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막부 시대 대표적인 무역항이자 나가사키현의 중심인 나가사키 시는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는 이국적인 도시다.
거리에는 노면 전차가 돌아다녀서 60년대 서울의 전차가 떠오르고, 달달한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이국의 빵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명품으로 만들어 나갔고, 최근에는 나가사키 짬뽕면으로 유명해진 지역이다.
또한 나가사키는 천주교 문명이 전파되어 일본 천주교 기리시탄이 발생하고, 토요토미의 억압과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으로 수난을 당했던 지역사가 있다. 그래서 이날은 천주교 성지 기행과 반전 평화 기행, 그리고 근현대 역사기행을 모두 할 수 있었다. ^^;;

일본26성인기념관
나가사키 역에서 가까운 니시자카 공원에 있어서 아침에 걸어서 찾아갔다.

포루투갈은 1543년 다네가시마(종자도)에서 화승총을 일본에 전달하였고, 1549년 가톨릭 예수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가고시마(녹아도)에 상륙하여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이듬해 히라도 섬의 영주가 하비에르를 맞아하여 히라도섬은 천주교의 거점이 되었다.
일본은 하비에르와 함께 온 토레스 신부의 노력으로 1570년에는 규슈를 중심으로 신자가 2만 6천명에 달하였다.
당시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를 옹호하며 교토와 아즈치에 난반지(남만사:서양절, 성당)과 세미나리오(신학교)등을 세웠다.


천주교가 제일 번성한 곳은 나가사키였다. 히라도에서 쫓겨난 예수회는 오무라(대촌)로 옮겨와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는 최초의 기리시탄 다이묘가 되었다(1563)
1570년 오무라 영주는 나가사키를 난반(남만:남쪽의 야만인) 무역항으로 개항하였다. 이로써 나가사키는 전국의 상인이 모이는 항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웃 후카호리(심굴)의 잦은 침략에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부한다.(1580)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기에는 10개가 넘는 성당과 병원이 줄지어 세워져 나가사키는 "일본의 작은 로마"라고 불렀다.

1601년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성모 승천 성당'이 완성되었다.
1582년 부하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혼노지의 변), 실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주교에 호의적이어서 오사카 성 밑에 성당 건설을 허가하였다.
1586년 히데요시는 예수회 책임자에게 "중국과 조선 정복을 위하여 서양의 대형 범선을 조달해준다면 점령지에 성당을 세우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도요토미는 천주교의 확대를 우려하여 하카다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그 다음 해에는 나가사키를 예수회에서 몰수하였다. 그래도 무역을 위하여 심하게 굴지는 않았기에 선교사들은 나가사키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 26성인 기념비
1596년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향하던 스페인 선 산 펠리페호가 태풍으로 도사(토좌)에 표착하였는데, 선원들이 "스페인은 세계강국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현지인을 개종시키고 점령한다"라고 말하였고, 격분한 히데요시는 선교사를 처형한다.
이로써 필리핀에서 온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24명이 교토에서 붙잡혀(도중에 2명 추가)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였다.(외국인 선교사 6인과 일본인 신자 20인)

일본 26성인 기념관 입구
1603년 도쿠가와 막부를 수립한 이에야스는 동남아시아와의 평화적인 주인선무역(막부의 승인이 찍힌 해외 도항 허가증을 가지고 무역)을 장려하여 나가사키는 무역 거점으로서 번영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으로 이에야스 주위에 기리시탄 가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나, 이에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천주교를 엄금하였고, 1612년 직할지에 금교령을 내렸다.
1614년 전국으로 금교령을 확대하고 기리시탄을 단속하게 된다.
이에야스는 천주교 보다도 무역을 우선시하는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막부 3대째인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쇄국정책을 선포하였고, 1634년에 나가사키에 데지마를 만들고, 외국선의 내항을 나가사키로 한정시켰다.
1636년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데지마에 수용하였고, 다른 곳의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로 추방시켜 쇄국 체제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이듬해 "시마바라, 아마쿠사의 난"이 일어난다. 시마바라 영주의 과도한 세금과 기리시탄 고문 강압정치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기리시탄 아마쿠사 시로를 수령으로 한 봉기세력은 3만 7천명으로 불어나 막부는 12만명의 군세로 공격을 가했지만 네덜란드의 협조를 구하여 간신히 진압하였다.

성 필리페 성당 입구


성 필리페 성당. 가우디의 제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검소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아담한 성당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막부는 천주교를 중시하는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단절하고, 1641년에 네덜란드 상관을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겼다.
중국 무역도 나가사키로 한정하여 막부에 따른 관리 무역 체제가 되었다. 나가사키는 다시 전국에서 상인이 모여 들고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인구 3만 명의 나가사키는 마을 전체가 무역공사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나가사키의 성당들은 파괴되었고, 성모 승천 성당 자리에는 나가사키 부교소(봉행소: 에도=도쿄에서 파견된 관리 부교=봉행의 관소)가 새롭게 새워졌다.

일본 26성인 기념비를 답사하고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으로 갔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에 희생된 외국인들이 전후 5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아 왔다. 이런 사실에 분노하고 무책임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일생을 바친 오카 마사하루의 유지를 이어받아 시민들의 힘으로 건립한 평화자료관이다.
나가사키 관광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지만 한국 관광객이라면 꼭 한 번쯤은 방문해봐야 할 곳이다.

나카무라 에치코토 상이 평화자료관 봉사자로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평일에는 노인분들이 봉사를 나오고 주말에는 젊은이들이 봉사나와 자료관을 지킨다고 전한다. 이날은 평일인 화요일이었다.
자료관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쌓여 있어서 자료관이 비좁게 느껴졌다.

