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운회新고대사 ·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1~9 回|자유시간 김 운 회 의 신 · 고 · 대 · 사 :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
| 1 고조선 후예들이 외부의 공격으로 몰려 집결한 곳으로 후에 선비족 발상지로 알려진 알선 동굴. 헤이룽장성과 몽골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선비족은 AD1세기께 이곳을 떠나 초원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이 아리하(阿里河)인데 이 이름은 아무르강, 압록강, 한강, 알천(경주)에 반영돼 있어 민족 이동의 징표가 된다. |
1. 사마천이 말한 ‘고조선과 요나라’ - 요나라는 8조범금 전통 지켜 |
| 1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箕子井田紀蹟之碑)의 탁본. 한민족에겐 ‘오랑캐의 왕’으로 각인돼 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 )는 요나라의 1대 황제다. 10년(916~926) 재위하면서 거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마치 중국 변방 왕조의 왕 같다. 그런데 그가 이끈 민족이 한민족과 뿌리를 공유한다면 어떻게 되나. 사서는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한민족 북방 역사에서 팽개쳐져 왔다. 사진<1>은 네이멍구(內蒙古) 바린좌기(巴林左旗)에 있는 야율아보기 묘역. <2>는 묘의 안내석. <3>은 요가 고조선 옛땅에서 일어나 법통을 이었다고 기록한 요사의 기록(붉은선 안). 우실하 항공대 교수 제공 |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
① 고조선과 요나라
고조선은 BC 2000년쯤~BC 103년까지 존재한 한반도의 뿌리 국가라는 게 한민족의 지식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얘기였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우린 믿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사서(史書) 들은 이런 믿음을 허문다. 먼지 허옇게 뒤집어쓴 역사책엔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916~1125)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다. 고조선이 오랑캐 나라로 이어졌다면 한민족은 뭐란 말인가. 한민족의 과거는 어떻게 된 걸까.
진나라(265∼419)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의아한 기록이 있다. 모용황(慕容<76A9>)은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용외가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때 연호) 초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 전쟁을 했다. 그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으며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 [慕容<76A9>字元眞, <5EC6>第三子也. …建武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末,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5EC6>卒, 嗣位(晉書 卷 109)]
우리가 대표적 오랑캐로 알고 있는 동호(東胡·후일의 남부의 거란계, 북부의 몽골계를 형성)의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니 (당시 조선은 오늘날 요동·요서다). 조선은 한민족의 단어 아닌가.
역시 오랑캐인 거란족의 나라 요의 요사(遼史)에도 난감한 기록이 있다.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이다.
요가 고조선을 승통한 것은 영역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패수(浿水) 문제이다. 즉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어디인지에 따라 고조선의 ①대동강 중심설, ②요동 중심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20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이나 한족(漢族)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엔 삼국사기와 수경주(水經注·중국 북위 때 저술된 중국의 하천지)의 주석자인 력도원(<9148>道元·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현에서 흘러나오고라는 말을 중시하여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이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패수는 대동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수경 원문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鏤芳縣)에서 나온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사서들에서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 [紫蒙縣. 本漢鏤芳縣地. [(遼史 卷 38 地理志2 東京道)]고 나온다.
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黎 等城, 蓋平州之界 契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진서에는 모용외가… 자몽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는 기록이 나온다(晉書 卷 108)). 이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동호(요나라의 선민족)의 중심지가 일치하며 후대 요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동호, 즉 고조선이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는 고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본다.
이젠 다른 문제, 즉 신화를 살펴보기 위해 시기를 더 거슬러서 1세기 후반의 진수의 삼국지를 보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하여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즈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옛날 고리(<69C0>離) 왕의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닭 알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아이를 갖게 됐다고 했다. 시녀가 아이를 낳자 왕이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가 부여를 세워 다스렸다(三國志 魏書 扶餘傳)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 [秦開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90E4>千餘里(史記 卷110 匈奴列傳)]고 하는 기록이 있다.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鹽鐵論 卷 8 伐攻篇)라고 표현된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한다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三國志 卷30 魏書30)]. 즉 고조선은 동호다. 이 동호는 어떤 존재일까.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東夷)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695B>矢)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 황제의 찬사로, 요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李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東胡)=맥(貊)으로 보고 맥(貊)과 예(濊)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東胡)와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진서 요사 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사만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 중앙선데이 | 제201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① | 사진=권태균 | 2011.01.15
1편-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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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마천이 말한 ‘단군신화와 한민족’ - 단군 이야기는 허황 ... |
| 1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箕子井田紀蹟之碑)의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는 내용이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 끝자인 지비(之碑)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
② 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247년,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에 병란을 겪어 평양성에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 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 (“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三國史記 高句麗本紀東川王)고 적는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 (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단군은 본래 한민족이 간직한 단군신화라고 볼 수 없다.
| | |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 |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다. 삼국유사에는 “옛 기록(古記)에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내려와 곰과 교혼하여 단군이 태어나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세웠다고 한다(三國遺事 卷1)”고 기록돼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최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 그 이름은 단군이라.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竝與帝高興戊辰 …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라고 한다. 제왕운기는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한시(漢詩)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 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고기 등에 적힌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들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여 나타난 폐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安鼎福 東史綱目第1上)”라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도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했다는 것은 믿을 만한 문헌자료가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라고 하였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현재는 소실)에서는 “신라,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은 모두 단군의 자손(壽)”이라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이들 삼국이 그 스스로를 고조선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용비어천가에서도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 한다.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梁書 諸夷傳),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개모성(盖牟城)’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 [‘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로 하여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을 지적하였다.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은 설화 수준으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제202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② | 사진=권태균 | 2011.01.22
2편-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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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사마천이 말한 ‘기자조선의 진실’ - 조선에 분 뜬금없는 '기자 광풍' |
| 1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箕子井田紀蹟之碑)의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는 내용이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 끝자인 지비(之碑)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
최남선 “기자조선설은 중국 이민족 동화 정책의 산물” |
조선시대에 한민족의 단군보다 국조(國祖)로 더 숭배됐던 인물이 기자(箕子)다. 은나라 제후였던 기자는 왜 멀리 조선에까지 왔을까.
③ 기자조선의 진실
역사 공간에서 단군과 기자는 복잡하게 얽힌다. 13세기에 급부상한 단군신화는 떠오른 속력만큼 빠르게 가라앉는다. 그 자리를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 차고앉는다. 기자는 유학으로 무장된 조선 위정자에게 정신적 절대자로 군림하며 단군에 수백 년간 설움을 안겼다. 기자는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 말살’ 전략을 펴는 일제 때문에 무너졌지만 해방 뒤 유학자 사회에 의해 복권돼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조’라는 단군에 천 년 가까이 싸움을 거는 기자는 누구인가. 한나라 초기의 '상서대전(尙書大傳) 기록을 보자.
“주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물어보았다.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尙書大傳 卷2 殷傅)”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 | 2‘기자가 평양외성에 자리 잡고 정전법을 시행했음을 기념하는 비석이라는 뜻’으로 탁본을 묶어 만든 서책의 표지다. 영·정조시대 서명응이 만든 책으로 당시 명필이던 조윤정이 글로 썼다. [자료=개인 소장가] | | '삼국지'에는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고)조선후(朝鮮侯)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칭하였다” (“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 僭號稱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나와 있다.
