가 붕괴되도록 거룩한 혼란을 일으켜야 하고 거룩한 도발자가 돼야 합니다. 모세의 종교는 공로종교 원수보복종교 일종의 유아기에 맞는 종교, 출신성분을 화려하게 보는 종교, 예수님은 갈릴리적 소박함으로 무장한 종교, 개인을 살리는 데만 힘을 발휘하고 자기는 빠져버려서 자기 위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종교,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비난 받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적인 발자취에 서 있습니다. 마무리 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매력적인 분이고 아픈 사람에게 가까이 느껴지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이 목사님에게 제일 가까워야 합니다. 신음하는 사람과 목사님이 1촌이 돼야 합니다. 부자와 목사님이 1촌이 되면 안 됩니다. 화려한 사람이 목사님과 1촌이 되면 안 됩니다. 그 목사가 정당하게 하나님 의에 붙어 있는 목사라면 아픈 사람 고난 받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워야 하고 그런 사람에게 목사님의 직통전화가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바로 그런 사람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고통 있는 곳으로 교회가 찾아가야 합니다. 교회로 고통 있는 사람이 찾아오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모세의 종교를 가진 자가 정상적인 하나님 영으로 행세하니까 예수님은 그 모세종교를 지탱하는 더러운 정신에 의하여 귀신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더러운 사람이 나더러 더럽다고 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거예요? 깨끗한 사람이 되는 거죠. 더러운 사람이 나에게 깨끗하다고 하면 나는 진짜 더러운 놈이 되는 거죠.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랬죠. 너는 마귀에게서 났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죠. 마귀의 자식의 입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고 들었으니 성령 충만한 사람인 거죠. 우리가 의를 행하고 진리를 행하다가 귀신 들린 자라고 듣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강한 멘탈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살 때는요.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제도권 종교가 빠지기 쉬운 공로주의 종교, 거짓 종교, 인간의 죄와 벌의 논리로 사람을 억압하는 종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고통이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시고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을 폭포수처럼 주시고 우리를 어루 만져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십니다. 다음 마지막 설교에서는 눈을 뜬 사람과 감은 사람의 차이 10가지를 발표하겠습니다. 자가 진단해주시기 바랍니다. 개봉박두, 요한복음 9장이 길죠? 저도 길어서 어떤 때는 나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 나도 눈을 감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때는 눈을 감기기도 하고 눈이 뜨이기도 하고 어쨌든 요한복음이 쉽지 않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을 뜨게 하고 눈을 떴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감게 하시는 예수님의 무섭게 휘몰아치는 역설의 메시지 앞에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오늘 이 주일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 여러분을 살아 계신 은혜의 직립보행 인간으로 만들어주시고, 여러분에게 거룩한 위격감을 느끼게 해주시고, 이 세상의 잘못된 시스템에 대해서 거룩한 위격감 소외감 고독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성령을 받으시고 힘 있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도시 안에 살지만 도시의 물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영향을 끼치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 살지만 대한민국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받는 을의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갑의 관계로 대한민국을 을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의에 노출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가향교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모두에게 하나님 은혜가 크게 임하기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은 출신성분이 소박하여 모세종교 지탱자들로부터 귀신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 모세종교가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개인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십니다. 주님 우리에게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는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난 사람, 화려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있는 사람, 너무 소박하여 저주받은 것처럼 사람의 인생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조금씩 관심을 가집니다. 주님이여 고통에 몸져누운 억조창생들을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마음 주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하는 표적의 현장에 저희를 써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거친 세상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망가지지 않고 우리 존엄성이 훼손당하지 않고 직장에서 소득을 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매우 불편부당한 관계 속에서 불리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는 형제자매들의 가녀린 마음과 아픈 마음과 모멸당한 마음을 하나님 위로해 주시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갈릴리적 소박한 외양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저평가된다는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이 땅의 많은 아들딸들을 위로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불리한 조건으로 두려움 때문에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직장들을 허락하여 주소서. 이 세상의 모든 일꾼들 직장인들이 사랑 때문에 일하게 하시고 친교 때문에 일하며 주님 때문에 일하는 놀라운 세계를 펼쳐주소서. 주님 너무 불리한 을의 조건 속에서 모든 굴욕감과 존엄성과 영혼의 축소를 경험하면서 일하는 아들딸들 지치지 않고 살아남아 주님의 햇빛, 은총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여 주소서. 자발적 실업상태를 유지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문을 열어 주시고, 포도원을 보여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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