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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강좌 - 루쉰 선생을 말한다 ⑤
희망이란 그대가 만드는 것!
혁명이란 영원한 진격
루쉰 선생의 혁명 투쟁의 마지막 무대가 상하이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인생 총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 9년간을 지냈다.
나도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1974년 6월), 상하이 루쉰 선생의 옛집을 방문했다.
루쉰 선생이 집필할 때 사용한 책상과 붓, 생전의 원고 등, 유품 하나하나에 혁명 투사의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협소한 방에서 사악을 파헤치는 말이 그리고 청년을 고무하는 열성적인 문장이 탄환처럼 쏟아졌단 말인가.
방에는 이런 말이 걸려 있었다.
“만약 내가 살 수 있다면 두말 할 나위 없이 계속해서 배울 것이다.”
서거하기 2개월 전에 쓴 문장이었다.
가까이 홍커우공원(루쉰공원) 한쪽에 루쉰 선생의 무덤이 있었다. 아름다운 나무들에 둘러싸인 선생의 좌상은 멀리 미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온화한 표정이었다.
“행복해 보이시는군. 투쟁한 분이시니까….”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나온 말에 동행한 청년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하이 루쉰기념관이 있는 이곳에 전 세계에서 루쉰 선생의 사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베이징 루쉰방물관과 함께 루쉰 정신을 전 세계에 발신하는 ‘희망의 성(城)’이다.
“유럽인이라면 이미 5년 전에”
상하이에서도 역시 투쟁의 연속이었다. 체력은 강한 편이 아니었다. 치아도 좋지 않고 자주 위통을 앓았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거하기 7개월 전, 갑자기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체중은 40kg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후에 재발해 발열이 계속됐다. 진찰한 미국인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유럽인이라면 이미 5년 전에 죽었을 겁니다.”
실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용기를 불러 일으켜 마지막 사명의 불꽃을 혁혁하게 불태우며.
루쉰 선생에게 3만 위안의 현상금
1930년, ‘자유운동대동맹’ ‘좌익작가연맹’이 잇달아 결성되고 루쉰 선생이 발기인 중 한사람이 됐다.
그러자 당국은 루쉰 선생에게 ‘타락문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체포령을 내렸다.
실재로 젊은 작가 중에는 무차별로 체포돼 비밀리에 총살된 사람도 있었다.
언제나 적이 노리고 있기 때문에 집안에 있어도 밖에도 보이는 창문 쪽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루쉰 선생이게 3만원(元)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는 사립대 학교 교수 월급이 2백 원, 그의 1백50배에 달하는 금액)
그것을 루쉰 선생은 “그럴 리가요. 문학자 같은 것에 그렇게 많은 현상금을 걸겠습니까. 군대를 소유한 사람의 목이라면 몰라도 그렇게 거금에 팔릴 리가 없습니다. 가령 내게 현상금을 걸었다 치더라도 천원 아니면 2천원 정도일겁니다.” 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적이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루쉰 선생의 문장은 엄격한 검열을 받았다. 책은 발간 금지됐다.
그 탄압의 그물을 피하며, 1백 40개나 되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변화무쌍, 신출기물하게 쓰고, 쓰고 또 썼다.
위협을 하든, 구슬리든 결코 신념을 굽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우익뿐 아니라 좌익에게도 엄청난 공격을 당했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루쉰은 말한다.
“(논적들은) 나를 심문할 것이다. ‘당신은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당신은 뉘우치지 않겠는가’ 라고. 하지만 나는 즉시 대답하지요. ‘조금도 괴롭지 않다.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는커녕 정말 재미있다’ 라고.”
적이 있기 때문에 싸운다. 투쟁이 있으니까 문학이 태어난다. 이것만큼 즐겁고 유쾌한 일이 없다! 이것이 루쉰 선생이었다.
“강적이 사람을 잘 되게 하느리라”라는 말은 불전(佛典)에 나오는 불멸의 한 구절이다.
일본인 서점주인 우치야마 간조씨
1930년대 전반, 상하이에는 2만수천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많은 일본인이 루쉰 선생과 만나 우정을 맺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상하이에서 ‘우치야마 서점’을 하던 우치야마 간조 씨였다. 오카야마현 출신으로 당시 지명수배 중인 루쉰 선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식사 등, 자질구레한 일까지 신경을 썼다. 그런 우치야마 씨가 ‘일본의 스파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루쉰 선생은 즉시 반론했다.
“우치야마 서점이라면 3년간 내가 자주 들러 잠시 쉬면서 책을 찾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지만, 상하이 일부의 이른바 문인과 비교해 가장 안심이 되는 곳입니다. (중략) 사람을 팔아먹는 곳이 아니란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루쉰 선생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봤다. 국적이나 지위, 이해관계 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루쉰 선생이 가장 괴로울 때, 가장 신뢰해 준 사람이 일본의 성실한 서점 주인이었다.