'상서대전'과 '삼국지'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사서들은 하나같이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해동에 국가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三國史記'年表)라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과 관련해 먼저 살필 것은 은-기자-동이족의 관계다. 은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서(史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나라로 알려진 은의 실체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사기'에는 “은(殷)나라가 오랑캐의 나라(“殷曰夷周曰華” '史記')로 돼 있다. “(은나라 시조인) 설(契 또는 卨)의 어머니가 목욕하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고 한다('史記''殷本紀'). 은나라 스스로 “하늘이 검은 새를 보내 은나라를 낳게 하였다(“天命玄鳥降而生商” '詩經'商頌')”는 신화를 널리 보급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화는 만주족의 시조신화와 일치한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은나라가 부여와 습속이 거의 같아서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고 부여는 은나라 역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은나라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만주로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도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 '後漢書'115卷)”고 했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이며, 은의 신하 기자가 만든 ‘기자조선’ 역시 동이족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은나라 신하였다는 기자는 누구인가. BC 2세기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는 “공자는 은나라의 3현인으로 미자(微子)와 기자, 비간(比干)을 지목했다. 세 사람 모두 은나라 주(紂)왕의 친척이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결국 은나라는 동이의 나라, 기자는 동이족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나라는 한민족의 나라, 기자도 한민족의 선조라는 결론으로 급격히 치닫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다. 우선 기자에 대한 사료를 신뢰할 수 없다. 사서들 가운데 AD 1세기에 나온 '한서(漢書)' 이전의 기록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역사가 체계적으로 제대로 기록된 것은 한나라 이후이기 때문이다. '상서대전'은 BC 2세기에 편찬됐다. ‘기자동래의 사실(史實)’은 이보다 800~1000년(?) 전의 사건이다. '상서대전'은 흔히 '서경(書經)'이라 하는데 이미 소실된 것을 한 문제(文帝)가 신하를 복생(伏生)에게 보내어 복생이 구술(口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기'조차도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많다. '사기'조선전'에도 기자 동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고고학적인 문제도 있다. 기자와 관련된 유물 또는 유적으로 주장되는 것들은 주로 산동반도 대릉하(大凌河) 인근에 나타난다. 1973년 대릉하에선 기후(箕侯)의 명문(銘文)이라고 주장되는 청동 예기가 출토된다. 이 ‘기후’를 ‘기자’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기자묘와 유물 출토지가 수백㎞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그렇게 단정하기는 무리다. 인정한다 해도 이 예기는 ‘기자가 기껏 산동이나 대릉하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일 뿐이다.
‘기후=기자’이며 기자는 곧 (고)조선 왕이라면 이는 오히려 고조선의 일부 영역(기자 조선)이 현재의 산동반도나 베이징 인근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한서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한 무제 때 설치하였다. 대개 조선·예맥·구려 등의 야만적인 오랑캐들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석에 “여기서 조선은 주나라 기자를 왕에 봉한 곳과는 다르다”고 했다했다. (“玄兎·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맥、句驪蠻夷 … 師古曰史記云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漢書 卷 28下) 이는 기자가 왕을 한 곳과 현재의 한반도는 무관함을 시사한다.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주나라의 기자가 한반도까지 가서 제후를 하기에는 너무 멀다. 당시 주의 세력은 요동까지도 미치지 못했다. 고대국가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유목민족도 아닌 BC 11세기께(?) 주나라가 수천㎞ 떨어진 한반도까지 미칠 힘은 없다. 그처럼 허구적이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은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사의 근간이 되는 삼국시대엔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문제는 고려 중기다. 북방민족적 건강성이 사라지고 문신 위주의 중화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기자는 날개를 폈다. 기자동래설은 부동의 사실(史實)로 용인되어 고려 숙종 7년 기자사당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1102).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기자로 인하여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이는 김부식의 생각만이 아닌 그 시대 지배층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 말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이 잠시 부각되더니 조선에 이르러선 기자 숭배의 열풍이 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國號') 라고 썼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친한족적(親漢族的)·모화적(慕華的)이었다.
단군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조선경국전'을 필두로 15세기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응제시주''동국세년가' 등을 거쳐, 16세기 후반 '기자지(箕子志: 윤두수)'가 편찬됐다. 조선 중기 대표 석학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했다.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칭송을 받는 송시열은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이 글은 2004년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송시열의 주장은 ‘중국의 속국인 기자조선이 한반도 역사의 출발’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의 주장과 일치한다.
1756년(영조 32년)엔 기자묘가 있다는 평양과 한양, 전국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를 영원히 숭배하자는 상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같은 일부 가문은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됐다.단군은 찬밥이 됐다. 조선 태종 때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삼국사절요(1476)'에서는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지만 기자가 오기 전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했다. 아예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다.
소위 기자 정통설에 대한 비판이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자 관련 기록 가운데 한반도와 무관한 기록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따졌다. 조선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묘가 어떻게 중국 하남성에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지만 ‘기자 광풍’은 이런 의문을 쓸어버렸다.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
한족(漢族)은 주변 민족들의 선조를 한족화(漢族化)하기를 즐기는데 기자도 그 예다. 한족은 흉노의 시조 순유는 하나라 걸왕의 후손, 서융은 하나라 말기 이주민, 선비는 유웅의 후손,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손 등이라고 했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한족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기자가 한반도로 와 왕을 한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다. 작은 먼지 같은 소문에 정치적 뼈와 살이 붙어서 점점 자라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천 년 이상 유학자들의 머리에 뿌리 박히고 그들의 지배와 억압을 받는 한국 민중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203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③ | 사진=권태균 | 2011.01.30
3편- "조선에 분 기자광풍"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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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마천이 말한 ‘고조선 도읍은 베이징 인근’ |
사마천이 말한 고조선 도읍 왕검성은 베이징 인근 |
사마천의 사기는 고조선의 도읍 왕검이 현재 베이징 주변이라고 기록했다. 중국인 스스로 인정한 고조선의 실체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고대사가 한국 교과서엔 없다.
④ 중국 역사서와 고조선
도대체 기자(箕子)는 누구인가. 고대로 거스를수록 짙어지는 역사의 안개가 기자 주변엔 유난히 짙다. 기자는 동이족의 은(殷)나라와 연결되고 그가 속한 기족(箕族) 혹은 기국(杞國)은 고결한 기개로 칭송받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죽국으로 연결된다. 짙은 안갯속에서 고죽국은 또 고조선으로도 길이 뻗어 있다. 기자와 함께 걷는 역사의 벼랑은 한 걸음 잘못 디디면 천길 오해로 추락한다. 수천 년 역사에서 기자는 미로를 만들었다.
‘기우(杞憂)’는 ‘기나라[杞國]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열자(列子)에 나오는데 ‘쓸데없는 근심’을 이르는 말이다. 송나라 때의 대표적 운서인 집운(集韻)에 “기(箕)는 고대 나라 이름이고 위굉(衛宏:한대 유명 학자)이 말하기를 기(杞)와 같은 말이다(箕古國名, 衛宏說杞同)”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자는 기국과 관련 있을 것이다.
우선 기자에 대해선 주나라 무왕이 한족인 기자를 한반도의 제후로 봉했다는 ‘기자 동래설’이 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민족의 선각들은 기자(箕子)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한다. 기국은 고대 한민족 국가였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단군을 태양(개)의 아들(아지)로 ‘개아지’라 불렀는데 이 말이 기자의 중국 발음인 지즈와 비슷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개아지 조선’은 해씨조선(解氏朝鮮)”이라고 했다. 정인보는 “기(箕)는 우리 고유어인 검(儉)자를 한자로 나타낸 것으로 최고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니 단군왕검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재홍은 ‘큰(한)’은 ‘크다’는 뜻이고, ‘지(치)’의 뜻은 수장 · 대인인데, 순 우리 고유어인 ‘크치(대수장)’를 한자로 잘못 번역한 것이 기자라고 하였다.