의식있고 책임감 있는 평화적인 교사들의 인솔로 이곳에 답사차 방문하고 견학 후기를 작성하여 책자로 만들어 놓았다.


벽에는 엄청나게 많은 종이학이 걸려 있다.

조선인강제연행

재일조선인인구변이도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공급하기 위하여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이를 근거로 인적 물적 총동원 정책을 실시하였다.
사진은 모집하는 모습. 모집 책임자는 마을에서 모집을 하였으나 계약을 2년으로 하였으나 기한이 지나도 돌아갈 수 없었다. 실질적인 '강제연행'이었다.



작가 한수산씨의 칼럼







중국 남경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학살 자료

2층 전시실에서

나가사키로 끌려온 중국인 강제 연행

나가사키 원폭 피해 조선인 서정우씨 관련 자료. 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이 분의 일생을 살피면서 조선인 피폭자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자료

강덕경 할머니를 추모하는 자료

오카 마사하루(1918~1994)는 목사이자 인권운동가로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로 활동했다.
일본 정부가 숨기고 있던 '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보상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직접 피해실태를 조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태를 파악하게 되었다. 오카 마사하루는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조선인의 차별을 없애는 추모비 건립, 관련 서적 저술 등의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했던 지인들을 중심으로 사후 1년 후인 1995년 10월 1일 평화 자료관을 열게 되었다.

'오카 마사하루 기념 평화자료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한일간의 평화를 진전시키는 소중한 장소이다.
친절하게 안내해 준 나카무라 상과 기념 촬영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나가사키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꼭 한번 들러봐야할 장소이다. ^^

다음으로 우리는 노면 전차를 타고 역사 기행을 떠났다.
오란다 자카(네덜란드 언덕)은 엊저녁에 가 본 데지마 아래쪽에 있다.
1호선을 타고 내려가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시민뵤인마에 정류장에 내렸다.

지도를 보고 오란다자카길을 따라 올라가서 한바퀴 돌고 공자묘 쪽으로 내려와서 오우라 천주당으로 가는 코스를 정했다.

오란다 자카(네덜란드 언덕) 표지석 앞에서... 야자수가 이국적이다.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히가시야마테와 미나미야마테 주변의 외국인(네덜란드인) 거류지를 우리나라 인천이나 군산 등지의 '근대문화유산길' 처럼 만들어 놓았다.

히가시야마테 13번관

네덜란드인이 살던 집을 그대로 복원하여 1층에는 카페가 있고 2층에는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나가사키는 일본 근대화의 기점이다"

왼편이 갓스이여자대학이다.




나가사키 히가시야마테 전통건물 보존지역 알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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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묘 앞에서
유일하게 중국인에 의해서 해외에 지어진 묘당이라 한다. 안쪽으로는 '중국역대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성인을 기리기 위해 1865년 프랑스인 선교사가 지은 성당으로,
일본에서 현존하는 교회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고딕양식 건물이다.
원래는 26성인이 순교한 곳에 세우려 하였으나 외국인 거류지 외에는 허가가 나지 않아 이곳에 세웠다.

사진의 히가시야마테 지역이 네덜란드 인들이 살던 오란다 자카 구역이다.

오우라 성당이 지어지자 200년 이상 숨어서 천주교 신앙을 지켜왔던 우라카미의 "잠복 기리시탄"이 찾아와 신앙고백을 하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단속으로 이들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교회는 그 석방을 위하여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일본 막부는 1620년대 후반이 되자 기리시탄을 색출하기 위하여 예수님상이나 성모상 그림을 밟고 지나가는 "에후미"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 기리시탄들은 비밀조직을 이루어 신앙을 이어갔고, 히라도섬, 나가사키 우라카미(포상)와 소토메 등지에 "잠복 기리시탄"으로 존재하였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우라가에 내항한 후로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다시 개국을 하였다.
최초의 개항도시는 하코다테, 요코하마, 나가사키로 외국인 거류지가 건설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을 방문하였다.
당시 사토와키 대주교는 "4세기 동안 교황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가사키 육상경기장에서 환영 집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일본의 성모상"
신도 발견(잠복 기리시탄의 신앙고백)이 일어난 다음해(1866) 우라카미의 가난한 신도들이 큰 돈을 가지고 찾아오자 프티 장 신부가 프랑스에서 성모상을 들여왔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천주교 금령은 지속되었고, 여러 차레 탄압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면서 서양의 요구인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되었으며, 1873년 2월 24일 그리스도교를 묵인하는 조처를 취한다. 1614년의 그리스도교 금교령은 262년만에 풀렸다.

오우라 성당 내부는 촬영을 못하게 하여 안내지의 사진을 찍어 올린다.
아주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잠시 앉아서 묵상 기도하였다.
460년전 화승총과 함께
바다 건너온 천주교는
규슈의 한줄기 빛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과
금교령으로 박해받다
잠복해버린 기리시탄들.
260년만에 부활하여
오우라 성당을 찾아와
신앙 고백을 하였다.
억압받는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넘겨준 예수의 가르침대로.
나가사키의 교인들은
이웃사랑과 평화 공존을 위해
헌신해주길 기도한다.

오우라 성당 앞거리는 상가가 즐비하고 관광객들이 많았다.

새로 지은 오우라 성당. 통상적으로 이 곳에서 미사를 보고 있다고 한다.

오우라 성당 근처 '사해루'라는 커다란 중국 음식점에 들어가 맛있는 '나가사키 짬뽕'과 볶음면, 군만두 등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

점심을 먹고는 호텔로 가서 짐을 싸들고 하카다행 급행열차를 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