이것은 양국우호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역사라 할 수 있다.
우치야마 씨는 루쉰 선생의 서거 뒤에도 남은 가족을 지키며 버팀목이 됐다. 전후(戰後)에는 중일후호협회 초대 이사장이 되어 평생 중국과 일본 우호에 진력했다.
10개월이나 일본 청년을 개인지도
탄압이 이어지는 와중이었다.
중국문학을 배우고 싶다며 루쉰 선생을 찾아온 일본의 한 청년이 있었다.
시마네현 출신의 마스다 와타루 씨였다. 청년의 진진한 마음에 응해 루쉰 선생은 흔쾌히 승낙 했다.
청년은 약 10개월 동안 거의 날마다 3시간 정도 개인지도를 받았다. 강의를 마치면 저녁을 함께 먹거나 때로는 영화를 함께 보러 가기도 했다.
마스다 씨는 루쉰 선생의 인상에 대해 “내게 루쉰 선생은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또 무엇이든 들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루쉰 선생은 마스다 씨가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아낌없는 격려를 했다. 마스다 씨는 1935년, 이와나미 문고 ‘루쉰선집’을 편찬하는 등, 중국문학 연구가로서 활약해 중요한 자료와 증언을 남겼다.
아울러 루쉰 선생은 일본인 뿐 아니라 각 나라의 문학가, 예술가의 벗이 많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여류작가 아그네스 스메들리, 작가이자 기자인 에드거 스노우, 러시아의 맹인시인 예로센코, 영국의 노벨문학상 작가 버나드 쇼.
한국의 청년 시인 이육사도 루쉰 정신을 계승한 사람 중 한사람이다.
이육사는 루쉰 선생과 악수를 나눈 그 손의 온기를 마음에 새기며, 펜으로 항일투쟁의 전사가 됐다. 그리고 1944년 1월,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돼 베이징감옥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민중이 행복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미국 여성작가 스메드리는 한때, 루쉰 선생의 상하이 자택에서 하숙하며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다.
스메들리는 상하이를 떠날 때, 공장에서 친해진 한 여성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함께 백화점에 들렀다. 거기서 우인이 고른 것은 흙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더 좋은 물건을 고르라고 하자 우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집이 가난해서 인형을 갖고 놀아본 적이 없어 이런 인형이 갖고 싶었습니다. 지금 나는 40세가 됐지만, 당신 덕분에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을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라고 말했다.
애처롭게 인형을 들고 있는 벗을 보고 스메들리는 사무치게 느끼는 것이 있었다.
빈곤에 허덕이는 중국 민중, 언젠가는 빈곤에서 반드시 헤어날 것이다. 인간다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민중, 그 인형을 그들의 희망을 상징하는 듯했다.
루쉰 선생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선생은 스메들리에게 예리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민중은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전에는 투쟁을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모든 민중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아니 가장 괴로운 민중이야말로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자신이 쓴 ‘아Q’처럼 민중이 강해지기 위해 루쉰 선생은 싸웠다.
“루쉰 선생이 열망한 것처럼 ‘아Q’의 두뇌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현대 중국문학의 거장인 김용 선생은 “루신 선생의 주장을 받들어 일어선 많은 청년들이 선생의 지도에 따라 그 어려운 일을 수행했습니다.”라며 긍지 드높게 말했다.
머리를 숙이고, 등을 굽히며, 입을 다물고 있던 민중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펴고 걷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아Q들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루쉰 선생이 열망한 ‘새로운 민중’의 힘이 지금 중국의 대 발전을 지탱하고 있다. 김용 선생은 말씀하셨다.
“수많은 민중의 두뇌가 바뀌고 민중 스스로 투쟁을 위해 분기했습니다.”
일본에서, 전 세계에서 21세기 ‘민중의 진정한 힘’을 끌어낸 투쟁이 바로 창가교육의 사명이다.
스스로 판화강습회를 준비 ․ 통역
상하이 시절 루쉰 선생이 문학과 함께 힘쓴 것은 ‘판화’ 보급이었다.
외국에서 작품집을 주문해 소개하거나 작품을 구입해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특히 무엇보다 원화를 그리고 목판에 새겨 종이에 인쇄하는 공정을 전부 혼자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루쉰 선생은 ‘목각’이라고 불렀다. 이른바 ‘창작판화’였다.
‘목각’을 보급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우치야마 간조 씨 동생 가키쓰 씨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키쓰 씨는 도쿄 세이조학원 초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31년 8월 어느 날, 여름방학에 우치야마 서점에 놀러 온 가키쓰 씨가 형 부부에게 판화를 선보이고 있을 때 마침 루쉰 선생이 들렀다.
작업하는 것을 본 루쉰 선생은 “이것을 상하이에 미술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의뢰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라고 굳이 사양하는 가키쓰 씨에게 루쉰 선생은 “초보 정도 수준이면 됩니다.”라고 거듭 부탁했다.