기족=동이족으로 보는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청 말의 저명 사가 왕셴탕(王獻唐)은 “염제 신농씨는 동이의 한 갈래인데 산둥 지역이 기원지” 라고 했다. 사기에는 염제 신농씨가 은보다 훨씬 앞선 3황5제 시대의 인물로 그의 후계 치우가 구려족(동이)의 임금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중국 동북사범대의 리더산(李德山) 교수는 “기족의 원주지는 산둥으로 이 지역의 기현(箕縣), 기옥산(箕屋山), 기산(淇山), 기령(箕嶺) 등의 지명은 기족에서 따온 것이고 기족과 은 왕조는 친족 관계로 동이 계통”이라고 한다. 나아가 “기자가 타민족인 주(周) 왕조에 반발, 일부 기족을 이끌고 고죽국(孤竹國)으로 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기록으로 사기의 “은(殷)나라는 오랑캐[夷]의 나라(殷曰夷周曰華)”, 또 후한서의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 115卷)” 등을 들 수 있다. 춘추좌씨전에 주나라 초기에 ‘기국(箕國)’이라는 제후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갑골문에도 ‘기(其)’가 흔히 보이므로 은나라 때에도 기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도 진(晋)나라에 기씨(箕氏)라는 고대성이 나타난다. 따라서 기국은 동이족의 일파로 현재의 산둥에서 차오양(朝陽)에 이르는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고대 국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은나라와 한민족의 선민족인 동이족, 기자와 은나라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은나라=기자=동이족=한민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계를 다르게 설명하는 기록들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들은 기자가 대동강까지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사서를 들이댄다. 상서대전 사기(송미자세가)의 기록(중앙SUNDAY 1월 30~31일자)과 한서의 “은(殷)나라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양잠·베짜기 등의 기술을 가르치니 낙랑조선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 (漢書 地理志 燕)는 등의 기록이다. 주나라가 중국 고대국가이므로 중국인 기자(주 무왕의 신하)가 한반도로 와서 통치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논어나 고대 역사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BC 4세기경) 같은 고서들이 기자는 인정해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외면한다.
혼란을 수서(隋書)가 부채질했다. 수서에는 “주나라는 기자가 일족 사람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아예 인정을 베풀어 고죽(孤竹) 땅을 그에게 봉하였다”라는 기록과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다(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於箕子. 隋書裵矩傳)”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앞의 기록은 우선 수서(636)와 기자조선(BC 11세기 ?) 간의 시간적 거리가 최소 1600년으로 너무 멀어 신빙성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또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현재의 상구현)에 있다”는 사기색은(사기의 주석서)의 기록과 모순돼 신뢰할 수 없다. 오히려 주나라의 영향력이 산둥 지역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고구려의 옛땅 고죽에 주나라가 기자를 보내 제후로 봉했다’는 부분은 ‘기자 조선동래설’의 근거로 제시되지만 여기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고죽은 여러 사서에서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 동남부~차오양(朝陽)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孤竹城在盧龍縣南十二里, 사기정의(史記正義)), “요서 영지현(令支縣)에 고죽성이 있다.”(한서(漢書) 지리지), “유주(幽州)는 상(은)나라 때는 고죽국으로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 (요동지(遼東志) 지리지),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 등이다. 한서에 나오는 영지현은 “유수는 (무열수이며) … 새외를 따라서 동남을 지나 영지현 북쪽을 지난다”라는 수경주 기록(濡水)과 “란하는 과거 무열수였다”라는 열하지의 기록(卷69 熱河) 등을 토대로 보면, 고죽은 롼허(<7064>河) 하류 지역으로 비정되는데 이는 사기정의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결국 동이족 일파이자 은나라 후예인 기국(箕國)이 현재의 산둥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고대 국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나라가 기족의 제후를 임명한 곳은 고죽이지 한반도의 기자조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자의 조선동래설’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기자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로 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권람의 응제시주(應製詩註:1462)에는 “기자가 건국했던 지역은 청주(靑州:현재 산둥)”라고 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1778)에 “주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동 전 지역이 모두 기자의 강역이었다” (東史綱目 遼東郡考)라 하여 기자조선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전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기자조선으로 오인되고 있는 기국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과의 관계 때문이다. 사기에는 “(고조선이) 왕검(王險)으로 도읍을 삼았다”면서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縣也, 卷115)”고 한다. 또 왕검을 험독이라고도 기록했다. 창려를 현재 창려(昌黎:현재 베이징 동부해안)로 보면, 왕검성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란 말이 된다. 그러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가 된다. 고조선의 영역과 기족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따라서 기국이 고조선의 선민족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국을 연결 고리로 해 은나라와 고조선이 역사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진서(晉書)가 ‘험독이 선비족의 모용씨의 주요 거점’이라고 한 것도 고조선과의 관계에서 중요하다. 진서에는 선비의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진 후 모용황(慕容<769D>)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卷109). 그런데 청나라의 대표적 고증학자인 고염무는 일지록에서 “(336년) 모용황은 창려 동쪽으로 나아가 거의 300여 리를 지나 유수(<6E1D>水)의 하류 역림구(歷林口)에 이르렀다”고 했다(日知錄 卷31 昌黎). 험독=창려라는 것이다. 수경주도 같다고 보고 있다(水經注<6E1D>水).
따라서 산둥 반도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지역이 은나라 후예인 기족의 영역이었다가 뒤에 고조선 중심지가 되고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원주지이면서 동시에 모용씨(동호 후예, 요의 선민족)의 터전으로 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동이족의 역사가 은→기국→고조선·숙신→동호·선비·부여→전연(모용씨)·북위·고구려→요(거란)·고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조선 역사가 후대에 큰 혼란을 남긴 이유는 동이의 국가들이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해 남긴 기록이 없고 사기의 조선 관련 기록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사기는 고조선에 관해 가장 기록을 많이 하지만 다른 이민족과는 달리 민족과 국호의 기원, 제도에 관한 내용은 없고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투쟁만 상세히 묘사한다. 고조선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위만 이전의 고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다른 경로를 통해 추적할 수밖에 없다. 기족이나 숙신(肅愼)에 대한 연구도 그 하나의 예다.
1973년 3월 랴오닝(遼寧)성 카쭤(喀左)현 구산(孤山)에서 한 농부가 은대의 청동 항아리, 술그릇, 솥 등을 발견했는데 술 그릇 중 하나에는 고죽(孤竹), 솥에는 기후(箕侯)라고 여겨지는 글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기후(箕侯)=기자(箕子)이며 이는 기자조선의 산 증거’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기후=기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도 없다. 유물 출토지와 기자묘가 적어도 700㎞ 이상 떨어져 있다. 고대에 그 정도 거리는 ‘상호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또 기후는 기족의 수장이라는 의미로 수십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기자는 주나라 무왕 때의 특정 인물이므로 ‘기후=기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컨대 기자가 조선 태조 이성계라면, 기후는 조선 왕이라는 말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고대에 기후의 나라(기국)를 기자조선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산둥~랴오둥 지역은 고대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기족·기후 등의 개념과 조선·숙신(주로 이 지역에 나타나는 민족명) 등이 뒤섞여 기자조선이라는 관념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은나라 청동 유물 출토지와 고죽국의 위치가 근접해 있어 일부 사가가 ‘기후=기자’로 오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후=기자’를 증명한다기보다 은나라 후예들인 기족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 중앙선데이 | 제204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④ | 사진=권태균 | 2011.02.05
4편- 기자조선의 실체 : 고조선 도읍 왕검성은 베이징 인근 http://news.joinsmsn.com/article/067/5015067.html?c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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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려현 창려현은 기록에 고조선의 도읍으로 나오는 곳이다. 사기의 “위만은 왕검(王儉)으로 도읍을 삼았다”라는 기록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의 서광(徐廣)은 “창려현에 험독현이 있었다”, 응소(應昭)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왕검=험독’임을 설명한다. 이 지역은 현재 베이징에서 멀지 않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서 봐도 천연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발해가 보인다. 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아래의 사진들) |
| 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
⑤ 고조선의 실체Ⅰ
고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은 신화의 세계 혹은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세계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공자의 춘추시대에 이미 뚜렷한 자취가 있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2000여 년 전 후대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뒤 잠긴 고조선의 문을 열려는 노력이 오늘 활발하다.
고려사에 “평양에 도읍한 단군이 전조선(前朝鮮)이고 기자조선은 후조선(後朝鮮)이며… 41대 후손 준왕(準王)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나라를 빼앗아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卷58 志 卷12 地理)”라고 한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사기에 충실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사기의 미스터리다. 이런 기록은 ‘은나라와 기족의 역사를 제외하면 한국사는 BC 190년께 연나라에서 온 중국인 위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만 이전, 41대 왕까지 이어져 왔다는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왕궁의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시경(詩經)의 주나라 선왕(BC 827~782) 때 일이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준 것은 그 추족과 맥족(貊族), 북쪽 땅을 받고 제후가 되었다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大雅)”는 기록이다. 이 한후를 상당수 한국 사학자들은 한국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한반도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 | |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 |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 (毛장)은 시경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북방의 제후급 인물이 오랑캐를 토벌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했다. ‘한후’는 주나라 왕실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일 뿐 한민족과는 관계없다는 의미다. 한민족을 의미하는 한(韓)의 개념은 당시엔 형성되지도 않았다. 시경에는 한후가 주나라 왕명을 저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하면 제후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구절과, “한후가 분왕(汾王) 조카딸과 결혼(韓侯取妻 汾王之甥, 大雅)”한 후 그 제후와 연나라 백성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이다. 즉 주나라 제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시경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 때 일’ 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한후(韓侯)가 아니라 맥족(貊族)이다. 맥족은 예족(濊族)와 더불어 고조선의 근간을 구성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예맥은 관자에 처음 나타난다. 관자(管子)의 “제나라 환공(桓公, ?~BC 643)이 북으로 고죽 · 산융 · 예맥(濊貊)에 이르렀다 (北至於孤竹山戎濊貊, 小匡)”는 기사가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죽(孤竹)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 · 전연 · 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엔 “진(秦) 북쪽으로 호(胡)와 맥(貊)이 접한다(强國)” 는 기록이, 사기엔 “진(秦)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진시황을 보필하여)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李斯列傳)”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맥은 현재의 내몽골이나 요서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 (呂氏春秋)에는 “북해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능어(陵魚)가 난다(北濱之東 夷穢之鄕大解陵魚, 卷20)”라고 한다. 여기서 북해는 발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BC 3~2세기 무렵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본다”고 했다.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관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실 ‘고조선’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가 만들어낸 말이다. 관자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卷23)” 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 (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 發朝鮮可得而朝也, 卷24)”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發朝鮮)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發朝鮮)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관자는 BC 7세기께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大匡)고 했다. 고죽국이 멸망하고 이 일대는 연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 · 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위략(魏略)에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史記 匈奴列傳)”고 한다. 삼국지에는 “(조선왕의)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마침내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고 했다. (동호가 고조선임은 이미 1회에서 밝혔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645년) 진흙이 200여 리나 돼 인마가 통과할 수 없다… 대습지여서 당태종조차 말의 칼집에 장작을 메었다(寶藏王)”고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사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후’라는 말은 주로 동호(선비, 모용, 요 등)가 계승했다.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魏書 東夷傳 韓)”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 · 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 중앙선데이 | 제205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⑤ - Ⅰ | 사진=권태균 | 2011.02.12
5편-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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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고조선의 실체 II - 고조선의 뿌리, 4000년 전 숙신 |
| 1 갈석산의 전경. 『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2 대릉하 상류. 고조선 영역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패수인데 사서들을 종합하면 패수는 란하 또는 대릉하다. 대릉하의 발원지 가까이에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인류문화 발상지인 홍산문화의 유적지가 있다. 3 고조선 영역에서 발견된 구멍무늬토기. |
고조선 뿌리는 숙신, BC 2000년 이전 은나라 방계국가 |
고조선사가 이제 2000년 전까지 올라간다. 은나라와 같이 존재했던 숙신이라 불리던 민족이 고조선의 선조다. 사기와 죽서기년 같은 사서에 등장하는 그들은 한민족 고대사를 아득하게 끌어올린다.
⑤ 고조선의 실체 Ⅱ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 (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고 나온다. 옥저는 현재 함흥·신포 지역, 매구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건녕 3년(896)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太祖紀)”고 돼 있다. 이때 조선은 한반도라기보다 고조선의 옛땅, 숙신은 만주 또는 한반도 중부, 변한은 한반도 또는 남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고조선 중심부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 “숙신은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돼 있다.
이처럼 숙신과 조선(고조선)이 혼용되는 사례는 많다. 고조선 혹은 그 일부를 숙신으로 보거나 조선과 숙신을 상호연결된 독립 주체로 보는 식이다. 이런 혼용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 (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로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BC 2000년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나라 또는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발식신은 다른 용례를 찾기 어렵고, 가장 가까운 표현이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 (“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 =조선’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숙신이나 조선은 어떤 민족명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음차어라는 점과 고조선은 전설시대 때부터 중국민과 함께 존재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에 “주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한 후 숙신 사신이 왔다”는 기사(卷115, 東夷傳)와 일치한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형제국)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정비된 형태의 국가였으며, 숙신이 고조선의 전신이라면 은나라의 북부에 있던 숙신이 은나라 유민과 결합해 고조선이 발전적으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주나라 왕이 신하를 진나라에 보내어 한 말 가운데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후(BC 1100여 년경) 숙신·연·박이 주나라의 북쪽의 땅이 되었다(昭公九年)”고 한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고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이 박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劉子敏古代高句麗同中原王朝的關係). 이것은 이후 순자의 “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 사기의 “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5회 참고>).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사기(史記)에 “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살 맞은 매가 멀리 날지 못했을 것이니,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한나라 말기 양웅(揚雄·BC53~AD18)이 저술한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 사이”라는 말이 20회 이상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연의 경계 밖으로 더러운 오랑캐인 조선과 열수의 사이(第1)” “무릇 초목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북연과 조선 사이를 일컬어 초망(가시덤불)의 땅이라 한다(第2)” “연나라의 동북쪽과 조선, 열수의 사이를 일컬어 목근(무궁화)의 땅이라고 한다(第5)”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고조선을 낮춰 보는데 이런 경우는 중국을 괴롭힌 경우 많이 나타난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의미다. 방언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 북쪽에 연이어 있다. 이는 숙신과 고조선 영역이 일치함을 확인시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열수(列水)다. 지난 2000여 년간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사강목(東史綱目)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그런데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은 틀렸다. 대동강(또는 한강) 동쪽에 열양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다면 고조선은 현재의 함흥이나 강릉이다. 고조선은 이 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나 조선은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朝鮮列傳)”라고 한다. 그런데 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에 “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에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와 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
- 중앙선데이 | 제206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⑤ -Ⅱ | 사진=권태균 | 2011.02.20
6편- 고조선 뿌리는 숙신 http://news.joinsmsn.com/article/aid/2011/02/20/4744156.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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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위만의 정체성 - 위만 조선은 중국의 역사 왜곡 |
|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대릉하의 랴오닝성 상류 부분. 강폭이 300~400m가 될 만큼 넓고 깊다. 이 강은 동이족의 나라 은(殷)이 BC 11세기께 중국 한족의 나라 주(周)에 의해 멸망한 뒤 은의 제후였던 기자가 만든 ‘기자의 나라’를 흘렀던 강이다. 고조선 땅이 된 이 대릉하 지역을 BC 3세기 중국 연나라가 침입해 장악하지만 고조선 만왕은 이 땅을 회복한다. |
위만은 억지 중국인 … 후한서 삼국지서 중국 성 ‘위’ 붙여 |
위만 조선으로 알려진 고조선사는 중국인의 억지다. 중국 성을 가짜로 갖다 붙였고 사서를 조작했다. 사서에 분명히 나와 있음에도 왜곡된 고조선사는 2000년이나 계속됐다.