열의에 압도돼 가키쓰 씨가 받아들이자 루쉰 선생은 “2, 3일 안으로 학생들을 모으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둘러 돌아갔다.
판화강습회는 6일간으로 정했다. 시간은 아침 9시부터 11시 까지 2시간, 장소는 평소에 일본어교실로 사용하던 곳으로 정했다.
첫날, 시작하기 조금 전에 루쉰 선생은 우치야마 서점을 방문했다. 그 모습을 보고 가키쓰 씨는 놀랐다.
언제나 색이 바랜 검은 복장을 한 루쉰 선생이 오늘 처음으로 입은 듯한 새하얀 중국 복장을 입고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가키쓰 씨도, 간조 씨도 범상치 않은 기세에 압도됐다.
모인 청년은 13명, 대부분이 20대 초반이었다. 6일간 전원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수강을 마쳤다.
이때 통역을 담당한 것이 바로 루쉰 선생이었다. 그 모습을 가키쓰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통역하시는 루쉰 선생의 이야기는 언제나 저보다 길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용하지만 열정이 담긴 진지함으로, 하나하나 힘차고 상세하게 설명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인류를 위한 예술은 불멸!
왜 루쉰 선생은 판화를 중시했을까.
선생이 주목한 ‘목각’의 이점은 작은 칼과 판자 그리고 종이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비싼 그림도구나 액자도 필요 없었다. 목판 하나로 많은 양을 인쇄해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다.
돈 없이 그림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더없이 좋은 표현 수단이었다.
아울러 판화는 읽기 쓰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혁명의 이상을 호소하고 결속을 호소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강습회 덕택으로 ‘목각’은 급속히 보급됐다.
청년들은 여러 미술그룹을 만들어 함께 배우며 전람회도 개최했다.
루쉰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청년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보냈다.
‘목각’은 문학과 함께 청년의 혁명의식을 계발하는 커다란 조류가 됐다.
그런데 2년 후, 일본에 있는 가키쓰 씨에게 루쉰 선생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충격이었다.
“지지난해 함께한 학생들 절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반은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더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루쉰 선생과 뜻을 같이한 청년들은 선생과 마찬가지로 탄압의 표적이 됐다.
학교에서 추방당하거나 소련문학가 초상을 새겼다는 이유만으로 연행됐다. 해산할 수밖에 없는 그룹도 있었다.
훗날 루쉰 선생의 아들인 저우하이잉 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3명의 수강생 중에는 강제수용소에서 옥사한 청년도 있었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청년도 있었다.
권력자의 도리에 어긋난 처사는 청년의 자유를, 희망을 그리고 목숨까지도 무참하게 앗아갔다.
루쉰 선생은 그 분노를 담아 이렇게 썼다.
“세계에는 실제로 우리들과 같은 ‘모욕과 학대를 받는’ 사람이 있으며, 그 위에 이들을 위해 슬퍼하고 외치며 투쟁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렇다. 인류를 위한 예술은 다른 힘으로는 저지할 수 없다.”
갖은 탄압을 받은 ‘목각’, 그래도 청년들은 새기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 중에 탄생한 작품들은 드디어 전국 순회전을 개최하기까지 기세를 더했다.
제1회는 1935년. 제2회는 1936년.
제2회 상하이 전시회에서 제자들의 성장을 주시하며 다양한 조언을 하는 루쉰 선생의 옆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날은 10월 8일로, 루쉰 선생이 서거하기 불과 11일 전이었다.
건강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배웅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거듭 말하며 루쉰 선생은 전시장을 떠났다.
생명의 마지막 힘을 불태워 제자들을 고무한 ‘혁명의 스승’이었다.
‘정의의 혼’ ‘민족 혼’의 깃발
그리고 결국 1936년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새벽녘 무렵이었다.
루쉰 선생은 파란만장한 혁명의 생애를 마쳤다. 55세였다.
많은 청년들에게 '투쟁하는 정의의 혼'을 남기고 루쉰 선생은 떠났다.
그 부고는 중국 전역에 전달됐다.
그날 당일 장례위원회를 만들었다.
쑨원(孫文) 부인 쑹칭링(宋慶齡), 베이징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차이위안파이, 작가 스메들리, 우치야마 간조 등으로 구성했다.
루쉰 선생의 시신은 19일 오후, 만국빈의관(萬國殯儀館)에 안치해 수일간에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조문했다.
그리고 22일 오후, 젊은 제자들이 관을 멨다. 그리고 만국공묘(萬國公墓)까지 약 2시간 반에 걸쳐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그 뒤에는 5천명 아니 7, 8천명의 남녀 청년, 노동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경찰의 총탄을 맞을 각오를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을 매장했다. 관은 ‘민족 혼’이라고 쓰인 흰 깃발에 싸여 있었다.
루쉰 선생의 장례는 전부 우인들의 손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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