⑥ 위만의 정체성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천하를 통일한 은나라 탕 임금은 옛 성현들의 후손들이나 은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고죽 등의 나라에 봉했다 (古聖賢有功者之後 封孤竹等國 各有差)”고 했다. 이 기록은 BC 1600년경의 일로,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기후의 고죽국이 은나라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의 왕가와 가까운 제후국이었음도 알 수 있다. 이 고죽국은 고조선의 역사와 그 영욕을 함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로인 까닭에 ‘고대 동북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의 정세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던 지역이다.
고조선은 BC 4세기 이후 보다 독자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인근 연나라와의 투쟁과 더불어 성장했다. 한때 연의 침공으로 요하 동쪽까지 밀렸지만 연의 멸망 후 진(秦)나라와 대치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BC 221~BC 206)은 내부 정비와 흉노의 위협 때문에 ‘멀고 지키기도 어려운’ 고조선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진 멸망 뒤 한이 들어서자(BC 202)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 (위)만이 문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조선왕 만(滿)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기일 때 진번과 조선을 복속하여 관리를 두고 장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요동의 외요(국경 밖의 땅)에 속했다. 한나라가 흥한 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도 어려워 다시 요동의 요새를 수축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 연에 속하게 했다. 연나라왕 노관이 배반해 흉노에 들어가니 만이 망명하여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으고 퇴결만이(<9B4B>結蠻夷·오랑캐)의 모습으로 동으로 달아나… 여러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왕이 되었고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卷115 朝鮮列傳)고 했다. 이 기록은 큰 흐름은 보여주지만 구체적인 사실과 해석에서 문제투성이다.
우선 고조선이 연의 속국인 듯 기록돼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과 연의 갈등이 극심했던 점 ▶연나라 장수가 침입해 고조선이 후퇴한 기록이 분명한 점 ▶진 멸망기에도 고조선이 건재한 점 ▶만(滿)은 고조선으로 ‘망명’한 점 등은 고조선이 절대 속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던 사마천이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 중국 고대사 전문가인 이성규(서울대) 교수는 “사마천은 한나라 주변 국가는 대부분 중국인(漢族)이 건설했다고 한다. 남월(南越)은 진나라 관리 출신(南越列傳), 운남(雲南)의 전왕(<6EC7>王)은 초나라 장왕의 후손(西南夷列傳)이라는 식이다. 진한(辰韓:신라 전신)의 주민이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해 망명한 진나라의 후예라고 주장한 것도 동이 사회에 잡거한 중국인의 비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다”라고 말한다.
‘만(滿)’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동안 이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가 연나라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만이 나타나는 최초 기록인 사기에는 위(衛)라는 중국식 성이 붙지 않았다. 그냥 ‘만(滿)’이라고 썼다. 만의 복장도 전형적 동이의 모습이었다. 또 고조선의 준왕은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만큼 만을 신임했다. 만은 왕이 된 뒤 국호를 그대로 고조선(조선)으로 불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만의 정체성은 ‘(고)조선인’에 가깝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망(BC 226)시키고 위만이 이 지역을 떠나는 시기(BC 190년경) 이 지역은 북방인과 한족의 완충지대로 국적을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비유하자면 만주사변(1931)에서 해방(1945)까지 시기의 연변 조선족과 유사하다.
또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이다.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설로 2세기 후반의 학자인 응소(應<52AD>)는 “요동의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遼東險瀆 朝鮮王舊都”史記 卷115)이라고 한다. 창려는 과거의 고죽국 지역이므로 왕검은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이다. BC 2세기께 고조선은 연나라에 뺏긴 과거 고죽국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다만 그 시기는 한나라 장군인 번쾌와 주발의 대군이 이 지역을 평정(BC 195)하고 철수한 이후로 보인다.
고조선 왕 만(滿)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할 당시 한나라는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했다. 사기에 따르면 BC 200년 태원(太原)을 지키던 한신(韓信)이 흉노에 항복하자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친정에 나섰지만 평성(현재의 다둥·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다. BC 199~196년 유방은 한신의 잔당과 진희(陳<8C68>) 등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분주했고, BC 195년은 연왕이었던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자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한 후 고향인 패(장쑤성 펑샨)에서 쉬었다. 이후 흉노는 고조선과 함께 만리장성 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만(滿)의 고조선’은 고조선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후의 사서는 ‘위만 조선’이라 해서 고조선과 분리시킨다. 문제는 사기보다 300~400년 늦게 쓰여진 삼국지 후한서 등에서 비롯됐다.
삼국지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북상투에 오랑캐 옷을 입고 다시 와 기자를 대신하여 그들의 왕 노릇을 하였다” (“燕人衛滿, <9B4B>結夷服, 復來王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하고, 후한서에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으로 피했다” (“燕人衛滿避地朝鮮” 東夷列傳 第75)고 썼다. 그동안 ‘만(滿)’으로만 알려진 이름에 당시 동북에 흔한 중국 성(姓)인 ‘위(衛)’를 붙여 위만(衛滿)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를 왜곡한 중화주의 사서의 영향으로 이후 ‘위만의 조선’이란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삼국지는 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후 준(準)은 시종들과 궁녀들을 데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 땅(한반도 남부)으로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하였다. 그 후 왕계는 끊어졌지만 지금도 한 땅의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三國志‘魏書’ 東夷傳 韓)라고 하여 중국인 위만의 고조선과 원래의 고조선을 분리하기 위해 이전의 ‘고조선 왕조가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후 나타나는 고조선(만조선)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한나라와의 투쟁도 더욱 심화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나온 ‘왕검에 도읍’이라는 기사로 보면, 고조선은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BC 2세기 초반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이었던 고죽국 지역을 점령해 왕검성을 건설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이에 따라 고조선과 한나라의 갈등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 “흉노의 좌현왕과 그 장수들은 주로 동방에 살고 있는데 예맥과 조선에 접하고 있다” (史記 匈奴列傳)는 기록은 흉노의 구체적인 위치, 조선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준다. ‘흉노가 조선과 예맥에 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오랑캐’라 부르던 동호·선비·오환·숙신 등은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며 중국이 흉노라 부르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 (“東伐朝鮮 起玄<83DF> 樂浪 以斷匈奴之左臂” 漢書 卷73 韋賢傳)고 한다.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다. 바로 이 점에서도 만(滿)은 중국인일 수가 없다. BC 2세기는 고조선이 저력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춘추 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이 멸망해 사라졌지만 고조선만은 의연히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해 거의 한 세기를 번영했다. 그러나 기회만 노리던 한나라는 BC 129~119년 북방을 공격했고 흉노세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침공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했다고 나온다. 조선을 한나라에 팔아넘긴 5대 매국노(임신5적)들인 참(參), 한음(韓陰), 왕겹(王<580A>), 장(長), 최(最) 등은 한나라의 작은 제후로 봉해졌다. 참은 홰청후(<6F85>淸侯), 한음은 적저후(狄<82F4>侯), 왕겹은 평주후(平州侯), 장은 기후(幾侯), 최는 온양후(溫陽侯)가 됐다.
이들 봉지가 대부분 고죽국이나 왕검성에 가까운 곳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은 위소(韋昭) 등의 주장을 인용해 “홰청과 온양은 제(산동반도), 적저는 발해(渤海), 평주는 양부(梁父), 기는 하동(河東)”이라고 했다. 이들 봉지가 고조선 땅이란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봉지는 자신이 속한 곳의 땅인 경우가 있기 때문에 5개 봉토의 분포는 고조선 영역이 일부는 산동 북부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제207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⑥ 사진=권태균 | 2011.02.27
7편- 위만은 억지 중국인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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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사서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의 조양시와 시를 가로지르는 대릉하다. |
고조선 유민 ‘추(騶)’,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
고조선이 멸망했다. 유민은 어디로 갔는가. 한 갈래는 고구려 건설에 나섰다. ‘추(騶)’라는 이름의 선조를 중심으로 베이징~선양 사이에서 용틀임은 시작됐다.
⑦ 고조선과 고구려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다. 첫 갈래는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東夷列傳濊)이라 했고 수서(隋書)에는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다(裵矩傳). 구당서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했다.” (“高麗本孤竹國 周以封箕子爲朝鮮,” 舊唐書裵矩傳)고 한다. 즉 수 · 당 시대에는 ‘고죽국=조선=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다. 고죽국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지역이므로 고구려는 고조선 옛 땅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에 대한 최초의 정사 기록은 한서로 “한무제 원봉 3년(BC 108)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음 해 4군을 설치하는데 현도(玄兎)군에 고구려현이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한서에는 왕망이 말하기를 “하구려(고구려 비칭)는 유주에 속하고 4만5000여 호에 인구는 22만 명”이라면서 그 주석에 “현도군은 과거 진번에 속했고 조선 오랑캐의 나라(地理志下 玄兎郡)”라고 했다.
한사군은 고조선 옛 땅에 설치한 4개 행정구역으로 BC 108년 낙랑·임둔·진번을, 이듬해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현도를 현재의 함흥으로 봤다. 그런데 한서에 “현도군은 유주에 속한다…현도군은 고구려, 상은태(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의 세 현”이라고 했다. 유주는 후한 때의 주 이름으로 현재의 베이징~랴오닝(遼寧)성 남부 지역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라는 수서와 구당서의 기록을 고려한다면 현도는 결코 함흥이 될 수 없다. 현재의 베이징에 가까운 지역이다. 이를 한서와 수경주(水經注)가 검증해준다.
한서에 “고구려현의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바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高句驪 遼山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地理志 玄<83DF>郡)라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대요수와 합류하는 백랑수(白狼水)는 교려(交黎)를 지나는데 이곳이 바로 창려(베이징 동남)다.
문제는 요수를 달리 요하(遼河)라고도 하고 고대에는 상류를 낙수(樂水), 하류를 대요수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수서에 “요산은 북위가 요양(遼陽)이라고 했는데 … 개황 16년(596) 요주에 속했다(遼山后魏曰遼陽 … 十六年屬遼州)”고 했다. 요양은 현재의 선양(瀋陽) 또는 랴오양(遼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재의 란하(루엔허)에서 선양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서의 현도군에 관한 주석으로 “과거에는 진번군으로 조선 오랑캐(朝鮮胡)의 나라이고 고구려(高句驪)현은 구려 오랑캐(句驪胡)다” (地理志下 玄<83DF>郡)라는 기록과 위략(魏略)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 오랑캐의 옷(胡服)을 입고”라는 기록을 보면 중국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 계열의 호(胡)로 보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동이(東夷)라는 개념과 결부시키면 동호(東胡)라는 보통 명사가 도출된다. 중국에서 호(胡)는 일반적으로 흉노(匈奴)를 말한다.
고조선 멸망 후 전한 시대(BC 202∼AD 7)를 통틀어 고구려에 대해 제대로 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즉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한서에는 “(AD 12년) 왕망(王莽)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나라의 법을 범하고 도적질을 일삼자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王莽傳)라고 한다.
추(騶)는 한편으로는 명목상 한나라의 제후였지만 북방 세력(흉노)과도 긴밀했기 때문에 중화 편집증을 가진 왕망(신 황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추가 왕망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고구려가 정상적인 정벌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추는 한나라의 위계에 빠져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추’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된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하였고 이때 비로소 고구려왕을 칭하였다”(高句麗傳)라고 한다. 즉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므로 고구려는 바로 이 시기에 서서히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에는 태조 대왕(53~146)을 국조왕(國祖王), 즉 건국 시조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태조왕의 생몰연대(97세 서거)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상식적이지 못하므로 여러 왕들의 업적을 통합해 이를 건국 시조화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고구려 전문가인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삼국사기의 건국신화는 4세기 소수림왕(371∼384) 때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확립됐다. 이때 고구려 초기왕계도 함께 정립됐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는 같은 계열인 부여계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신화는 부여 신화의 복사판이다. 삼국사기에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金蛙·금개구리)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고구려 본기)라 한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과 ‘금와왕’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다.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동호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하다. 삼국지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가 ‘낮에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쩍이는 빛이 입에 들어와 임신하여 출산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으니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자라면서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하여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단석괴는 선비족(동호의 후예)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장렬히 산화한 고구려후 추의 일생을 존숭하여 동호의 영웅인 단석괴의 출생신화에 부여계의 신화를 흡수, 북방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신화를 강화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부여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이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다. 알타이에 퍼져 있는 알타이인의 아버지, 탄자강 설화는 “옛날 알타이에 탄자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붉은 개구리와 싸우던 흰 개구리를 구했다. 이 일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되고 꾸르부스탄(하늘의 신)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는다”(양민종 알타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여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 우렁각시 나무꾼과 선녀 혹부리 영감 심청전 등의 원산지다.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다. 물론 부여·고구려의 신화가 거꾸로 알타이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연구 과제다.
위략(魏略)에 “옛날 북방에 고리(<69C0>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인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 (三國志 魏書 扶餘傳 주석)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바로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어 삼국지(三國志)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동이들이 과거에 하던 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라든가 다른 대부분의 일들이 부여와 같다고 한다” (魏書 高句麗)라고 했다. 부여세력 일부가 고구려 건설에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부여계→고구려’라는 역사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략에 나타나는 고리(<69C0>離)는 이후 고리(高離:삼국지(三國志)), 고리국(藁離國), 탁리(<69D6>離:논형(論衡)), 삭리(索離), 콜리(忽里: Khori), 고려(高麗), 구려(句麗), 고구려(高句麗) 등으로 나타난다. 사기나 당서(唐書: 940) 당운(唐韻: 751) 또는 명나라 때의 정자통(正字通: 1671)에서 ‘려(麗)’라는 글자의 발음은 ‘[리(li)]’로 난다. 따라서 대체로 위의 발음은 ‘까오리’에 가깝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부여로 세력을 확대했다. 동시에 추의 죽음을 기리고 거기에 부여와 단석괴 신화를 결합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 고주몽의 건국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사라진 옛터에, 고주몽으로 환생한 고구려왕 추(騶)의 수급(首級)이 흘린 혈흔(血痕) 위로 새로운 역사의 꽃이 피어난 것이다.
- 중앙선데이 | 제208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⑦ 사진=권태균 | 2011.03.05
8편-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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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끝). ‘고조선의 계승자들’ -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
⑨ 고조선의 계승자들
고조선 멸망 뒤 유민 일부는 고조선 남부와 해안을 중심으로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다른 갈래들은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 · 탁발부(拓拔部) · 우문부(宇文部) · 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 | | ▲ 2 알선동 지역에서 발견된 명문(銘文). 위서에 따르면 북위의 태무제 때(443) 지역 부족들이 나라의 발상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태무제는 동굴에서 제사를 지낸 뒤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다. 축문은“위대한 선조들 덕에 천하를 다스리게 됐고 조상의 은덕으로 무궁 발전할 수 있도록 축원한다”는 내용이다. | | BC 2세기 한나라는 ‘흉노’를 견제하는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요하상류의 동호(東胡 · 선비오환부)를 한나라 5부 북쪽으로 옮기려 했다(後漢書 烏桓鮮卑列傳). 그런데 흉노가 이를 간파해 동진하자 동호는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들을 선비 또는 오환으로 부르게 됐다 (烏桓鮮卑列傳)고 한다. 이들의 명칭이 시기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에 “조(趙)나라…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다” 하고 사기에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山戎)이 있고 이들은 각기 흩어져 계곡에 거주하고 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했다(匈奴列傳)”고 하는데 동호 지역이 모두 고조선 영역이다. 따라서 동호는 고조선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오환이 처음 나타나는 사기의 기록엔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 동으로 예맥조선과 서로 접하고 있다(貨殖列傳 烏氏<502E>)”고 한다. 이 기록은 흉노의 동진으로 동호가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족이 됐다는 후한서와 어긋나 의심스럽다. 또 부여는 북만주 일대이므로 연나라 ‘북’이라면 고조선 지역인데 사기는 이를 오환 지역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여와 조선이 모두 예맥의 국가인데 ‘오환부여’니 ‘예맥조선’이니 하므로 오환은 예맥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오환산은 적산(赤山), 즉 울라간(Ulagan)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오주(烏州)는 원래 오환의 땅으로 요하(遼河) · 오환산(烏桓山) 등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적산(赤山)이 있다”고 한다. 오환산은 현재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츠펑(赤峯)이다. 츠펑(赤峯)은 몽골어로 ‘울라간 하다(Ulagan Hada)’라고 하는데 원사(元史)에도 적산(赤山)으로 명기돼 있다. 붉은 산(울라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달’ ‘조선’과 연관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문헌적 연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흉노와 후한의 대치 국면에서 고조선은 번영하지만 한 무제의 침공으로 흉노는 후퇴하고 고조선은 멸망한다(BC 108). 많은 유민이 발생하고 이들 대부분은 잡거(雜居)한다. AD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의 습격으로 수천 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 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한다(後漢書 南匈奴列傳). 흉노는 내분으로 남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네이멍구(內蒙古)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고조선은 2세기께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기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단석괴는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중·서부로 나눠 각각 대인을 배치했다. 동부는 현재의 허베이(河北) 핑취안(平泉)~랴오양(遼陽), 중부는 탕산(唐山)~베이징(北京), 서부는 베이징~둔황(敦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영역을 확장해 청주·서주·유주·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三國志 魏書오환전).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 답돈(踏頓:?~207)이 황제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202)는 답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을 보냈다(魏書 무제기). 답돈은 위 무제 조조(曹操)의 정벌 때 참수됐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에서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암살되자 분열돼 모용부·탁발부·우문부·단부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했다.
4세기엔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진서에 “모용외가 건무(후한 광무제의 연호) 초에 정벌 전쟁을 하여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晉書 卷109)”고 했다. (고)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에 봉해진 뒤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晉書 卷109).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베이징 인근~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모용황이 회복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 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후연은 모용운(慕容雲)으로 이어진다. 진서(晉書)는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로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고구려의 한 족속이다(慕容雲傳)”고 한다. 모용운은 즉위 후 성을 다시 고(高)씨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어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자(408년), 시어사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함으로써 종족 간의 유대감을 표시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해 건설한 국가가 북위(北魏:386∼534)다. 북위 헌문제(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자 꾸짖으며 장수왕을 두둔했고,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499~515)를 낳았다(魏書 文昭皇太后列傳).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 와 북위 조정을 장악했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을 듣고 흰 위모관과 베로 지은 심의를 입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는 천자(天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
이 같은 전연·후연·북위·고구려의 관계는 모용부·탁발씨·고구려가 중국 북부 지역에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었지만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북위의 멸망 수 · 당시대(7~10세기)가 열렸다. 수 · 당나라는 선비족 전통과 중국 한족(漢族)의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퓨전(fusion)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이었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양견의 이종사촌이었다. 전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호한융합(胡漢融合) 또는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평가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 국제 국가 당은 ‘선비(鮮卑)의 나라’지만 한화가 극심했고 중국도 한 · 당나라를 중화의 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를 고조선의 고유성(固有性)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는 그 정체성을 중립적, 비한비이(非漢非夷)로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많은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귀화 또는 편입했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방민의 고유성이 많이 상실되는 계기가 됐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만주에서 거란 · 고구려 · 발해가 유지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뒤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魏書 庫莫奚 契丹)”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네이멍구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 · 탁발부 등 타 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 수 · 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 · 거란(요) · 금 · 고려 · 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 중앙선데이 | 제209호 | 김운회의 新고대사 ⑨ 사진=권태균 | 2011.03.13
9편-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0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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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 못다 한 이야기, ‘나라는 몸 역사는 혼(魂)’ … 우리 혼 말살되는데 대응 못 해 큰일 |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필자 김운회 교수 |
인터뷰 - 못다 한 이야기
본지가 1월 16일 이후 9회에 걸쳐 연재한 ‘김운회의 신고대사’는 특이했다. 고조선사를 집중 조명한 연재물은 사막의 모래 밑에서 혹은 깊은 물 속에서 역사의 덩어리를 꺼냈다.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고대사가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을까. 왜 중국이 비하하는 오랑캐의 무리로 우리의 고대 선조를 몰아넣었을까. 과장도 폄하도 없는 철저한 고증 때문에 시리즈는 ‘고대사 교과서를 새로 썼다’는 평까지 받았다. 그러나 깊은 고대사를 담기에 시리즈는 너무 짧았다. 글을 쓴 김운회 교수를 만나 아쉬운 마음을 들어봤다.
-연재에 어떤 의미를 뒀나. “한국인들의 정체성과 관련해 지난 1000여 년간 나온 공식 기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썼다. 한편으론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구겨 넣은 보수사학계와 고조선이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한 듯 묘사하는 재야사학계의 패러다임을 교통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철저히 문헌 고증을 했다. 기록의 사실 여부를 다른 자료들과 비교 검토했다. 원래 훨씬 분량이 많았지만 그런 축약의 과정을 거쳐 고증 중심의 연재가 됐다.”
| | | 1월부터 9회에 걸쳐 본지에 실린 김운회 교수의‘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 | -기존 사학계는 사이비 이론으로 보지 않나. “연재에 앞서 나는 어떤 전문가라도 공식 반론을 하면 공개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기존 학계는 당장 대응하지 않았다. 사실 보수사학계 내부도 균열이 있다. 일부는 단군신화,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재야사학처럼 고조선 강역을 만리장성 이북 전체로 본다. 그러나 주류는 중국 관점을 따르면서 한반도 중심으로 고조선사를 본다. 연재물은 검정과 고증이 가능한 부분만 제시했다.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선비의 역사에 관한 기록들을 내가 적극 수용한 것이다.”
-보수사학계는 뭐가 문제라고 보나.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소중화 의식’이 사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한족과 한국인 외에는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력한 패러다임을 형성한 게 가장 큰 문제다. ‘조선’이란 국호도 ‘중국이 봉한 기자조선의 후예’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원래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칭한 용어이며 고조선의 원이름인데 그 뜻은 버렸다. 스스로 뿌리를 부정한 것이다. 중국ㆍ일본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 한ㆍ중ㆍ일 가운데 왜곡이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역사 기록에도 없는 단군신화나 기자 조선은 침소봉대하면서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이라거나 요나라가 고조선의 영역과 전통을 가장 오래 이어왔다는 기록, 그리고 동호가 고조선이라는 기록들을 외면했다. 4세기 이전까지는 기록도 없는 백제를 BC 1세기에 건국한 것처럼 가르치고, 서울 · 경기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한 말갈을 오랑캐라고 한다. 우리 스스로를 오랑캐라 폄하하는 것 아닌가. 고증 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한반도 중부 지역을 숙신의 남쪽 지방이라고 한 정사의 기록은 부인한다.”
-재야사학계는 무슨 문제가 있나. “더 심각하다. 고증을 외면하고 과장한다. 심지어 신라의 수도가 중국의 장안(시안)이라는 주장도 한다. 정사의 지리지가 그저 있는 게 아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정사를 남겼고 왕조별로 검정을 해왔다. 『한단고기』 식으로 근거도 없이 ‘경진원년(BC 1716) 큰 가뭄이 있었고 을해 56년(BC1666) 호구를 조사하니 총계가 1억8000이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이다. 역사가 제대로 기록된 것은 BC 3세기 한(漢)대 이후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신고대사에서 가장 큰 이슈는 선비를 고조선의 후예라고 한 것이다. 그 의미는. “천 년 넘게 이어져온 고조선의 멸망(BC 108) 후 유민들은 2세기께 단석괴(檀石槐)를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그는 고대 한국인들의 건국신화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태양감응 설화’의 유일한 실존 인물이다. 이후 구력거ㆍ가비능 등이 확장된 고조선 지역을 다스리다가 중국 자객에게 암살된 뒤 모용부ㆍ 탁발부ㆍ우문부ㆍ단부로 재편 됐다. 이들은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고조선의 유민들이다. 그 외 나머지의 일부는 부여 이주민과 결합해 고구려의 건국세력이 된다. 그리고 뒤에 요나라로 이어진다.”
-요나라를 유별나게 주목하는 것 같다. “동아시아 문명 전체에 대한 연고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은 내몽골의 자오양(朝陽)과 선양에 집중 분포돼 있다. 유물의 중심 지역은 최근 세계를 놀라게 하는 홍산(紅山) 문화 지역인데 바로 과거 요나라 수도다. 요하 상류는 한국인들의 주거 양식인 구들의 발상지다. 요나라 역사를 추적하면 한민족의 원형질인 고조선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리즈에 따르면 고구려는 고조선의 실제 적통과는 상대적으로 연계가 약하다.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면 우리는 뭔가? 혼란스럽다. “역사를 소중화주의 식으로 보면 그런 인식이 생긴다. 한반도 역사는 만주ㆍ한반도ㆍ몽골ㆍ시베리아 유목민 역사의 일부다. 고조선은 서쪽으론 전연ㆍ북위로 동쪽으론 고구려ㆍ백제ㆍ신라로 분리됐다. 그런데 왜 한반도만 고조선 역사를 독점해야 하나.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 외면하나. 고구려와 선비는 분명 고조선의 고토에서 비롯됐고 이들은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동아시아 발전에 기여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요나라가 과거 형제 나라인 고려보다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컸음을 인정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모두 2000년 전 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오늘날 강조하는 것은 과장 아닌가. “동아시아의 고대사 문제는 현대사 문제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식민지 지배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현대 중국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이 정치적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았듯 현대 중국 공산당도 중국 내부 문제의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고 있다. 사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연고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왜곡이 절실하다.”
-우리도 역사 왜곡을 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한국은 베이징발 역사 도발의 배경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의 역사전쟁은 범알타이인(알타이, 몽골, 만주, 한국인)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몽골 제국의 역사도 1950년대부터 북중국 역사로 기록한다. 몽골인 국가가 엄연히 있는데 칭기즈칸ㆍ쿠빌라이칸 같은 알타이의 영웅들을 북중국인으로 만들었다. 이면에는 몽골도 한족의 영토라는 생각이 숨어있다. 중국은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집어 삼키려 한다. 중국은 일본과 다투는 센카쿠(尖閣)열도뿐 아니라 오키나와(沖繩)를 포함한 140여 개 류큐(瑠球) 전체도 중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필리핀도 자기 땅이라고 한다. 발해를 독립 국가가 아닌 발해도독부로, 당나라의 침입을 막은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을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둔갑시켜 만리장성 동단으로 만들었다. 고조선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한족이 발전시켜 한반도와 일본의 문명 발전에 기여한 듯이 묘사한다. 중국의 역사패권을 넘으려면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있어야 한다. 고려 말의 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魂)과 같다 (國猶形史猶魂)’고 했다. 지금 우리 혼을 말살하려는데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는가?”
- 중앙선데이 | 제214호 | 대담 글: 안성규 / 新고대사의 필자 김운회 | 2011.04.17
인터뷰- 못다 한 이야기, 나라는 몸 역사는 혼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367 |
 김운회의 新고대사를 연재하며
언제부턴가 한반도와 한민족에게서 북방은 사라졌습니다. 거대한 북방사는 잊혀지고 미신처럼 무시됐습니다. 북방을 누비고 역사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만 서성이게 됐습니다. 오늘날까지 강단사학 혹은 실증사학이란 이름의 흐름은 한민족 역사를 한반도로만 밀어 넣고 있습니다.
이제 젊은 사학자들이 사서(史書)의 먼지를 털고 힘차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광대한 북방을 달리고 역사를 쓴 선조들의 기록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 좌파 이데올로그를 하다 어느 날 역사에 천착했습니다. 지금까지 쥬신을 찾아서 삼국지 바로 읽기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 같은 책을 냈습니다. 북방사 전공입니다. 스스로 실증 사학자라고 하는 그는 사료(史料)를 중시합니다.
중앙SUNDAY는 김 교수가 새로운 해석과 틀로 쓰는 신(新)고대사를 8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신고대사는 단군을 넘고, 고조선을 넘어 한민족 DNA의 원형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북방사의 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제201호 | 20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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